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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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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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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DUMMY

칠 년이다.


자신의 남은 수명이 오 년이라고 일축했던 용두방주는 이 년을 더 살아서 칠 년이 넘도록 살아 있었다.


당연한 말로, 아무리 고수라지만 자신의 수명을 정확하게 점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용두방주쯤 되는 고수가 오 년이라고 했으면 그가 죽는 날은 오 년에서 그리 멀지 않았어야 했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연명이었다.


육으로 이루어진 몸은 관조할 수 있으나 향후 오 년의 정신까지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몸은 정신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는 좋았던 것이다.


더없이 불편한 일상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이상으로 동굴 안에서 제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용두방주로서의 직위를 내려놓고, 강호의 모든 근심들에게서도 멀어진 채로 그저 어린 놈과 투닥거리며 오늘의 먹을 거리를 고민하는 나날이.


만약 그가 가정을 이루어 자식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평화롭다. 그저 평화롭다.

상황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음습하기 짝이 없지만 고요한 이 동굴에도 꽤 정이 들었다. 찐득했던 습도와 퀴퀴했던 냄새는 이제 의식하지 않으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응했다.


허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용두방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초연하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지난 칠 년간 내 너에게 개방의 모든 것을 전수했다. 시간이 부족하여 전부 완벽하게 다듬지는 못했다마는······.”


용두방주의 눈이, 이제 열아홉이 된 홍광의 얼굴을 담았다.

“음. 잘 여물었구나. 개방의 역사를 통틀어 그 어떤 후개도 네 옷자락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보장하마. 너의 성장은 보는 나조차 경이로웠다. 제자야.”

“네 사부님. 말씀하세요.”

“꾸짖기만 해왔지만, 이제 네 무공은 천하일절이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건 내가 보장하마.”

“네.”

“허나 강하냐 물어보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 네가 극성에 오르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오른다 해도 그렇다.”


홍광은 입을 다물었다.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다. 칠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너는 강하지 않다.

그리고 나 또한 강하지 않다.


강호의 그 누구라도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교가 있으니까.


“······알겠느냐?”

“명심할게요. 제자, 결코 주제파악도 못하고 염병하고 나대다가 죽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찰떡 같이 알아들은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한 말이다. 반드시 잊지 말거라.”

“알았어요.”

“그리고······.”

“세상을 누비면서 협을 찾으라고요? 알겠어요. 기억하고 있어요. 유언 두 개가 영 부딪힐 것 같긴 하지만 해볼게요.”


대답을 들은 용두방주가 빙그레 웃었다.


“나는 개방을 그리 운영하지 못했으나,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는 법. 너는 네 방식대로 나보다 나은 협을 찾길 바라마.”

“뭘 어떻게 해도 개방보단 나을 것 같······ 아니에요. 계속 말씀하세요 사부님.”

“떼잉 쯧.”


제자는 좋은 분위기에 산통을 깨는 재주가 있었다.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찬 용두방주가 허공섭물로 동굴 안쪽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이것을 받거라.”


그러자 무언가 막대기 같은 것이 날아와 곧장 홍광의 손아귀에 잡혔다.


“타구봉이네요.”

“그래.”


타구봉은 개방의 신물이자, 오직 방주만이 소유할 수 있는 신병이기다.


모습이 보이지 않길래 전투중에 잃어버렸거나 부러졌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가는 길에 버리고 가거라.”

“······주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신물을 계승해줄 줄 알았는데.


용두방주는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말했다.


“상식적으로 동굴에 나무 막대기가 칠 년 있었으면 내부가 썩지 않았겠느냐?”

“아니, 그래도 타구봉이 개방의 신물인데 그렇게 쉽게 썩습니까?”

“신물이지. 그런데 신물은 뭐 천하무적이냐? 차라리 개가 백 년을 산다고 해라. 본래 신물이라 불렸던 개방 조사의 타구봉은 이미 흙으로 돌아가고 없겠지. 이것은 널 데리고 도망치던 와중에 대충 깎아 만든 것이니라.”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쓸데없이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는 길에 버리도록 해라. 나무조각이라지만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준 무기인데 마지막까지 동굴 안에 처박아놓긴 좀 그렇더구나.”

“······알겠어요.”


하긴.


막말로 타구봉이 만들어진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거라면 차고 다니다가 삼도천 건널 때 노 젓는 용도로 쓰기 딱 좋았다.


홍광은 낭만과 다른 현실에 빠르게 납득했다.


그 모습을 본 용두방주가 흐뭇하게 웃었다.


“좋다. 그리고 한 가지 선물이 있다.”

“뭔데요?”

“무공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네가 익힌 것과는 다른 종류의.”


홍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렸을 때와는 달리 그도 이제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 말하는 도중 사부의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로운 무공이라니?


“좋은 거 있으면 진즉에 좀 가르쳐 주시지.”

“그리 말할 줄 알았다, 이놈아.”


무공이라는 것은 본디 가르치기 어렵다.


몸을 써서 하는 기술들은 전체적으로 그런 면이 있다.


머리보다는 몸이 기억하고 기맥과 근육의 섬유 하나하나가 숙달해야 비로소 하나를 익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속전속결로 간단하게 이어진 무공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 위력을 낼 수 없다.


그러나 용두방주의 음성에서는 한 치의 아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함에 가까웠다.


“걱정하지 마라. 다른 종류의 무공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네게 이 무공을 주되, 너는 배울 필요가 없음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명해줄 테니 들어라. 사실은 첫날 네게 내공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네 몸에 구멍이 크게 생겼다. 보통이었다면 거기서 죽었어야 맞지. 당연하다. 단전이 망가졌다고 볼 수 있는 일이니.”

“예?”


홍광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자 용두방주는 철면피로 받아쳤다.


“그럼 격체전공이 쉬운 줄 알았더냐? 그게 쉬웠으면 고수들은 죽기 전에 제자들한테 내공 싹 다 넘기고 죽었겠지. 그럼 소림은 달마의 내공을 이어받았을 테니 지금쯤 삼대제자들도 산을 부수고 파도를 가르고 다녔을 것이다.”

“······아니 강호의 운명을 걸고 후개를 데려온 거 아니었어요? 그걸 그렇게 쉽게 죽일 뻔해?”

“안 죽었으니 됐지 않았느냐.”

“그렇긴 한데······.”

“그럼 끝난 거지 뭘 열을 올리고 있느냐? 제자는 소인배처럼 굴지 말거라.”

“······.”


더 설왕설래해도 의미가 없을 것을 직감한 홍광이 합죽이가 되었다.


“크흠. 아무튼.”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날려버린 용두방주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그 구멍을 메워보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겠더구나.”

“왜요?”

“그야 네 그릇이 크기 때문이지. 너어어어어어어어무 커서 굳이 티끌 한 점은 매울 필요가 없었다. 네가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음.”


이제는 홍광도 무인의 몸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사부가 말하는 내용이 말도 안 되지만 분명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증거로 지금 자신이 떡하니 살아 있지 않은가?


심지어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못한 채로.


“그래서요? 새로운 무공이랑 제 단전에 뚫린 구멍이 무슨 상관이에요?”


중요한 것은 이 뒤의 이야기다.


드디어 홍광이 경청하고자 하는 자세가 되자 용두방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전에도 말한 바지만 네 단전은 헤아릴 수 없이 넓다. 내가 물을 채워넣긴 했지만 바다가 되기엔 턱없이 모자르지. 그런 와중 물길이 뚫린 것이다.”

“그래서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다. 세상 모든 물줄기는 결국 바다로 돌아오게 되어있지.”


잠시 고민하던 홍광이 물었다.


“흡성대법인가요?”


용두방주는 자신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흡성대법이란 남의 것을 억지로 약탈해와서 여기저기 기워넣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는 도자기 가득 물을 채울 수는 있어도 바다를 만들 수는 없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피부로 느끼게 될 터이니. 그보다 내가 대종사 된 자로서 무공의 이름을 붙어보았다.”

“일단 받잡을게요.”


아직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렇다는데 안 받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홍광이 자세를 고쳐서 정좌했다.


“와룡회주공(臥龍回主功).”


와룡회주공. 즉, 웅크려 있던 용이 주인에게 되돌아온다는 의미였다.


“한 곳에 고이지 못하고 정처없이 흐르는 내공이 있다면 주인을 만나는 즉시 알아보고 돌아올 것인 즉, 너는 앞으로 거친 물줄기들의 어버이가 될 것이다.”

“······거창하네요.”

“왜, 멋있잖느냐.”


그리 말한 용두방주가 낄낄 웃었다.


그러다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은 용두방주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축하한다. 너는 흐르는 모든 기운의 주인이 되었고, 마침 강호가 매우 격하게 범람하고 있으니 꽤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겠구나.”

“에잉, 왜 마지막에 와서 그런 말을 하세요 찝찝하게.”

“허허, 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네 말마따나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


마지막.


그 말이 지니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만약 사부가 웃지 않았다면 홍광은 이렇게 담담하게 용두방주를 보내주지 못했을 것이다.


홍광이 쥐어짜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제가 양지바른 곳을 알아두긴 했는데, 어떠세요? 해 뜨면 볕도 들고 기울면 그늘도 지고 좋아요. 땅도 단단하고.”

“됐다. 같이 싸운 놈들 중에 곱게 묻힌 놈이 없어. 혼자만 호사를 누려서야 쓰겠느냐.”


결국 용두방주는 마지막까지 동굴 안에서 어떤 장례도 없이 죽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추울 거에요.”

“뒈졌는데 춥긴 어떻게 춥냐.”

“여름에는 벌레가 들끓을 텐데.”

“그것도 잠깐이지. 뼈만 남으면 벌레가 꼬일 일도 없느니라.”

“알았어요 알았어. 어휴. 좋게 보내준대도 난리네.”


홍광이 질린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용두방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나가봐라.”

“괜찮겠어요? 저 없어도.”

“그럼 내가 기어코 죽는 꼴까지 제자에게 보여야겠느냐? 됐으니 가라. 그게 이 사부에 대한 너의 마지막 예의가 될 것이다.”

“······알았어요.”


홍광이 마지막으로 용두방주, 아니 장일홍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사부님. 이 은혜는 평생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오냐. 나도 즐거웠다.”


홍광이 고개를 들어 사부의 얼굴을 일별한 뒤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 하던 동굴이건만 기분이 이상했다.


“······노인네 고집 하고는.”


홍광은 동굴 입구에서 기척을 죽이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안쪽에서 들려오는 야트막한 숨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아주 짧았지만 영겁처럼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쌕쌕거리던 숨소리는 곧 멈췄다.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 * *


장일홍의 입꼬리는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미 죽은 자의 표정을 말한다는 것이 기묘하긴 하지만, 생이 다한 그의 얼굴에서는 한 가지 자부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의 눈은 회한을 담고, 그의 입과 코와 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졌음에도 그랬다.


‘내가 말년에 용을 키워냈다’는 자부가.


그의 입가에 숨길 수 없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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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2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8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1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7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50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9 15 12쪽
»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7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6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6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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