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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 님의 서재입니다.

악역 레벨 9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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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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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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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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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통수의 통수의 통수 4

DUMMY

“한잔?”

“아니, 음. 술은··· 이제···.”

“도움이 될걸.”

술을 건넨다. 마신다.

모든 게 취한 거 같은 방이다. 어지럽혀졌고 질서 따위는 없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엉망이다.

하지만 나는 안 취했다.

정신이 아주 멀쩡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어쨌든 알콜을 들이부었으니 그 영향은 있다.

조금 기분이 좋고, 조금 나른하고, 입 안에서는 과일로 만든 술 특유의 단내가 풍겨온다.

이게 전부다. 발이 꼬인다거나, 괜한 웃음을 흘린다거나, 했던 말 또 하는 술버릇 따위는 없고 그런게 나올 정도로 취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강조한다. 나는 안 취했다.

그리고 카리스를 바라본다.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색 옷. 그 위에 가슴 정도까지 내려오게 걸친 로브.

전에 봤던 옷과 비슷하다. 재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스타킹과 비슷한데 그보다 더 질기다.

저건 벗겨내기도 힘들다. 그래서 그때에는 잡아 찢어냈었다.

놀랍게도 맨살 하나 보이지 않는데 사람의 눈을 휘어잡는다. 아니, 저 정도로 붙어 있으면 바디 페인팅이라 해도 될 정도.

한잔 마신다. 그 다음 더운 숨을 내뱉었다.

“후우.”

앉은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인다. 양팔은 조금 늘어지게 무릎 위에 올려둔다.

자. 나는 취했다.

지금부터 취한다.

셀턴을 만나 좀 과음했고 하는 일이 고되 몸이 늘어진다.

“취했나.”

카리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일부러 2초 정도 늦게 답해주었다.

“아니. 이 정도로는 안 취하지.”

그리고 술을 따른 뒤에 말한다.

“한잔?”

“과한거 같은데.”

라고 말하지만 한잔 따른다. 마신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목을 뒤로 넘겨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이제 어떻게 할까.

“·········.”

긴 침묵이다. 조금 열려있는 창밖에서 도시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끼익.’

작은 발소리. 그리고 창문이 조용히 닫힌다.

나간 걸까?

아니 그럴 리가.

감각이 확대되며 방 안에 있는 것들이 느껴진다. 멈춰 있는 사물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알아챌 수 있다.

게다가 그 상대는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본인을 숨길 생각까지는 없어 보인다.

이제 옆에 와서 앉는다. 아주 조용히.

예상했다. 나갈 생각도 없는데 창문을 닫았다면 여기 있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뒤에 벌어진 일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내가 생각한 것은 천천히였다.

천천히. 어차피 나야 상의는 안 입었고 바지도 풀어 놨으니까.

게다가 카리스는 순진하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팍.’

밀쳐낸다. 아니 밀쳐졌다.

내가 들어다 눕힌 적은 많지만 이렇게 눕혀져 본 적은 거의 없다. 손에 꼽을 것이다.

그리고 과감하게 올라탄다. 배에서 느껴지는 것은 천의 부드러움이지만, 그 너머 때 타지 않은 살결의 부드러움 역시 느껴진다.

이쯤 되면 이제 취해서 자는 척하는 것도 미련한 짓이다. 애초에 취해서 자는 척을 하는 것도 조금 악질적인 장난이었다.

그러니 이제 내가 리드해야지, 라고 마음 먹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 손을 멈추게 하는게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찌이익.’

찢어낸다. 스타킹을 찢듯 자극적인 소리와 함께 좌우로 갈라진 검은색의 옷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살결.

카리스는 자신의 양 손으로, 자기 옷을 잡아 좌우로 뜯어내 버렸다.

제대로 뜯기지 않아 중간 중간 검은 실처럼 남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다.

그 거침없으면서도 단호한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암살자라는거다. 조용히 다가왔으나 할 때는 순식간이다. 신중하지만, 시작하고 나면 끝을 봐야 한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굴곡. 몇 번이나 눈에 담았지만 항상 새로운 것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그간의 세월을 알려주는 자상들.

흉터다. 오른쪽 밑가슴에서 사선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가 있었고 배꼽 근처에도 찔린 듯한 상처가 있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자잘한 상처들이 많다.

곱게 자라온 일리안과는 다르다. 부드럽지만 거친 느낌이 나는 몸이며 향수 냄새 대신 옷 아래 갇혀있던 미미한 땀 냄새와 채취. 그리고 젖은 흙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난다.

그 시선을 느낀 걸까. 카리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런 상처는 싫은가.”

그리고 나는 그 상처들을 손끝으로 훑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시가 있는 꽃을 꺾는 게, 더 재밌는 법이지.”

영화의 한 대사다. 내가 말해 놓고도 왜 그랬나 싶지만, 적어도 이 분위기에서는 적절하다 생각했다.

특히 엘프를 상대로는.

그리고 카리스는 아주 잠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날 어떻게 꺾을 거지?”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이 내 손목을 가볍게 잡는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허리 아래의 것들을 잡아 찢으며 말했다.

“이미 꺾었어.”

그리고 덮쳐온다. 뒤 섞인다.

방해되는 것들은 벗어버리고 찢어낸다.

시작은 카리스가 했지만, 마무리는 내가 짓는다.

이미 옷이 아니라 검은색의 쪼가리가 된 것을 걸치고, 아래에 깔린 채 껴안듯 오더니 손톱으로 등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전에는 단검으로 긁고 찌르더니 지금은 손톱이다. 물론 손톱으로는 피를 내지 못한다.

지금은 반대다. 내가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카리스가 한줄기 선혈을 흘리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왔다. 셀턴이 암살자를 보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방법은 나왔다.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범죄자를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정을 파는 것이다. 뒤통수를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로 내가 칠 수 있다.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절로 지어지는 미소.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힌 통수.

몸에 힘이 더 들어간다.

그리고 더 짙은 미소와 함께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됐군. 셀턴. 암살자가 날 쑤시는 게 아니라 내가 암살자를 쑤셔주고 있으니.’



***



화창한 날이다.

먹구름이 끼어 있지만 화창한 날이다.

“죽였다. 드디어 그 개놈새끼를 죽였어.”

암살 성공.

실패가 없다. 그 암살자가 전설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실패를 안한다.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실패를 하지 않으니 이렇게 오랫동안 믿고 거래하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이 목을 잘라 들고오는 게 아니라 그 시체를 통째 들쳐메고 왔다.

그게 의아하긴 하지만 살벌한 눈빛에 캐묻지는 못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시체를 확인했다. 대금을 치렀고 암살자는 시체를 들고 돌아갔다.

그럼 이제 다음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레이튼 발렌할. 놈이 죽었고 놈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사건의 주동자는 루멘 해방군이며, 그 루멘 해방군의 뒤에는 마족이 있다.

‘게다가 레이튼, 그놈은 공주의 신임도 얻었다고 했지. 그놈이 죽은 걸 알려주고 마족을 잡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면 이걸로 공주에게 줄을 쉽게 대볼 수 있을지도.’

가슴속 응어리가 쑤욱, 내려가는 듯하다. 그러니 셀턴은 술집에서 퍼질러진 헥스와 병사들을 깨웠고 그들과 함께 발걸음도 가볍게 병사 막사로 향했다.

하지만 병사 막사는 의외로 차분했다. 난리가 났을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가 풍겼다.

기사들이 있다. 서로 모여 뭔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은 한 것 같았다.

당연히 기사들이니 경거망동하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등의 행동 지침이 있을테니 이 조용한 분위기는 이해할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자연스러운 걸지도.

하지만 뭔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물론 셀턴은 이 위화감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고 그걸 기사에게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다.

그러니 일단 신고한다. 그래, 그 레이튼이라는 놈의 말대로 제국의 1등 시민으로서 투철한 신고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기사 하나가 무거운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인다. 그러니 이 기사에게 보고한다.

“루멘 해방군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예.”

“위치가 어디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안내는 필요 없다. 여기 지도를 보고 위치만 말하도록.”

굳은 표정의 기사의 말에 셀턴은 속으로 욕을 한 뒤에 조시의 지도에 그 위치를 찍어주었다. 마족이 있는 저택. 물론 그 저택의 실소유주는 조사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사는 보고를 마친 셀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 수고했군. 그럼 이제 돌아가도 좋다.”

“예.”

고개를 숙인다.

곧바로 루멘 해방군을 잡으러 저택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레이튼이 죽어서 명령권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들이 저기 모여 저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회의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알 수 없는 그 묘한 위화감에, 셀턴은 슬그머니 질문했다.

“뭔가, 일이 있었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 그러나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없으니 돌아가도록.”



***



인상을 쓰고 연초를 피워낸다.

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기사들의 그 태도도 결국 놈이 뒤져 나자빠졌기에 그러는 것이니.

지금 당장 기사들이 루멘 해방군을 치면 좋겠지만, 명령권자가 없어 대기하는 것도 뭐 이해는 한다. 하지만 고발은 해두었으니 상관없다.

설령 그 기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밍기적 거려도 상관없는 것이, 그렇게 하면 붉은 랜턴 길드를 움직여 몇 놈을 루멘 해방군으로 위장시켜 깽판을 쳐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결국 기사들이 움직일 것이다. 게다가 레이튼, 그놈이 죽었다는 게 알려질 테니 이제 제국의 군대가 움직일 것이고.

마족이 있다는 게 드러나면, 성물을 모아둔 그 방으로 가서 지낸다. 그리고 그 성물을 모아둔 방에, 그 마족년을 붙잡아 와서 아래를 쑤셔줄 것이다.

“흐흐.”

기분좋은 웃음. 그리고 당장의 성욕을 풀기 위해 여자를 몇 부르려는 찰나.

“셀턴님! 셀턴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저기서 연락책 하나가 뛰어온다.

그것도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래도 손가락이 하나 더 없어져도 상관없는 모양일까. 연락책이 앞에 서자 셀턴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여기서는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죄, 죄송···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큰일 났습니다!”

“큰일?”

“예!”

큰일. 큰일이라. 조금 전에 가장, 큰일 하나를 처리했는데 뭔가 그리 큰일일까.

이 도시에서는 살인도 큰일이 아닌데 대체 뭐가 큰일이라는 걸까. 일단 들어보고 별거 아니면 이놈을 매달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뭔데.”

말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남자가 말한다.

“엘프입니다! 엘프가 있습니다!”

“뭐?”

“엘프요, 엘프! 지금 엘프가 버디네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연초가 떨어진다.

그리고 셀턴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거짓말이면 네 혀를 잘라다가···.”

“자르건 말건 아무튼 엘프입니다! 진짜 엘프!”

지금 여기에 엘프가 나타나다니?

거짓말? 아니, 아무리 머저리 새끼라도 이걸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연락책이라면 그래도 똘똘한 놈으로 쓰고 있으니까.

뭔가의 착각?

엘프인데 착각을 할 수가 있을까? 여기까지 와서 알려줄 정도면 아래에서 이미 충분히 확인하고 알리러 온 것이다.

그렇다면 엘프다.

진짜 엘프인 것이다.

왜 여기에 엘프가 나타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서 확인해야 한다. 확인하고 엘프라면 사로잡는다.

일이 이렇게도 풀릴 수 있다니?

즐거운 미소. 그리고 급하게 명령한다.

“그럼 빨리 앞장서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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