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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 님의 서재입니다.

악역 레벨 9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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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
작품등록일 :
2020.07.0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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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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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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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뒤풀이 3

DUMMY

성녀를 상대로 하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짜 죽이려 달려든다. 빠르고 정확하며, 주먹에 맞으면 아프다.

나한테 신성력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건 순수한 고통이다. 육체를 신성력으로 강화해 주먹으로 후드려 치는데 맞는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물론 두들겨 맞기만 하고 있던 건 아니다.

나도 공격을 했다.

무서운 대사를 내뱉으며 눈을 부릅뜬다. 그리고 무식하게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맞질 않는다. 큰 덩치에 큰 동작.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녔지만 맞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춤사위일 뿐이다.

심지어 멋도 없는.

하지만 이건, 못 때리는 게 아니라 안 때리는 거다.

내가 져야 한다.

패배를 전제로 하는 일이다.

내가 이기면 안 된다. 룬하임의 대신전을 무너뜨린 악마가 성녀도 잡아 족쳤다더라, 라는 말은 나에게 있어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

악역은 악역답게, 적당히 싸우다가 비겁한 변명이나 하면서 도망치고, 이게 끝이 아니다! 라는 속편을 암시하는 대사나 뱉어주면 된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도망쳤다. 물론 도망치려 해도 성녀가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그건 팔칸의 시민들을 인질로 잡는 걸로 해결한다.

그렇게 인질극을 벌이며 성녀를 따돌리고 도착한 곳은 산이다. 팔칸이 넓은 평원 한가운데 있었단 걸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달려서 내뺀 것이다.

이제 마기를 가라앉히고 인간의 모습. 아니 내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다음 커다란 나무를 짚고 숨을 고른다.

“뒤지는 줄 알았네.”

물론 뒤질뻔한 적은 없다. 사실 숨이 그리 차지도 않는다.

그러나 피곤한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패배를 전제로 싸워야 한다. 주인공에게 맞으면 공중에서 거진 180도 휘릭! 돌면서 떨어지는 무술 엑스트라처럼.

심지어 무술 엑스트라는 헛방이다. 안 맞은걸 맞은 것처럼 연기하는 거지만 나 같은 경우는 진짜 맞아줘야만 했다.

“후우.”

이제 석양이 진다. 숲의 밤은 더 빨리 찾아올 것이다. 습하고 찬 공기를 폐 깊이 밀어 넣으며 굽혔던 허리를 펴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팔칸의 모습.

그리고 그 주변으로 점점 횃불을 켜 올리는 개미떼 같은 제국 병사들의 모습.

“와아아아아아~.”

어렴풋이 들려오는 병사들의 환호 소리. 희대의 악마를 물리친 성녀는 가서 승전보를 알렸을 것이고 그게 병사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나는 여기 있지만, 저 환호 소리가 바로 내 승리를 뜻한다. 아이린 성녀. 강하지만 단순한 이 여자는 완전히 낚였다.

그때, 바스락하는 낙엽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나무 사이에서 라티스가 걸어나온다.

좌우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골반. 그걸 따라 움직이는 허리.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리는 가슴.

걸어올 때에는 마치 뱀이 이동하는 것처럼 낙엽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방금 들린 것은 의도적으로 알렸다는 것이다.

허리에 한쪽 손을 척, 올려두고 앞에 선다. 그리고 라티스는 저 멀리 보이는 제국의 군대를 슬쩍 바라보더니 의문스럽다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 하지?”

“뭘.”

“바일을 죽일거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럼 가서 죽이면 되는데 왜 저 인간들과 쓸모없는 짓을 하는지 궁금해서.”

라티스는 아주 단순하게 말했다.

물론 나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장 빠르고 깔끔하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악한 무림인. 천살 백랑기를 얻으면 당장 달려나가 머리를 부숴버릴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내가 먼저 앞서나갔음을 라티스를 통해 확인했다. 동시에 현시점에서 바일에게는 적이 많다.

당장 성녀를 보자. 성녀는 나와 싸우며 들은 말. 희대의 악마가 내뱉은 말들을 주요 인물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구할 것이다.

베린.

엘프들의 숲에 있다는 그 마족년.

그리고 하딘.

수인들을 규합한다는 이놈 역시 아직 바일의 편이 아니다.

테티스.

마족 여주인공 역시 바일과 대적하고 있다.

바일은 분명 강하다. 지금도 강하다. 하지만 적이 너무 많다. 아직 집안 정리가 안 끝난 놈이다.

그러면 굳이 내가 놈을 마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죽이건 남이 죽이건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다만 내가 죽인다고 한다면, 내가 바일보다 강하다고 해도 분명 위험한 일이 있을 것이다.

혹시. 어쩌면. 설마.

그러니 내가 잡을 필요가 없다. 물론 나도 급해지면 당장 가서 바일을 마주 보고 때려잡을 계획도 있다.

그러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적의 적은 가장 든든한 아군이라는 말을 실천한다.

동시에 나 자체의 강함도 신경 써야 한다. 악명 레벨을 올리는 것도 좋고 시체를 흡수하는 것도 좋다.

새로운 직업은··· 뭐, 잘 찾아보면 쓸만한 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걸 라티스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주고 싶지 않다.

원래 죽이려고 했다. 아니, 죽이지 못하니 사로잡으려고 했고, 잡은 이유는 내가 물어보기 위해서지 답해주려 한 게 아니다.

“후우.”

성녀와 싸우다 와서인지 아직 약간의 흥분감이 남았다. 져주기 위한. 패배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싸운건 싸운거니까.

그래서일까. 라티스의 눈이 아래로 향하는게 느껴진다.

그리고 먼저 다가온다. 아까와 같은 요염하다는 표현조차도 모자랄 정도로.

그러더니 내 뒤에 선다. 뭘 하려나 싶어 내버려 뒀더니 뒤에서 안아들 듯 서늘한 몸이 달라붙어 온다.

등 넓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도 딱딱한 감촉. 전부 닿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여성의 굴곡.

그리고 가느다란 손이 내 안아들 듯 앞으로 나와 내 목을 슬그머니 훑는다.

아래로. 탄탄한 가슴을 지나며 복근을 간지럽히듯 지나간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차갑고 부드러운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더 아래로. 아슬아슬할 정도로 더 아래로. 그러나 닿지는 않게.

그리고 속삭이듯 말한다.

“난 솔직한 남자가 좋아.”

손이 더 아래로 내려온다.

“날 노예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걸 알아. 날 여자로써 원한다면, 하나 알려주지.”

“···.”

답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알려달라 말하지 않아도 라티스는 알아서 말했다.

“널 만나기 전까지 남자를 만나본적 없어. 누구도 손대지 못한 깨끗한 몸이지. 게다가··· 네가 여기서 날 안아도 새 몸으로 바꾸면 다시··· 후후후.”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

그리고 이제, 손이 더 아래로 내려올 필요는 없다.

이미 손에 닿고 있다. 그리고 라티스는 그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길게 뻗은 손톱 끝으로만 슬쩍 끝을 찔러온다.

라티스가 그때 왜 스스로 노예를 자처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기를 여자로 봐달라고 말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사랑을 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족이기에 자신이 사용할수 있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라티스보다 약했다면. 그 지하실에서 오히려 반대로 제압 당했다면 내가 라티스처럼 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티스가 모르는게 있다면 나는 아무 상관 없다는 뜻이다.

뭘 요구하는지는 알지만 내가 알아줘야 할건 아니다.

음습한 욕망이 식욕처럼 피어난다.

그러니 라티스의 팔을 잡아 때어낸다. 그 다음 몸을 돌려 정면으로 바라본다.

붉은 눈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에 닿아오는걸 바라보는 라티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 라티스를 밀어붙였다.

등 뒤의 나무까지. 거기서 한걸음 더 걸어 나무와 내 몸 사이에 완전히 끼게 만들었다.

삐걱, 하고 뒤로 살짝 넘어가는 나무. 그리고 한손으로 라티스의 양팔을 한손으로 잡아 위로 젖혀 올린 뒤, 귓가에 대고 말했다.

“새 몸으로 바꾸면 다시 처녀가 된다고.”

그리고 라티스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점점 더 뜨겁게 커져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라티스는 미소를 지었다.



***



전부 끝났을 때는 숲 어딘가의 커다란 바위 위였다.

그 위에 알몸으로 앉아 위를 바라보니 이제 곧 사라질 달이 떠 있다.

숲 속에서 알몸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냥 변태새끼다. 여기서 뭐 이런게 운치 있다는 헛소리는 필요 없다.

“담배 땡기네.”

입술에 손을 갖다 대 그저 시늉만 해본다.

물론 여기에도 담배 비슷한 게 있긴 있다. 하지만 그건 담배가 아니다.

한약 냄새 같은 게 나는 최악의 쓰레기다.

하지만 지금은 그거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바위 아래서 라티스가 나타났다.

양손에 평복을 하나씩 들고.

“가져왔어.”

멀쩡하다 못해 말끔한 모습이다. 그런 물건을 받아 들이고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위에서 뛰어 내려 옷을 받아든다.

하지만 옷을 입기 전에 먼저, 손을 뻗어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좀 익숙해졌나?”

그러자 라티스가 말했다.

“···닥쳐.”

그래, 그럴수도 있지. 마치 짓밟아 버리듯 그런식으로 하면 누구라도 화를 낼 테니까.

욕을 좀 먹었지만 화는 나지 않는다. 반말하는 것도 상관없다.

결국, 익숙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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