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 예비 입학 (1)
꿈을 꿨다.
꿈속에서의 나는 강당의 의자에 앉아있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안다. 차갑고 꿉꿉한, 그런데도 어쩐지 싫진 않은 먼지 냄새.
이곳은 내가 다녔었던, 화령과학고등학교의 소강당이다.
꿈속의 나는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예비입학기간 동안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여줌에 따라 본교의 위상을 드높인 3명의 학생에게, 상장과 함께 소정의 장학금을 수여하려 합니다. 이름이 불린 학생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학년부장 섭쌤의 걸걸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린다. 주위에는 나뿐만 아니라 아직은 앳된 얼굴인 다른 친구들도 다 같이 앉아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가 제일 좋았지. 다른 걱정 없이 공부에만 매진했고.’
사진을 찍는 모습, 분주한 분위기들을 보아하니 입학식 겸 시상식인 것 같다. 과학고는 입학 전 한 달 간의 ‘예비입학 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진행되는 수업 사이에 총 3번의 시험을 쳐 학생들을 테스트한다.
과거의 난 이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골에서 올라와 처절하리만큼 못했었지.
저 상이 그때는 얼마나 받고 싶었던지. 얼마나 부러워 보이던지.
—화령과학고등학교 3기 예비입학성취 1위 고요한.
“쟤가 1반 고요한이야?”
“화학 빼고 전부 1등이라던데.”
“진짜 존잘이다······.”
고요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엄친아랄까. 외모, 성품, 성적.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외모. 180cm의 딱 적당한(?) 키. 선이 유려한, 그러면서도 올곧은 미남자.
성품. 남을 돕는 걸 좋아하고. 귀찮은 일도 나서서 처리하고. 언제나 한결같고. 그러고 보니 반장도 했었던 것 같고. 2학년 들어서는 회장도 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적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지고불변의 전교 1등.
그야말로 귀족적인. ‘완벽이란 이것이다’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은. 너무 압도적인 차이에 경도되어 감히 질투심을 품을 수도 없는, 그런 존재.
과학고의 세계에선 일반적으로 공부 잘하는 아이를 ‘영재’라고 부른다. 영재는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을 받아 뛰어난 아이를 말한다.
그리고 그 영재보다 더 높은 단계가 ‘천재’다. 천재는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다. 그 영재들조차 어쩔 수 없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고요한은 그런 천재다.
—2위, 신예은.
신예은. 이름이 불리자마자 남학생들의 시선이 그녀를 쫓아 따라붙는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적으로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과학고니까. 이곳에서 저런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을 정도다.
고요한과는 중학교 때부터 지역 굴지의 명문학원을 같이 다니며 수학한 사이. 타고난 천재인 고요한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그 콤플렉스는 점점 관심으로 변하게 되는지, 어쨌든 고요한을 점점 짝사랑하게 되고. 자존심 높은 신예은의 특성상 끝까지 인정을 안 하다가 결국 대학교에 가서야 솔직해지고 고요한과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다. 솔직해지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고 뭐 여러 가지 있다.
하여튼 자존심이 너무 세서 인생을 많이 돌아가게 된다-고는 해도 뭐 내가 걱정할 깜냥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을 땐 카이스트에서 높은 성적을 바탕으로 서울대 의전에 편입했다나 뭐라나.
마지막은 김병학이 불리겠지. 얘는 좀 싸가지가 없다. 물론 실력도 있고 외모도 날카롭고 선이 짙어 그런지 나쁜 남자로서 용서되는 느낌이다. 과학고의 잘하는 애들은 신예은도 그렇고 하여튼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다. 그래서 고요한이 더 멋진 걸지도. 고요한은 그 천재성이 때때로 재수 없긴 해도 본성이 겸손하니까.
어쨌든 김병학 정도면 총 성적 3등이지만. 그 정도도 엄청난···
—3위, 이해우.
엥?
—이해우!
에에엥?
“···우야! 이해우! 일어나, 이제 다 왔어!”
앞자리에서 쩌렁쩌렁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주위를 둘러보니 차 안이다.
맞아, 꿈이었지.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꿈에 너무 몰입해서 착각해버렸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얘는 어떻게 이렇게 긴장감이 없니. 학교 들어가는 첫날인데 잠이 오니?”
10년 전의 엄마 잔소리는 좀 더 묵직했구나.
멍하니 흘려들으며 창밖을 보니 저 멀리 화령과학고등학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신생 과학고답게 멋지게 아치형으로 세워져 있는 입구 옆으로 플랜카드가 붙어있다. 합격생 목록. 서울대 2명, KAIST 23명, POSTECH 8명, 연세대 20명······.
“이거 우리 아들 서울대 팍하고 붙어버리는 거 아니야? 하하하!”
“이이는. 아직 제대로 입학도 안 했는데. 예비입학이라고요. 무슨 벌써.”
부모님이 화목하게 투닥대는 소리, 그리고 창밖으로는 주렁주렁 달린 플랜카드들. 난 다시 천천히 눈을 감고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뭐 예전 뉴스 중에 그런 거 있지 않나?
기자가 PC방 전원을 내려버리고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이 터져나옵니다.’라고 했던 거.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에 부닥쳐보니 정말 그렇게 되더라.
교수님께 논문을 뺏겼고, 밤새 술을 마셨고, 대학원을 관둘 결심을 했고, 후배와 인생 얘기를 했고.
자고 일어나니 내 방인 거다.
순간 멍했다.
내 자취방이 아니라, 진짜 우리 집. 그러니까 본가.
무려 200km나 떨어진.
“이게 뭐야...?”
그 난데없는 상황에 욕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지? 해문이가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줬나? 내가 술에 취해 비몽사몽 하다가 실수로 본가 집 주소를 불렀나?
처음에는 몰래카메라인가 했다. 그러나 그 가설은 곧 두 번째 욕설과 함께 폐기되었다.
왜냐고? 내 몸까지 어려져 있었거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하 그렇다면 꿈이겠지’ 했다.
그쯤 되니 가출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깨물어봐도, 뺨을 쳐봐도.
이건 꿈이 아니다. 진짜 현실이다. 이런 선명한 꿈이 있을 리 없다.
어젯밤, 나는 모종의 이유로 과거로 돌아왔다.
10년 전, 과학고에 입학하기 하루 전날로.
그것도 10년 어치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천해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럼 다시 한번 해보세요.
-후회 없게 말입니다.
그 말이 원인이었단 말이야?
어찌 되었든 좋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천문을 공부할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8년 전의 선택으로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고맙습니다.’
반드시 서울대 물천에 갈 거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전국에서 제일 뛰어난 애들이 모이는 곳.
서울대를 가려면, 게다가 서울대 물천을 가려면 화령과고에서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요한, 김병학, 신예은 같은 천재들을 이겨야만 하고.
‘쉽지는 않겠구나.’
우르륵- 차의 시동이 꺼지는 소리에, 다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차들로 가득 찬 어수선한 주차장, 각양각색의 애들이 보인다. 차에서 내리는 애, 부모님과 포옹하는 애, ···
“하여튼 해우 네가 잘 해낼지 걱정이다, 걱정.”
그리고 나처럼 잔소리 듣는 애까지.
과거로 돌아와 보니 참 객관적으로 보인다. 지금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지. 어떤 마음으로 날 여기 놓아주고 가셨을지. 얼마나 걱정이 되셨을지.
그러니 겸연쩍지만 나도 한마디 하기로 한다.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여기서 1등 할 테니까요.”
“얘는···”
“아니야. 우리 아들 말이라도 그런 패기 좋다! 아빤 우리 아들 믿는다!”
하지만 이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10년 치 기억이 있다면.
이번이라면 정말로······.
‘···해낼 수 있을지도.’
#
부모님을 보내고 소강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갑고 꿉꿉한- 그런데도 어쩐지 싫진 않은 먼지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이곳저곳 애들이 조금씩 무리 지어 뭉쳐있다. 분명 오늘이 첫 학교 소집일이건만 다들 안면이 있는 눈치다. 그 이유는 학원 때문이다. 저들은 이미 과학고에 오기 전부터 학원에서 만나 친해져 있는 상태라는 거다.
나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 가서 앉는다. 다들 이미 친해져 있는 듯 보이지만 나는 혼자다. 구석에 앉아서 가만히 그들을 구경한다.
“흠···”
자세히 보면 학원에 따라 대략 크게 3개의 무리로 나뉘어있다. 그중 고요한과 신예은이 속한 ‘유클리드’가 제일 눈에 띈다. 애들을 가려서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철저한 소수정예의 학원이다. 애초에 고액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 결과도 좋고.
그들 주위에는 이미 남들과는 다른 기류가 보인다. 그건 아마 자신감이라고 불리는 걸 거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멀뚱히 걔들을 바라보는데 속이 답답해진다. 내가 저 천재 놈들을 이겨야 한다는 거지.
내가 한숨 쉬는 이유?
어젯밤에 그런 일을 겪고 잠을 잘 수 있었겠나. 게다가 당장 내일이 예비입학인데.
현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책을 폈고, 곧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챘다.
‘고등학교 과정이 이렇게 수준이 높았나?’
카이스트 전산학부에 입학한 후 8년 동안 컴퓨터만 만졌던 나는 수학 과학을 다 까먹었다는 사실.
그야말로 무지의 상태.
수학, 물리는 그나마 감이라도 조금이나마 잡히지만 화학, 생물, 지구과학은 아예 백지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예전에 한 번 기를 쓰고 배웠던 것들이니, 다시 배우고자 하면 그 습득 속도가 비교도 안 되게 빠르긴 할 거다. 이해력이 굉장히 높아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의 얘기겠지만.
‘보내주는 김에 1년만 더 전으로 보내주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 곧 ‘그 시험’이 시작된다.
차라리 모르고 맞이하는 게 더 낫지, 싶을 정도로 괴롭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적절한 긴장감 속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쟤들 중 일부는 심지어 대학과정까지 수과학을 선행한 경우도 있을 텐데. 나는 지금 고등수준조차 모르니.
곧 강당 전체가 학생들로 채워지고, 선생님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대머리가 반짝이는, 풍채 좋은 선생님이 나와 단상의 마이크를 잡는다. 나는 저 얼굴을 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
“화령과학고에 온 걸 환영한다. 난 너희들의 학년주임을 맡게 된 수학과 부장 김손섭이라고 한다.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했고··· 앞으로 2년 동안 크고 작은 너희의 모든 일을 관리하게 될 거야. 그냥 간단하게 섭쌤이라고 부르면 된다.”
‘서울대‘라는 단어에 애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인 이상 누구에게나 꿈의 학교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수준을 알게 되며 점차 포기하게 되는 학교이기도 하고.
“환영이라고는 해도 당장 오늘부터 일과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예비입학이라고는 해도 이미 입학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거야.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라, 이 말이야.”
별 것 아닌 농담에도 곳곳에서 킥킥,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긴장하고 있었다는 증거겠지.
솔직히 2회차인 나도 긴장되는데 다른 애들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사실 지금 저 대머리만 봐도 웃기다. 거의 발광체인 양 앞에 서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너희가 무얼 생각하고 왔든, 과학고는 생각보다 빡셀거다. 여기선 성적만이 옳다. 다들 중학교에선 우등생으로 대우받으며 전교 1등을 했겠지만 여기선 전교 꼴등을 할 수도 있다, 이 말이야. 실제로 그런 괴리감에 매년 두세 명씩 자퇴하거나, 전학을 가곤 한다. 그 정도로 힘들고 고될 거라는 거야.”
80명 중 두세 명이면 그 비율은 꽤 높다. 섭쌤의 엄포에 다시 분위기가 냉랭하게 굳는다.
“그러나 그걸 꾹 참고 버티면 반드시 달콤한 열매를 줄 것을 내가 약속한다. 견뎌라. 그러면 너희를 책임지고 명문대에 보내주마. 그거 하나만큼은 내가 반드시 약속할 수 있다.”
#
섭쌤에 이어 1학년을 담당하게 된 선생님들이 하나둘 나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수학과, 물리과, 화학과, 생물과, 지구과학과.
자기소개를 하면서도 자기네가 속한 전공이 더 매력적이라고, 입학하게 되면 우리 전공을 선택하라고 어필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애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렀다. 분위기가 물렁물렁해졌다.
그렇게 소개도 적당히 끝나갈 즈음—
“아, 혹시 여기서 선행 안 한 사람 있나?”
섭쌤이 별 것 아니라는 듯,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지나가듯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벼운 어조로 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이 오늘의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난 안다. 그렇기에 저렇게 중요한 질문이 아닌 것처럼, 긴장을 풀어놓고 묻는 것이다.
애초에 저 질문은 예비입학 기간의 존재 의의를 묻는 것과 같다.
나는 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과거의 나는 멍청하게도 스스로가 선행을 안 한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라는 것도 모르고 여기서 손을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아니 거의 1년 동안 엄청나게 고생하게 된다. 물론 선행이라는 단어의 정도에 대해 조금 의문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걸 자세히 물을 용기가 없기도 했고.
그랬기에 난 손을 들어야 했다. 2회차고 나발이고 실제로 난 지금 아는 게 없다.
과거의 나로부터 변해야 했다.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한다. 내 권리를 챙겨야 한다.
‘이렇게 돌아와서까지 호구일 수는 없다고.’
나는 조용히 손을 올렸다. 천천히 들어 올리는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천천히 허공을 훑던 섭쌤의 눈동자가 내게 와서 멈춘다.
곧 신입생과, 선생님들, 강당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 관자놀이에 짜릿하게 꽂혔다.
신입생 80명이 모인 소강당에서, 오직 나만이 손을 들고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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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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