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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님의 서재입니다.

정령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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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작품등록일 :
2018.04.19 18:40
최근연재일 :
2019.09.3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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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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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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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방관자 (8)

DUMMY

일행은 식사와 차를 마시고, 다시 자리를 옮겼다. 아까 왔었던 여성의 집이었다.


“웬일이세요. 다시 게임하실 줄 알았는데?”


“그냥. 오랜만에 꼬마들이랑 말하는 것도 나름 괜찮아서. 자,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해볼까?”


하지만 스트라가 남자에게 질문이 있다고 한다.


“뭐지?”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응? 내가 지금까지 말 안 했었나? 아아. 그래서 아까부터 저기요 저기요 이러면서 질문했던 거구나. 이거, 자기소개도 안 하고 계속 말하고 있었네.”


“확실히 실수군요. 주인님의 평판이 나빠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넌 자기소개했어?”


“...”


“내 비서의 평판이 나빠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구나.”


“호호호. 걱정 마세요. 제 평판은 곧 주인님의 평판. 전 손해보지 않아요.”


“이 녀석이?”


“꼬마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시죠.”


“쳇. 아무튼 내 이름을 알려주지. 하지만 본명은 아니야. 본명은 함부로 밝힐 수가 없어서 말이야.”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난 아르헨이야.”


“난 아우루란다, 꼬마들. 참고로 나도 본명이 아니야.”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름을 기억했다.


“너희의 이름 같은 건 어차피 아니까, 우리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바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크하하하! 남은 건 나뿐입니다.”


“그래. 도깨비. 사실 너희야말로 혼혈의 끝이지. 원래 너희와 설녀는 반정령에 가까운 종족이었지만, 어느새 바뀌었군.”


“크하하하! 그 말은 우리가 약해졌다는 말입니까?”


“에테르를 다루는 측면에서는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정령보다는 못하겠지만, 영물 정도의 수준으로는 속성을 다룰 수 있었을 정도니까. 물론 친화력이 그렇다는 거지, 힘이 그랬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에 반해 육체는 크게 강화되었군. 육체가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야. 어떻게 보면 세계에 존재한다는 가장 큰 증거니까. 육체가 없어서 자기 자신을 유지 못하고 세계의 흐름에 휘말린 놈들은 생각보다 많아. 그런 점을 보자면, 약해졌다는 말은 옳지 않아.”


“크하하하! 그거 다행입니다. 육체가 없다면 정말 재미없을 것 같습니다. 씨름도 못할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것도 그렇지. 아무튼 예전이라면 술법의 복잡도는 필요 없이 그저 속성에 대한 이해력을 키우라고 했을 거야. 에테르로 속성을 흉내내는 것이 술법의 가장 기초라면, 너희들이 사용했던 것은 속성을 사용하기 위해 에테르를 끌어 쓴다는 느낌이니까. 결과만 보자면, 속성을 다루는 초능력과도 비슷해. 지금도 어느 정도 그 감각이 남아있을걸?”


“하긴 도깨비들은 가끔 술법 없이 자연력을 담아 발만 굴렀는데 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잖아?”


“엘르의 말대로 아직 속성력 자체를 다루는 힘이 남아있는 거지. 원래는 땅보다 불과 더 친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카를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자연력, 마나, 초능력, 술법의 방법, 거기다 속성력까지. 아무리 북부를 여행하면서 자연력을 사용하는 존재를 많이 만나보긴 했지만, 원체 그런 쪽 지식이 전무했던 카를이었기에, 한 번에 이해하기란 힘들었다.


‘다른 얘들은 잘 이해하고 있는 거 같긴 하네···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지.’


우선은 지금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덕분에 지금 도깨비들의 힘은 다른 종족과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이 열려있지.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오거들과도 맞붙을 수 있는 신체능력이지. 애초에, 별 다른 술법 없이도 강한 종족이야. 그걸 제외하면, 지금 도깨비들의 특징은 응집력이네. 스트라의 방사 능력과 정반대야.”


“크하하하! 응집력이라면 역시 주위에 있는 걸 끌고 오는 것을 말하는 겁니까?”


“그것도 있지. 그리고 거기에 견고함을 더하면 돼. 너희의 힘은 술법의 힘이 아니라, 정수의 힘에 가까워. 그 힘으로 그 어떤 종족보다 튼튼하게 정수를 완성할 수 있지. 덕분에 외부의 타격에도, 정수나 술법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


도깨비의 전투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인종들은 술법을 완성하고, 술법을 사용한 다음에야 근접전을 시도할 수 있다. 전투 중에 술법을 완성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게다가 충격을 받는다면 술법이 오히려 역류해서 몸속을 헤집어 놓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도깨비들은 격투 중에도 술법을 준비한다.


“몸이 튼튼해서 정수까지 충격이 안 가서 그런 줄 알았어요.”


시미가 퇴기의 몸을 툭툭치면서 이야기한다.


“하하하. 물론 그것도 영향이 있지. 다만 이 방법에도 역시 단점은 있어. 정수를 너무 단단하게 뭉쳐놓으면, 정수의 힘을 사용하기가 힘들어지지. 껍질이 단단하면 외부의 충격을 잘 버티지만, 정작 안에서도 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아. 너무 단단한 알에서는 새끼가 태어나지 못하지. 아, 지금 세계에는 조류랑 어류가 없어서 알이라는 걸 잘 모를 수도 있겠군. 뱀알은 본 적 있겠지만, 거기서 새끼가 태어나는 모습은 못 봤겠네.”


“전 본 적 있어요!”


시미는 일행에게 알에서 새끼가 태어나는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아르헨의 말이 이해가 간다.


“반대로 그 견고함 덕분에 무리한 술법을 사용해도 정수가 망가지는 경우가 훨씬 드물어.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는 드워프들과도 비슷한데, 드워프들의 안정성이 구조의 안정성이라면, 도깨비들의 안정성은 소재의 안정성이라 할 수 있지.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집을 만드는 게 드워프라면, 통바위에 출입구를 뚫어놓는 게 도깨비라고 할 수 있어.”


“크하하하! 화끈해서 좋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자연력을 흡수하는 능력도 좋지. 다른 종족들이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주위의 자연력을 끌어당기거나, 정수에 회전을 넣어서 끌어당길 때, 도깨비는 정수 자체가 주위의 자연력을 끌어당겨. 다른 종족이 자연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보다는 훨씬 느리지만, 딱히 별다른 작업 없이도 힘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장점이야. 특유의 속성친화력 덕분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속성과 딱 알맞은 자연력만을 끌어당길 수도 있어. 느리지만, 변환의 과정이 사라져서 순도가 굉장히 높아지지. 하지만 역시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도깨비 정수의 폐해는 퇴기, 네가 직접 겪어봤겠지.”


“크하하하! 그 말대로입니다. 저번에 카를을 도울 때, 정수가 바위처럼 굳어져서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제가 힘을 주어도 꿈쩍도 안 했습니다.”


“그래. 아무리 좋고 특징적인 방법이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과하면 큰 독이 되지.”


“... 과유불급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지. 그것을 위해 많이 노력했고. 하지만 설마 지금 세계에 그 말이 있을 줄 몰랐네.”


아르헨은 하스트에게 웃어 보이고 말을 이었다.


“도깨비들의 술법은 속성력을 기준으로 발전했으니, 사실 지금도 그렇게 해도 무관하긴 해. 그런데 다른 방향도 있지. 지금 도깨비들은 술사보다 전사가 훨씬 잘 어울리기도 하고.”


“크하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퇴기는 전사가 어울린다는 말이 참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정수의 견고함과 더불어, 육체의 견고함도 끌어올려. 지금보다도 더. 지금도 돌의 갑옷을 입으면서 비슷하게 하고 있지. 하지만 지금은 술법을 사용해야 가능하지? 나중에는 상시 강화가 가능해질 거야. 응집력도 있으니까, 자연력의 소모량을 충분히 충당할 수도 있지.”


“크하하하! 어떻게 상시 강화를 해야 합니까?”


“말하자면 갑옷이 아니라, 피부를 강화한다는 느낌으로, 혹은 피부가 한 겹 더 생긴다는 느낌으로, 파충류들의 비늘 같은 느낌으로. 그다음에는 에테르로 육체 자체를 강화하는 게 중요해. 가장 좋은 예시가 옆에 있지.”


아르헨의 눈길이 한쪽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카를이 있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사실 지금 이 세계에서 상시 강화를 가장 훌륭하게 완성한 것은 카를 너야.”


“역시 너네 조상 중에 도깨비 있었던 거 아냐? 네 덩치도 그렇고.”


엘르의 말에 카를은 즉답하지 못했다. 혹시? 라는 생각도 들었다.


“넌 거두절미하고, 오직 육체만을 강화시켰지. 다른 기능들은 모두 버리는 대신에. 반대로 넌 자신의 자연력을 통제하기 힘들어하지. 그 좋던 재능을 폐기하는 수준까지 내려버렸으니까. 얼마 전에 너네가 싸운 드워프 꼬마가 정신의 경지를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면, 저놈은 반대야. 육체의 경지를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 정확히는 재능을, 육체를 완성하는 것에 전부 쏟아부었다는 말이 정답이겠지만.”


“크하하하! 그렇다면 우리도 카를처럼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가능해. 저놈처럼 무식하게 육체만 완성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더 유연한 활동도 가능하지. 상시 강화를 유지하면서 적을 압박, 술법 방해와 동시에 자신은 정수의 견고함을 토대로 강력한 술법을 완성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전투 형태가 될 거야. 다행히 너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 얼마 전에 해봤으니까. 뼈가 박살나는 충격을 받아도 꿋꿋이 술법을 완성했잖아?”


“크하하하! 맞습니다!”


그 말에 일행은 놀랐다. 퇴기가 거스에게 굉장히 큰 부상을 입고 온 것은 예언의 아이들 모두 목격했다. 그런데 설마 그 부상을 당하면서 술법을 완성했을 줄은 몰랐다.


일행은 생각해보았다. 만약 퇴기와 겨룬다면 어떻게 될까?


쓰러지지 않는 적이 빠르게 다가와 근접전을 강요한다. 그런데 적이 준비하는 술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방해를 해도 소용이 없다. 술법이 끊기지 않는다. 게다가 점점 강해지는 힘에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전투에 시간제한이 생기는 것이다.


“음···”


엘르는 접근전이 되는 순간, 패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화살로 접근을 저지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 화살의 파괴력과 퇴기의 방어력, 어느 쪽이 우위인지가 승패의 관건이다. 그리고 시간 내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석벽이 자신을 감쌀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회피를 잘해도, 피할 공간이 없으면 끝이다.


시미는 애초에 자신은 상대가 안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소인의 힘은 개인의 힘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스트라도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속도로 퇴기를 뿌리칠 수도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퇴기가 얼마나 열기에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도깨비도 불의 특성이 있다고 하니, 쉽지 않을 것이다.


“네 친구들이 어떻게 널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하는 모양이군.”


“뭣이? 크하하하! 그렇게 좋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니, 훌륭하다! 역시 다음에 각축의 장을 열어야겠다! 카를에게도 재도전해야 하니까!”


그 말에 일행은 모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우, 우선 내가 비행술을 배우고!”


엘르는 지기 싫었다. 셋은 포기했다. 못 이길 것을 아니까. 유일하게 카를만은 귀찮다는 이유였다.


하스트는 애초에 반응하지 않았다.


“하하하. 좋은 호승심이야. 게다가 아주 산뜻하네. 아, 하나 더 이야기해줄게. 카를의 특징 중에서, 회복력은 따라갈 수 없어. 저건 속성 때문에 그런 거라서 말이야. 하지만 땅도 굉장히 좋은 속성이니, 실망하지는 마.”


“크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누견과는 다른 것도 듣고 싶습니다.”


“누견까지야. 결국 사람은 땅에 발이 닿아있어야 힘을 실을 수 있지. 그리고 몸만 튼튼하다면 땅의 움직임으로 힘을 더 실을 수도 있어. 예를 들자면.”


아르헨의 손 위로 다시 무언가가 떠오른다. 라슈였다.


“이 토끼 꼬마는 발차기 위주의 전투를 하지. 꽤나 사용하기 힘든 무술이지만, 용케 잘 사용하고 있어. 각력이 강한 토끼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겠지만.”


라슈의 앞에 퇴기가 생성된다. 라슈가 퇴기를 향해 앞차기를 시도한다.


“둘은 워낙 힘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이래 봤자 오히려 토끼가 밀리겠지.”


그 말대로 앞차기를 시도했던 라슈가 퇴기를 차자마자 뒤로 밀린다.


“하지만 땅을 이용하면?”


라슈와 퇴기 아래에 땅이 생성된다. 라슈가 다시 앞차기를 시도한다. 그런데 라슈의 발아래의 땅이 앞으로 쑥 밀려난다. 아까와 다르게, 퇴기가 약간 움찔한다.


“땅을 이용해 더 큰 무게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다시 한번 라슈가 앞차기를 시도한다. 이번에도 라슈의 땅이 앞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반대로, 퇴기의 땅이 쑥 꺼진다.


기반을 잃은 퇴기는 라슈의 앞차기에 넘어졌다.


“반대로 상대의 힘을 없앨 수도 있지. 격투의 기본은 발에서 나오니까, 기반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치명적이야. 다른 이용법이라면.”


아르헨의 손 위에 라슈가 사라지고, 거스가 나타난다.


“이 소의 특기는 바람을 압축 후 방출하여 급가속하는 것이었지.”


거스가 순식간에 퇴기에게 쇄도한다. 그 일격을 맞은 퇴기가 손 위에서 사라진다.


“그것을 넌 이렇게 대응했지.”


거스가 돌아온 퇴기에게 다시 쇄도한다. 퇴기의 다리가 땅과 연결되어있다. 거스가 땅에 연결된 퇴기의 팔에 쓰러진다.


“좋은 방법이야. 고정 능력까지 써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어.”


“크하하하! 그 능력을 일부러 사용했다기보다,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 초능력은 그런 마음과도 큰 연관이 있지. 어쨌든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까. 하지만 네 성격으로 봤을 때, 더 재밌는 방법도 있었어.”


거스와 퇴기가 재생성된다. 둘 다 같은 자세로 앞을 향해 뛰어나가려고 한다.


거스의 바람을 폭발하며 거스를 앞으로 쇄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퇴기의 땅이 퇴기를 앞으로 날리며 앞으로 쇄도하게 만든다.


중간에서 부딪힌 둘의 쇄도는 퇴기의 승리였다.


“크하하하! 확실히 재밌는 방법입니다! 다음에 써봐야겠습니다!”


“그래. 누군가는 땅의 힘을 가장 유연성 없고, 가장 활용도가 떨어지는 힘이라고 하지만, 다른 어떤 속성보다 형태가 뚜렷하고, 무거운 무게는, 오히려 물리적인 힘으로는 가장 강하지. 무엇보다 땅 위에서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도움을 못 받을 일은 별로 없지. 대신 무게로 인해서 가장 다루기 힘든 것도 사실이긴 해. 발사나 투척 계열의 술법을 발휘했을 때, 같은 힘으로 가장 속도가 느린 게 땅속성이니까. 아무튼 카를은 자신의 힘만을 사용할 수 있지만, 너희는 다른 힘을 얹을 수 있어. 이 차이가 재밌지. 같은 경지에 다다르면 아마 카를보다 큰 파괴력을 낼 수 있을 거야.”


“크하하하! 기대됩니다!”


“그리고 속성력이나 신체강화 같은 능력은 사실 인간보다 영물들이 주로 사용하니까, 나중에 시간 되면 땅의 영물을 찾아봐. 카를은 전혀 도움이 안 될 테니까, 기대 말고.”


카를은 눈을 돌렸다. 뭔가 계속 까이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고정 능력이라면, 이해하기 편하겠지. 정지하고만 안 헷갈리면 되니까.”


아르헨은 갑자기 카를보고 자신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 손짓에 카를은 앞으로 향했다.


“윽!”


카를은 손짓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당황했다. 손가락은 물론, 눈동자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자, 이렇게. 다른 사람을 고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물론 지금처럼 무조건적인 고정은 힘들어. 보통은 매개가 있어야 해. 네가 사용해 본 매개는 지금까지 두 가지. 땅, 그리고 공간. 땅에 몸을 고정시키는 것은 격투기를 연마하는 너희들이라면 누구보다 이해하기 쉬울 테니 넘어가고.”


아르헨이 손을 들자, 카를의 몸이 떠오른다. 카를은 그 상태에서 허공에 고정되었다.


“이것이 공간 고정이지. 일부러 보기 편하라고 공중에다 했어. 이것의 장점은, 땅이 없어도, 하다못해 자기보다 무거운 것이 밀어내도 버틸 수 있다는 거야. 특히 상대의 공격이 땅을 터뜨릴 수 있는 수준이라면, 땅에 몸을 고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 무지막지하게 넓은 땅에 자신을 고정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게다가 땅을 매개로 고정하는 것은 보통 발에 한정되지. 하지만 공간을 매개로 하면 온몸을 고정하는 것이 가능해. 무엇보다 공간을 부수기는 힘들어. 그렇기에 더 큰 안정성이 있지. 물론 공간을 인식해서 거기에 고정하는 것이 땅에 고정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지만, 엘르와 시미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은 할 거야. 더 세밀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카를은 아르헨의 지시에 발을 휘저었다.


“어? 어?”


그러자 허공에서 카를이 앞으로 나간다. 허공을 걷고 있다.


“어때? 재밌지? 이런 것도 가능해져. 일정 순간마다 한 발만 공간 고정시키는 거지. 이거보다 바람으로 발판 만드는 게 더 쉽지만. 자, 이리 와.”


아르헨이 카를 쪽으로 손가락을 내민다. 그리고 움직이자, 카를이 손가락에 매달린 것처럼 쓱 움직여서 본래의 자리에 앉게 된다.


“크하하하! 방금 그것은 무엇입니까?”


“응? 아, 이거? 이건 내 시선을 기준으로 해서 손가락 끝에 카를을 고정한 거야. 드래그 앤 드롭이라고 할까?”


“크하하하! 뭔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이름입니다!”


“아무튼 네가 경지와 고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서 매개를 늘린다면, 재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어.”


“크하하하! 재밌는 일. 좋은 말입니다. 훌륭한 장난을 시도할 수 있겠습니다!”


“부럽다, 초능력.”


카를은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렇게 부러워 안 해도 돼. 어차피 이 정도 경지에 이르기는 정말 힘드니까. 아무런 대처도 안 하는 상대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초능력으로 간섭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힘이 필요해.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농락할 수 있는 수준이면, 이미 상대와 경지가 꽤나 차이가 나는 거지. 그래서 가장 상대하기 힘들 것 같은 초능력이, 사실은 가장 상대하기 편한 경우도 많아.”


“예를 들면요?”


“예를 들어 생물을 보기만 해도 즉사시킬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 어떨 것 같아?”


“최악인데요.”


“그렇지?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지. 상대를 봐야 한다. 생물이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전제조건 때문에 이런 초능력자는 자신의 상대 말고는 다른 것에 간섭하기가 힘들지. 만약 이런 놈과 싸우게 되면 둘 중 하나야. 적보다 경지가 낮아서 즉사하던지, 경지가 높아서 아무런 영향을 안 받던지. 변수 따위는 하나도 없지. 상대보다 경지가 낮다면, 뭐라도 투척할 수 있는 속성 초능력이 훨씬 나아.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 수 있거든.”


“아하. 그런데 예시가 너무 전투적인데요? 실생활에서는요?”


“실생활에서는··· 초능력이 있는 편이 더 편하지. 뭐라도 더 할 수 있으니까.”


“부럽다, 초능력.”


아르헨은 카를에게서 눈을 뗐다.


“설산에 사는 녀석들은 우선 속성력에만 몰두하면 될 테고. 어차피 냉기밖에 못 다루는 녀석들이니까.”


“수인족은 어떻습니까?”



“걔네는 애매해. 그 능력이 애매하다기보다, 뭉뚱그려서 설명하기가 애매해. 사실 수인족은 말이 수인족이지 종족마다 특성이 천차만별이거든. 토인과 랑인의 차이는 소인과 드워프의 차이만큼 심해. 그래도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체강화가 특징이지.”


“그럼 도깨비랑 같네요?”


“신체 강화가 특기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많아. 가장 큰 특징 차이는 도깨비가 전체 강화라면, 수인들은 부분 강화에 능하다고 해야겠지. 아까 설명한 것을 예로 들자면, 수인은 도깨비의 신체 강화와 드워프의 부여를 합친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그 말은, 수인들은 드워프들이 물건에 술법을 부여하듯이, 신체의 일부분만 강화하는 것에 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래. 사실 신체강화라는 특징만 보면 수인보다 도깨비가 우월한 점이 많지. 그러나 수인은 짐승들의 인자를 가진 종족. 다른 종족보다 뚜렷한 확실한 무기가 있다.”


“뿔, 이빨, 발톱 같은?”


“그래. 그런 특징이 있는 녀석들은 보통 통로가 그쪽으로 발달되기 마련이야. 토끼나 말처럼 다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수인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집중력이지. 그렇기에 같은 경지의 도깨비와 수인이 있다면, 공격력은 수인이 더 강한 경우가 많아.”


“진짜 서로 비슷하면서도 천차만별이네요.”


“그렇지. 아예 서로 만나본 적이 없으면 모를까, 같은 세계에서 부대끼고 살다 보면 서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처음에 말했잖아. 서로의 특성을 아는 게 좋다고. 어차피 교집합이 있으니, 상대에게 배우는 것도 많을 거야.”


“다행히 모두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그렇지. 현자 녀석이 노력 많이 했거든. 지금과 다른 유일한 종족은 드워프겠지. 그쪽은 술법의 기반을 거의 남기지 못했거든. 그나마 최근에 드워프 술법을 다룬 놈은 그 드워프 꼬마가 유일할 거야.”


“나이트 말입니까? 나이트가 어떻게?”


“정령 기계에 남아있던 기술을 습득했으니까. 거기에는 드워프의 기술도 있거든.”


“네? 파괴자는 남부 왕국에서 만들었던 거 아니에요?”


“거기가 주축이긴 했지만, 그 기계를 완성하려면 왕국만으로는 힘들었어. 그래서 다른 종족에게도 협력을 많이 구했지. 엘프를 제외하고.”


“네, 들었어요. 엘프 마을 사람들이 방해할 것이 뻔해서 그전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그 후 왕국의 사상과 뜻이 같은 기술자와 능력자들을 모아 파괴자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 남부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지금과 다르지. 그때 분열된 것은 남부와 북부라는 땅 위의 사람이 아니라, 이념이었으니까. 한 가지에 대한 찬성과 반대.”


“한 가지? 파괴자를 만드는 거요?”


아르헨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다.


“더 질문 있나?”


“혹시 술법을 잘 다루는 방법 중에 간단한 거 없을까요?”


“간단한 거라? 반대로 물어보지. 술법을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침착함?”


“집중력?”


“이성?”


“정신력?”


“지식?”


“하하하. 하스트 빼고 모두 하나씩 이야기했네. 그래, 모두 맞는 말이기는 해.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거야. 하지만 무시하는 것이 하나 있지.”


“그게 뭐죠?”


“바로 감정이야.”


“감정?”


“감정적이면 술법을 발휘하기 힘든 거 아니에요?”


“그런 경우도 있지. 그럼 물어볼게. 너희가 가장 성공한 술법을 발휘할 때, 너희에게 감정이 없었나?”


“감정이 없는 경우가 없으니···”


“하하하. 그런 말이 아니야. 그때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려 했냐는 말이지. 아마 아닐걸?”


일행은 각자 인생 최고의 술법을 생각해봤다. 확실히 그때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다.


“감정이란 술법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야. 물론 과하면 정신력과 집중력이 분열된다던지, 침착함을 잃는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 감정 자체가 힘을 소비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단점도 있지. 하지만 모든 것에는 적재적소가 있는 법. 이번에도 예를 봐라.”


아르헨의 손 위로 다시 무언가 떠오른다. 모두에게 익숙한 장면이다.


-아쉬운 건 너다, 나이트.


그건 나이트를 향한 술법을 준비할 때, 하스트가 나이트와 했던 대화다.


-예언자의 선택에 의미는 없다. 세계는 진동했고, 예언에 없던 카를이 나타났다. 파괴자는 일찍 깨어났으며, 우리는 준비가 덜 되었었다. 그래. 예언은 깨졌다.


-보아라! 이곳에 모인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보아라, 파괴자! 너희들을 없애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선택의 시간을 보아라!”


-우리를 선택한 것은 세계다!


마지막은 아까도 봤던 장면이었다.


“자. 하스트는 왜 이랬을까? 술법을 완성하기도 바쁜데, 뭐하러 적이랑 주저리주저리 대화를 했을까? 그냥 날려버리고 끝내면 되는데? 일부러 알려줄 필요도 없는데?”


“자기만족?”


“멋?”


“자존심?”


“자랑?”


“크하하하! 아니다! 적에게 보내는 마지막 예우다!”


“...”


하스트는 보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이야기를 왕국의 국민들과 반군이 들었으면 하는 거였다. 너희도 포함해서. 예언에 대한 흔들림은 사기와 명분에 큰 영향을 주니까. 전쟁이 끝나더라도.”


“아하.”


“그리고 다른 이유는 고조다.”


“고조? 고조할아버지?”


카를은 헛소리를 한 죄로 아르헨에게 꿀밤을 한 대 맞았다.


“악! 아파?”


카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맞아서 아픈 건,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느껴봤다.


“저 말의 화자는 물론 하스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청자도 하스트지. 저 말들은 본인의 감정과 기세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 극도의 집중을 포함한다. 고조된 감정을 깨트리지 않고 유지한다면 감정에 걸맞은 집중력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수동적인 집중과는 급이 다르게. 술법과 상극이라는 분노와 증오 또한 마찬가지야. 오로지 적을 향한 집착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는 집중력을 낳는다. 비록 그 끝이 파멸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집중력을 얻을 수 있지. 그래서 실제로 예전에는 감정을 중시하는 술법들도 있었어. 스스로에게 단기적인 최면을 걸어, 감정을 고조시킨 후, 더 강한 술법을 완성하는 거지.”


“그런 것도 있어요? 다른 술법은요?”


“세계에 저장되어, 그 자체만으로 힘이 있는 글자나 언어로 술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 지금 세계에서는 안 되지만, 별 술법이 다 있었어.”


“그렇구나.”


“다른 술법은 나중에 너네가 알아서 개발하고, 우선은 내가 말한 각 종족의 특성을 위주로 마을 사람들과 고민해봐. 그럼 다음 질문?”


일행은 무슨 질문을 할까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


“하스트, 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아르헨의 지목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스트가 움찔한다.


“...”


고개를 든 하스트의 표정이 굳어있다. 하스트는 침을 삼켰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걱정 마라.”


하스트는 그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단순히 질문을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에 한발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르헨님, 위대한 존재여. 송구하지만, 질문드리겠습니다.”


“그래, 뭐지?”


“당신은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흐음~?”


아르헨은 하스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우루 또한 하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스트는 아르헨과 눈을 마주쳤다. 역시나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육체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짓눌리는 감각이, 절대 저 존재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그러나 하스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은발 은안의 드래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께서 한 말, 어디까지 진실이죠?”


작가의말

 찾아보니까, 표준 표기는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건이더라고요.


 하지만 드래건은 어색해서 우선은 드래곤으로 쓰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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