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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님의 서재입니다.

정령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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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작품등록일 :
2018.04.19 18:40
최근연재일 :
2019.09.30 23:58
연재수 :
2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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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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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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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방관자 (5)

DUMMY

“들어본 적 없지? 없어야 해. 있으면 안 되거든.”


“아, 네. 들어본 적 없습니다.”


“다행이네.”


말과 다르게 남자에게 안도의 기색은 없다.


“아무튼 우리는 너희가 말한 용이랑은 다른 종족이야. 아래 얘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이게 진짜 모습이 아니거든. 폴리모프라고 하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둔갑술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려나?”


그 말은 일행도 들어본 적이 있다. 먼 옛날, 극소수의 고매한 영물이 발휘했다는 술법이다.


“그럼 용이라는 종족 위에 드래곤이란 종족이 있는 겁니까?”


이제 몸상태가 괜찮아져,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카를이 질문한다.


“응? 아. 하하하. 하긴 너희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구나. 우리가 용들을 부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니야. 용과 드래곤은 종족적으로 대등해. 생긴 것도 있고, 용족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놈들도 있을 정도니까. 저들이 우리 아래 있는 건, 우리가 고용했기 때문이야. 친구의 소개로.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놈 자기 식구들 중 모자란 녀석들을 우리한테 미룬 거 같지?”


“제가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용족을 부하로 두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특히 어린것들은 쓸데없이 고집만 세고, 남 시켜먹는 버릇만 있다고요.”


“아, 그래서 설녀들과 거래를···”


스트라의 중얼거림에 남자가 관심을 보인다.


“응? 이건 무슨 소리야?”


남자가 여성을 본다. 여성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얼마 전에 보니까, 자기들 놀려고, 설산에 있는 인간들과 거래하고 있더라고요.”


“엥? 무슨 거래? 걔네들, 내가 인간과 관여하지 말라고 한 이야기 까먹었어?”


“안 까먹었겠죠. 해고당하기 싫다면. 그런데 원래 그렇잖아요? 똑똑한 놈들은 꼭 꾀를 쓴다는 거? 절대 하라는 대로 안 하죠.”


그리고 여성은 용들이 설녀들과 어떤 거래를 맺었는지 말했다.


“그걸 왜 지금 보고해?”


“저번 보고서에 다 쓰여있었습니다.”


“아, 그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여성에게서 눈을 뗐다. 괜히 자기가 일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것만 확인시켜준 꼴이었다.


“음. 뭐, 그 정도는 양해해주지. 솔직히 할 일도 별로 없는데, 경비 때문에 계속 서있으라고 하는 것도 아깝고.”


“그러니까, 그럴 거면 그냥 다른 종족들을 가디언으로 삼을 것이지, 뭐하러 용들을 고용한 거예요?”


“아니, 저번 일도 있으니까 확실히 하자는 거였지. 덕분에 이번 일은 잘 되었잖아?”


“걔네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어요.”


여성과 남자는 서로 티격태격하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급 인력이라고 매년 연봉 주는 거 생각하면 얼마나- 흠흠. 아니, 지금은 이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니었죠.”


일행의 눈을 의식한 여성은 얼른 이야기를 멈췄다. 일행이 빤히 쳐다보자, 얼른 말을 돌린다.


“그래. 꼬마 손님들. 뭐 궁금한 거 없어?”


이에 하스트가 말한다.


“왜 카를을 살려주신 거죠?”


남자는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 하스트를 바라보았다.


“응? 왜? 살려주면 안 돼? 넌 그걸 바라고 여기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아니라, 혹시 대가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리고 이미 카를을 알고 계셨고, 구해주실 마음이 있었으면 저희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카를이 오기를 기다리셨던 것 같은 대화도 들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당신들의 능력이라면 파괴자 같은 놈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즉, 넌 우리가 나서지 않았기에 세계가 멸망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 마음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스트는 당돌하게 이야기했다.


“건방지네. 우리의 신경을 거슬리면 어떻게 될지 알고는 있냐?”


“세계에 큰 재앙이 닥치겠죠.”


“그 누구보다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놈이 그런 말을 가볍게 하는 거냐?”


남자는 하스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큭···”


그것만으로 하스트는 크나큰 압박감을 느꼈다. 눈빛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스트? 왜 그래?”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그의 반응에 공감하지 못한다. 남자의 압박감은 단순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일행은 남자와 하스트가 그저 단순히 서로를 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도 하스트의 낯빛이 창백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하스트는 남자를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지금 죽더라도 의문을 풀어야겠다는 것처럼.


“재밌네.”


남자의 말과 함께 하스트를 감싸던 압박감이 사라진다.


“헉··· 헉···”


하스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네 입장에서는 우리가 야속하기도 할 거야. 아니, 누구라도 그러겠지. 세계를 구할 힘이 있는 존재가 그저 넋 놓고 보고만 있다니 말이야. 지금까지 친지를 잃은 사람이 우리의 존재를 안다면, 누구라도 너처럼 생각하겠지. 원망할 거야. 물론 그걸 감히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누구에게라도 있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남자는 웃었다.


“물론 네 말이 맞아. 우리가 나섰다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을 거야. 그 기계가 완성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완성되었다고 해도 의미 없지. 우리에게 그 기계의 힘은 전혀 통하지 않으니까. 그깟 것들, 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수가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재채기만 해도 쓸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왜 나서지 않았죠?”


“그건 우리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우리의 일?”


“그래. 우리의 힘은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크다. 우리가 나서면 이 세계 자체를 뒤집는 것도 가능하지.”


“그렇다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우리가 그러는 순간, 너희 인간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하게 된다. 말이 그렇지, 힘의 차이를 생각하면 우리가 너희 전부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지. 너는 그것을 원해? 강자에게 빌붙어서 자유의지 따위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 싶어? 그렇게 되는 순간, 인간의 세계는 사라져. 드래곤의 세계에 너희가 있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해도, 살 수만 있다면 괜찮은 거 아닙니까?”


“확실히 너희는 죽음과 너무 가깝지. 하지만 너희에게는 미안하게도, 죽음과 삶은 순환하는 거야. 너희가 죽음에서 멀어질수록, 다른 생물들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발전한 문명은 다른 생물들을 손안에 넣는다. 인간의 발전이 다른 생물들에게 재앙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지. 그럼에도 문명에는 큰 의미가 있지만, 내가 문명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모를까, 우리 입장에서 너희는 지나가는 다람쥐 새끼와 다를 바 없어. 특별히 예뻐해 줄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 기계는 너희 인간의 업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치우는 것도 너희의 업이지. 그걸 다른 사람에게 바라면 안 되지.”


“인간의 업이라고요? 소수의 인간이 저지른 일에, 세계 전체가 휘말려도 된다는 말입니까?”


“원래 힘이 있는 자는 없는 자보다 영향이 크기 마련이야.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서로가 깊게 연관되어 있기에 세계인 것이고, 질서인 거야. 타인이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만큼, 자신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도 중요한 것이지. 너희는 그 부정의 극단을 먼저 맛본 것일 뿐이고. 긍정의 면은,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일이고. 뭐,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가 잠시 여성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린 너희에게 관여하지 않기로 했고, 할 수도 없다는 거지.”


“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제약이 있다는 거야. 우린 이 세계에 정식으로 속해있지 않아.”


“... 귀신같은 건가?”


엘르의 중얼거림에 남자는 웃었다.


“하하하. 어떻게 보면 비슷하네. 세계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점이 말이야.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에 관여하면 그만큼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지. 그런데 우리는 더 해. 워낙 가진 힘이 크다 보니, 우리가 나서는 순간.”


남자는 뜸을 들였다. 일행은 그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계가 가만있지 않을 걸?”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의 힘을 가지기 위해 세계가 우리를 복속시키려고 한다던지, 반대로 우리를 내쫓을 거야. 물론 우리는 그 둘 모두에 저항할 수 있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일행은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의 말은 세계가 하나의 생물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다.


시미는 상상했다. 세계가 드래곤들을 복속시키려고 한다. 내쫓으려고 한다.


‘세계가 일어난다? 산과 들이 전부 일어난다?’


시미의 상상 속에서는 세계가 사람의 형태로 일어나서 전설로 들은 용과 싸우고 있다. 호쾌한 싸움이었다. 세계가 산으로 이루어진 주먹을 내뻗자, 용이 번개를 쏘아 그것을 막아내고 있다.


시미는 입을 헤 벌리고 상상에 몰두했다.


“시미? 무슨 생각해?”


시미는 엘르의 부름에 퍼뜩 상상에서 깨어났다.


“하하하. 소인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 들어볼까?”


남자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시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시미에게 향한다.


“산과 들이 사람의 형태로 일어나서 용과 싸우는 상상을 했어요.”


“하하하. 역시 재미난 상상이네. 물론 실제로 그럴 수도 있지.”



“네?”


시미는 자신의 상상이 인정받자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안의 생물들은···”


단순히 산과 들이 일어나는 것만으로 대부분이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대지의 은혜를 잃은 자들은, 저 죽음의 바다로 내팽개쳐칠 것이다.


“그래. 너희는 다 죽어.”


하스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계는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세계는 언제나 너희 편이다. 하지만 너희 개인의 편은 아니지. 세계가 나서야 할 정도로 큰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 와중에 일어나는 약간의 손해는 충분히 감수하기 마련이다.”


“생물 전부가 약간의 손해···”


하스트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도 되었다. 세계 그 자체가 없다면, 그 위의 생물 또한 없어진다. 약간의 손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따로 있다. 눈 앞의 존재들이 정말 그만큼 강한가? 라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말을 듣기만 해도 공포를 불러오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역사가 따위로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거다.


‘허세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이유가 없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들이 세상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간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세계를 멸망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스트는 다른 질문을 해보았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모두 그렇게 강합니까?”


“그렇지는 않아. 물론 드래곤과 용들이 워낙 강하긴 하지. 성년이 되면 혼자서 왕국을 끝장낼 수 있다는 말이 전혀 거짓말이 아니니까.”


일행은 며칠 전에 봤던 나이트와 대장의 힘을 생각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왕국 전체와 싸워도 혼자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은, 충분히 말도 안 되는 힘이다.


“어때? 무섭지? 그런 존재가 있으면 서로 다투는 것만으로 세계가 끝날 것 같지 않냐?”


일행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안 그래. 그게 끝이야. 너무 강하다 보니, 안 되는 일도 없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야. 같은 용족들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렇다고 죽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서로 싸우는 경우도 드물지. 그래서 모두가 보통 게을러. 충분히 강해질 수 있는데도 별 다른 의미를 못 느끼다 보니, 다 그 나이대의 보통에 머무르지. 그러니 걱정마라. 아무리 용족이라고 해도 세계가 위험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의 존재들이 그리 흔치는 않아. 애초에 이 세계에 드래곤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없고. 용들은 꽤 많지만, 걔네는 좀 약하니까.”


일행은 공통적으로 생각했다. 약하다는 말이 이렇게 공감이 안 되기는 처음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라. 걔네가 본체라면 몰라도, 인간 형태일 때는 너희도 충분히 상대할만 해. 번개라는 것이 좀 까다로워서 그렇지. 우리라고 해도 개체차가 있어서 막 성년이 된 녀석 중 약한 놈들이라면 본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을걸?”


“그럼 그 용들은 세계에게 걸리지 않는 건가요?”


“걸리긴 하지. 물론 걔네는 세계를 거부하지 못할 테니 그대로 복속되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설녀들과 거래를 하고 있는 거죠?”


“인간 형태로 힘을 약화시켰으니까. 만약 세계에 걸려도 그냥 인간이라고 판단하고 말겠지. 특별하게 복속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거야. 세계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거든. 물론 그래도 오랫동안 세계에 속해있으면, 어쩔 수 없이 복속되겠지만, 세계는 너희가 금지라고 부르는 이 안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 내가 막아놨거든. 그렇기에 여기는 세계의 일부면서, 별다른 공간이 되었지.”


“그래서 설녀들을 불러오는 건가요? 밖으로 나가기는 힘드니까?”


“정답이야. 그래서 내가 봐주는 거고. 밖으로 나갔다면 나한테 혼나겠지.”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용들 중 누군가가 마을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마을로 내려갔다가 해고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뭐? 진짜? 왜 나한테 보고-”


여성의 눈빛에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보고는 있었던 것이다. 게임하느라 신경을 안 써서 생각나지 않았을 뿐.


“아, 그 녀석 안 되겠네. 나한테 폐급만 보낸 거 아냐? 나중에 따져야겠다.”


남자는 말을 돌렸다. 그래도 여성의 눈빛이 거두어지지 않자, 하스트가 말을 이었다.


“그럼 카를을 여기에 와서야 구해준 이유도 그것입니까?”


남자는 하스트를 보며, 사회생활 좀 하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 남자는 얼른 대답했다.


“맞아. 원래는 그것도 방관하려 했지만, 이 녀석과 내기 비슷한 거를 해서 말이야. 너희들이 여기에 온다는 조건 하에 들어주기로 했었지. 정확히는 조그마한 부탁 몇 가지 들어준다는 거였지만.”


“조그마한?”


카를은 죽다가 살아났다. 그런데 그것을 조그마하다 말한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거 지금 응급조치만 한 거야. 아마 머지않아 다시 발작할걸?”


“네?”


살아났다고 생각한 카를이 남자를 본다.



“네가 부탁한 게 아니잖아.”


“주인님. 저 꼬마는 아까 부탁할 힘도 없었습니다. 설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건 아니죠?”


여성의 말에 남자는 웃었다.


“맞을걸?”


여성은 관자놀이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갔다.


게임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면, 남자는 카를에게 응급조치조차 취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었다. 카를의 부탁이 없었으니까. 하스트의 부탁은 그냥 듣고 말았을 거다.


‘0.01%도 안된다 그랬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물론 여성도 카를을 치유할 능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이곳의 책임자는 그녀의 주인. 전권을 위임받은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다른 일에 멋대로 나설 수는 없었다.


“흠.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기도 그러니, 자리를 옮겨볼까? 여기 있으면 계속 게임하고 싶어져서 말이야.”


남자가 일어나서 걷자,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카를도 본인의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기에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주인님, 그쪽은-”


생각 때문에 잠시 반응이 늦은 여성이 남자를 막아보려 했지만, 거실로 나온 남자는 바로 건너편 방의 문을 열어버렸다.


“윽···?”


“흠!?”


예언의 아이들은 그 문이 열리자 닥쳐오는 힘에 주저앉았다. 그 힘이 커지고 있다. 오직 하스트와 카를만이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 미안 미안. 아무 생각 없이 여기로 들어가려고 했네. 너희들, 연결된 얘들이었지?”


남자는 문을 닫고 다시 거실로 향했다.


“다 앉아서 뭘 하기에는 좁네.”


“그럼 저희 집으로.”


여성이 손을 휘두르자, 또다시 시야가 바뀐다. 일행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힘이 진정된 일행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행이 진정되는 것을 기다린 남자가 다시 말을 꺼낸다.


“아무튼 네 부탁을 말해봐. 조그마한 부탁 정도야.”


카를은 고심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술사인 하스트조차 하지 못한, 사람을 살리는 것조차 조그마하다 말하는 존재다.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소원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불로불사 이런 거라도 빌어봐.”


엘르가 옆에서 속삭였다. 카를은 그 말을 듣고 남자를 보았다. 만약 가능하다면, 파괴자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로불사. 혹시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왜? 원해?”


남자의 반응이 너무나 가볍다.


“지, 진짜 돼요?”


엘르의 반응은 너무나 호들갑스럽다. 본인이 말하라 해놓고 전혀 기대도 안 한 눈치다.


“그럼, 세계 최강이 되고 싶다던지, 아니면 10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한다던지 이런 것도 돼요?”


“물론이지.”


“카를. 다 된대!”


남자는 엘르의 말을 듣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카를의 대답을 기다렸다.


“... 전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카를, 왜? 이왕 비는 거 좋은 거 빌어야지!”


“뭔가 불안해서···”


카를은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대놓고 당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에 더욱 활짝 웃었다.


“하하하하. 좋은 생각이야. 엘르라고 했지? 넌 소원 함부로 빌면 안 되는 유형이구나.”


“엑? 왜요? 불로불사, 세계 최강, 많은 음식. 다 좋은 거 아니에요?”


“다 좋지. 그러나 너무 두리뭉실해. 소원은 언제나 확실하고 정확한 것이어야 해. 가끔 세계에는 그런 게 나타나거든. 소원 수리기라고 할까? 다양한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나타나는 세계의 일부가.”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카를은 방금 느낀 불길함이 뭔지 깨달았다. 그런 게 있다. 그런 게 있었다.


‘그런데 세계에는 불로불사가 없다. 분명히 누군가 빌어봤을 소원인데. 불로불사를 이룬 자가 있었다면 파괴자는 이미 끝났을 텐데, 그렇지 않아.’


“그렇군. 두리뭉실하다는 말이 그런 말이었어. 소원의 정확성이 결여된다면,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야.”


하스트의 말에 남자가 박수를 친다.


“그래. 정확해. 실제로 엘르의 말 같은 소원을 비는 자의 기록이 있었지.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참고로 소원 수리는 이루어졌어.”


“에? 그럼 그냥 불로불사 아니에요?”


“불로불사는 맞아.”


“그럼 뭐가 잘못-”


“형태.”


“하스트, 뭐라고?”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몰라. 불로불사는 늙지도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뿐이야.”


“하하하. 그래. 그 말대로야. 실제로 그 소원을 빈 자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지. 육체의 모든 것, 정신의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 세계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소원을 빈 곳에서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정지해있어.”


“그게 무슨?”


“왜? 이상해?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졌어. 늙지도 죽지도 않지. 그뿐만이 아니야. 세계 최강이 되고 싶다는 누군가의 소원은 세계에서 추방당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는 걸로 해결되었다.”


“그, 그렇다면 100년간 먹을 식량을 빈 사람은요?”


“그 식량에 깔려 죽었지.”


“그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소원은요?”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 온몸에 얼굴을 가져도, 아름다운 얼굴인 건 맞으니까. 반대로 얼굴만 남은 사람도 있고.”


엘르는 오싹해졌다. 소원 수리기가 아니라 괴기 제조기다.


“그, 그렇게 하실 건 아니죠?”


“글쎄?”


“히익!”


“크하하하! 스트라, 엘르에게 한 이야기에 왜 네가 겁먹는 거냐?”


“물론 나는 그런 악질은 아니지만, 소원을 빌 때는 언제나 신중해야 해.”


카를은 이미 고민하고 있었다. 과한 부탁은 안된다. 그만큼 대가도 크다.


무엇보다 명확해야 한다.


‘단순히 살려달라고 하면 안 된다. 살아만 있다면 팔다리가 사라질 수도 있어.’


카를은 마침내 결심했다.


“제 기억을 남긴 채로 육체를 3달 전으로 돌려주십시오. ”


3달 전이면 여행을 시작하기보다 전이다. 그 때라면 지금 같은 붕괴의 위험은 없다. 붕괴는 파괴자들을 만나면서 시작되었으니까.


자연력이 활성화되지 않아, 드워프 왕국에서처럼 무지막지한 힘을 내기는 힘들겠지만, 애초에 그건 죽기 직전의 발악 같은 거니 무시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썩 괜찮은 부탁이네. 또?”


“또···”


카를은 다시 생각했다. 그러자 하스트가 메고 있는 배낭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철로 만들어진 파괴자의 잔해. 나이트가 장비했던, 대장이라고 불린 옛사람의 잔해가 그 안에 있다.


카를은 결정했다.


“제가 손에 쥘 수 있고, 휘두를 수 있는, 다른 기능은 필요 없고 오직 단단한 검을 만들어주십시오.”


그것은 카를이 오래전부터 바라 왔던 소원 중에 하나였다.


허구한 날 부서지는 무기에, 무기술을 배워도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고 있다. 얼마 전에 검만 있었으면 나이트에게 그렇게 밀리지 않았을 거다.


“좋아. 또?”


“또요?”


“그래. 마지막 하나 더 들어주지.”


“마지막···”


하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부작용이 없고, 그러면서 필요한 것. 그런 건 너무나 찾기 힘들었다. 하다못해 두 소원은 부작용을 감안해도 필요한 것이었다.


카를은 하스트를 보았다. 하스트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 모양이다.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다. 퇴기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있는 느낌이다.


“흠···?”


카를은 하스트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의 공통점이 있었다.


“정했습니다.”


“기대되네. 뭐야, 마지막 소원은?”


“오늘 하루만, 저희와 대화해주십시오.”


카를이 생각한 둘의 공통점은, 말이 많다는 거다. 물어본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절주절 내뱉는 것이 둘의 공통점이었다.


예상이 맞다면 지금은 점심 무렵. 대화라면 질리도록 할 수 있다.


“응?”


남자는 이건 생각 안 해봤다는 표정이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남자는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대단한 소원이야. 그 어떤 소원보다 큰 소원이야. 설마 내 시간을 가져가겠다고 하다니. 차라리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더 쉽겠어.”


하지만 웃음도 잠깐, 갑자기 표정이 돌변한다.


“아니, 잠깐 오늘 하루라고? 이따 저녁에 레이드 뛰어야 하는데? 아까 뽑은 7성도 키워야 하고?”


“주인님.”


“으··· 부탁을 들어주겠다 해놓고 말을 물릴 수도 없고··· 좋아. 결정했다.”


남자는 카를에게 말했다.


“오늘 말고 딱 저녁까지만 하기로 하자.”


그냥 말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주인님, 자존심도 없으세요? 제발 드래곤 망신 좀 시키지 마세요.”


“어허. 다 생각이 있어. 꼬마야, 내가 맨입으로 줄여달라는 게 아니야. 네 나머지 2개 소원으로 해코지 안 할게. 아까 소원 수리기 이야기 다 뻥이야. 어떤 단점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저녁까지만 하자, 어때?”


“아, 네. 그렇다면야···”


“그래. 넌 좋은 아이다. 말이 통하는 꼬마구나. 아까 7성 뽑을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


남자는 말이 바뀌기 전에 얼른 행동에 나섰다.


“그렇지만 그냥 소원을 들어주면 재미없지. 오늘만은 내가 소원 장인이다.”


“소원 장인은 또 뭐람···”


여성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있다.


남자는 여성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스트에게 있던 파괴자의 잔해가 떠오른다.


“어차피 네 힘은 여기에 있지. 그리고 3개월 전으로 돌려도 큰 의미는 없어. 어차피 네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까, 이 기계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거야. 3개월 전으로 돌리면, 넌 다시 이번 같은 일을 반복하겠지.”


그 말은 카를이 생각지 못한 거였다. 카를은 자신의 상태가 파괴자에 의해 악화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너의 문제는, 너무 에테르가 고정되어있다는 거야. 에테르의 특징 자체가 그런 거지만, 그걸 인간의 몸에 적용하려면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더욱이 넌 에테르를 순환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주변의 에테르를 흡수 정제하기만 했을 뿐. 가득 찬 제방은 넘치기 마련이야. 제방 안에 있는 것이 제방과 같다면, 말할 것도 없지. 제방은 부서진다.”


잔해가 뭉쳐져서 하나의 검이 된다. 그것이 압축된다.


“반대로 너의 강점도 그것이야. 오직 육체에만 적용되는 에테르는 외부와 너를 단절시켰지. 다른 자들과 다르게 틈이 적어. 주변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않는 너의 에테르는 육체와 크나큰 공조를 이루었어. 덕분에 특별한 기술 없이도 신체강화를, 그것도 언제나 적용할 수 있다. 급습에서 가장 안전한 유형이지. 그 순도 또한 높아, 최고의 효율을 유지할 수 있다.”


남자는 검을 카를에게 내밀었다.


“너와 검을 연결해주마. 검은 네 과다한 에테르를 먹어줄 거다. 네 에테르에 네가 스스로 붕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리고 네 에테르가 쇠하지 않는 한, 이 무기 또한 쇠하지 않아.”


카를은 침을 삼키며 검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순간이다. 자신만의 무기다.


“잡아라.”


카를은 남자의 말대로 검을 잡았다.


작가의말

 설명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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