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9000 님의 서재입니다.

엄참기는 못참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9000
작품등록일 :
2023.02.08 13:29
최근연재일 :
2023.03.22 10:48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1,042
추천수 :
11
글자수 :
149,807

작성
23.02.15 12:41
조회
26
추천
0
글자
11쪽

6화

DUMMY

날이 밝자마자 휴대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정 매니저님. 좋은 아침이네요.”



“음참기씨? 어쩐 일이죠? 아침부터 좋은 일로 전화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뭐죠?

혹시 어제 또 배달사고라도 났나요?”



날카로워진 정매니저의 목소리에서 짜증의 짠내가 훅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뇨. 사고라뇨. 무슨... 그럴리가요.

다른게 아니라 제가 오늘 좀 몸이 안좋아서 월차를 냈으면 해서요”



“음참기씨! 정말 왜 이러시는겁니까?

월차는 최소 하루전에 알려야 한다는거 모릅니까?

이렇게 당일 아침에 전화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어제 일로 나한테 시위하는 겁니까?”



그렇게 시작된 나의 문제점과 고칠 점, 단점 및 개선 사항,

그리고 인생선배로서의 조언으로 이어지는 정매니저의 피드백이 15분을 넘게 이어졌다.



“참기씨, 제가 할 말은 많은데 지금 출근을 해야 하니 일단 이정도만 할게요.

음··· 병원에 가신다니 믿어야겠죠.

하지만 이번 배송 사고 관련해서는 이 이사님께 보고 드릴테니 그렇게 아세요”



“뭘 그렇게까지···”



“매주 보고하는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가족이 아프다는데 이 이사님도 아셔야지요. 안그래요?

참기씨, 제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저도 중간에서 참 고충이 많습니다.

짐작이나 되실까 모르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병원갔다 별거 아니면 오후에라도 나오세요.

요즘 회사 바쁜거 알죠?”



아 정말... 질린다.



***



“여기 어디쯤 같은데?”



병원이 밀집된 상가가 보이길래 생각없이 들어갔지만 은하인 정신과는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주소가...동천대로..."



잠에 든다는게 불안했는지 지난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꿈, 자각몽, 기면증 등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해서 포탈, 블로그, 카페 등을 탈탈 털었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그 새벽에 답글을 달아주는 진정한 지식인이 있었다.



심지어 태양신을 넘어선 은하인 레벨.



성의있는 답글에서 느껴지는 연륜과 진중함은 초딩에게 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단박에 날려 버렸다.



간단 명료한 설명 끝에 있던 "무료 대면 상담" 예약 링크에서 빛이 났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은하인의 병원은 내 예상과는 언젠가 한번 와 본 듯한 흔하디 흔한 일반 상가 2층 중국집 옆에 있었다.



엥? 병원 이름 자체가 은하인 정신과 의원이잖아?



반찬집, 공인 중계 사무소, 인테리어 공사, 세탁소, 중국집... 이 병원. 믿어도 될까?



의구심을 가득 안고 들어간 병원 내부에는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과하게 고급스러웠다.



클래식이 흐르는 내부에는 드라마속 재벌가 거실처럼 사면에 천정까지 올라가는 높은 책장이 둘러져 있고 수많은 원서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아름드리 떡갈나무 전체를 세로로 켜서 잘라 놓은 듯 나이테가 구비치는 진한 밤색 테이블은 마치 전시품 같아 보였고



옆에 놓인 등이 높은 의자는 표면이 너무 곱게 손질이 잘 되어 있어 만져보기 전까지 가죽소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학위와 임명장에는 내가 아는 유명 해외 대학이름은 다 적혀 있는 것 같았다.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옥스포드, 북경대, 동경대....



도대체 어떤 의사이길래... 아니지. 박사님이시지... 이쯤이면 나의 병증은 콧김만 불어도 나을 것 같았다.



갑작스레 업된 기분에 마음이 놓인 내 눈에 선반위 반들 반들 기름이 잘먹은 액자들이 들어왔다.



그 액자에는 은하인 박사님의 가족 사진이 알알이 박혀 영롱히 빛나고 있었는데 정말 단란해 보이는 사진들 이었다.



사진으로 미리 만난 은하인 박사님은 흰머리가 적당히 있는 지적으로 보이는 무테 안경의 오십대 중후반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렇지. 이런 느낌이 공부 잘하는 느낌이 맞지. 딸만 둘인가보네. 애들 생긴걸 보니 엄마가 예쁜가 보다."



내가 완치에 대한 확신으로 가슴이 웅장해질 무렵, 어디선가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향이 나는 듯 싶더니 세상 귀엽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참기 고객님 이신가요?"



헛!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지?



천상의 목소리에 이끌려 쳐다본 곳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초비현실적인 여인이 간호원 복장을 하고 서 있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국내외 유명 코스프레어들의 망작에 실망을 해 왔던가?



얼굴이 비슷하면 몸매가, 몸매가 비슷하면 비율이, 비율이 비슷하면 사이즈가 안나오는 애니와 현실간의 괴리.



간호원이라면, 여전사라면... 나의 기준은 높지 않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애니만큼만. 하지만 언제나 실망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안타까움은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사라진다. 지금 내 눈앞에 애니 실사가 서 있으니까!



"네..... 딸꾹! 네 제가 엄참기입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말이 새고 있다.



그녀가 내 이름을 알듯이 나 또한 그녀의 이름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그간의 경험과 상식에 근거해 유추해 낸 그녀의 이름표 위치.



흰색 가운의 어딘가 둥그렇고, 높게 솟아 오른 융기에 새겨진 뭔가를 발견했지만 있는 힘껏 잡아 당겨져 늘려진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 보기엔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 잘 맟춰서 오셨네요.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내게 시선을 한번 주고는 앞장서서 걷는 그녀, 그녀를 따라 온 세상이 출렁거렸다.



순간 침을 흘리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급히 입가를 훔쳤다. 다행히 묻어나오는건 없었다.



이거 또 꿈 아닐까? 혹시 또 지하철에서 쓰러진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 나의 마음은....



이게 기면증이면 어떻고 자각몽이면 어떻냐? 그냥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병 고치러 왔는데 계속 아팠으면 하는 마음. 그게 바로 지금의 내 마음이다.



그녀의 안내로 들어간 진료실은 대기실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받은 인테리어였고 가운데 세상 편하게 생긴 리클라이너 의자가 놓여 있었다.



최근에 구입된 것인지 특유의 가죽 냄새가 나긴했지만 눕기만 하면 모든 고민이 사라질 것만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엄참기씨, 먼저 의자에 앉으시겠어요?



홀린듯 그녀의 말에 따라 아바타처럼 움직이는 내 자신이 참으로 대견했다.



이제 곧 늙다리 은하인이 들어오고 진료가 시작되면 그녀는 나갈까? 머물까?



완치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던 은하인 박사님에 대한 존경심은 온데 간데 사라졌다.



오로지 그녀를 지켜야한다는 나의 숭고한 기사도가 은하인을 최종 보스쯤으로 만들어 놓은지 오래였다.



"오늘 날씨가 나쁘지 않죠? 오시는데 별 문제는 없으셨나요?"



"아... 그런거 없었습니다. 날씨가 좋죠? 헤헤헤"



이게 무슨 경박하고 해괴한 웃음 소리지? 살면서 내 자신에게 많은 실망을 했지만 지금이 최악이었다.



"편안한 상담을 위해 의자 위치를 살짝 조정할게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엉덩이 아래로부터 작은 진동이 일더니 리클라이너가 서서히 뒤로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진료실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누운 자세가 되자 숱많은 내 머리통이 의자 머리 받침에 강하게 밀착되면서 내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쓱 쓱 소리를 냈다.



이쯤되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훔쳐 보기가 어려워졌다.



"새벽에 올리신 글은 잘 봤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이잉? 의사도 없이 이렇게 상담이 시작된다고?



뭐야? 은하인 이 놈! 날 이렇게 눞혀 놓은 채 인사도 없이 들어와 앉아 있는거야? 이거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음흉한 놈이잖아!



나의 내적 갈등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호호호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정신의학 전문의 은하인이라고 해요. 엄참기씨."



"네?! 태양신 뭐 이런게 아니구요? 그럼 밖에 있는 사진은?"



나 미쳤니? 이걸 지금 묻는다고? 하지만 이건 설사다. 애쓴다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 호호호. 종종 오해가 있더라구요. 은하인은 제 본명이에요. 기다리시면서 제 가족 사진 보셨군요. 남편과 제 딸인데, 저랑 많이 닮았죠?"



남편이라고? 딸이라고? 누가? 왜? 어째서? 그럼 나는? 응? 뭐라구?



왜 그렇게 남편과 나이차가 나 보이는지? 딸은 왜 동생 같은지? 궁금하지만 더 이상은 물을 수 없는 질문들 때문에 가슴이 메어져왔다.



나의 여신은 이렇게 다시 애니속으로 아니 상상속으로 멀어져 갔다.



"간호원 복장을 하고 계시길래..."



"아 이 복장이요? 이건 포탈에서 찾아보니까 고객들이 좋아하신다고 하길래 입어본건데? 별로인가요?"



도대체 어떤 포탈을 사용하시나요? 선생님. 그 놈들 모두 악마입니다.



"아뇨 아뇨 그럴리가요... 너무 너무 잘 어울리세요. 너무 그러다보니.... 그래서 제가 실례했습니다."



"실례 하신거 없어요. 이렇게 저를 믿고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우리 이제 같이 일해 볼까요? 호호호"



어찌 이런 웃음이 있을까? 이 한없이 자애롭고 은혜로운 저 세상 옥음.



"시작에 앞서 한 가지 동의가 필요한데... 오늘 상담 과정을 녹화해도 될까요? 불편하시면 거부하셔도 되니까 부담없이 결정하세요."



"뭐 상관없어요. 근데... 저도 나중에... 그 영상 받아 볼 수 있나요?"



언제 또 볼지 모를 그녀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난 변태인건가?



"그럼요. 많이들 그렇게 하세요. 제가 링크보내드릴테니 사이트에 회원 등록하시면 언제든지 보실 수 있어요."



역시 요즘 세상엔 악마같은 놈들이 너무 많다.



"그냥 편하게 혼잣말 하듯이 말씀하세요. 필요하면 제가 질문할거니까 걱정마시고요."



그녀의 숨결에는 신경 안정제라도 들었는지 심신이 편안해지며 싱크된 블루투스 스피커인 양 적절한 음량으로 나의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딱히 상관도 없는 아주 어릴적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간간히 하지만 아주 시기적절하게 터지는 은하인의 탄식과 긍정의 추임새는 나를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에라자드로 만들어 쉬지 않고 입을 놀리게 만들었다.



나의 속사포 랩 중간 중간 던져지는 은하인의 질문은 내 속옷까지 홀랑 다 벗겨버리며 인간 엄참기의 실체를 샅샅히 드러내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지금 무엇이 가장 두려우며, 또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참기씨는 참 용기있는 분이시네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는 건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아주 잘하셨어요."



은하인의 이 한마디에 가슴속이 간질간질 하더니 뭔가가 속으로부터 훅 치밀어 올랐다.



그러자 10년전 흘렸던 그 짜고 뜨거운 눈물이 다시 한번 뺨을 타고 흐르며 귓가를 거쳐 머리까지 적시고 말았다.



정말이지 흐느끼는 소리까지는 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남 다른 용기가 있는 용자 음참기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엄참기는 못참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29화 23.03.22 24 1 11쪽
29 28화 +1 23.03.21 19 1 11쪽
28 27화 +1 23.03.16 25 1 11쪽
27 26화 23.03.15 27 0 11쪽
26 25화 23.03.14 23 0 11쪽
25 24화 23.03.13 20 0 11쪽
24 23화 23.03.10 20 0 11쪽
23 22화 23.03.09 22 0 11쪽
22 21화 23.03.08 19 0 11쪽
21 20화 23.03.07 19 0 12쪽
20 19화 23.03.06 25 0 11쪽
19 18화 23.03.03 22 0 11쪽
18 17화 23.03.02 20 0 11쪽
17 16화 23.03.01 18 0 11쪽
16 15화 23.02.28 24 0 11쪽
15 14화 23.02.27 21 0 11쪽
14 13화 23.02.24 23 0 11쪽
13 12화 23.02.23 24 0 11쪽
12 11화 23.02.22 25 0 11쪽
11 10화 23.02.21 22 0 11쪽
10 9화 23.02.20 22 0 11쪽
9 8화 23.02.17 26 1 11쪽
8 7화 +1 23.02.16 25 0 11쪽
» 6화 23.02.15 27 0 11쪽
6 5화 23.02.14 32 0 11쪽
5 4화 +1 23.02.13 40 0 11쪽
4 3화 23.02.10 43 0 12쪽
3 2화 +1 23.02.09 54 0 11쪽
2 1화 +1 23.02.08 106 3 14쪽
1 프롤로그 +1 23.02.08 226 4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