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남겨진 자
“세.. 세아야?”
나는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순간 너무 당황했다.
머릿속이 띵해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게 무슨 의민지 알 수 있었다.
“세아야.~”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모든 게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다.
“오빠~”
유세아가 눈물을 닦으며 방긋 미소 짓는다.
상쾌한 환한 미소,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세아가 내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한다.
“오빠, 약해지지마, 포기하지마, 오빠 답지 않아.”
“너 그러면..”
세아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사랑하는 진성운은, 다소 거칠어도, 다소 정제되지 않아도, 그래도 꿈을 쫓아 눈부시게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
그리고는 방긋 웃으며 가늘고 긴 두 팔로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다.
“바보야, 오빠는 나의 불사신이야.”
스르륵
세아가 의자를 뒤로 뺀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세아야, 잠깐만..”
후우~
유세아가 테이블을 짚은 채로 고양이 마냥 등을 쭉 빼고 심호흡을 한다.
“오빠, 그거 알아? 인연의 붉은 실로 얽힌 사람은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날 수 있대. 약해지면 안 돼?”
세아는 그대로 일어났다.
이미 카페 문 앞에는 화가 난 표정의 매니저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먼저 나갔다.
그렇게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
****
다음날 유세아의 귀국 기사와 공항 패션이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나는 LA의 혼자 덩그러니 남은 집에서 멍하니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내일 들어간다.
유세아랑 같이 들어가면 민폐가 될 것 같아 하루 일정을 늦췄다.
어젯밤 일들이 꿈 같다.
“아.. 머리야.”
어제 집에 돌아와서 혼자 위스키 한 병을 비웠다.
머리가 혼란하고 감정이 끓어올라 어쩔 수가 없었다.
바보 같았다.
세아가..
유세아가 나랑 같이 회귀를 거듭하고 있었다니..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지난 삶에서 그렇게 나한테 적극적이었구나.
그러면 왜 이번 삶에서는 나를 피했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알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숙취에 머리가 띵해서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이잉
상태창이 뜬다.
‘아.. 씨.. 아니야, 잘못 눌렀··· 어?’
순간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미션 실패였는데?
···················
[미션상태: 진행중]
특능: Extra Life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인연으로부터 여분의 삶을 선물받았습니다.
제한 없는 삶 속에서 미션을 완수하세요.
···················
이게 뭐야?
Extra life라고?
그럼 세아도 특능이 있었다는 거? 어제의 그 키스가??
머리가 복잡했다.
‘왜.. 굳이 지금? 예전의 삶에서는 이런 적이 없는데?’
세아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톡을 해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국 가서 물어보자.’
****
나는 공항에서 귀국 기자회견장에 섰다.
“진성운 선수, 올해 대단한 활약이셨는데요? 지금 사이영상 최유력 후보로 꼽히는데 심정이 어떠세요?”
“아.. 네, 뭐 상이야 받으면 좋지만 못 받는다고 해도 제가 한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크게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올해 성적이 좋아지신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적응 문제가 큰 것 같습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여러 측면에서 더.. 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수 많은 플래시와 인파,
많은 팬들이 나를 보러 나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유세아 뿐이었다.
“네, 이상으로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마중 나온 에이전트 찰리 킴 형의 차에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밥 안 먹고 갈래?”
“아냐 형, 그냥 좀 피곤하네. 집에서 일단 쉴게.”
“그래, 행사 몇 개 잡아놓은 거 있으니까 스케줄 확인 해.”
“어, 봤어. 알았어.”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누나와 인사를 나누고 가족 간에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은 당연히 기뻐하셨고 누나도 뛸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퓨리티스 유세아 건강이상으로 무기한 활동중지]
오늘 연예 기사 한 편에 이런 기사가 나온 것이다.
[소속사 측은 단순한 피로 누적으로 일정 기간 요양의 시간을 가질 것으로.. (후략)]
‘세아가 건강 이상이라고?’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띠리리리링
바로 유세아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받지 않는 그녀,
‘회귀했다면 분명히 내 번호를 알텐데?’
하지만 몇 번을 전화해도 그녀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ㄴ 세아야, 오빠 한국 들어왔어. 통화 한 번만 하자, 응?
톡을 몇 번이나 남겨도 답이 없었다.
그녀는 일체 나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
유세아는 진성운과 헤어진 이후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제 나한테 남겨진 시간은 일주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 양해를 구했다.
“저 일주일만 조금 쉴게요. 죄송해요.”
그나마 앨범 활동은 거의 끝 물이었고 새 드라마 들어가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왜? 몸이 어디 안 좋아?”
“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에요. 저 가족이랑 여행도 좀 다녀올게요.”
상태창 속의 시간은 계속 돌아간다.
마음의 준비는 했다.
어차피 수 없이 맞이한 죽음이었다.
‘이제 끝났어.’
유세아는 더 이상의 앞을 알 수 없었다.
하여간 타임루프의 굴레는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오직 알 수 있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1년에 몇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엄마 아빠에게 가서 안겼다.
“얘는.. 무슨 일 있어?”
“아냐 엄마, 그냥 엄마 아빠 보고 싶어서..”
“우리 여행 가, 오빠도 부르자.”
“네 오빠 회사 다녀야지.”
“그냥 휴가 좀 내라 그래, 응?”
“왜? 무슨 일 있어?”
유세아의 엄마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평소에 올곧고 심지가 굳은 딸을 믿었다.
“아냐, 나 오랜만에 가족 여행 가고 싶어서 그래. 우리 가까운 일본이라도 다녀오자.”
세아는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재계약 때가 되면 회사에서 근사한 여행을 보내줄 것이라는 걸 잘 안다.
문제는 재계약 때 까지 살 수가 없다는 것.
띠리리링
전화 벨이 울린다.
[바보 오빠]
진성운으로부터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하겠나?
괜히 울고 싶지 않았다.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회귀를 그토록 많이 했는데 제대로 가족 한 번 챙기지 못했어. 엄마, 아빠 죄송해요.’
유세아는 더 밝게 웃으며 가족 여행을 즐겼다.
돌아와서는 옛 친구들을 만났다.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
이미 초등학교 6학년때 회사에 들어갔다.
중학교부터는 제대로 나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고등학교는 거의 제대로 못 갔다.
몇 안되는 소중한 소꿉친구들,
그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세아야 무슨 일 있어?”
“아니? 나 그냥.. 행복해. 잘 산 것 같아.”
마음의 정리를 했다.
****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는 유세아의 집을 안다.
원래의 삶에서 바뀌지 않았다면 그대로 일 것이다.
하지만 집 근처로 찾아간다고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스케줄이니 뭐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야겠다.
그리고, 나에게 왜 여분의 삶이 생긴 건지도..
띠리리링
[유세아]
숨이 멎을 것 같다.
한 밤중에 울려온 유세아로부터의 전화,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세아야?”
“오빠? 잘 지냈어?”
“세아야? 어디야? 어떻게 지냈어?”
내 목소리는 초조함에 타 들어갔다.
“오빠.. 나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그게 뭔 소리야? 시간이 안 남다니?”
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온화했다.
“오빠, 그거 알아? 나는 항상 오빠 뒤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난 말이야, 오빠가 죽는 걸 여섯 번이나 지켜봤어. 그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미안해, 세아야 오빠가 미안해. 오빠 잘 할게, 정말 잘 할게. 네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게. 세아야 제발..”
“치잇, 남자들은 맨날 말로만.. 바보야 뭘 잘해? 오빠, 나 마지막으로 오빠 목소리 듣고 싶었어. 이제 갈 길을 가야 해. 오빠도 알잖아? 그래도 기뻐, 나 후회 없이 잘 살았어. 화려한 스타로 6번을 살았고, 가장 예쁠 때 가게 되었잖아? 남들은 한 번도 못 하는 걸 여섯 번이나 했어.”
유세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목소리는 점점 가냘파지고, 느려지고 있었다.
“세아야, 안 돼, 오빠 지금 갈게. 집이니?”
“아냐, 나 집 아냐, 오빠 소용 없어.”
세아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힘이 빠졌다.
“오빠가 말 끊으면 나 하려 던 말을 못해. 히잉”
세아의 코맹맹이 어리광이 들려왔다.
“미.. 미안해, 세아야. 오빠 조용히 들을게.”
“오빠 나랑 약속해, 절대 포기 안 하겠다고, 꿈을 이루겠다고.”
“그래 알았어, 포기 안 해, 내 꿈을 절대 포기 안 할게.”
“그래. 고마워, 나 그래도 오빠 만나서 행복했어. 이제 말도 살살하고.. 오빠 너무 좋아.”
“나도 사랑해.”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거 알아? 나 오빠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왠지 모르게 끌렸어. 오빠를 두 번째 봤을 때, 세 번째 봤을 때.. 확신했어. 오빠가 내 붉은 실의 사람이라고.”
“세아야..”
“오빠, 사랑해. 내 불사신, 파이팅!”
“세아야~~”
띠링
그것이 끝이었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난 한 밤중에 무작정 세아의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찾아갔다.
하지만 세아 집은 불이 꺼진 상태였다.
그리고 세아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두 시간 여가 지났을 때 뉴스 속보가 떴다.
[만인의 연인 퓨리티스 유세아,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
“으으윽”
나는 입술을 깨물고 운전대에 머리를 박았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예상하고 있던 불길한 전조였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아 뒤에 남겨진 자가 되었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웠다.
****
나는 유세아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팔꿈치 뼛 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사실은 야구를 할 수 없어 택한 도피처였다.
12월이 되자 또 하나의 비보가 전해졌다.
‘NL 사이영 상에 블레이크 스넬, 근소한 차로 진성운 고배마셔..’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그까짓 사이영 상 따위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저 미국 먼저 들어갈게요.”
“왜 벌써 가?”
“그냥요. 따뜻한 데가 재활 하기 더 좋아요.”
나는 1월초에 서둘러 미국에 들어갔다.
소속 에이전트도, 취재진도 모르게 비밀리에 들어간 것이다.
머릿속이 공허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호텔에 짐을 풀고 강성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 나 미국에 왔어.”
“어? 무슨 일이야? 회사로부터 연락 없었는데?”
“그냥 왔어. 집 좀 구해 줘. 지금 호텔이야.”
“그래, 알았어.”
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형, 그리고 프리드먼 사장한테 말 좀 전해줘. 내가 공황 장애 치료 받아야 해서 당분간 야구가 어려울 것 같다고..”
“뭐?”
“병원 좀 알아봐 주고..”
난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팔꿈치 재활도 해야 한다.
당분간 이 상태로 야구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담담하게..
그냥 늪 속으로 가라앉는 그런 느낌이었다.
‘세아는 이런 과정을 여섯 번이나 겪었다 이거지?’
세아와 약속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기로..
불사신처럼 일어나기로..
난 오른 팔에 붕대를 한 채 왼손으로 세아와 찍었던 시구 한 날 기념 촬영한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우리 둘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계속>
작품내의 모든 인물/지명/단체는 허구이며, 우연히 겹친다 하더라도 현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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