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베테랑의 품격
“반란을 일으킨 자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동참한 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처단하기보단 우리 쪽으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게 우선인 거 같습니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 이번 일만 처리하고 다음부터 한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권 서장이 불필요한 살인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
김 기자를 놓쳤다는 허탈한 마음으로 경찰서로 돌아왔다.
경찰서는 우리가 현장에서 시체들과 씨름하고 있을 때, 동료 경찰관들이 좀 치우긴 했지만, 여전히 난잡하고 어수선했다.
그런 경찰서 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바로 그때, 또 전화가 울렸다.
“겨우 정보국 애들한테 인계해 주고 왔는데, 또 같은 사건이야!”
전화를 끊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몇 시간 전에 갔던 현장과 판박이였다.
“기자들한테 누가 알린 거야.”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이번에는 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다.
현장보존이야 어찌 됐든 자극적인 특종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사건 현장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닌다.
혹시나 해 김 기자가 있나 찾아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면 유명인들의 죽음으로 나라가 또 한 번 혼란을 겪을 것이다.
“소용없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기자들을 돌려보내며, 경찰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까지 좀 참아달라 읍소 하지만,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현장에 있던 시체들을 정보국에 인계해 주고, 나오다가 저번에 서장님과 정 형사를 치료해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정보국에는 경찰에 인계받은 것만 10구였으며, 자체적으로 15구의 시체를 더 확보한 상태였다.
“이거 또 날 밤 까게 생겼어. 이런 건 경찰서 자체적으로 해결 못 해. 이 봐. 강 형사, 나중에 밥 한번 사.”
그의 말에 그러겠다. 대답은 했는데, 서장님도 있고, 서 반장도 있는데, 왜 말단인 나에게 밥을 사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물었다가는 불똥이 튈 게 분명했기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나?”
“현장에서 본 것도 있고, 목에 교살 자국도 선명하게 보이는데요.”
“겉으로 보기엔 그렇네만. 그래도 한번 까봐야겠지. 어떤가. 부검하는데 좀 도와주겠나?”
의사의 말에 정중히 거절하고는 본부를 황급히 빠져나왔다.
내 눈에는 그가 마치 어느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닥터처럼 보였다.
두 건의 현장을 수습하다 보니 자정을 훌쩍 넘겼다.
“니들은 배 안 고프냐?”
사건을 접하다 보면 끼니를 놓칠 때가 많다.
근데 또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배는 고프지만, 입맛은 없기 마련이다.
비밀 정보국 본부에서 도망치듯 차에 올라 경찰서로 복귀하는데, 갑자기 허기가 밀려 왔다.
“이게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밥도 못 얻어먹고 지금 뭔 지랄인지 모르겠다.”
허기와 함께 괜히 짜증도 밀려 왔다.
“문 연 곳이 있나? 동만아, 어플로 야식하는데 찾아서 주문 좀 해봐라.”
“넌 경찰서 꼬라지를 보고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갈 거 같냐. 가다가 그냥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자. 입맛도 없고.”
아직 찬 바람이 불었지만, 먹을 걸 가지고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근데, 니들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뭘 샀길래 편의점에서 10만 원이 나오냐. 이럴 거면 그냥 식당을 가는 게 더 낫지 않냐?”
입맛도 없고 별로 안 산 거 같은데, 10만 원이 나왔단다.
혹시 바가지를 씌우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가긴 했지만, 우리가 산 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보니 밑으로 굴러떨어질 만큼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하 5도의 날씨에 꽝꽝 언 떠먹는 아이스크림은 아니지 않나.
“다시 가 물을까?”
“그냥 쳐드셔!”
우린 군말 없이 앞에 놓인 것들을 입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저 많은 걸 언제 먹나 했는데,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우린 후식으로 누군가 사다 놓았는지 모르는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씩 떠먹었다.
달달한 게 들어오니 기분이 좀 풀리는 거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산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허기를 채우고 바람을 쐬고 있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학생들 같은데, 그렇게 술을 사가도 돼?”
“아저씨가 뭔 상관이에요!”
술을 사 들고 나오는 애들에게 한마디 했다가 괜히 한 소리 들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요새 애들 너무 무섭다.
“한주야, 니 아들도 저러냐?”
“저러면 나한테 죽지!”
“근데, 쟤네 진짜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태혁아, 넌 저 나이 때 더 했다. 쟤네도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너 아까 니 아들이 저러면 죽인다며!”
서 반장이 괜히 딴청을 피운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애들이 사라진 쪽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벌써 모습을 감춘 뒤였다.
녀석들이 어디로 갔나 살펴보고 있는데, 한 건물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따라 들어가니 아까 그놈들 중 한 놈이 경비로 보이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패고 있었다.
가만 보니 경비원은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나머지 놈들은 그 장면을 폰으로 찍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뒤질라고!”
놈을 패려는데, 서 반장이 날 막았다.
“한주야, 내가 학교 다닐 때 아무리 개차반이었어도 저렇게 어른을 패고 다니진 않았잖아!”
“그래도 참아!”
서 반장과의 기 싸움을 벌이다가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질러 댔다.
“잘 참았다. 태혁아.”
현장을 수습하고 놈들을 전부 경찰서로 데려왔다.
놈들은 경찰서에 와서도 날 열 받게 했다.
“그 꼰대 영감탱이가 먼저 시비를 털었어요!”
놈들을 팰까 봐 조사실에는 서장님과 서 반장이 들어갔다.
“그래도 어른을 기절할 정도로 때리면 쓰나.”
“헐! 뭐래! 경비 따위가 무슨 어른이라고.”
놈들이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저놈들 현장에서 검거했으니 벌은 줄 수 있지?”
채 형사의 대답에 너무 화가 나 근처에 있던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모두 촉법이에요.”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또 어디 있을까.
현직 형사가 그것도 다섯이나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봤는데도 처벌을 할 수 없다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조사실에 있던 두 사람도 어처구니가 없던지 아무 말 없이 서로만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지랄발광을 하고 있을 때, 피해자와 함께 병원에 갔었던 정 형사가 돌아왔다.
“다행히 깨어나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정 형사의 한마디에 안도의 눈물이 났다.
경찰서에 와서도 당당한 놈들을 보며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옷 사이로 문신이 희끗희끗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들어왔다.
문신의 형태로 봐서는 온몸을 휘감고 있을 게 분명했으며, 몸 군데군데 흉터도 보였다.
근무한 지 2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 형사의 눈으로 봤을 때, 이곳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저자는 조직 생활을 하는 게 확실했다.
앞까지 와 우리를 눈으로 한번 스캔을 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조사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외간 남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두 사람이 얼떨떨해 있는데, 그가 아까 잡아 온 놈을 개 패듯 팼다.
정말 개 패듯 팼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맞고 있는 놈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녀석의 얼굴은 벌써 피에 물들고 있었다.
“뭐해! 말리지 않고!”
서장님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리는 허겁지겁 두 사람을 떼어냈다.
덩치만큼이나 힘이 얼마나 장사인지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한참 만에야 때리던 걸 멈춘 사내가 서장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식새끼 잘못 키워 죄송합니다. 저놈을 처벌할 수 없다면 대신 저를 처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의 돌발행동에 무척이나 난감해하는 서장님이셨다.
자책하는 그를 겨우 말려 돌려보냈다. 나머지 녀석들도 부모가 와 데려갔다.
아비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그 아들이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됐다.
“니들 둘 따라 가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정 형사와 동만이에게 따라가게 했다.
두 사람은 30분도 안 돼 돌아온 후,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부자를 쫓아갔더니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들을 치료해주기 위해 가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 병원은 그 아들에게 맞은 피해자가 있는 곳이었다.
부랴부랴 둘을 쫓아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피해자에게로 가고 있었다.
피해자 앞으로 간 남자는 다짜고짜 피해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아들도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었다.
어찌나 사과하던지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피해자의 사과를 받은 두 부자는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치료비 전액과 피해 보상을 약속하고 나서야 병원을 나왔다.
다음날 우리는 당혹스러운 일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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