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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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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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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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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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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네가 돌아올 곳(8)

DUMMY

※※※



“저자들을 막아라!”

“사도들은 침입자를......!”

“술법이 끊기지 않도록 유지해!”


외침과 고함이 섞여든다. 널찍이 울려퍼지는 목소리들을 귀에 담으며 백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쓸어내리듯 눈꺼풀이 뒤덮었다가 올라가는 순간.


화아악-!


시야가 뒤바뀌었다. 세상을 이루고 있던 면과 선이 사라지며 다채로운 음률과 기파가 눈앞에 선명하게 형상화된다. 언뜻 춤추고 있는 별무리를 눈에 담은 것 같기도 했다.


자령안. 그의 타고난 감각 기도를 안법에 녹여낸 무공.


넓다랬던 기감이 수축하며 일점에 모여든다. 그만큼 정신과 시야가 예리하게 다듬어진다. 마주하는 적들의 호흡, 근육의 움직임, 흐르는 기파의 방향까지도 전부 인지 속에 들어온다. 한순간 소년의 눈에 깃든 것은 예지에 가까운 예측.


동시에 백연은 자령안을 통해 보았다. 공동 안에 흐르고 있는 거대한 기파가 발밑의 피로 그려진 술법진을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일단은 이것부터 끊어내야겠어.’


백연이 뒤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술법진의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해랑. 이대로 놔둬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술법진의 외곽을 따라서 모여있는 혈교도가 많았다. 백연 자신이 업고 다니면서 싸우기도 어려운 노릇.


“잠깐만 그대로 있어요.”


해랑이 그를 향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백연이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기파를 끌어올렸다.


찰나 하단전에서 막대한 양의 뇌기가 밀물듯이 터져나왔다. 세맥을 찢어낼듯이 질주하는 격렬한 진기의 흐름. 그 내공 수발의 속도가 더없이 쾌속하고 또 강렬했다. 그대로 직진해 검격을 내쳤다면 정면의 혈교도 두엇은 반응하지도 못한채로 즉살 당했을만큼.


그러나 백연은 검을 내치지 않았다.


다만 발끝을 가벼이 들어올렸을 뿐.


‘술법진이 우선이다.’


이대로 놔둘 수 없었다. 혈교도들의 사도가 흑랑과 화율을 상대하면서도 술법진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어떤 공능의 술법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완성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물며 그 재료가 아이들의 피와, 살아있는 아이 다섯이라니.


“버러지들이.”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끌어올린 기파를 허벅지부터 종아리와 발바닥 용천혈까지 퍼뜨리는 것과 동시였다.


다음 순간, 백연이 가벼이 들어올린 발끝을 사뿐하게 내리찍었고.


쩌억.


대지를 따라 거미줄 같은 금이 새겨졌다. 동시에 그의 발끝을 따라 기파가 터져나오듯 방출되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태청신공의 뇌기가 연달아 파문을 그리며 공동의 벽을 타고 휘몰아쳤다.


일전 엮어내었던 보법 화신풍의 바람을 몇배로 잡아 늘린듯이.


파괴적인 뇌기의 경파 조각이 한줄기 태풍이 되어 술법진 사이를 꿰뚫고 잡아뜯는다. 공간을 장악하는 용형보(龍形步). 권역을 풀어헤치고, 나아가 영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보법이었다.


일전 청화단주와의 싸움에서 염혈신공의 권역을 찢어냈는데, 술법진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크헉!”

“무슨......!”


술법의 진언을 외던 혈교도들 몇몇이 즉시 가슴께를 잡고 피를 토해냈다. 동시에 맥동하던 술법진의 흐름이 삽시간에 훅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였다. 백연이 지체하지 않고 두번째 걸음을 내딛었다. 한순간 공간을 격하듯 움직인 백연의 신형이 그대로 혈교도들의 코앞에 나타났다.


“새파란 애송이가!”


검붉은 장포를 두른 혈교도가 노호성을 외치며 손을 내쳤다. 요사한 혈기(血氣)가 서린 손바닥. 거칠게 뻗어오는 장법이 예리했다.


‘사도인가.’


그런 듯 했다. 제대로 연마된 혈공이었다. 장법에 서린 기세가 약하지 않았다. 일격을 맞으면 백연으로써는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을 일격이었다. 호신강기가 없는 탓이었다.


허나 백연은 그 일격을 맞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았다. 청화단주조차 그의 몸에 일격을 적중시키지 못했던 것을.


‘우중간. 두번 꺾는다. 첫번째는 허초.’


생각이 먼저 스쳤다. 예리하게 다듬어진 기감 속에서 백연의 냉담한 자색 눈동자가 먼저 움직였다. 한순간 혈교의 사도와 시선이 마주친 듯도 했다. 크게 띄여진 눈동자에는 얼핏 당황이 서려 있었다. 주름진 얼굴이 나이가 상당한 듯 보이기도 했는데, 그 이상은 뇌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휘릭.


백연의 몸이 춤추듯 움직였다. 가볍게 돌면서 몸을 낮춘 상태로 검끝을 반원을 그리며 베어냈다. 묵직한 감각이 손끝에 걸리는 것과 동시에, 사도의 팔뚝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


고통섞인 비명이 새어나올 틈도 없었다. 사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백연은 상대의 몸 안쪽으로 짓쳐 들어가고 있었다. 왼발을 앞에 두며 한바퀴 회전. 백연의 검이 그대로 혈교도의 목을 갈랐다.


지극히 효율적인 살검(殺劍). 화려한 허초와 변초를 일체 배제한 움직임이었다. 그럼에도 그 속도와 예리함이 더없이 날카로웠기에 막아낼 수가 없었다.


날아간 목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백연은 재차 보법을 내딛고 있었다. 그의 검끝이 벼락처럼 낙하하며 혈교도의 가슴을 갈랐다. 무언가 진언을 내뱉으려던 듯 했는데, 채 끝맺지 못했다.


어깨를 쩍 갈라내며 들어간 검격을 그대로 몸 안에서 틀어 옆으로 갈랐다. 깨끗하게 상완을 잘라낸 검격. 혈교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볼가를 적셨지만, 그런 것은 이미 백연의 안중에 없었다.


‘피냄새가.’


너무 짙었다. 이곳의 바닥 전체에 깔린 핏물. 몇명이 희생된건지 모를 만한 양의 피가 공동을 가득 메우고도 남아 뇌리를 깊게 파고든다.


수없이 많은 전장을 넘나들며 피 냄새에는 익숙해진 자신이건만.


“내가.”


검격이 살을 갈랐다. 혈교도의 양 어깨를 잘라내고 들어간 검격이 회전하며 목을 쳤다.


“귀(鬼)를.”


검끝이 비틀렸다. 백광을 매단 검격이 혈교도의 살을 발라내듯 회전했다. 한순간 늑골이 훤히 드러날 만큼 살이 패인 혈교도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것도 찰나, 이윽고 백연의 검격이 교도의 목을 꿰뚫었다.


“버리고자 했는데.”


여휘검의 끝자락에 걸린 핏물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검신에 묻은 핏물이 뇌기와 뒤섞여 기이한 빛을 만들어냈다. 한순간 뻗어나간 백연의 검격이 혈교도의 사지를 끊어냈다. 직후 바르작거리는 혈교도의 가슴팍에 발을 올린 백연이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은 안되겠다.”


콰드득!


혈교도의 안면을 가르며 검이 꽂혀들어갔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혈교도의 움직임이 멈췄다. 입매를 비튼 백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백연!”


후욱.


그를 감싸드는 기파가 있었다. 찰나 검을 내치려던 백연이 눈앞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난 큰 키의 남자를 보고 검을 멈췄다.


온몸에 그림자를 두른 흑랑이 발치를 힐끗 하곤 입을 열었다. 차분한 음성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과하다.”

“......무엇이요?”

“네 손속은 깔끔한 편이었을 텐데.”

“청화단주에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르다.”

“무엇이......”

“그때 너는.”


흑랑이 손을 뻗어 백연의 검끝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차가운 그림자가 뇌기를 따라 휘감기며 주변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한순간이나마 사방을 휘감고 있던 혈향이 조금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검룡을 위해 검을 내쳤었고, 또 이기기 위해 싸웠다.”

“......”

“지금은 누굴 위해 베는거지?”

“그건......”

“이들이 너의 상대인가.”


흑랑이 주변을 향해 넌저시 손을 펼쳤다. 그의 차가운 입매가 반쯤 비틀려 올라갔다.


“혈교의 본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새외를 전전하는 한줌의 나약한 혈교도 무리가?”

“아이들을 학살했습니다.”

“저들의 목을 치는 것으로 끝내면 될 일이다. 봐라.”


흑랑이 백연의 뒤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술법진의 중심 부근에 앉아 있는 해랑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를 구하러 온게 아닌가.”

“......대협?”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늘었다. 언뜻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그제서야 백연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찰박.


발끝에 닿아오는 핏물이 가득했다. 그의 뒤편으로 쓰러진 혈교도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몇이나 죽인지 세기가 어려웠다. 하나같이 검격으로 난자되어 있었는데, 그로 인해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얕게 뒤덮고 있을 정도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주변을 살피자 남은 적이 별로 없었다. 애시당초 이곳으로 낙하하는 순간부터 공동을 채운 혈교 사도들의 수는 수십에 불과했다.


저편에서 화율이 가볍게 상대하고 있는 몇몇 혈교도와, 그를 노려보며 겁먹은 듯 움찔거리는 혈교도 몇을 제외하면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흑랑의 말이 맞았다. 일순 머리를 가득 채워오던 혈향이 점차 사그라들며 답답하던 가슴이 점차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입마(入魔)의 전조라도 되었나. 위험했어.’


잠깐이지만 검에 몸을 맡겨버렸던 것이다. 무인으로써 해서는 안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깨닫고 나자 들끓던 감정이 나직한 불꽃으로 가라앉는다.


‘이보다 더한 광경도 많이 보아놓고 어째서.’


검을 가벼이 털어내며 입술을 베어물었다. 여전히 일렁이는 기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움직이는 감정에 머리를 흔들었다.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이 흔들리는 것은, 이리 어린 몸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알기 어려웠다.


“이제 괜찮은가보군.”

“감사를 표해야 할까요.”

“필요없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테니 해랑을 데려와라.”


흑랑이 손을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는 한시도 더 있기 싫군.”


고개를 끄덕인 백연이 납검하곤 공동의 중앙을 향해 보법을 밟았다. 가벼이 움직인 그의 신형. 이윽고 한순간에 해랑의 앞에 다다른 백연이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한숨을 뱉었다.


“해랑.”

“백연 대협!”

“미안하네요. 꼴사납게. 걸을 수 있나요?”

“그야 당연히......으앗?”


벌떡 일어나려던 해랑이 크게 휘청였다. 푹 쓰러지려는 몸을 백연이 급히 다가가 받아냈다. 소년의 가벼운 몸이 백연에게 안기듯 기대었다.


“어라? 몸에 힘이......”

“술법진 때문일거에요. 잠깐이지만 기운이 밑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으니까.”


백연이 용형보로 술법진을 찢어내기 전, 잠깐이나마 해랑도 기운을 빼앗겼다. 찰나 그가 읽어낸 구조대로라면 생기(生氣)를 뽑아내 무언가를 만드는 술법진이었는데 그 여파가 아직 남아있을 것이었다.


해랑은 아주 잠깐 기운을 빼앗겼으니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닐 터. 그러나 당장 몸의 진기가 소진되어 팔다리를 가누지 못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냥 안겨요. 어차피 이곳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한참 보법을 밟아야 하기도 하고.”

“아하하. 감사해요, 대협.”


그 사이 주변은 점차 정리되고 있었다. 흑랑의 말대로 이곳의 혈교도들은 크게 위협이 될 수준이 아니었다. 양민에게는 더없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테지만, 흑랑과 백연 자신, 그리고 화율까지 들이닥친 시점에서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애시당초 팔영을 제압한 것도 수적 우위를 앞세운 것일 터.


‘뇌옥에 있다고 했지.’


흑랑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고 했다. 흑랑의 말로는 몸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고.


싱거우리만치 빠르게 해결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위험했다. 그들이 제 시간 안에 이곳까지 찾아오지 못했더라면 해랑 또한 그가 보았던 아이들의 시체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을테니.


“다른 다친곳은 없죠? 빨리 올라가서 한번 살펴야겠네요.”


백연이 옅은 미소를 걸며 해랑을 안아들려는 그때였다.


문득, 백연의 등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발치를 따라 무언가 희미한 진동이 한번 울렸다.


쿵.


언뜻 맥동하는 심장의 소리 같기도 한 둔중한 울림. 스치듯 지나친 감각에 백연이 눈을 깜빡이는 그 순간.


“......!”


해랑이 몸을 뒤틀었다. 백연의 등 뒤에서 무언가를 본 듯 갑자기 커다래진 녹빛 눈과 함께였다. 찰나 품속에서 번뜩이는 단검을 뽑아든 소년이 백연의 팔을 뿌리치며 몸을 날렸다.


직후 묵직한 피륙음이 울렸다. 백연이 뒤를 돌아보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무슨......!”


백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바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사람이었다. 밤조차 빨아들일 듯한 새까만 흑발과, 스러질 듯 가느다란 선. 깨끗한 백색 의복을 타고 흘러내리는 흑발이 더욱 대조적으로 보였다.


해랑이 구르듯 달려들어 단검을 꽂아넣은 것은 바로 그 사람의 가슴팍이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이.


그러나 백연은 아직 안법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랬기에 한순간 보였다. 바닥을 따라 어지럽게 그려진 술법진의 기운이 전부 눈앞의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람의 손끝에서 막대한 기운이 느릿하게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시체였는데?’


이미 처음 공동에 떨어지는 순간 보았다. 해랑의 곁, 바위 위에 누워있던 이 사람은 확실하게 죽어 있었다. 아니, 애초에 생명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지금 분명한 것은 한가지였다.


“해랑!”


백연이 즉시 움직였다. 한순간 보법을 딛으며 뻗어나간 백연이 한손으로 해랑의 팔을 그대로 잡아끌었다.


동시에 백연이 몸을 비틀었다. 반쯤 돌면서 잡아끈 해랑을 그의 뒤에 숨기면서 반댓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흑발의 사람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찰나 백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선명하게 빛나는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였다. 기운이 휘몰아치는 손끝을 여상히 들어올려 백연을 가리키는 것과 함께였다.


곧이어 먹먹한 기파가 사방을 짓누르듯 떨어지고.


쿠웅.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어 손끝이 가리킨 방향을 피한 백연의 어깨 위로 묵직한 감각이 스쳤다. 동시에 그 방향을 힐끗 쳐다본 백연의 눈에, 무언가가 비쳤다.


자령안 안법으로 읽어낸 기파.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어깨 바로 위쪽 공간에 그야말로 거대한 기파가 내리찍혔다. 아주 잠깐동안 공간을 그대로 짓눌러 우그러뜨리는 듯한 거대한 압력이 휘몰아친다.


직후 백연의 왼 어깨에 작열하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백연의 검끝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상대의 일격을 예측해 피하면서 내친 검격이었다. 몸을 피하는 것과 공세 간격에 차이가 없었다. 문득 백연의 검 끝자락이 희끄무레한 백광으로 물들고.


피잇-!


사선으로 그어낸 검격 끝에 높다란 바람소리가 휘파람처럼 매달렸다. 정확히 흑발 소년의 목을 스친 일격이었다. 백색 의복 위로 희게 뻗은 고운 목덜미에 붉은 실선이 나직하게 새겨지고.


“......하아, 하.”


백연이 가뒀던 호흡을 뱉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의 신형이 풀썩 쓰러져 내렸다. 실 끊긴 인형처럼.


이윽고 한결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


‘어깨가 박살났어.’


왼쪽 어깨 윗부분의 뼈가 통째로 짓이겨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잠깐. 빠르게 어깨를 점혈해 고통을 경감시킨 백연이 해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나요? 다친데는......!”

“저,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백연, 어깨가.”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헌데 그 단검은......”


해랑이 갑자기 무작정 달려들어 꽂아넣은 단검의 모습이 익숙했다. 자신이 해랑에게 건넸던 단검의 모습을 알아본 백연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잘했어요. 덕분에 한 호흡을 벌었네요.”

“그냥 손이 멋대로 나갔어요. 갑자기 저 사람이 몸을 일으켜서.”

“......분명 살아있지 않았는데.”


그랬기에 그의 감각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애시당초 적으로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기이한 술법 무공중에 시체를 되살리는 것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가 용형보로 술법진이 완성되기 전에 파훼했을 것인데.


“이 술법진, 아무래도 이걸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나 보네요.”


정황이 확실했다. 시체인지 뭔지 모를 존재. 술법진의 중심에 누워있던 것부터, 갑자기 이리 일어났던 것까지. 혈교의 술법진이 뭔지 모를 괴물에게 생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단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생기를 갈취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 헌데 이걸 왜 모산파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 천살문의 대주와 이야기를 나눈 바로는, 모산파가 이 일에 관련이 있다 했다. 어째서일까.


그때였다.


“어이쿠. 이쪽도 벌써 끝나셨군요. 궁금한게 많으신 모양인데.”


저벅.


공동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백연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미소를 걸고 있는 참월대주였다. 그 사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의 손에는 잘려나간 머리 두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가벼이 들어보인 참월대주가 웃었다.


“어쩌면 제가 조금, 설명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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