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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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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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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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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월동(越冬)(5)

DUMMY

※※※



청해 옥수.


해가 막 간밤에 얼어붙은 대지를 보듬기 시작한 사시 초(巳時:오전 9시)임에도 도시의 거리는 부산스러웠다. 일찍이 오가는 상행과 수레들부터 밤동안 주루의 일을 마치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는 기녀들까지.


일찍부터 객잔에 눌러앉아 국수를 먹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오가는 이들 사이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섞여 겨울 공기를 타고 퍼졌다.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적어도 청해에서는 그러했다. 사파의 땅이다. 무뢰배들이 점거한 거리는 향락과 폭력으로 점철된다. 이런 평온한 거리의 모습은 중원 정파의 영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섬서나 사천같은 땅에서는 정파 무인들이 산 아래를 돌며 민생을 굽어살핀다고.


옥수에서는 조금 달랐다.


“주인장, 목검 스무 자루만 주실 수 있습니까?”


상인 왕문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침부터 들어온 큰 주문. 재빠르게 손을 비비며 가게 앞으로 나가자 눈처럼 흰 무복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니, 곤륜파의 무인분 아니십니까! 어제도 한아름 사가시더니. 또 필요하신겁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하.”

“무엇 하시길래 목검을 이리 많이.......아참, 제가 이럴때가 아니었군요. 바쁘신 분의 시간을.”


후다닥 가게 안에서 목검을 한아름 들고 나온 왕문덕이 가판 위에 그것을 차곡 차곡 쌓아올렸다. 그것을 가만히 선 채로 지켜보는 청년의 표정이 묘했다. 이윽고 목검 스무개를 다 꺼내온 왕문덕이 몇가닥 없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후. 여기 있습니다.”

“얼마입니까?”

“은자 한냥입니다만, 곤륜의 무인분께 어찌 그리 받겠습니까. 반만 주십시오.”


그에 청년이 고개를 젓고는 은자 한냥을 건네었다.


“그러면 제가 혼납니다.”

“혼나다니요?”

“제값 안쳐주고 사오는걸 싫어하는 사제놈이 제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리겠지요.”


청년의 이야기에 왕문덕의 눈이 휙 커졌다.


청해 옥수에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곤륜파의 이름은 이미 유명했다. 본래 사파 하오문과 만금장의 세력 다툼이 매번 일어나던 도시. 특히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청해의 다른 지역과 여타 다를바 없던 도시는 일년만에 놀랍게 뒤바뀌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곤륜파였다. 중원 무림에 터를 잡고 있는 다른 정파들과 달리, 사마외도의 땅에서 정파의 기치를 내걸고 도시를 평화롭게 만든 무인들. 이제 와서는 하오문과 손을 잡고 이곳을 지키고 있다.


옥수를 돌아다니며 곤륜파의 무인 한명 정도 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낮이면 백색 무복을 입은 소년과 청년들이 돌아다니며 도시를 살피고, 밤이면 하오문의 그림자들이 겁없이 들어오는 무뢰배들을 척살한다.


눈앞의 청년, 도현도 그런 곤륜의 무인들 중 하나였다. 왕문덕 또한 자주 얼굴을 보아 알고 있는 곤륜파의 사람. 그러나 왕문덕이 놀란 이유는 도현이 말한 내용 때문이었다.


“사제라면, 혹시 그 소년 도사분을 말씀하시는겁니까?”

“도사요? 백연이가......?”


왕문덕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말끝을 늘이는 도현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떠나계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벌써 돌아오셨나 보군요!”

“네, 뭐. 얼마전에 돌아왔습니다. 근래 도시에도 내려왔을 것인데.”

“하이고, 기쁜 일입니다.”


반색하는 왕문덕의 표정에 도현이 피식 웃었다.


그런 이 도시에서 곤륜파보다 유명한 것이 그의 사제였다. 밤을 녹여낸 것 같은 짙은 흑발과 삐딱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선이 얇은 소년. 그러나 백연의 이름이 유명한 것은 결코 뭇 여인들을 홀리고 다닐법한 외양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거닐던 사파 무뢰배들을 척살하고 하오문의 높은 이와 거래를 벌여 옥수를 평화롭게 만든 장본인. 쓰러져가는 곤륜파를 일으켜 세운것도 모자라 중원 섬서에서 수라궁의 금안나찰을 격살한 무림의 신성.


암화라는 별호가 뭇 호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칠룡보다 위에 놓이기도 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특히 소문에 밝은 상인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런 소년이 자주 옥수에 오가며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춘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의 외모와 더불어 늘 무심한 듯 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는 상인들에게 있어 더없이 예쁨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겐 소년 도사님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히 옥수의 사람들은 백연을 자랑거리로 여겼다. 뭇 중원인들이 자기 지역에 자리한 문파의 장문인과 후기지수들을 떠받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얼마 전에 사천에 다녀왔습죠. 이 두눈으로 암화를 봤다고 하니까 거짓말 하지 말라고 어찌나 면박을 주던지. 이 왕문덕이가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왔습니다.”

“이 도시에 오면 매번 볼 수 있는것 아닙니까? 그렇게 보기 어려운 녀석도 아니고.”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무튼 돌아오셨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헌데 내려오셨다구요? 소인이 아쉽게 못 봤나 보군요.”


못내 아쉬운듯 입맛을 쩝쩝 다시던 왕문덕이 이윽고 근처 가판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여기, 이것 좀 전해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제가 소년 도사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사천 특산 당과라는데 아직 이런것 한창 좋아하실 나이 아니십니까?”

“어......”

“자, 여기 이건 무인분께 드리는거고요. 곤륜파 분들 덕분에 이곳에서 발 뻗고 잠에 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도현이 정신을 차릴때쯤엔 이미 그의 품 안에 목검과 함께 화려한 장식의 비단 주머니가 안겨 있었다. 목검 스무자루를 장작마냥 어깨에 짋어진 도현이 품에 든 비단 주머니를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당과라. 백연이 당과를 좋아할까. 아무리 봐도 자신의 사제는 또래 소년다운 면모가 단 하나도 없었다. 단 것은 커녕 술을 물처럼 마실 놈인데.


‘안 먹으면 내가 먹으면 되지.’


어깨를 으쓱인 도현이 돌아서려다 걸음을 멈추곤 왕문덕을 향해 말했다.


“아참, 주인장. 가능하면 목검 좀 더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만간 또 내려올 듯 싶어서.”

“예. 얼마나 필요하신지요?”

“될 수 있는 한 많이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합지요.”


밝게 인사하는 왕문덕을 두고 도현이 걸음을 옮겼다. 목검을 한아름 지고 걸어가는 곤륜의 무인을 알아봤는지 이곳저곳에서 인사가 들어온다.


그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옥수를 벗어날때쯤, 문득 도현은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 백연이가 모습이 변한걸 모르는구나.”


옥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어린 도사님은 이제 없는데. 아직 대부분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훌쩍 커버려 이제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다다른 외양. 그럼에도 아직 풋풋하고 앳된 느낌은 여전했다. 사람들이 알게되면 어찌 반응할련지.


도현 자신도 처음 봤을때는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머릿속으로 놀랄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웃은 도현이 여상히 보법을 내딛었다.


화아악.


바람결과 함께 짐을 짊어진 도현의 신형이 산길을 내달렸다. 처음 오갈적에는 산길을 오르는 것이 더없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곤륜파부터 옥수까지 오가는 것 만으로도 수련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눈감고도 험준한 산길을 달려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도현의 걸음이 눈밭을 밟으며 멈춰섰다. 곤륜파의 정문이었다. 높다랗게 솟은 문너머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때였다.


빠각!


듣는 사람에게도 섬뜩하게 느껴지는 소리가 정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고통섞인 신음 소리도 함께였다. 그걸 들은 도현의 표정이 살풋 구겨졌다.


“또 부숴먹었나보네.”


중얼거린 도현이 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유달리 부산스러운 아침의 풍경. 곤륜파 안쪽의 연무장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연무장 위에는 백자 배 아이들이 여럿 모여 제각기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함께 초식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 아니였다. 각자 짝을 지어 일대일로 검을 맞대고 있는 모습.


대련이었다.


그러나 그 대련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검격부터가 가볍지 않았다. 일검에 살기마저 실려있다.


“더 못하겠어?”


무심한 목소리가 울린다. 연무장 위에 서 있는 미려한 외모를 지닌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백자 배 아이 한명이 대자로 뻗어 있었는데, 옆에는 반으로 부러진 목검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이결이네.’


도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목검이 박살날 정도로 두들겨 맞은 모습. 하필 백연을 대련 상대로 마주한 녀석의 최후가 처참했다.


그러나 그 옆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연무장 위에서 대련을 펼치고 있는 수는 다섯 쌍. 백연부터 무진, 단휘, 소홍이 각기 백자 배 아이 한명씩을 붙잡고 상대하는 중이었다.


“머리가 비었다!”


우렁차게 외치며 내리치는 무진의 검격, 직후 맑은 퍽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고꾸라진다. 며칠 전부터 지겹도록 반복된 풍경이었다. 단휘와 소홍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맡은 사람을 착실하게 다져놓는 모습.


허나 제일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예상외로 백연이 아니었다.


“보법이 부족합니다. 하체를 좀더 넓게 딛고 걸음을 잘게 쪼개세요.”


산뜻한 목소리와 섬뜩한 검격 소리가 뒤섞인다. 한순간 검이 꽃잎처럼 분열하며 눈앞의 사람을 두들긴다.


검룡 유성.


저 유명한 무인이 이곳에서 검술 대련을 해주고 있는 상황부터가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도현은 이제 이런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장 그도 어제 오후에 저 검룡한테 딱 죽지 않을만큼 얻어맞았으니까.


드러누운 이결을 보고 혀를 쯧 찬 도현이 입을 열었다.


“백연아, 목검 사왔다.”


도현이 부르는 목소리에 백연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고마워, 사형.”


후욱.


한달음에 연무장에서 달려나온 백연이 도현의 앞에 멈춰섰다. 자연스레 손을 뻗은 그가 도현에게서 목검 다발을 건네받았다.


“더 준비 해달라고도 해뒀어?”

“응. 네 말대로 했다.”

“고생했네. 원래 내가 직접 하려고 했는데.”


백연이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대자로 뻗어있던 이결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고 있었다. 더 대련을 이어나갈 상태가 아닌 듯한 사형을 보곤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한명 한명 다 지도해주고 있는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마음껏 부려먹어라.”

“아하핫.”

“그나저나 이거 가게 주인장이 전해달라더라.”


비단 주머니를 건네받은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사천에서 사온 당과라는데, 먹기 싫으면 그냥 내가......”


말하던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입속에 당과를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백연의 모습 때문이었다.


“맛있네 이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뭐, 당과? 나 단거 좋아해.”


생긋 웃은 백연이 남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찼다. 단것을 먹자 기운이 도는 느낌이었다. 근래 잠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약간의 피로가 쌓이고 있었는데.


“감사히 잘 먹었다고 전해드려줘.”

“엄청 좋아하겠네. 그 주인장.”


도현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받아든 목검을 한켠에 쌓아둔 백연이 다시 연무장으로 걸음했다. 막 일어나 앉은 이결의 상태를 가늠한 백연이 입을 열었다.


“이결 사형은 좀 쉬고 와. 다음 사람은......”


백연의 시선이 막 머리를 쓸어넘기던 도현에게 가 닿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도현 사형. 지금 할래, 아니면 청율 사숙 다음에 할래?”

“먼저 할란다.”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했다. 어차피 언제 해도 두들겨 맞을 것이 뻔했는데, 굳이 나중에 할 이유도 없었다.


목검 한자루를 가볍게 집어들고 한숨을 푹 내쉰 도현이 백연의 앞에 가 섰다.


이윽고 서로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올리고 목검을 들어올렸다. 정신을 집중한 도현이 그대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호흡을 가다듬는 도현을 보며 백연이 입을 열었다.


“어제 검룡과 대련했을때 배운것이 뭔지 기억해?”

“전혀.”


일전 이런 물음에 안다고 대답했던 도현이었다. 정말 아는지 확인하겠다면서 말없이 두들겨 팼는데, 그 뒤로 다시는 안다고 대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답에 백연이 씩 웃었다.


“사형의 검은 무거워. 묵직하게 가라앉지. 속도를 장기로 하는것과는 거리가 먼데, 화산파의 매화검법은 빠르고, 화려하며, 매혹적이지. 막기가 어려울거야.”


백연의 말을 귀에 담으며 도현이 중단세를 취했다.


녀석이 말하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확히 귀에 담는다. 도현은 본래 무학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사파의 영역을 전전하며 사도 문파의 가르침 한자락이라도 얻어보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일이 꼬여 크게 다쳐 죽을 뻔 하기도 했었다. 운결을 만나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곤륜파에 들어온 후에도,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 한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사제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 얻어낸 무위도 꿈만 같은데, 이보다 더 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비무제전.’


백자 배 아이 열명이 갈 수 있다고 했다. 백연과 무진, 단휘, 소홍을 제외하면 남는 자리는 여섯이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리였다.


삽시간에 도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무겁고 느리다 해서 꼭 쾌검에게 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사형은 창명류수검(滄溟流水劍)의 방어 초식을 완벽하게 익혀야 해.”

“그거면 충분하냐?”

“모든것을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검이니까.”


담백한 답변이었다.


도현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사제놈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명심해. 상대의 검로에 시선을 뺏기지 마. 수기(水氣)의 원을 그려 흐름을 사형의 것으로 가져오는거야.”


어제 검룡이 지적했던 점까지 입에 담는다. 몇번이고 머릿속에 새겼던 조언을 다시 입속으로 되뇌인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일으킨 현음공의 수기를 몸에 가득 담는다. 팔다리를 따라 흐르는 차갑고 묵직한 감각이 선명했다.


“그럼 간다.”


나직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도현이 검을 뻗었다. 찰나지간에 허공을 가른 목검이 묵직한 기운을 끄트머리에 매달고 소리없이 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선명하게 묻어나오는 것은 한없이 차갑고 묵직한 물의 기운이었다.


‘이번엔......!’


일전 검룡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완벽하게 펼쳐진 검초에 도현이 반색하는 순간, 귓가에 한숨섞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시선을 뺏기지 말라고 했다고, 아예 안보면 어떡해?”


화르르륵!


삽시간에 시야 가장자리를 붉은 기파가 가득 매웠다. 후끈 달아오르는 공기 속에서 사선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백연의 검을 뒤늦게 눈치챈 도현이 눈을 부릅뜨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목검을 확 꺾어 원형으로 방어초를 재차 내치면서였다.


“반응은 괜찮네.”


무심한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칭찬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낀 도현이 씩 웃는 순간.


빠아아악!


강렬한 소리가 울렸다. 한순간 머리가 뒤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다음 순간 도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망할.’


머리에 정통으로 일격을 맞았다는 것을 인지한 도현의 시야가 점차 좁아졌다. 깜깜하게 물드는 시야 저편에서 한숨과 함께 들려오는 백연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청율 사숙. 이어서 바로 할까요......”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도현의 의식이 뚝 꺼졌다.



※※※



곤륜의 산봉우리에 눈이 쌓이고, 얼어붙었다 다시금 녹아내렸다. 유달리 맑은 겨울이었다. 그 흔한 눈바람조차 자주 없는.


소년이 다시 살아나 처음 겪는 겨울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낯선 겨울의 온도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겨울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달이 차고 기우는 속도가 바람과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삼 주가 넘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사형들의 성취는 하루가 지날때마다 달라졌다. 상승의 무공을 배우거나 초식을 외우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특별한 무공이 필요하지 않다. 곤륜의 무인이라 하면 삼원검과 운연동공으로도 충분할 일이다.


대련 지도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났을때 백연의 초격을 반응해 막아내는 사형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주가 지날 무렵에는 반격초마저 날려대기 시작했다. 어느새 무진과 단휘, 소홍은 몇합 뿐이라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진짜 대련에 임해 싸워야 했다.


뭉툭했던 검들이 날카롭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숫제 야장이 무구를 제련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사형들은 이미 검이었다. 지난 일년의 시간이 그리 만들었고, 날을 세우는 것에는 한달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서른 번의 해가 뜨고, 달이 졌다.


“그동안 고생했어. 내일은 푹 자고 일어나도 좋아. 비무제전에 갈 사람들을 알려줄테니까.”


담담히 말하는 백연의 뺨을 훑고 지나간 것은 차가우면서도 젖은 흙냄새를 껴안은 바람이었다.


준비가 끝났다. 월동(越冬)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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