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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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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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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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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네가 돌아올 곳(9)

DUMMY

※※※



“조금만 물러나 주시지요.”


공동에 있던 혈교도들을 전부 격살한 뒤였다. 두엇을 생포하려 시도했으나 혈공을 일으킨 괴물들은 순순히 잡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기를 끌어올려 고독(蠱毒)을 몸에 넣은 양 스스로를 터트려 자살하려는 사도들 때문에 결국 전부 목을 베어야 했다.


그렇게 반시진.


드넓은 공동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사방을 휘감은 기분 나쁜 혈향조차 침잠하며 가라앉는다. 뻥 뚫린 천장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스산한 기운을 드리우며 핏물로 그려진 술법진의 잔해를 비춰냈다.


바닥을 가득 채운 것은 혈교도들의 시체.


공동의 출입구와 이어지는 동혈 끄트머리에 선 것은 화율이었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원혼이 짙습니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기를.”


그녀가 중얼거렸다. 백연과 흑랑, 참월대주는 이미 동혈에 들어선 참이었다. 공동과 이어진 입구에 버티고 선 그녀의 몸을 따라 황금빛 기파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라법왕공이라니. 새외 천룡사의 무인을 보기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시끄럽군, 살문의 개.”

“아하핫. 방주 대리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보군요.”

“위령(慰靈)을 하는 중이다. 한번만 더 지껄이면 네놈의 혀를 잘라주지.”


냉막한 흑랑의 음성에 참월대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 뒤편으로 동혈에 모여든 아이들 넷이 미약한 두려움이 서린 눈으로 흑랑을 쳐다보았다. 술법진에 사용되던 아이들이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반면 해랑은 백연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자꾸만 백연의 어깨에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그럴만 했다. 직전 술법진의 가운데에서 잠깐 살아났던 무언가가 내지른 일수(一手). 그 여파로 왼 어깨뼈가 완전히 부러진 상황이었다. 막대하게 짓누르는 압력이 거대했더랬다. 대체 어떤 무공을 쓴지 알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어깨 위를 스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겨냥했다면 지금쯤 그의 목숨은 다했을 것이다.


호신강기(護身罡氣)가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모든 일격을 보고 회피할 수는 없다. 예지에 가까운 예측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항시 그의 몸을 덮어줄 옷자락 같은 갑옷이 필요했다.


호신강기. 어찌 엮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앞서야 할 것이다. 곤륜의 옷자락에 흠결이 지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런 생각을 머리 한구석에 새겨두며 백연이 앞을 응시했다.


“부디, 이곳에 잠든 아이들이 안양(安養:극락)에 이르기를.”


우웅-!


방출되는 금빛 기파를 따라 화율의 의복이 펄럭였다. 공동의 천장을 부수고 내려온 이후에 격렬한 전투를 치뤘음에도 그녀의 축기량은 끝이 없는 듯 했다. 진정한 무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가늠할 생각도 없었다. 여상히 일으킨 기파를 손끝에 담아 허공에 내뻗는 모습. 불자(佛子)의 위령이다. 유성을 치료해준 것 만으로도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앞으로도 그녀와 대적할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잔악한 혈귀(血鬼)들에게 팔열(八熱)의 업을 지우시기를.”


뒤따르는 음성이 나직했다. 화율이 손을 짧게 휘두르는 것과 함께였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에서 발출되는 거대한 기운. 일전에도 한번 보았던 장법 천수장의 기파였다. 그러나 그 기세가 이전보다 몇배는 거대했다.


한순간 살갗을 따라 묵직한 압력이 느껴질 만큼.


백연이 아릿하게 통증이 밀려오는 어깨를 재차 매만졌다. 눈앞의 화율이 공동을 향해 장법을 내뻗는 것도 동시였다.


직후.


콰아아앙!


벽력탄 같은 폭음이 뒤따랐다. 돌벽이 바스라지며 금이 가는 소리도 미약하게 전해져왔다. 이윽고 둔중한 울림과 함께 돌벽이 쩍쩍 갈라지며 공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끝났습니다.”


가벼운 호흡으로 기파를 갈무리한 화율이 몸을 돌렸다.


“올라가시지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올라가는 길인 동혈은 길었다. 공동의 옆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자연적인 것을 다듬어 만든 길인듯 했다. 본래는 혈교 이전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세력이 따로 있었다 했다. 지금은 뇌음사가 떠난 이후 도시에 들어온 혈교 잔당들의 본거지였지만.


‘본단 세력과 거리가 멀다 했지. 무슨 일이 있는건가.’


백연의 눈이 곳곳에 남은 혈교도들의 흔적을 살폈다. 큰 규모의 세력이 모여든 것 치고는 그리 모양새가 잡혀있지 않았다. 이곳의 술법진도 급히 준비한 듯했다. 따로 지원을 받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잘것 없군.”


그것을 알아챈 것은 흑랑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동혈의 거친 벽면을 손으로 슬쩍 훑은 사내의 눈동자가 비스듬히 떨어졌다. 넌저시 혼잣말을 하듯 백연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혈교는 본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흑랑의 중얼거림에 백연이 반응했다.


“교의 내부에서 반목이 있는 겁니까? 세력 다툼이라거나.”

“알기 어렵다. 천라방주에게 물어보기는 하겠다만, 혈교는 극히 폐쇄적인 집단이니. 물론 그와는 별개로 조사에 들어가야겠지.”


흑랑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돌아가면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오문 무영방의 방주 대리. 그 역할이 작지 않았다. 칠방의 소집건도 알아봐야 할 일인데, 거기에 선대 무영방주 무허의 기록을 찾고, 마교의 동향을 살피며, 혈교의 일까지 확인해야 할 상황이었다.


“......쉴새없이 바쁘겠군.”


그러나 전부 필요한 일이었다. 대문파란 그러했다. 중원의 격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릇 모든 동향을 파악하고 좇으려 노력해야 하니.


더해 그 사이사이 가지고 있는 손패를 더하는 것은 각 문파를 이끄는 수장들의 역량이라 봐도 좋았다.


그리고.


“너는 바로 곤륜으로 돌아가겠지?”


흑랑이 곁에서 걷고 있는 소년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밤을 녹여낸 것 같은 머리칼 사이, 은은한 자색 눈동자가 엿보였다. 고민에 빠진듯 쉴새없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겉으로 빤히 보였다.


그가 투자했던 소년. 처음에는 이리 커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매번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이미 이번 무덤 일로 목숨을 한번 빚졌다. 그 과정에서 소년이 지닌 무위는 어느새 청화단주를 쓰러트릴 만큼 강해져 있었다. 몇개월 뒤에 다시 보면 또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가장 큰 변수인 것이다. 장래 하오문이 위기에 처했을때, 엄청난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그럴 일이 없는 것이 좋겠지만.’


그럼에도 앞일은 모르는 것이니.


“그럴 것 같네요. 아무래도 자리를 계속 비우고 돌아다니기도 그렇고. 이러다가 장문인께서 홧병나서 쓰러지실 것 같은데요.”


여상히 답하는 말이 가벼웠다. 그러면서도 소년의 미간은 살풋 찌푸려져 있었다.


욱신거리는 어깨의 고통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점혈로 감각을 마비시켜놓긴 했지만, 그것이 계속 가지는 않았다. 그만큼 심하게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빠르게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올라가서 부상을 봐드리겠습니다.”


넌저시 그의 어깨를 건드린 화율이 말했다. 백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혈을 벗어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둡고 길다란 동혈을 지나 바깥으로 걸어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시린 겨울 바람이 몸에 절은 혈향을 씻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유독 손속을 험하게 쓴 직후여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문득 옷자락이 핏물로 절어버린 것이 아닌가 소매를 매만질 정도로.


‘조심해야겠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바깥에 이르자 간간히 상황을 모르고 달려드는 혈교의 말단 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백연은 검을 두번 뻗지 않았다. 다시 시린 백광으로 탈바꿈한 소년의 검격이 일격에 혈교도를 귀천시켰다.


그렇게 돌기를 잠깐.


“팔영, 고생했다.”

“......때맞춰 오셨군요. 소란이 일길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많이 다쳤나?”

“괜찮습니다.”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군. 화율, 그대에게 부탁해도 되겠나.”

“문제 없습니다. 의원의 본분이지요.”


뇌옥 한구석에서 부상을 입은채로 앉아있던 팔영을 찾아내었다. 핏물이 말라붙은 손과 몸을 따라 새겨진 옅은 자상에도 팔영은 가만히 수염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맡은바 소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구려. 노부의 부족함 때문에 그대가 욕을 봤소.”

“아, 아니에요! 지켜주셔서 감사드려요. 정말로요.”


팔영이 주름진 손으로 해랑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노인의 눈에 오늘따라 유달리 감정이 짙게 묻어나오는 듯 했다. 본디 흑랑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팔영이건만. 백연으로써도 외팔의 노인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보기 좋네.’


백연은 굳이 생각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의 걸음이 혈교의 근거지를 뒤로 하고 움직였다. 중간에 잠시 화율의 전각을 들러 약재 몇가지를 챙기고 나서는 객잔으로 향하는 걸음이었다.


“저도 가는겁니까?”


능글맞게 웃는 참월대주도 함께였다. 일행들에게서 살풋 거리를 둔 움직임이 여차하면 도주할 기세였다.


“설명할 것이 있다 했지. 그건 들어야겠다.”


천살문의 대주를 흘깃 쳐다본 백연이 답했다.


“우선은 객잔에 가서 이야기하지.”

“아하하, 나름 바쁜 몸이긴 합니다만......”


백연은 말없이 검파에 손을 올렸다. 일순 태청신공의 뇌기가 손마디에 휘감기며 번뜩이는 백광을 피워올렸다.


“의뢰가 끝났으니 시간 여유가 좀 있겠군요. 가시죠. 천천히 전부 설명드리겠습니다.”


삽시간에 공손해진 참월대주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백연에게서 조금이나마 멀리 떨어지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저벅.


고요한 도시를 따라 일행의 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올때는 보법을 밟으며 질주했던 거리가 더없이 적요하게 느껴졌다. 그리 걷기를 잠시.


어두운 전각들 사이 환히 불켜진 객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기다리고 있었나보네요.”


일렁이는 불빛 너머, 객잔의 바깥에 서성이고 있는 인영들이 보였다. 그것을 본 백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움직이던 인영중 하나가 우뚝 멈춰서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백연!”


외치는 목소리가 주욱 늘어진다 싶더니, 허공을 따라 옅은 바람결 같은 기파가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왔다.


후우욱!


한달음에 펼쳐진 보법. 갑작스레 그에게 뛰어든 인영이 코앞에서 멈춰섰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백연의 앞에 다다른 소홍이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그에 백연의 눈썹이 휘어졌다.


“몸도 안좋으면서 뭐하는거야? 내공을 끌어올리면 내상이 다시......”

“기다렸어.”

“......못말린다. 들어가자.”

“잠깐만, 너. 어깨가.”


이번에는 반대로 소홍의 눈썹이 휘어졌다. 잔뜩 미간을 좁힌 사형의 표정에 백연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금방 나으니까.”


소홍의 입술이 굳게 일자로 다물어졌다.


조심한다더니, 금새 다쳐서 오는 꼴이 매번 비슷했다. 그럼에도 따라가 지켜주지 못하고 한숨밖에 쉴 수 없는 스스로의 무위가 불만스러웠다. 돌아가면 더욱 수련에 매진해야 할련지.


소홍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비죽이고 있을때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모여들었다.


“대협!”


커다란 외침과 함께 달려온 것은 객잔 주인이었다. 한달음에 도착한 그가 충혈된 눈으로 두러번 거리다가, 백연의 곁에 선 해랑을 보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해랑아! 괜찮은거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괜찮아요. 이분들이 구해주신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의 울먹이다시피 되뇌이는 모습이었다. 해랑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백연은 그 모습에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사한지 확인했으면 들어가지. 부상자들이 있다.”


객잔 앞에서 그리 서 있는 것도 잠시. 흑랑의 말에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랑은 기력을 조금 소진했을 뿐, 다친 곳이 없었다.


감사를 표하겠다는 객잔 주인을 간신히 말려서 해랑과 함께 잠자리로 보냈다. 백연이 돌아올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형들도 하나씩 눈을 붙이러 들어갔다. 물론 아침에 자세한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겠다고 백연이 약속을 하고 나서였다.


“너, 어깨는......”

“화율님이 치료해주신다고 하셨어. 정말로 괜찮으니까 먼저 자. 사형 몸도 안좋은데.”

“하아.”


한숨을 내쉰 소홍이 마지막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기 전, 백연의 앞에서 고민하듯 입술을 베어문 소홍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면, 가르쳐줘.”

“뭐를?”

“전부.”


짧게 내뱉는 사형의 눈빛이 단단했다.


“너만큼, 강해지고 싶어.”

“......힘들텐데. 농담이 아니라 죽을만큼.”

“괜찮아. 나는.”


또렷한 시선이 백연을 올려다보았다.


“지키고 싶어.”


어조가 단호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랬다. 백연은 사형의 말에서 각오를 느꼈다. 두번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좋아. 가르쳐 줄게.”


소홍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고개를 끄덕인 사형이 몸을 돌려 층계를 올라갔다.


그렇게 객잔이 천천히 조용해졌다.


“이제 다 끝난겁니까? 거참. 곤륜의 사제들은 우애가 깊군요.”


한 구석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여태껏 조용히 앉아있던 참월대주였다. 객잔의 일층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며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설명, 이제 들어볼까.”



※※※



“이자도 같이 들어도 되는겁니까? 흐음, 정보가 아무데나 퍼지면 저도 곤란한 일인데......”


어두워진 객잔의 일층에 나직한 등불 한자락만이 일렁였다. 모여앉은 사람은 넷이었다.


흑랑과 참월대주, 그리고 상의를 풀어헤친 채로 맨 어깨를 드러낸 백연과, 그의 어깨를 살피고 있는 화율이었다.


참월대주의 말끝이 가볍게 올라갔다. 화율을 어느 정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혈교도들과 전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화율은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백연의 어깨를 매만질 뿐이었다.


“제아무리 새외 무인이라 하나, 중원의 내밀한 정보를 듣는 것은.”

“문불취상(聞不取相:들어도 듣지 않음)입니다. 비록 사문을 떠난 몸이지만, 불자된 이로써 언동을 가벼이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만이라 하신다면 이분의 어깨 치료를 마치고 말씀을 나누시지요.”


담담히 답하며 손을 놀린다. 박살난 어깨뼈를 만지는 손길에 백연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통증에 한 호흡을 참았다가 내뱉은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냥 말해. 다른 곳에 발설할 사람은 아니다.”

“뭐, 그리 요구하신다면야.”


어깨를 으쓱인 참월대주가 손을 매만졌다. 흑랑을 잠시 힐끗 쳐다본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먼저 듣고 싶은게 무엇인지요?”

“우선은.”


백연이 답했다.


정해놓은 우선순위가 있었다. 참월대주가 어디까지 답해줄지는 모르겠으나, 그 또한 이 질문은 예상했을터. 애초에 처음 입 밖으로 발설한 순간 참월대주가 이 정보를 흘리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은 백연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정보는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이번 살행 의뢰의 목표, 모산파의 무인들이라 했지. 사실인가?”

“맞습니다. 정확히는 모산파 출신의 무인들이죠.”

“출신?”


참월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의 무인들 중에는 사문을 떠나 떠도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아예 사문을 등지지 않는다면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폐하는 일은 드문 편이니, 이들도 그런 떠돌이들 중에 하나라 보아야지요.”

“그렇군.”

“적어도 겉으로는 말입니다.”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번에 그들이 이곳에서 혈교와 한 거래의 내용. 저도 오늘에야 정확히 알았습니다만, 이들은 혈교의 술법 구결을 얻는 대가로 혈교의 재보(財寶) 하나의 위치를 알려주려 한 모양입니다. 일개 떠돌이들이 내놓기에는 심히 귀한 정보인데. 독단적인 움직임은 아니라 보는 것이 옳겠지요.”


탁.


품에서 무언가 종이 한장을 꺼낸 참월대주가 그것을 탁자에 올렸다. 군데군데 말라붙은 핏물이 묻어있는 종이였다. 그것을 받아든 흑랑이 내용을 살폈다.


“그 재보는 아마 적혈보의(赤血寶衣)라는 옷일겁니다만, 그 물건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얻으려 한 술법 구결의 공능.”

“......생령(生靈)의 창조.”


낮게 깔린 흑랑의 음성이 무거웠다. 동시에 화율이 고개를 훅 치켜들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문불취상이라 하더니. 거......”

“생명을 만든다니. 섭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정확히는 생명을 불어넣는 느낌인가. 사람들의 생기(生氣)를 뽑아 한곳에 모으는 술법진인 모양이군. 내 술법무공의 이해로는 이게 한계다. 자세한건 하령에게 물어보면 정확하겠지.”


종이를 내려놓은 흑랑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 놈들이 원하는게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만드는건가?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군.”

“이유라, 이유는 대자면 수십가지도 댈 수 있겠지요. 굳이 제가 생각해본 추측 몇개를 말해보자면.”


참월대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시선이 백연의 눈과 마주쳤다.


“첫째는 시귀(屍鬼)의 군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


시귀.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말하는 것이다. 사이한 무공중에 간혹 시체를 조종하는 술법이 있다고 들었다. 다만 그것을 무리로 부리거나 할 만큼 거대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백연이 아는 한은.


“어째서?”

“작금은 혼란한 시대입니다. 중원 무림에는 사마외도와 살인자들이 들끓고 북방은 끊임없는 오랑캐의 공격으로 위협받고 있지요. 황실의 도지휘사가 백방으로 애써서 간신히 장성 일대는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하나,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내란을 꿈꾼단 말인가?”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어투가 가벼웠다. 참월대주의 말을 귀에 담으며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모산파가 시귀의 군대로 내란을 꿈꾼다고? 가능성이 낮았다. 제아무리 강대한 시귀를 만든다 해도 그렇다. 다른 구파와 세가들의 절대자들. 그 위용이 드높다. 그냥 두고 볼리가 없는 것이다. 더해 시귀라 해도 그냥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내공 진기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니.


그리 와닿지 않았다. 혼란한 시기라 하여도 명이 고작 모산파가 일으킨 시귀들로 인해 쓰러질거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추측은 뭐지.”


백연이 묻자 참월대주가 씩 웃었다.


“제가 며칠 전 무덤 앞에서 여러분과 마주쳤지요. 당시도 모산파의 무인들을 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경로를 그쪽으로 틀더군요. 천마의 무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직후였습니다. 그것이 이상해서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이상하다?”

“예. 천마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장소에 그들이 왜 갔을까요? 고민하다보니 재미있는 가설이 떠오르더군요.”


빙글거리는 웃음이 짙었다. 그 속에서 찰나 백연은 날카롭게 감각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혹시 아십니까? 모산파에는 귀혼대법(歸魂大法)이라는 무공이 있다는데.”

“귀혼대법?”

“죽은자의 혼을 부르는 술법무공입니다. 그 무공과, 혈교의 술법. 그리고 천마의 무덤에 가고자 하던 행태까지.”


문득 백연은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화율이 치료하던 왼 어깨에 걸어놓은 점혈이 완전히 풀린 것인지. 물밀듯 쏟아지는 통증에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뒤이은 참월대주의 말은 귀에 똑똑히 틀어박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쩌면 모산파는 이 땅에 천마(天魔)를 다시 재림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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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사천 +8 23.12.01 3,554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6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7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7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7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59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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