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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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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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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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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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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네가 돌아올 곳(10)

DUMMY

“헛소리.”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입을 연 것은 흑랑이었다. 그의 단호한 어조에 참월대주가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그리 말씀하시면 가슴이 아픈데 말입니다. 나름 타당한 추론 아닙니까? 하핫.”

“들어줄 가치도 없다. 비약이 심하군.”


참월대주의 말을 고려조차 해보지도 않고 일축한다. 팔짱을 낀 흑랑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구파일방의 일좌다. 모산파가 다른 정파에 비해 비밀스러운 집단이라곤 하나, 천마를 부활시키고자 한다고?”

“구파라 해서 다를것이 있습니까? 정사(正邪)를 가르는 것은 모호한 경계지요. 같은 사도(邪道) 육진(六鎭)으로 묶이는 수라궁과 하오문이 같습니까? 구파일방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혓바닥을 잘 놀리는군. 네 말대로 정파라는 것을 제하고 생각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흑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유도 의미도 없다. 천마를 부활시킨다 한들 그자가 순순히 모산의 힘이 되어줄 것 같나? 우습군. 차라리 마교가 획책한 계획이라 하면 몰라도.”

“뭐, 그도 생각해보고는 있었습니다만. 어쩌면 둘이 한통속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빙글거리며 웃는 참월대주. 어투가 더없이 가벼웠다. 그의 말에 흑랑의 몸에서 차가운 기세가 일어나려는 순간.


“......마교가 중원에 개입한 정황은 있습니다.”


백연이 입을 열자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흑랑과 참월대주의 눈을 마주하며 백연이 손가락을 두들겼다.


천주산에서 일어났던 일. 만금장과 금원방의 계략으로 검왕 남궁산을 중독시키고 제거를 도모했던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백연이 발견한 것은 마기(魔氣). 마교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이었다.


“만금장과 마교가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마교의 손이 이미 중원에 뻗쳤다 보아도 이상하지 않겠죠.”

“......뭐라?”

“아, 그러고보니 흑랑은 자리에 없었죠. 천주산에서 용봉지회가 열렸는데, 사건이 좀 있었습니다.”


백연의 짤막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말이 끝난 직후 흑랑의 표정이 한층 비틀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금원방주가? 미쳤군. 문주가 칠방을 소집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아마 그럴겁니다.”


금원방주의 교체. 그것으로 인해 하오문 내부의 정세도 많은 것이 바뀌겠지. 흑랑 또한 바삐 움직여야 할 일이었다. 백연으로써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오문 내에서 무영방을 위시한 자신쪽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니.


“하오문에도 마교의 손길이 뻗쳤다라. 정파도 의심 정도는 해볼법 한것 아닐까 싶군요.”


끼어드는 참월대주의 목소리가 흥미를 담고 있었다. 그에 흑랑의 눈썹이 살풋 움직였다.


“천살문의 개. 너는 마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알아야 할 만큼은 알고 있지요. 하오문이 모든 정보의 중심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럼 교의 뿌리에 대해서도 알겠군.”

“알지요. 신교 아닙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이야기에 가만히 입을 다문채로 백연이 생각에 잠겼다.


“그 시절부터 그들이 무엇보다 염원해온 것이 천마의 재림이지. 백여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활동해온 놈들이 혈교의 술법을 시도해보지 않았을까.”

“모산의 무공을 얻지는 못했었잖습니까. 결정적으로 모산파가 이리 강성해진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끼워맞추기에 불과하다. 미약한 가능성이 존재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겠다만.”

“그거면 충분합니다.”


참월대주가 씩 웃었다.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었다. 그를 바라보던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확실한 것은 두가지. 천살문에서 죽인 무인들이 모산파에 한때 적(籍)을 두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혈교와 거래를 통해 생기를 모으는 술법 구결을 얻어내려 했다는 것 뿐.”

“그렇지요.”

“그런데 왜.”


백연이 의문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이 참월대주를 응시했다. 어느새 자색으로 물든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로 빛났다.


지금 참월대주가 설명해준 이야기. 굳이 그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아주 가능성 낮은 추측에 불과할 뿐인 내용까지 덧붙여가면서.


살문 내부 의뢰의 정보를 밖으로 발설하는 일이기도 했다. 천살문 측에 이득이 있다 보기 어려웠다. 부러 간계를 써 백연과 흑랑의 이목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이런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거지?”

“저희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만, 우선은 가벼운 경고라고 해두지요.”

“경고?”

“예. 암화 그대는 곤륜파의 무인 아닙니까? 용봉지회에도 초청되었고.”


참월대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겨울이 지나면 곧 봄이 올테지요. 천하에서 가장 큰 제전(祭典)이 열릴 시기라 생각되는데.”


봄에 열릴 제전. 천하비무제전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백연이 추측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참월대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중원 무림의 상황에서 비무제전을 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천하비무제전이 열린다는 말은.


“전 무림의 온갖 무인들이 몰려들겠지요. 구파일방의 일좌인 모산파도 당연히 있을터. 조금쯤은 경계하라 일러드리는 겁니다.”

“살문에서 친절이라도 베풀려는건가?”

“저희도 거대한 전란이 중원을 휩쓰는 것은 원치않는 바이니까요. 친절이라기보단, 모산파의 감시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여태껏 미소를 걸고 있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간다. 참월대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완벽한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가벼워 보이던 언동이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암화 그대가 무덤에 들어갔다 나왔지요. 당신 또한 저희가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한데. 그런 이가 모산을 경계해준다 하면 환영할 일입니다.”

“너희가 전란을 바라지 않는다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데.”

“당연한 이치입니다. 모두가 모두를 죽이는 시기에는-”


참월대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탁자에 걸터앉은 그의 얼굴을 따라 기울어진 음영이 기괴한 형상을 자아냈다.


“살문의 의미가 없어지니 말이지요.”


느릿한 침묵이 흘렀다.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백연의 어깨를 매만지는 화율의 옷자락만이 미약한 소리를 내었다.


백연이 입술을 지그시 베어물었다.


천살문이 모산파를 강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알았다. 더해 혈교의 술법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확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넘어갈 것도 아니었다. 참월대주가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들이 모산파를 크게 경계하는 이유가.


그렇다 하면 백연 자신 또한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천살문은 적을 가리지 않는다 했다. 반대로 말하면 같은편에 설 이도 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들과 적당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도 괜찮을 일이다.


“새겨두지.”


백연이 짧게 답했다. 참월대주가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 이것으로 일러드릴 말은 끝이군요. 저도 바쁜 몸인지라 슬슬 가봐야겠습니다.”

“징표를 줬었지.”

“예. 혹시 잃어버리신건 아니겠지요? 그럼 정말로 곤란한데.”

“오래지 않아 다시 볼지도 모르겠어.”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가까운 미래에 천살문을 찾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말에 참월대주가 웃음을 흘렸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벼이 일어난 참월대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잔을 떠났다. 흑랑과 백연은 구태여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각기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천마.”


자꾸만 그 이름이 얽혀든다. 천주산의 일에서도 그랬다. 만금장도, 모산파도 그의 자취를 좇는다. 일련의 일들이 우연이라기엔 이상했는데, 알아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한켠에 묻으며 백연이 눈을 감았다. 밀렸던 피로감이 한번에 몰아닥치고 있었다. 팔다리가 축 늘어지는 기분으로 앉아있자 화율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무시지요. 미혼초를 조금 갈아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어깨는 주무시는 사이 깨끗하게 치료해 놓을테니 걱정 마십시오.”

“감사해요, 화율. 그럼......”


쉴새없이 몰아쳐왔던 긴장감이 풀리며 의식이 점차 가라앉았다. 의문과 고민거리를 남긴채로 밤이 깊어갔다.



※※※



사흘이 흘렀다.


그 사이 매일같이 객잔을 오가던 화율은 아예 약을 상자째로 들고와 객잔에 자리를 차리고 부상자들을 살폈다. 의식을 잃은 검룡부터, 내상이 심한 소홍과, 마찬가지로 부상을 입은 무진과 단휘도. 혈교도들과의 싸움에서 다친 팔영은 물론이고 어깨가 박살난 백연까지.


“멀쩡한 사람이 없네.”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백연의 말에 유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날 밤에 막 의식을 차린 참이었는데, 아침이 되자 침상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까지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졌다.


지금은 이불을 덮고 앉은채로 화율이 지어준 탕약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유성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엄청 쓰네 이거. 대체 뭘로 만든거야?”

“억울하면 안 다쳤어야지.”

“......그 사이에 한쪽 어깨 부숴먹고 온 놈한테 들을 말은 아니야.”

“나는 다 나았는데?”


백연이 왼팔을 휘휘 저어보이자 유성이 한숨을 뱉었다. 어젯밤 유성이 깨어났을 때만 해도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던 놈이 하룻밤 사이에 완쾌한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듣자하니 사흘 전에 다쳤다고 했는데. 어찌 그리 회복이 빠른지.


조용히 입술을 비죽이는 유성을 보며 백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다행이야.”


침상 끄트머리에서 일어난 백연이 유성에게서 그릇을 받아들며 그의 머리를 쓸었다.


“깨어나서.”


잠깐 눈을 깜빡인 유성이 이윽고 맑은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약을 먹고 다시 눈을 붙이는 유성을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일었다. 탁자 하나에 모여들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 둥글게 둘러앉은 이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놈아, 거긴 귀곡사다. 그냥 버려.”

“아직 안죽었습니다 사형.”

“그거 살리다가 판 망칠일 있냐.”

“무진 공자의 말이 맞소. 포기할건 포기해야지.”


커다란 판을 놓고 올려진 흑백의 돌.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나같이 훈수를 두는 모습이었다. 대체 어디서 구해온건지 기전(棋戰:바둑을 둠)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은 물론이요 팔영도 수염을 쓸며 진지하게 한마디씩 툭툭 던진다. 심지어는 소홍과 선화도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 모습.


그 와중에 가운데에 앉아 돌을 두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단휘와 해랑이었다.


“백연 공자? 이리 와서 같이 봐요.”


루주 선화가 그를 향해 손짓하자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규칙도 잘 모릅니다.”

“그래요? 그래도 그냥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있는데.”

“딱 보니 사형이 지고 있는건 알겠네요.”


일방적으로 해랑의 흰돌이 판을 뒤덮은 형국이었다. 자세한 규칙은 몰라도 단휘가 그리 녹록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즐겁게 놀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백연이 객잔의 바깥으로 걸음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뺨을 쓸었다. 정오의 햇살이 건조한 공기를 따라 드리우며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객잔의 바로 바깥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도시를 가늠하듯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던 여인이 백연의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다.


“나오셨군요. 검룡께선 달여드린 탕약은 다 드셨습니까?”

“네. 잘 먹던데요. 덕분에 다 나은것 같습니다. 뭐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그의 말에 화율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싼 검은 천이 햇빛 아래 유달리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제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옅은 미소를 지은 화율이 다시 도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떠나시겠지요?”

“그래야죠. 검룡이 움직일 수 있는대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화율께선 어찌 하실 계획인지 궁금하군요.”

“저도.”


화율이 중얼거렸다.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떠난다고요?”


백연이 반문했다. 그가 듣기로 화율이 이곳에서 의원으로 살아온 세월은 꽤 길다고 했다. 도시 사람들의 수많은 부상과 질병을 치료해줬다고. 오랜 기간 머물러 왔으니 여기가 집이라 봐도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떠나겠다니.


“사문을 떠나왔지만, 무도(武道)에서 발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습니다. 며칠 전 들은 이야기가 자꾸 머리속에서 맴돌더군요.”


참월대주와의 대화를 언급한다. 담담히 중얼거리는 음성 끝에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큰 혼란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혈교와 마교가 준동하고, 사마외도가 날뛰기 시작하면 새외 무림이라 해서 영향을 받지 않을리가 없지요. 제 나름대로 조사와 대비를 하고자 함입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혈교를 살피고자 합니다.”

“그렇군요.”


백연이 짧게 수긍했다. 그녀 정도의 무위와 실력이라면 능히 해낼 것이다. 별다른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화율이었다.


“제가 처음 이 도시에 오고, 수많은 아이들을 치료해주었습니다. 해랑이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렇습니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새외의 칼바람을 맞으며 자랐지요.”

“가족이 없다 들었습니다만.”

“아이의 가족은.”


화율이 고개를 들어 객잔을 흘깃 쳐다보았다.


“저분입니다.”


언제 나왔는지 객잔 앞을 분주하게 돌며 정리하는 풍채 좋은 사내의 모습. 객잔 주인이었다. 바쁘게 요리를 하다 나왔는지 바람을 타고 음식의 향취가 풍겼다.


그를 눈에 담으며 백연이 물었다.


“헌데 어째서 해랑이를 떠나보내려 하는지 모르겠군요.”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랑이 중원 무림에서 무공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도 좋을 일이다. 하지만 객잔 주인은 이곳에 있을텐데. 해랑이 그만큼 떠나고 싶어할지도 알 수 없다.


그때, 화율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 년 남았습니다. 저분은.”

“......예?”

“불치병입니다. 본래부터 몸이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리한 영향도 없지는 않겠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낼 이유로는 충분하겠지요.”


입을 열려던 백연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었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가만히 서 있었을까.


“대협! 화율님! 두분 다 식사하러 오십시오. 기가 막힌 요리를 해뒀습니다!”


기세좋게 울리는 목소리에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슬쩍 돌아본 화율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시지요. 배가 고프군요.”



※※※



다시 이틀이 흘렀다. 정신을 차린 유성의 회복 속도는 빨랐다. 화율이 적절히 처방해준 약 때문인지. 금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가 검을 잡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하루면 충분했다.


객잔에서 머무는 시간은 휴식이었다. 새외의 찬 바람도 음식 냄새가 들어찬 아늑한 공간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해랑과 더욱 친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외려 백연 자신보다도 무진과 단휘에게 상당한 예쁨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형님?”


백연의 반문에 해랑의 귓가가 눈에 보일정도로 달아올랐다. 금새 도망갈 것 같은 얼굴에 백연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괜찮죠. 원하는대로 불러요.”

“가, 감사합니다. 백연 형님!”

“뭔가 낮간지러운데 말이죠.”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

“그렇게......할까?”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두쌍의 시선을 느끼며 백연이 헛기침을 했다. 왠지 해랑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형들한테 혼날것 같다는 기분은 착각일까.


곧이어 잔뜩 기분이 좋아보이는 해랑이 쪼르르 다른곳으로 달려가고.


“잘했어. 사제.”

“으응? 뭐를......”

“눈치는 있구나.”


소홍이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에 백연이 한숨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시간이 바람같이 흘러,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진짜 가요? 진짜?”


물기섞인 해랑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말을 끌고 온 백연과 일행을 향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객잔 앞에 나온 객잔 주인. 그가 씩 웃으며 해랑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그래. 가라 이놈아.”

“하지만......”

“이만한 기회가 어디 쉽게 오는줄 아냐? 평생 점소이로 살려고? 아서라.”


객잔 주인이 백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두번 뵙기 힘든 대협분들이다. 문파에 입문 시켜준다는 말씀이 얼마나 귀한건데. 가서 잘 배우면 네 녀석 앞길이 창창할거다.”

“하지만 주인 어른께선.”

“내 걱정을 왜 하냐. 네가 오기 전에도 몇십년이나 이 일 했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


해랑이 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잠시 해랑을 내려다보던 객잔 주인이 한숨을 푹 쉬더니 몸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라.”


빠르게 안으로 사라진 객잔 주인이 이윽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때, 그의 손에는 길쭉한 천으로 싸인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이게 뭐에요?”

“선물이다. 그간 일도 열심히 했으니까 주는거야.”


그것을 받아든 해랑의 팔이 무거운듯 훅 아래로 떨어졌다. 천을 걷어내자 드러난 것은 수수한 검집에 담긴 한자루의 검이었다. 그것을 본 해랑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거, 검이요?”

“준비해놓은지는 좀 되었다만. 그리 비싼건 아니고 평범한 검이다. 그래도 무학에 입문하려면 검 한자루는 있어야지.”

“주인 어른......!”


와락 달려든 해랑의 등을 툭툭 쳐준 객잔 주인이 백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협.”

“걱정 마시지요. 그리고......”


백연의 눈짓에 객잔 주인이 해랑을 밀어냈다. 검을 두 손으로 꼭 쥔 해랑이 달려가 단휘의 곁에 섰다. 그 사이 객잔 주인에게 다가간 백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말없이 떠나진 마세요.”

“크흠, 들으셨군요.”

“나중에 다시 만나서 직접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곤륜에 오신다면 언제고 환영이니.”

“......그러겠습니다.”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인 백연이 물러나 말에 올랐다. 주변을 살피고 있던 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는게 좋겠소.”

“평안한 길이 되셨으면 좋겠군요.”

“화율께서도 몸 조심하시길.”


화율과의 짤막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일행이 말머리를 돌렸다.


“자주 찾아뵐게요!”


해랑이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백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삐를 끌어 선두에 선 흑랑과 걸음을 맞추자 그가 흘깃 돌아보았다.


“고생이 많았군.”

“누구 때문인데요.”

“......미안하게 생각한다. 목숨값은 달아놓지.”

“그건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와야 할 일이었으니.”


백연이 중얼거렸다.


“친우니까요.”

“친우......인가.”


냉막하던 목소리가 흐릿하게 늘어졌다. 그를 귀에 담으며 백연이 웃었다.


“돌아가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할까요. 술귀신이 한놈 있는데, 흑랑도 만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나쁘지 않지.”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말을 타고 움직인다. 동쪽을 향해서였다. 한시라도 빠르게 돌아가고 싶었다.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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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61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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