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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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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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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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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네가 돌아올 곳(7)

DUMMY

잠깐의 침묵이 스쳤다. 본디 여기서 마주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인물.


처음 마주쳤을 당시도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고 넘어간 일이 있는데, 왜 이자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참월? 천살문의 하수인이 새외에 와 있었나. 죽여 없애도 별 탈 없겠군.”


냉막한 흑랑의 목소리가 뒤따르자 참월대주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말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이 검좀 치워 주시면......”

“일전 의뢰 때문에 무덤에 왔다 했지. 지금은 어때.”


백연이 검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참월대주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눈에는 어느새 자색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마찬가지인가?”


천살문. 사도 육진의 일원인 살수 문파이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의뢰 받은 대상에 대한 살행을 한다 했는데, 그것이 정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어느 편에 서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도.


하물며 본래 신강에 의뢰를 처리하러 왔다던 이자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그극.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여휘검이 느릿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검끝이 서서히 참월대주의 머리를 향하자 그가 살풋 눈매를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백연의 검을 막고 있기가 버거운 듯이.


“잠깐......”

“한번만 묻겠다. 너희 천살문이 혈교와 관계가 있나?”


본래 뇌음사가 버티고 있을 무렵에는 도시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혈교도들이다. 본단의 의지와는 거리가 먼 세력이라 봐야 했다. 혈교의 위세가 그리 나약하지 않으니.


그런 이들이 이리 급작스럽게 일을 벌렸다. 혈교만의 독자적인 짓일까.


‘만일 천살문이 이 일에 관련이 있다 하면.’


백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들과 적대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가만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참월대주를 베고 뒷일은 나중에 감당하면 그만일 터.


흑랑을 흘깃 돌아보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어도 문제없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방주 대리?”


웃음기가 가라앉은 참월대주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천살문의 암검을 피할 수는......”

“그리 되면.”


흑랑이 손을 펼쳤다. 허공에 드리운 그림자가 고개를 숙이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참월대주를 집어 삼키기라도 할 듯이.


“우리 잘난 방주께서 직접 나서겠지. 거꾸로 묻고 싶군. 천살문은 하오문을 감당할 수 있나?”

“......”


한순간 대기가 휘어들었다. 흑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차갑게 가라앉아 살갗을 내리누른다. 그림자 자체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 그 압박이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 백연의 감각에도 그리 느껴졌다.


참월대주의 감각은 더할 것이었다. 백연의 검을 막아내는 것도 벅찬 상황. 본디 살수는 이리 정면으로 무공을 받아내는 자들이 아니다. 누구보다 예리한 일검을 지녔으나, 그만큼 본신의 방어는 약한 자들.


개활지에서의 도주라면 몰라도 이리 묶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를 반증하듯 참월대주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깐.


“그만, 그만! 제 농이 심했군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삽시간에 표정을 뒤집은 참월대주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전히 검을 막아서고 있는 자세 그대로였다. 점점 창백해져가는 안색은 그대로였는데, 그러고서도 웃음을 지어보이는 모습이 태연했다.


“농이라고?”

“우선, 저희는 혈교와 관련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심하고 계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참월대주의 시선이 흘깃 옆을 스쳤다. 직전 백연이 눈을 감겨주었던 아이들의 시체가 있는 방향.


“혈교의 무도한 짓거리는 천살문과 일체 관계가 없다......라고 말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언행으로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힘든 자였다. 살수는 그렇게 훈련되는 이들이니.


하지만 백연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진실이군.’


그의 몸에서 분분히 튀어오르는 새하얀 벼락불. 태청신공의 뇌기였다. 자연스레 따라오는 반동을 상단전 백회혈로 받아내고 있었는데, 그 덕에 신(神)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


참월대주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적어도 방금 입에 담은 것에는.


‘허나 그렇다 해도.’


그것이 참월대주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했다. 왜 하필 혈교도의 본거지에 참월대주가 잠입해 있었는지.


“혈교와 관련이 없다면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궁금한데.”


그에 참월대주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본래라면 결코 발설하지 않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설명을 드려야 하겠군요. 우선 저희의 의뢰 목표가 이곳에 있습니다.”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강에서 이곳으로? 복잡하게 돌아다니는군.”

“아하핫. 놈들의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참월대주의 시선이 아래로 흘깃 떨어졌다. 이윽고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의 의뢰 대상. 혈교가 이번 술법을 준비한 이유가 아마도 그들 때문일겁니다.”


말하는 모습이 매끄러웠다. 그러나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뒤이어 참월대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볍지 않았으니까.


“구파의 일익인 모산파(茅山派). 그곳 출신의 무인들이, 이곳에서 혈교와 손잡았습니다.”



※※※



저벅.


뇌옥을 벗어난 직후였다. 그나마 등불로 밝혀져 있던 뇌옥을 벗어나자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음습한 어둠이 도처에 내리깔렸다. 축축하고 습한 기운이 사방을 점했는데, 그 속에 미약하게 섞여있는 것은 비릿한 혈향이었다.


칠흑에 가까운 동혈. 그 속에서 빛을 지니고 있는 것들은 허공을 떠다니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들, 그리고.


“이 놈인가?”

“......윽!”


거친 손길이 해랑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앞으로 끌려나온 해랑의 턱을 누군가의 손길이 붙잡아 들어올렸다. 섬뜩한 붉은 안광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감탄을 흘렸다.


“과연. 보석같군.”


푸른 기운이 섞인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었다. 해랑의 눈을 살피던 이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아까운데, 여기서 파버리면......”

“안됩니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일었다. 해랑을 붙잡고 있던 손을 쳐내며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동혈에 내려앉은 어둠과 같은 흑색 장포의 무인들. 해랑은 언뜻 그들의 소매 사이에 숨겨진 붉고 노란 종이를 엿보았다.


“술법은 재료의 상태가 온전해야 합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흐음. 웃기는군.”


비웃음 소리가 일었다. 이윽고 뒤따르는 목소리에 서린 못마땅한 감정이 선연했다.


“본디 무덤에 들어갈 계획이 먼저였던 것 아닌가? 그마저도 실패한 자들이.”

“검성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였습니다. 덕분에 천마의 무덤이란 곳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촤륵.


무인의 소매가 흔들렸다. 한순간 떨어져 나온 괴황지 한장이 허공에 스르륵 떠올랐다.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듯이. 직후 괴황지를 따라 옅은 기파가 스치듯 일고.


화르륵!


거센 불길이 피어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붉은 불빛이 어두웠던 동혈을 음울한 빛으로 밝혔다.


그 빛 아래, 붉은 눈의 혈교도와 흑포의 무인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가지 의심할 점이 생겼지요. 군부 출신의 검성을 움직일만한 사람이 별로 없으니.”

“네놈들의 움직임이 드러났을지도 모른다는 것?”

“언제나 가능성은 고려해야 하는 법입니다. 다만, 저쪽에서 눈치챘다 해도 별 의미는 없을 것인데.”

“......뭐, 아무래도 좋다. 네놈들의 사정은 우리 교와는 일체 관련이 없으니.”


잠시간 흑포의 무인과 시선을 겨루던 혈교도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펄럭이는 암적색 장포가 해랑의 시야를 가렸다. 커다란 장포가 흩날리는 것을 보며 해랑은 문득 박쥐의 날개짓을 떠올렸다.


“우리는 교의 술법 구결을 빌려주고, 네놈들은 적혈보의(赤血寶衣)의 위치를 알려준다. 그것이 거래의 전부.”

“그렇지요. 헌데 적혈보의를 얻는다고 당신들이 혈교주를 몰아낼 수 있습니까? 그 저의가 궁금합니다만.”

“......교 내부의 일이다. 거래를 존중해라.”

“뭐, 좋습니다. 가지요.”


나직히 나누는 대화가 해랑의 귀에 틀어박혔다. 그 누가 들어도 상관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내뱉는 언행들.


그러나 동시에 해랑은 그것이 자신이 들어서는 안되는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점소이로 일하면서 배운 것이었다. 무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중, 들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들을 구분하는 법. 지금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공포감이 야금야금 손끝을 갉아먹듯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안돼.’


해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억지로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따가운 고통에 손의 떨림이 조금이나마 멎어들었다.


그때였다.


“움직여라!”


일행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혈교도가 그를 툭 밀치는 순간이었다.


“음?”


문득 흑포의 무인이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였다.


후욱.


그가 허공에 띄워놓은 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 해랑의 눈에는 보였다. 유영하던 불빛이 분분히 쪼개진 듯이 허공을 따라 일렁이는 것이.


불빛을 쳐다보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눈치채기도 어려울만큼 아주 잠깐의 흔적. 그러나 해랑은 분명 똑똑히 보았다. 검으로 벤 듯이 잘려나갔던 불빛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뒤편에 조금 쳐져 있던 또다른 흑포의 무인이 묻는 목소리. 가느다란 여인의 목소리에 불빛을 만들어낸 무인이 고개를 젓고.


“아니. 슬슬 시간이 부족하군. 지체하지 말고 움직이지.”


해랑의 몸을 뒤에서 떠밀었다. 갑작스레 그를 밀친 혈교도의 손에 넘어질듯 비틀거린 해랑이 간신히 걸음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덕분이었을까, 해랑은 문득 품속에 잠들어 있던 단단한 물건의 존재를 눈치챘다. 받은 이후 가슴팍 언저리에 항상 고이 잠들어 있던 물건. 자연스레 손을 스치듯 가져다 대자, 칼집속에 담긴 예리한 무기의 형태가 느껴졌다.


일전 백연이 떠날때 건네주었던 단검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마구 흔들리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발치에 걸리는 질척한 감각과 혈향을 애써 무시하고, 혈교도들이 이끄는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걸어나가기를 한참.


“......좋아.”


문득 주변이 확 밝아졌다는 것을 느낀 해랑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동시에 사방을 가로막고 있던 시야가 훅 넓어졌다. 길게 이어지던 동혈은 어디가고,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거대한 공동(孔東)이었다.


반구형 형태로 이어진 공동. 사방을 틀어막고 있는 돌벽은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장소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본디 있던 공동을 깎아내고 다듬어 크게 만든 양, 매끈하게 다져진 돌벽이 눈에 잘 들어왔다.


벽면을 따라서는 수십의 등불이 제각기의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환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둡기만 하던 동혈과는 달리 사방 시야가 확보될 정도의 불빛.


그 아래를 따라 수십이 넘는 적포의 무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사방에 무언가를 놓고 매만지며 글씨를 새겨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의식을 치루는 듯이.


그것만 해도 충분히 기괴하다 칭할 풍경이었다.


그러나 해랑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순간, 이제까지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다. 여태껏 동혈을 지나오는 동안 코를 얼얼하게 만들던 비릿한 혈향. 끈적한 피냄새의 출처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욱......!”


자연스레 토기가 치밀었다. 헛구역질을 내뱉는 해랑의 발치 앞으로는 거미줄 같은 선들이 깔려 있었다. 바닥에 패인 홈을 따라 조밀하게 채워 넣어진 것은 기괴하리만치 순수한 붉은 색의 액체.


대체 몇명의 사람들에게서 뽑아냈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만큼 많은 양의 피가, 복잡하게 새겨진 홈을 따라 일정한 문양을 그리며 거대한 공동의 바닥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이것으로 다섯. 이게 마지막입니다.”


흑포의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누군가 해랑의 손목을 확 잡아채 끌어당겼다.


“으앗!”


갑작스레 끌려나온 해랑을 살핀 혈교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아이를 중앙에 놓지.”


비릿하고 끈적한 냄새를 애써 머리속에서 지우며 해랑이 주변을 흘깃 돌아보았다.


‘중앙? 그게 무슨......’


그때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부 해랑과 비슷하거나 어린 연배의 아이들. 그보다 먼저 끌려온 듯 보이는 아이들이, 공동 전체를 기준으로 네 방향에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둘은 아예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급조하느라 힘들었군. 교의 술법은 본래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야 하는 것인데. 본래 상정된 만큼의 효력을 내지 못할수도 있다.”

“상관 없습니다. 이곳에서 써보는 것은 그저 술법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일 뿐이니.”


흑포의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료와 술식 구결에도 개량이 필요하겠지요. 만금장과 협조하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지만. 아예 무공을 익힌 아이들의 피를 쓴다면 효능이 더 오를지도 모릅니다.”

“사마의 무공을 익혔다면 안된다. 탁기가 섞인 피는 불순해.”

“당연히 정파 무인들을 말하는 겁니다. 구파는 어떻습니까? 무당의 자제들이라면 천하에 가장 정순한 피를 지녔을 것인데.”

“......말도 안되는 일을 입에 담는군.”


잠시 질린듯이 흑포의 무인을 쳐다보는 혈교도. 이윽고 고개를 저은 그가 거칠게 해랑을 끌어당겼다.


“와라.”


해랑이 당황섞인 표정을 지으며 혈교도의 손에 이끌려 이동했다. 반항하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직전 들은 말들이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내용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만은 깨닫고 있었다.


그가 지금 들은 말들. 백연에게 그대로 전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씨 하나 틀림없이.


그때 혈교도의 걸음이 멈췄다. 공동의 한 가운데에 이른 것이었는데, 그가 해랑을 슬쩍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라.”


그가 가리킨 곳은 바닥에 거미줄처럼 새겨진 문양의 중심이었다. 바닥 위로 왠 돌이 솟아 있었는데, 돌로 된 침상이라도 된 마냥 평평하게 펼쳐진 것이 거대했다.


그러나 그 위는 비어있지 않았다.


널찍한 바위 위를 따라서 누워 있는 것은 눈을 감은 한 사람의 형체.


밤조차 빨아들일 듯한 새까만 흑발과, 스러질 듯 가느다란 선이 해랑의 눈에 들어왔다. 티끌 한점 없이 깨끗한 백색 의복을 입고 누워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한방울 돌지 않았다. 마치 시체같은 모습.


소년인지, 소녀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키가 크지 않았는데, 그로써 말미암아 눈앞의 사람이 어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러나 해랑은 그것을 보며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의 사람에게서는 응당 느껴져야 할 숨결도, 온기도, 심장의 맥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있지 않아.’


그것을 깨닫는 것도 잠시.


“앉으라 했다.”

“읏......!”


뒤에서 다가운 우악스러운 손길이 해랑을 눌러 바위 위에 앉혔다.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은 해랑이 시선을 쳐들었다. 직후 혈교도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저편의 흑포를 입은 무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무언가 복잡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언제 풀려나왔는지 모를 괴황지들이 허공을 떠돌며 제각기 살아있는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였다.


해랑의 귓가에 음울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에 모여든 혈교도들. 공동의 가장자리에 둘러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단 한마디도 알아 들을수가 없었다.


모든것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찰나 해랑은 공동 안의 공기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 무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그들이 공기중의 기운을 붙잡고 뒤틀어내고 있었다.


‘내공 기파?’


객잔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무인들의 이야기. 내공이라는 것을 이용해 힘을 발산하고 천지를 뒤흔들 무공을 펼친다 했다. 해랑 자신은 결코 보거나 느낄 수 없어야 할 힘. 하지만 본래라면 자신이 인지할 수 없어야 할 흐름이, 어째서인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이 가운데에 앉아 있어서일까.


그로 인해 해랑은 한순간 전부 보았다.


무인들 사이를 휘감고 돌던 힘이 점차 바닥을 가득 채운 피의 문양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흐르던 기파가 핏물에 닿는 순간, 바닥의 문양이 마치 맥동하는 혈맥마냥 꿈틀거렸다는 사실도.


그와 동시에, 네 방향에 앉아있던 아이들의 입이 쩍 벌어지며 소리없는 비명을 내질렀고, 그들의 몸에서 막대한 기운이 뽑혀나오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 기운이 해랑이 앉아있는 중심의 바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뭐라도 해야......!’


두려움보다 행동이 앞섰다. 미지의 공포 앞에서 얼어 붙어있던 해랑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의 몸이 바위 위에 못 박힌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몸이 통제에서 벗어난 양.


그때였다.


쿠궁.


한순간 둔중한 울림이 사방을 채웠다. 귓가를 넘어, 몸에 선명하게 전달되는 울림. 거대한 진동이 사방을 채우는 순간, 해랑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시야에 공동의 천장이 들어왔다. 위를 향해 바스스 퍼져나가는 실금과, 그 너머에서 흩어져 들어오는 옅은 기운마저.


쿠웅.


직후 한번의 소음이 더 뒤따랐다. 동시에 끊김없이 흘러나오던 혈교도들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들도 소란을 인지한 듯이.


“무슨......? 이곳까지 거리가 아직 한참 남았을 것인데.”


의문석인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그 순간.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이 터져나왔다. 한순간 공동의 천장이 쩌억 갈라지며 사방으로 파편과 돌무리가 비산했다. 동시에 그 사이에서 웅혼한 황금빛의 기파가 퍼져나왔다. 무너지는 바위 사이로 눈가에 검은 천을 두른 여인이 낙하했다. 온몸에 거대한 황금빛 기운을 두르고 있었는데, 어두운 공동을 순식간에 빛으로 채울 정도였다.


그 직후였다. 파편들 사이로 문득 검은 그림자가 흩어져 나왔다. 물처럼 녹아내린 그림자가 찰나 지상에 다다르는 순간, 키 큰 흑포의 인영이 땅에서 솟아나듯 일어났다.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혈교도들의 등 뒤에서 손을 펼쳤다. 그와 함께 일어난 검은 그림자가 삽시간에 혈교도들의 목을 관통하는 것도 한순간.


뒤이어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시야 전체가 새하얗게 밝아지고.


쿠르르릉!


우렛소리가 떨어졌다.


쩍 부서진 공동의 천장 사이로 시리도록 새하얀 빛이 낙하한다. 저 높은 천장의 너머부터 해랑의 코앞까지. 한줄기 거대한 기둥처럼 솟아난 벼락 줄기가 떨어지는 돌무더기와 파편을 풀어헤치며 이어졌다.


그것도 찰나. 이윽고 새하얀 번갯불이 흩어지며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기파로 펄럭이는 흑포. 왼손에는 길게 늘어뜨린 검신을 따라 뇌기가 이따금 튀어오르고 있었다.


“괜찮나요, 해랑?”


물어오는 음성이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더없이 날카로웠다. 그를 마주하는 순간, 해랑은 조여오던 심장의 압박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백연......!”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럼......”


스릉.


백연이 검을 치켜들었다. 사방을 휘감은 불쾌한 혈향에 소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혈교의 술법.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을 것인가.


그를 노려보며 제각기 기파를 일으키는 혈교의 사도들을 향해 소년이 입매를 비틀었다.


“벌레들을 치워버릴 시간이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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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5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7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6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7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0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59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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