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연재수 :
288 회
조회수 :
1,508,059
추천수 :
30,266
글자수 :
2,199,617

작성
23.10.04 18:20
조회
4,948
추천
106
글자
25쪽

태청신공(太淸神功)

DUMMY

※※※



-대장.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뎁쇼.

-뭔데?

-대장은 왜 그렇게 강해지는 것에 집착해요?

-그냥.


먹먹한 귓가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기억과 현실이 뒤섞여 환청을 불러 일으킨다. 아니, 심상에 있기에 어쩌면 마음 속에서 들리는 소리일지도.


-아하핫. 그냥이 뭐에요. 김빠지게.

-불만 있냐? 본래 검객이란게 그런거다. 협행을 하려 해도 힘이 있어야 하고, 위세를 떨치려 해도 힘이 있어야 하지. 검이 모든 것에 앞선다.

-그럼, 대장은 강해져서 뭘 하려고 하는데요?


소매가 길게 늘어져 있던 장포는 어느새 갈기갈기 찢겨나가 있었다. 흩어진 머리칼은 반쯤 불타 나풀거리고, 그을린 팔다리에서 수천개의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올라온다.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비릿한 토혈을 뱉어내며 백연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몰아치는 화염과 파도. 창공을 수놓는 수많은 벼락의 향연.


‘반동이 심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짚은채였다. 광활한 대지 위에 홀로 선 백연. 그 신형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수백번의 시도가 지나간 후였다. 뇌광을 손아귀에 쥐어채려는 무모한 도전. 그러나 태청의 구결을 응용해 힘의 반동을 흘리려 했음에도 모조리 실패했다.


그만큼 강했던 까닭이다. 적양공의 의념과 현음공의 의념이 충돌해 만들어낸 백광. 하늘을 수놓는 뇌기(雷氣). 인간의 몸에 담기 어려운 힘이었다. 풍백이 경고한대로.


-알 것 없다.

-이거 과묵한 사람이네요. 재미없다.

-그럼, 나도 하나 묻자. 너는 왜 그렇게 무공 연마에 집착하냐?

-그야......


백연이 숨을 가다듬었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혈향이 진했다. 심상 속임에도 감각은 현실과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온몸을 저미는 고통도, 어지러이 흔들리는 머리도.


이윽고 백연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여휘검을 짚은채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 보는 모습.


동시에 귓가에 예전 나눴던 대화의 답이 속삭여 온다. 실제로 들리는 것인지, 그저 빛바랜 기억이 어느 순간 자꾸 끌어올려지는 것인지.


어쩌면 주화입마의 전조일지도 몰랐다.


-저는 잃는게 싫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강해져서 모두를.


그러나, 백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입속으로 천천히 같이 뇌까릴 뿐이었다. 과거 들었던 청휘의 답변을.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지키려고요.

“지키려고.”


메마른 육성이 허공에 흩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백연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그가 알 것 없다며 넘겼던 청휘의 질문에 대한 답. 그 자신 또한 다르지 않았기에.


“......태청이라.”


백연이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펼쳐든 서책의 책장이 촤르르륵 넘어가기 시작했다. 안에 새겨진 수많은 구결과 고민.


“이대로는 불가능이겠군.”


청휘가 만든 무공. 구결이 완전하지 못했다. 수많은 고민과 연마를 통해 만들어낸 뛰어난 무공이나, 그 근간이 운연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느렸다. 무거움이 가미된 무공은 그 뿌리를 과거의 곤륜에 두고 있었다. 이제는 잊혀져 사라져버린 잔재들.


상단전 신(神)을 이용하여 반동을 받아낸다는 생각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 단련의 수준.


‘애초에 육체가 운연공으로 단련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운연공을 재해석해 만들어낸 운연동공. 풍백이 언급했듯이, 그 심법은 그야말로 신공절학이었다. 무공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 육체를 변화시키니.


그러나 아무리 운연동공의 축기 속도와 육체를 단련하는 속도가 운연공에 비해 빨라졌다 해도, 절대적인 시간이라는게 존재했다. 무공을 익히는 것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시간.


그가 무공을 익힌지 고작해야 일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것이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 해도 그 시간 안에 육체를 새로 일궈낼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태청을 이용해 반동을 줄이더라도, 아직 그의 몸은 남은 여파조차 감당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정기신(精氣神)중 정(精)이 나머지 둘을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


풍백이 말한대로였다. 지금부터 딱 일년여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천천히 몸을 만들고 무공을 적용하면 될 터인데.


그러나.


‘방법이 있다.’


그 시간을 건너뛸 방안. 분명 존재했다. 허나 극히 위험한 도박에 가까운 일. 그럼에도 백연은 고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런걸 생각했다고.”


본디 경지를 뛰어넘은 무인들의 몸에는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점차 고강해지는 영성과 기운. 육체 단련을 끝없이 한다 해도 인간의 몸으로는 한계가 존재한다. 모든 생명에게 노화와 쇠퇴는 필연적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니.


허나 기(氣)와 신(神)이 어떠한 한계를 넘는 순간.


그 둘에 육체가 이끌려 온다. 무공을 펼치기 최적화된 몸으로 육체가 다시 짜여지는 과정.


본래는 강제로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온몸 신체의 경혈이 막힘없이 뚫려 있어야 하고, 주화입마에 다다르지 않게 버텨낼 굳건한 신(神)이 있어야 하며, 막대한 양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경지를 넘어서 다다른 무학.


‘셋은 있다.’


본디 특이한 신체였다. 자신의 신체 경혈이 전부 막힘없이 뚫려 있다는 것은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알았다. 신(神)의 굳건함 또한 자신이 있다.


더해, 지금 그의 몸에는 찾아보기 힘든 막대한 양의 내공이 머물고 있었다. 부러 풀어놓지 않고 하단전에 붙들어맨 자소단의 거대한 기운.


그 양이 해일과 같았다. 몸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숨결에서 새어나오는데, 그가 집중을 잃고 이것을 풀어놓는 순간 몸 전체가 찢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양이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단 하나.


‘내 무학의 경지.’


그가 만났던 풍백과 검왕. 두 무인 다 이러한 경지를 넘어선 이들이었다. 풍백의 청년같은 모습은 아마 노화순청에 이르렀기 때문일 터이며, 중년의 외양을 한 검왕의 육체는 환골탈태를 겪은 모습일 터.


전생의 검귀는 분명 그러한 경지에 필적했으나 넘어서지는 못했다.


단 한번을 제외하면.


“그때 그 검을.”


백연이 뇌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귀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내쳤던 단 한번의 검격. 하늘을 반으로 가르던 일검(一劍). 아직까지 뇌리에 선연했다. 내리그은 검끝에 반으로 갈라졌던 세상. 섭리를 벗어나는 검격은 분명 한순간 그가 닿았던 경지였으니.


“다시.”


짤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백연이 숨을 뱉었다. 망설임 없는 움직임. 여휘검을 치켜드는 동작과 함께였다.


동시에.


후욱.


주변의 기파가 뒤틀렸다. 여태껏 묶어두던 자소단의 기운을 한번에 풀어놓는다. 찰나 묶여있던 막대한 양의 내공이 터져나오듯 휘몰아쳤다. 온몸의 경혈을 꿰뚫고 찢어놓을 것 마냥 날뛰는 자소단의 기운.


세맥이 뒤틀리고 근육이 찢겨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물밀듯 찾아온 고통의 물결이 뇌리를 연이어 강타한다. 한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할 정도로 극심한 아픔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이를 깨물자 무언가 아득 깨져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렇게.


쿠웅.


한 걸음을 내딛었다. 동시에 우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느낀 것일까. 뼈가 뒤틀리는 감각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백연의 눈은 여전히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리게 번뜩이는 뇌전을 향해.


동시에 촤르륵 넘어가던 서책의 책장이 멈춰서고, 그곳에 새겨진 새로운 글씨들이 허공에 유형화 되어 맴돌기 시작했다.


구결이 아닌 일기를 적어놓은 듯한 가벼운 어조.


[언젠가, 내가 곤륜으로 돌아간다면.]


쿠웅.


두번째 걸음에 땅이 움푹 패였다. 발끝에서 퍼져나오는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처럼 뻗어나간다.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다. 대장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니 부디 그때.]


몸의 부하를 뇌리에서 지웠다. 경혈 속에서 휘몰아치는 내공의 파도. 이미 안쪽에서부터 몸을 갉아먹고 있다. 강제로 신체를 한계로 몰아 붙이는 것이다. 동시에, 머리는 과거의 검격을 그려낸다. 한계를 뛰어넘던 일격을.


[이 무공이 완성되어 모두를 지켜냈기를.]


백연이 숨을 뱉었다.


“아직도 미완이다. 바보같은 놈. 제대로 만들었어야지.”


아득. 갈려나가는 잇새로 백연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언뜻 고통 섞인 신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도 시도는 좋았다. 그러니까 내가......”


쿠웅!


세번째 걸음이었다. 동시에 도약이었다. 걸음이 대지를 딛는 순간, 주변의 땅이 패이며 쩌억 갈라졌다. 가공할 양의 기파가 물밀듯 터져나오며 백연의 신형을 떠밀었다.


찰나, 흐릿한 백연의 신영이 한줄기 벼락마냥 허공을 타고 질주했다. 여전히 터져나오는 뇌광을 향해서였다. 몇번째인지 세기도 어려울 도전.


“완성시켜주마.”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번뜩이며 점멸하는 시야 속. 백연은 시린 백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아귀는 분명 이전보다 살풋 커져 있었다. 허공을 저미는 대기 속에서 반쯤 불타버린 머리칼이 어느새 다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뻗어낸 팔의 간합은 한층 길어져 있었다.


한순간 흐릿하게 일렁이던 백연의 눈동자가 완전히 자색으로 물드는 순간.


쩌저저정!


우렛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전부 찰나였다.


백연의 신형이 뇌광에 가려 흐릿하게 사라지는 것도. 끝없이 휘몰아치던 화염의 폭풍과 대해의 파도가 우뚝 멈춰서는 것도. 반으로 갈라진 세상의 풍경이 뒤틀리듯 휘어지며 짙푸른 창공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도. 쉴새없이 세상을 가르던 뇌성이 멎으며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는 것도.


직후.


흰 깃털같은 구름이 하늘에 피었다.



※※※



쿠구구궁!


연격이었다. 끊이지 않는 움직임. 사방에 펼쳐진 그림자가 제각기 의지를 가진듯 뻗어나가며 주변을 잠식했다.


“크아악!”

“분명 부상으로 약해졌다고......!”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들. 그러나 멀리 뻗어나가지 못했다. 빠르게 경공을 펼쳐 도주하던 청화단원의 옆구리. 노을에 드리운 그림자가 한순간 꿈틀거리며 일렁이고.


“거기까지.”


후욱.


일순 늘어진 그림자가 부풀어 오르는 듯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옆에서 나타난 흑랑이 그대로 비도를 휘둘렀다.


“놈......!”


비명을 외칠 새도 없었다. 찰나 번뜩인 검광이 그대로 마교도의 목에 틀어박혔다. 빠르게 질주하던 그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허공에 흩어지는 핏물이 가득했으나 흑랑은 두번 돌아보지 않았다. 비도를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흑랑의 신형이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흩어지는 꼴들이 쥐새끼같군.”


우드득!


훨씬 떨어진 곳에서 불쑥 나타난 흑랑의 손아귀에 다른 청화단원의 목이 반으로 꺾였다.


일격(一擊).


격차가 심했다. 본래도 평범한 마교도는 흑랑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 상대가 청화단의 정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개개인이 하오문의 그림자를 상회하는 무력을 지녔으나, 그렇다 해도 방주 대리에 미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그간 해왔던 것 처럼 포위망을 펼친채 길게 소모전을 펼치고 합공을 했다면 모르겠으나, 이리 간격을 내주고 싸움을 걸어온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내빼는 속도가 빠르군.”


중얼거린 흑랑이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눈길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괜찮나?”


그의 물음이 옆을 향했다. 직전까지 그가 몸을 회복하고 있던 초가집. 그 앞에 지친 기색으로 벽에 기댄 소홍을 향해서였다.


이윽고 작은 머리가 천천히 올라오더니 한번 끄덕였다.


그러나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린 흑랑은 소홍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내상이 있군. 마교의 무공들은 위험하다. 임시로 점혈을 해주지.”

“괜찮은데.”

“고집이 네 사제나 다를바 없군. 가만히 있어라.”

“......백연만큼은, 아닌데.”


흑랑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직후 한결 안색이 편해진 소홍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흑랑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부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약의 효능이 놀라웠으니. 대체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궁금할 정도야.”


흑랑이 자신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온몸에 가득했던 상처도 거의 아물었고, 몸을 저며오던 청화단주의 무공 여파도 전부 해소했다. 덕분에 그는 지금 만전에 가까운 상태.


이리 빨리 회복되리라 기대하진 않았는데. 기연이라면 기연이었다.


“몸이 이리 가벼운 것이 몇달 만인지 모르겠군.”

“청화단, 쳐들어왔어.”

“보면 안다. 나머지는 어디있지?”


소홍이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켰다. 시야 너머 푸른 화염과 자색 검기가 일렁이는 곳. 너무나 흐릿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그것을 본 흑랑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서 막으러 갔나보군. 청화단주는?”

“검룡이.”

“......버티고 있는게 기적이군.”


흑랑이 입매를 비틀었다.


“백연은 어디 있지? 청화단주를 상대하지 않고 빠져나가는게 최선이다만. 놈은 괴물이다.”


단언하는 모습. 흑랑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곳 마도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물중, 청화단주는 단연코 최악중 하나였다.


그의 무공 수위는 구파의 고강한 무인들에 필적하는 수준. 그 싸움 방식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화천귀제의 직전 제자로 이름을 알렸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였다.


“내가 붙들 수 있으니 먼저 빠져나가는 것이......”


흑랑의 말 사이에 소홍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흑랑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 생각이 없군?”

“백연이, 그러겠어?”

“맞는 말이다만.”

“구하러 온거야. 당신을.”


소홍의 말에 흑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혼자 청화단주를 붙들어 놓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특히 이리 회복된 상태라면 꽤나 긴 시간동안 교전을 이을 수 있을 터. 그러나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것을 백연도 알고 있을 터인데.


“나를 구하려 놈을 상대한다고? 다같이 자살하는 취미라도 있나. 이 몸은 그렇게까지 비싼 목숨이 아니다만.”


자조섞인 중얼거림에 소홍이 천천히 눈을 들어올렸다. 소년의 맑은 눈이 흑랑의 냉막한 시선과 마주쳤다.


“온다고 했어.”


소홍이 손을 뻗어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청휘의 집. 백연이 있는 방향.


“한 시진 안에.”

“......저건.”


흑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홍이 가리킨 방향. 피어오르고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사방을 휘감은 바람에 흩어져 오는 기파는 분명 백연의 기운이었다. 그 양이 지나치게 많았을 뿐.


“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나직히 뇌까리는 음성. 그러나 흑랑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백연이 그리 말했다 했다. 언제나 생각이 있는 녀석이었으니 이번에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터. 그것이 설령 청화단주를 진심으로 상대한다는 도박에 가까운 생각이라도 그러했다.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아무리 낮은 확률의 도박이라 해도. 흑랑은 그런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는 이미 백연을 믿고 도박을 걸었었다. 이제 와 또다시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우리는 무얼 하면 되지?”

“저쪽, 힘에 부칠거야. 도와줘야 해.”


소홍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흑랑이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룡 홀로 청화단주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에 가까운 일. 그가 가서 균형을 맞춘다면 한결 시간을 벌 수 있을터다. 더해 저편에 가득할 마교도들도 그랬다.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았으니.


“너는 이곳에 있도록. 내상이 심하다.백연을 지킬 자도 필요하고.”

“......그럴거야.”

“살아남아 만나면 좋겠군.”


중얼거린 흑랑이 기파를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 생각난듯 뒤를 돌아보는 모습.


“혹, 월영신공을 전수받을 생각이 있나?”

“......응?”

“생각이 있으면 말하도록.”


그 말과 함께 흑랑의 시선이 힐끔 소홍을 스쳤다. 동시에 그의 발치에서 늘어진 그림자가 후욱 일어나며 그의 신형을 집어삼켰다.


“네 오성이 무공에 어울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림자가 뒤틀렸다. 찰나 녹아내리듯 흩어지는 그림자. 절세신공의 기파가 허공으로 분연히 흩어지고.


이윽고 홀로 남은 소홍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 없는데.”



※※※



카가가가각!


허공을 따라 검이 휘어졌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흩어진 검격이 찰나 분열하더니 위아래를 동시에 점했다. 뒤따르는 자색 경파.


환상같은 검격이었다. 만개하는 꽃잎들이 시야를 가리고 감각을 저해시킨다. 뭇 무인들이라면 현혹되어 순식간에 목을 내줬을지 모르는 일격.


그러나 상대는 뭇 무인이 아니었다.


“하찮은 잔재주를!”


화르르륵!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태풍처럼 귓가를 파고든다. 동시에 펼쳐진 꽃잎을 갈갈이 찢어발기며 일어난 푸른 불꽃이 휘몰아쳤다.


짙은 기파. 몸속에 화기를 품어 즉시 불꽃으로 바꾸는데, 그 출수 속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백연의 싸움 방식을 따라 무아에 접어들었음에도 그랬다. 더해, 이 불꽃은 그저 화기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끈적하게 달라붙어오는 마기.


“......!”


유성이 몸을 뒤틀었다. 휘어지는 검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였다. 본능에 가까운 영역. 이미 생각을 놓은지 오래되었다. 모든 신경은 감각에 싣고,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의 오성에 맡겼다.


콰아앙!


직후 폭음이 귀를 저몄다. 검을 내친 유성이 뒤로 한보를 밟으며 장법을 내치는 것과 동시였다. 손에서 퍼져나간 기파가 화염의 여파를 흩어내고.


“죽어라.”


그 너머 부서진 분홍빛 경파와 불꽃 사이를 뚫고 나오는 청화단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압도적인 기세였다. 청화단을 이끄는 단주라는 위명. 조금 달리 보인다. 익히고 있는 무공 자체가 그러한 기질을 띄고 있는데, 사방에 흩뿌린 화염을 마치 군세를 이끌듯이 다룬다.


일전 스승이 했던 말이 뇌리에 스치듯 떠오른다. 다수의 무인을 상대하는 법. 군세를 상대로 무공을 펼치는 원리. 삽시간에 받아들여 제것으로 만든다.


‘진격하는 선봉을 짓밟는 것이 상책. 그러지 못하면 선봉을 흘리고 잔가지를 쳐내는 것이 중책.’


그대로 일보 더 뒤로 빠진다. 언뜻 휘청이는 유성의 신형이 잠시 균형을 잃은 것 처럼 보일 정도.


그것을 본 청화단주가 한층 더 속도를 더해 질주한다. 지붕을 밟는 순간 쩌적 금이 가며 불꽃이 터져 나오는 모습.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사선으로 보법을 밟았다. 청화단주의 손끝에 실린 푸른 화염을 스치듯 지나가면서였다. 반쯤 회전하며 검격을 날린다. 끝에 매달린 기파가 휘어지며 비스듬히 청화단주의 옆구리를 노리고 짓쳐 들어갔다.


‘이런 거였군요.’


뇌리에 또다른 깨달음이 스친다. 목숨을 걸고 압도적인 적과 싸우는 지금. 유성의 오성은 처음으로 제 격에 걸맞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간 막혀있던 길이 뚫리고, 시야가 넓어진다. 지금 스치는 이 검격도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사선에 내건 일보.


“놈이......!”


그러나 청화단주 또한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 깨닫고 있는 대부분의 경험들이, 청화단주는 이미 거쳐온 길이었다.


쿠웅.


청화단주가 지붕 위에서 짧게 진각을 밟는 순간. 굉음과 함께 막대한 기파가 터져나왔다. 삽시간에 휘몰아친 기파가 유성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검끝에 실린 기운을 흩었다. 동시에 유려하게 돌며 내치는 수도. 불꽃을 매단 손날이 그의 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피해라.”


휘익!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의 옆을 스쳤다. 흑랑의 나풀거리는 흑색 장포가 길게 눈앞을 채웠다. 찰나 수도를 받아내며 그림자를 휘감는 모습. 그것을 인지하는 동시에 유성은 방어를 포기하고 보법을 밟았다.


쾅!


짧은 충돌과 여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동시에 세 무인의 신형이 제각기의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지붕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흑랑과 유성.


“......젠장할.”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귀에 담으며 유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싸움을 이어나간지 얼마나 된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미 시간 감각조차 지워진지 오래였다. 어느새 하늘 한쪽이 점차 검푸르게 물들고 있다는 사실만 눈에 들어올 뿐.


하늘에 점점이 새겨진 별빛이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끝이 없군.”


흑랑이 손을 펼쳤다. 그가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그가 이 전장에 합류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유성에게 손을 보태며 간간히 마교도들을 상대한지도 한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화단은 지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요?”

“곤륜의 두 녀석은 조금 물러났다. 팔영은 저기 있군. 슬슬 포위당하고 있는데.”

“......단주를 이길 방법이.”


유성이 검을 들어올렸다. 시야에 검끝이 살풋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색 기파도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내공을 거의 소모한 것이었다. 기나긴 싸움이 이어졌으니 여기까지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마저도 중간에 흑랑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전투를 이어나가는 도중 성장하지 않았다면 불가했을 일.


하지만.


“저놈의 불꽃이 안 보이나.”

“보입니다.”

“아직 전력이 아니다.”


흑랑이 담담히 선언했다. 그 말에 유성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저편에 우뚝 선 푸른 불꽃은 점차 기세를 더해가기만 할 뿐이었다. 전투를 시작한 이래 단 한번도 약해지는 일 없이. 점차 커져가는 기운.


“놈의 염혈신공이 본디 가진 힘이다. 아직도 끝에 다다르지 않았어.”

“그래도 해봐야지요.”

“......주변에 비슷한 놈들밖에 없군.”


헛웃음이 섞인 흑랑의 목소리. 그러나 그 또한 천천히 기파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제각기 결전을 준비하는 모양새. 이미 둘 다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불꽃이 더 커지게 놔두면 정말 끝이다.”

“한번에 전력으로 가죠.”

“내가 먼저다. 이어라.”


짤막한 선언. 유성의 검격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습이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유성이 기파를 억지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늦었다.”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사방을 저미는 섬뜩한 기파. 그것을 인지한 순간 눈앞을 뒤덮은 것은 거대한 푸른 화염이었다.


찰나.


유성의 감각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늪에 빠진듯 느려지는 시간. 시야가 확장되며 사방을 관조한다.


분명 저편에 있던 청화단주의 신형. 그의 코 앞에 다다라 있었다. 손끝에 매단 푸른 화염이 꼬리처럼 길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등 뒤로 늘어진 화염을 장포인 양 걸치고 있는데, 그 작열하는 열기가 대기를 삽시간에 바싹 말렸다.


‘이런......!’


두 사람이 반응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격. 한순간 깨달았다. 여태껏 싸워오던 청화단주의 불꽃이 한층 강해져 있었다는 것을.


‘좌상단.’


유성이 검을 휘둘렀다. 인지 이전에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짓쳐오는 첫 일격. 푸른 화염으로 이루어진 검격을 검으로 받아친다. 동시에 손아귀에 느껴지는 막대한 반동.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덮쳐오고.


‘우중간. 무슨 연격이......!’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몸을 뒤틀며 암향표를 반보 펼쳤다. 유성의 검끝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순식간에 좌상단에서 우중간까지 꺾였다.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방어초. 재차 스스로를 뛰어넘는 움직임이었다. 스승이 보았다면 며칠이고 칭찬해줄 만큼.



‘다시 우하단까지......’


후욱.


휘어든 검격이 한차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상단전 백회혈이 작열하는 것처럼 번뜩였다. 한계를 뛰어넘어 내달리고 있다는 증거.


그러나.


“약하군. 너무.”


꺼질 듯 일렁이던 자색 경파가 결국 푸른 화염에 휩싸이는 것도 한순간. 비웃는 듯한 음성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화염에 휩싸인 손아귀가 그대로 유성의 검을 움켜쥐었다.


쩌어어엉!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박살난 금속의 파편이 별무리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산산조각난 검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끝이다.”


콰득.


피륙음이 울렸다. 왼 어깨에 느껴지는 작열통. 푸른 화염에 휩싸인 수도가 어깨를 반쯤 파고들었다. 마지막 순간 몸을 뒤틀어 심장이 관통 당하는 것은 피했으나 거기까지.


“......쿨럭.”


옅은 기침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시야 한켠, 푸른 화염 너머로 짙은 밤하늘이 엿보였다.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별들이었다. 저편 하늘을 가득 채운 밝은 빛.


‘천추성(天樞星)이......’


눈에 들어온 가장 밝은 별의 이름이 문득 뇌리에 스치는 그 순간.


새하얀 빛으로 시야 전체가 밝아졌고.


쿠르르릉!


우렛소리가 떨어졌다.


찰나 눈앞에 끝없이 치솟던 푸른 화염이 반으로 갈라진다. 어느 순간 하늘에서부터 지저까지 실타래마냥 분분하게 이어진 벼락 줄기를 따라서였다. 직후 새하얀 번갯불이 흩어지며 드러난 자리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긴 머리칼 사이로 자색 안광을 흩뿌리면서 흘끔 돌아보는 눈매가 유려했다. 원래도 얇았던 선이 한층 더 얇아진 듯 했는데, 그 외양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양 스러질듯 투명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은 어리기만 했던 전보다 한층 성장해 있었다.


한순간 꿈결이라고 착각할 법한 시간이 스치고.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작가의말

지각 죄송합니다. 100화까지 따라와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2 철야방(8) +4 23.12.22 2,996 84 19쪽
141 철야방(7) +4 23.12.21 3,008 83 17쪽
140 철야방(6) +4 23.12.20 2,986 83 17쪽
139 철야방(5) +4 23.12.19 2,999 84 19쪽
138 철야방(4) +4 23.12.18 3,130 79 18쪽
137 철야방(3) +5 23.12.16 3,199 80 15쪽
136 철야방(2) +3 23.12.15 3,123 83 15쪽
135 철야방 +4 23.12.14 3,119 86 16쪽
134 재회(3) +5 23.12.13 3,210 87 19쪽
133 재회(2) +4 23.12.12 3,216 86 16쪽
132 재회 +5 23.12.11 3,309 88 17쪽
131 성화방주(3) +7 23.12.09 3,295 79 15쪽
130 성화방주(2) +5 23.12.08 3,286 85 20쪽
129 성화방주 +5 23.12.07 3,361 89 16쪽
128 사천(4) +8 23.12.06 3,338 88 19쪽
127 사천(3) +8 23.12.05 3,355 92 22쪽
126 사천(2) +5 23.12.04 3,426 87 17쪽
125 사천 +8 23.12.01 3,554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6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90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90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9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9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4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5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4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7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64 92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