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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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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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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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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네가 만든 마을(9)

DUMMY

콰과과과과!!


넘실거리는 푸른 화염이 휘몰아치며 질주한다. 불태우는 것을 넘어서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부딪히는 것을 전부 갈아버리는 모습. 건물들이 늘어선 좁은 길목을 따라 응축된 기파가 연이어 터져나온다.


콰앙!


갈라진 화염의 줄기가 제각기의 의지를 지닌 듯 투사되어 전각 세 채를 연이어 꿰뚫고 돌진했다. 사방으로 찢어진 네 갈래의 화염이 전부 하나의 목표를 노리고 맹금이 낙하하듯 예리하게 떨어져 내렸다.


막아서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 듯한 청염. 그러나 청염이 목표를 집어삼키는 일은 없었다.


질주하는 흑포의 무인. 그를 쫓아 맹렬하게 솟구쳐 오는 화염을 힐끗 하더니 허공에서 몸을 뒤튼다. 찰나 부서지는 전각 지붕을 발판으로 삼아 솟구친 직후였다.


은빛 검신이 노을을 받아 흐릿하게 이지러지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사방을 울리고.


“매화구변(梅花九變).”


파아아앗!


검끝을 따라 분홍색 경파가 올올이 피어올랐다. 한순간 자그마한 점에서부터 터져나오듯 번져가는 거대한 아홉 겹의 꽃잎. 그 기세가 부드럽게 뻗어나가며 질주하는 청염 앞에 만개한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산산조각난 경파 조각이 흩어졌다. 아롱지는 노을빛에 올올이 흩어진 경파 조각이 잠시 반짝거리다 이내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맹렬하게 치솟던 청염은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아홉겹의 꽃잎은 마지막 두 장만을 남겨놓고 잠시 버티다 이내 흩어져 없어졌다.


직후 암향표로 옆 전각의 지붕에 착지하는 유성. 먹먹한 침묵이 귓가를 스쳤다.


“잔재주가 많구나!”


쾅!


그러나 굉음에 뒤따르는 고요도 잠시. 부서지는 건물의 잔해를 뚫고 솟구치는 인영이 있었다. 줄기줄기 흩날리는 머리칼과 장포. 손아귀에 그러쥔 화염을 제 수족 부리듯이 여유로이 내뻗는다.


청화단주.


몇몇 신공절학들은 보신경과 무공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했다. 무영방주의 월영신공이 그러한 무공이었고, 풍백의 바람을 휘감은 검이 그러했다.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자신의 무공 성취에 완벽히 비례한다는 의미이다.


염혈신공을 일으킨 청화단주는 유성의 암향표로 거리를 벌릴 수가 없는 수준의 상대.


“쥐새끼처럼 내빼지 말고......!”


일그러진 얼굴 사이 암적색의 눈이 번들거렸다. 내뻗은 양손에 모여든 청염. 일순 두 자루 검의 형태를 갖춘다. 솟구치는 자세 그대로 몸에 화염을 휘감으며 속도를 더한다.


내공 수발의 속도가 지극히 빠르다. 잡념이 없는 것인지. 하나에 집중한 광인은 무아의 경지에 이른것과 비슷하다 했다.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린 무인이 본래 지닌 무위보다 고강해지는 이유다.


‘내가 너무 느려.’


찰나 유성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었다.


매화구변을 일으킬때 내친 경력을 회수하고 있었는데, 청화단주의 속도에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짓쳐오는 청화단주의 공격.


‘스승님이었다면.’


간극 속에 접어든 상태였다. 허공을 가르는 청염의 검을 눈에 담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어느날 스승님, 운하검신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내려놓으렴. 너는 너무 많은걸 담고 있단다. 그 작은 머리속이 어찌나 무겁겠니.


웃으며 이야기하던 스승님. 생각을 비우고도 검을 내칠 수 있어야 한다 했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싸움에 있어 수를 쪼개고 상대의 공격을 가늠하는 것은 기본. 그는 그리 생각했다.


당시의 유성 자신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던 것을.


‘......백연이었다면.’


섬서의 일이었다. 금안나찰을 상대하는 꼬마를 보며 유성의 생각은 깨어졌다.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전투의 궤(軌). 일련의 상식을 벗어난 싸움이었다.


금안나찰을 상대로 몸을 내던지며 검을 뿌리던 백연. 검식을 내칠때마다 가져가는 선택지가 유성 자신과는 판이했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 들어가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모든 변수를 미리 읽은듯이 검을 내친다.


그 전투를 눈에 담은 이후 계속 궁금했다. 때문에 화산파에 돌아가서도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몇달을 고민했다. 생각이 그곳에서 떨어지질 않았으니까.


어떻게 그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싸울 수 있냐고.


그리고 결국 얼마 전, 직접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 백연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가벼웠다.


-믿어야지. 자신의 감각을.

-무슨 말인지......

-머리를 비워. 네가 그동안 해온 수련. 네 재능. 부족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항상 위험을 감수하며 한발짝 앞으로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했지?

-응.

-발을 앞으로 딛는 순간,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어. 여길 넘어서면 상대의 검에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지점. 그걸 넘어가는 그때부턴.


피이잇.


귓가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다가오는 청염의 검. 넘실거리는 불꽃 너머로 일그러진 청화단주의 얼굴이 보인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유성은 검을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정해진 검식이 아니었다. 손 가는대로 뻗어낸 검격의 자세.


귓가에는 여전히 백연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는 듯 했다.


-네 검끝이 생각에 앞서야 해. 죽음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검 한자루만을 뇌리에 새겨.

-그게 가능한건가?

-네 의지에 달렸지.


언제나처럼 여상히 답하던 놈. 그 모습에서 유성은 자신감을 읽었다.


항상 반드시 승리한다는 그런 자만심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이 최적의 선택을 내릴 것이라는 확신. 터무니 없을 정도로 강한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것들이 합쳐져 사선을 넘나드는 백연의 싸움 방식을 만들었다는 것을 유성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승님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를 비우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우는 순간 의식이 가라앉으며 주변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인지되는 듯한 감각. 뻗어오는 청화단주의 두 자루 청염의 검이 눈에 보였다. 한 자루는 종격으로, 한 자루는 찌르기로.


동시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칼 너머, 노을지는 하늘이 보였고. 뒤편의 부서지는 전각 너머 장포를 펄럭이며 암기를 던지는 하오문의 노인이 보였으며, 건물 사이를 가득 메우며 뛰어오르는 마교도들을 상대로 쌍검을 휘두르는 루주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전부 찰나였다.


사방의 상황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유성의 검끝은 이미 사선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휘어지는 검끝에 잔영처럼 남는 자색 경파가 선연했다.


찔러오던 청염의 검을 검의 낮은 부분으로 받아 올려치는 것과 함께, 그대로 전진 보법을 밟는다. 상대의 종격 범위에 어깨를 내주며 들어가는 움직임. 왼발을 상대의 뒤에 놓으며 전신에 기파를 두른다.


직후 펼쳐지는 암향표. 한순간 내줬던 어깨를 그대로 회수하며 한바퀴 회전한다. 유려하게 펄럭이는 장포의 끝자락이 청화단주의 종격에 베이고.


푸화악!


허공에 붉은 핏물이 점점이 비산했다. 두 무인의 위치가 뒤바뀐 직후였다.


서로를 등지고 선 청화단주와 유성.


“하하하핫......”


낮게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 청화단주의 옆구리 옷자락이 길게 베어져 있었다. 사이로 드러난 몸에 길쭉하게 그어진 검상. 벌겋게 벌어진 상처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청화단주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네놈.”


유성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흩어져 나오는 숨결에 섞여든 기파가 진했다. 흩어지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떨어지는 눈매가 선명했다. 청화단주에게 고정된 눈동자.


자색과 분홍으로 아롱진 눈동자가 노을 아래 보석처럼 빛났다. 자하신공의 경파가 잔영처럼 검끝을 따라 일렁였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청화단주를 응시하는 눈. 호흡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청화단주가 이를 드러냈다.


“강해졌군. 첫 일격이 이렇지 않았는데.”

“......”

“좋다. 강할수록 좋아. 네 자하신공. 본도의 화염을 일굴 재료로 더없이 적합하다. 인정해주마.”


치이이익.


그와 동시에, 지붕 위 점점이 흩어진 핏물에서 옅은 김이 올라왔다. 청화단주가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에 내공 기파가 깃들었다. 각기 의지를 지닌 듯이.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유성이 보법을 일으키려 걸음을 내딛고.


“염혈신공. 잔화(殘火).”


콰아아아앙!


전각의 지붕이 그대로 푸른 화염에 휩싸였다.


한순간 일어난 막대한 열기. 찰나 전장의 모두가 그쪽을 돌아볼 만큼 강렬했다. 마교도들을 상대로 이검을 휘두르던 루주도 마찬가지였다.


“검룡!”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 푸른 화염을 뚫고 솟구치는 잔영이 있었다. 길게 흩날리는 장포. 올올히 휘감은 자색 경파가 뒤따른다. 허공을 짓쳐나가며 검을 휘두르는 유성의 모습. 뒤이어 푸른 화염을 휘감은 청화단주가 연이어 연격을 날린다.


쩡! 쩌저정!


전각의 위를 밟으며 반쯤 허공에서 연격이 교환되는 모습.


“다행......”


쐐애액!


중얼거리던 루주의 앞으로 단검 두자루가 날아와 박혔다. 제각기 달려들던 마교도의 목을 일격에 관통한 모습. 루주가 고개를 들어올리자 저편에서 암기를 던지고 달려나가는 팔영의 모습이 보였다.


“집중하시오!”

“고맙네요. 아직 이런 것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닌데.”


역수로 검을 쥐고 중얼거린 루주가 회전했다. 앞으로 직진하는 보법. 꽃잎처럼 화려하게 흩어지는 움직임이다. 언뜻 춤을 추는 것 마냥 느릿하게 보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손에 들린 이검의 속도는 정반대였다.


허공을 가르는 빛살같은 검격. 연이어 마교도를 격살한다.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지붕 위로 뛰어오른 팔영. 잠시 사방을 둘러본 그가 그대로 보법을 밟았다. 유령처럼 뻗어나간 그의 신형이 막 허공에 뛰어오르던 마교도 하나의 뒤를 점했다.


“여긴 안되지.”


중얼거리며 손을 내뻗는다. 외팔의 노인이 내친 금나수가 뱀처럼 허공을 따라 꿈틀거리며 뻗어나가 마교도의 목을 틀어쥐고.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교도의 목이 꺾였다.


전부 한 호흡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직후 팔영의 신형이 또다시 한쪽으로 뻗어나갔다.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는 또다른 이들. 그들을 눈에 담은 팔영의 손이 번뜩였다.


찰나 품 안에 들어갔다 나온 손끝에서 길쭉한 비도 두 자루가 방출되어 허공에 선을 그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간 비도가 무진의 등 뒤에서 달려들던 마교도의 등에 틀어박히고.


“고맙습니다!”


등 뒤에서 쓰러지는 마교도의 기척을 느낀 무진이 쳐다보지도 않고 외쳤다. 곁에서 검을 휘두르던 단휘가 힐끔하며 중얼거렸다.


“예의바르네요.”

“당연하지. 나는 원래 웃어른을 공경한다.”

“헛소리 할 시간에 검이나 휘두르는게 낫지 않습니까, 사형?”

“내가-”


휘익. 콰직.


무진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묵직한 기파가 실린 검격이 그대로 달려오던 마교도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본디 뼈에 실린 검격은 제대로 관통하기 어렵건만, 무진의 용력은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검이 둔기인 양 휘둘러 마교도의 머리를 부숴버린 무진이 그대로 보법을 밟았다.


“지금 더 많이 잡은거 같은데. 단휘 너나 열심히 해라.”

“사형이 실수할때마다 제가 살려주잖습니까. 거참.”


서로 실없는 대화를 뱉으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얼굴은 한치의 웃음기도 없었다. 날카롭게 호흡을 가다듬은 단휘의 검이 불꽃을 매달고 이지러진다.


적화검류.


찰나 일으킨 맹렬한 불꽃이 사방에서 달려들던 마교도 둘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흐읍!”


무진의 기합성과 함께 마교도 하나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다. 그것을 보며 단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도끼를 쓰는게 어떻습니까?”

“곤륜은 검법이다 임마.”

“뭐, 도끼 다루는 무공도 백연이한테 말해주면 하나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은데요.”


말하면서도 검을 내치는 것이 끊기지 않는다. 천주산 이후 적양공과 현음공을 익힌 단휘는 점차 새로운 검술에 잘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당연히 막대한 양의 노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간극에 이른 경험. 그리고 칠룡과 합을 맞춘 경험. 전부 무인에게 있어서는 귀중하다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단휘는 그런 경험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휘익.


휘어진 단휘의 검끝에서 불꽃의 검로가 새겨졌다. 허공을 수놓는 화려한 움직임. 한순간 아홉번 흩어진 검격이 그대로 짓쳐오던 마교도의 몸을 난도질했다.


“하는건가. 어렵네요.”

“......너도 괴물이구나.”

“사형도 할 수 있습니다. 적당히 노력하면.”

“네 적당히의 기준이 좀 이상한거 아니냐?”


투덜거리며 검을 내치는 무진. 그러나 점차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 두 소년의 말은 줄어들었다.


“끝이 없군.”


무진이 입매를 비틀었다. 연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굉음. 간간히 시야 저편 허공을 수놓는 자색의 검기와 푸른 화염이 보인다. 아직까지 검룡이 잘 버텨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후. 지금 얼마정도 지났죠?”

“모른다.”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서서히 호흡이 길어지고 정신이 가라앉는다.


청화단의 마교도들. 단주의 힘에 비해서는 강하지 않았으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더해 단휘와 무진의 입장에서는 쉬이 이겨내기 힘든 상대들. 간간히 그들을 도와주는 팔영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그때였다.


허공을 가르는 인영들이 보였다. 찰나 단휘와 무진을 공격하지 않고 뒤로 스쳐가는 일련의 무리들.


여태까지의 다른 마교도들과 보법을 밟는 기세가 달랐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놈들......!”


무진이 외쳤다. 그에 반응한 팔영이 즉시 시선을 돌렸다.


“저쪽은?”


뇌까린 노인이 그대로 비도를 발출했다. 지붕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팔영. 그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암기가 쾌속하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카가강!


그림자처럼 전진하던 마교도의 손이 번뜩였다. 팔영의 방향을 돌아보지도 않고 내친 방어초. 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이 날아온 다섯 자루 암기를 전부 쳐낸 것이었다.


재차 비도를 빼든 팔영이 그것을 다시 던지려고 했을때, 이미 그들의 신형은 시야에서 한참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런.”


팔영의 목소리에 옅은 낭패감이 실렸다. 밑에서 싸우던 무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로 가는겁니까!”

“청화단의 정예요. 아무래도 방주 대리를 찾으러 들어가는 듯 싶소만. 노부가 따라가서 막는 것이......”

“늦을거에요.”


타닥.


루주가 뛰올랐다. 그녀의 검끝에 점점히 새겨진 핏물. 뺨에 붉은 피를 잔뜩 묻힌 그녀가 저편으로 사라진 마교도들을 가늠하며 말했다.


“저쪽에 지금 남아있는 사람이......”

“소홍이 있습니다.”


단휘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 적화검류를 내쳐 주변의 적을 한차례 몰아낸 상태. 숨을 몰아쉰 그가 침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방주 대리와 백연을 지키고 있겠다고 했으니.”

“......우리는 쫓아가면 안돼요.”


루주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하늘을 쫓았다. 시야 저편의 전각이 무너지고 연이은 검격의 소리가 허공을 저미고 있었다. 빠르게 허공에서 연이어 맞붙는 자색의 검기와 푸른 불꽃.


“검룡이 훌륭하게 청화단주를 막아주고 있지만, 균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끝이에요.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믿는 수밖에 없겠소이다.”


팔영이 중얼거렸다. 그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비도를 치켜들었다.


“모두 살아남기를.”



※※※



“......”


노을이 걸린 나무 아래 그림자.


나무에 가만히 기대어 있던 소홍이 눈을 떴다.


‘온다.’


허공 저편에서 돌진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미미하지만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기파를 느낄 수 있었다.


소홍의 재능이었다. 원래부터 존재감이 옅은 그였다. 그 덕분인지 감각은 더 발달했는데, 타인의 기척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살수로써 더없이 적합한 일이었다.


결국 살수의 업에서 벗어나 이리 곤륜에 들어왔지만.


‘아홉.’


그 재능마저 쓰임이 다하지는 않았다.


적의 기척을 인지하는 것과, 그들의 모습이 눈에 담긴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유령처럼 짓쳐오는 보법. 몸에 두른 검은 기파가 흉흉했다. 다가올수록 번져오는 진한 마기에 소홍이 눈매를 살풋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소홍은 그 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다.’


강한 상대였다. 하나하나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 무위가 드높았다. 하오문의 무인들과 비교해도 한수 위였다. 일대일이라도 소홍이 상대할 수 없는 괴물들.


그랬기에 소홍은 눈을 감으며 기척을 더욱 죽였다. 호흡을 가둔 소년의 존재감이 정말 그림자로 인지될 정도로 옅어지고.


타다닥.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들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흑포를 두른 아홉의 무인. 가슴에 작게 새겨진 청화라는 글자가 진했다.


“꽁꽁 숨어있었군.”

“전부 뒤져서 찾아라.”


목소리들이 울렸다. 바로 근처에서 움직이는 기척들. 재빠르게 달려나가는 걸음들이 감각에 느껴졌다. 소홍은 눈을 감은채로 숨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아홉개의 기척이 제각기 흩어지며 집을 조사하러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인들이 흩어지며 유일하게 소홍의 근처에 남은 기척.


“전부 태워버리는 것이 편할진데. 단주님은......”


중얼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코앞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투웅.


소홍의 몸이 유령처럼 늘어났다. 나무에 기대어 있던 자세 그대로 걸음을 박찼다. 몸에 휘감은 기파가 바람결마냥 가벼웠다. 길쭉하게 늘어난 소년의 신형이 한순간 삼장에 달하는 거리를 좁히고.


피잇.


은빛 검광이 번뜩였다. 찰나 인지를 뛰어넘는 쾌속한 발검술. 이지러지는 은빛 검광이 그대로 선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막 백연이 들어앉은 초가집의 문을 열려던 흑포의 마교도. 소홍이 도달하기 직전 뭔가를 느꼈는지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널찍한 등에 검이 소리없이 틀어박혔다. 반쯤 돌아보던 눈이 경악성으로 부릅떠지는 것과 함께였다. 소홍은 그대로 검파에 온몸의 기파를 실었다. 땅을 디딘채로 검을 내리누르는 동작.


등허리 늑골에 걸린 검신이 그대로 위로 젖혀지고.


푸확!


마교도의 등허리부터 어깨까지 반원을 그리며 꿰뚫고 지나간 검신이 허공에 은빛 잔영을 뿌렸다.


“여기......”

“쉿.”


죽어가면서도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외치려는 마교도. 그러나 소홍이 더 빨랐다. 찰나 기파를 실어 내친 작은 손이 마교도의 입가에 틀어박혔다. 이빨을 부수고 들어간 손이 그대로 혀를 잡아채 뽑아버렸다.


허공에 점점히 흩어지는 핏물.


쓰러지는 마교도를 뒤로한 소홍이 보법을 밟았다. 다른 방향을 향해서였다.


‘방주 대리.’


여기 달려온 놈들의 목표이다. 단주는 검룡과 싸우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나머지 네 사람이 청화단 전체를 막고 있을수는 없다. 애초부터 불리한 싸움. 소홍이 이곳에 남아있던 이유였다.


적이 강하다 해서 상대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부터 살수란 자신보다 강한 이들을 죽이는 사람들이니까.


‘이젠, 살수 아닌데.’


문득 스치는 생각을 흘려넘기며 소홍이 유령처럼 보법을 밟았다. 주변에 느껴지는 다른 모든 기척을 무시하면서였다. 개중 하나. 방주 대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기척.


확인하며 가속을 더했다.


사박.


걸음이 바닥을 스치는 순간마저 내공을 역으로 방출해 발소리를 없앤다.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또다른 흑포의 무인. 방주 대리가 있는 집을 향하고 있었다.


그자가 눈에 들어오는 즉시 소홍은 기파를 끌어올렸다. 검끝을 뻗어냄과 동시였다. 스스로의 몸이 쏘아낸 화살이라도 된 것 마냥. 뒤가 없는 일격의 찌르기.


“음?”


이번 상대는 좀 더 기감이 예민했다. 검이 닿기 직전 몸을 돌리는 무인. 그러나 소홍은 무시하며 검끝에 기파를 더욱 실었다. 바닥에 두번 보법을 더 밟으면서였다. 발소리가 새어나갔지만 이미 그런 것을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놈......!”


경악성을 싣고 울리는 목소리. 그러나 길지 못했다. 뻗어낸 소홍의 검이 이미 너무 가까웠던 탓이었다.


상대는 강했지만, 소홍의 기척을 인지하지 못했고, 싸울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무인의 몸은 보통 민초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푸욱.


섬뜩한 은빛 검광이 그대로 무인의 목을 꿰뚫었다. 눈을 부릅뜬 흑포의 마교도. 찰나 그의 손에서 강렬한 기파가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발악이었다. 목에 검이 틀어박힌 상태에서도 기파를 끌어올리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소홍과는 한참 차이가 나는 상승의 무위.


한순간 뻗어나온 장법이 기파를 싣고 소홍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


격통이 복부를 저미는 것이 느껴졌다. 내장이 진탕 뒤집히는 충격. 그러나 이미 목에 검이 틀어박힌 상태로 끌어올린 내공이었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 해도 충분히 힘을 싣지 못했다.


‘구멍은, 안 뚫렸어.’


토혈을 억지로 삼킨 소홍이 검파에 힘을 주었다. 한순간 검끝에 무언가 걸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한층 더 내공을 실어 그어내는 순간.


까득.


뼈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마교도의 목이 그대로 양단되었다. 머리 없는 몸뚱아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직후 소홍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검을 짚었다.


“쿨럭.”


입가를 따라 핏물이 한움큼 쏟아져 나왔다. 기습을 해 일격에 죽였음에도 반격에 당한 것이다.


억지로 정신을 붙든 소홍이 덜덜 떨리는 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저기!”

“남아있는 놈이 있었군.”

“허겸과 교영이 당했다. 살수 무공을 익힌 놈이야.”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일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들. 나머지 일곱 전부였다. 그것을 느끼며 소홍이 입가를 훔쳤다.


‘이런.’


두 번의 요행이 따랐지만 거기까지였다. 암습으로 적을 제거하는 것은 이게 한계였다. 그럼에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비릿한 혈향을 느끼면서 소홍이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저놈, 생포하지? 얼굴이 반반한데.”

“시끄럽다. 우리의 목표는 하오문의 쥐새끼 뿐. 다른건 신경쓸 일이 아니다.”

“팔다리 힘줄을 끊어놓고 단전을 폐하면 좋은 인형이 될 것 같은데.”

“지저분한 놈.”


소홍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저들 중 둘을 격살했음에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모습. 모습이 드러난 살수는 적수가 되기 어려웠다. 그가 백연만큼 강했다면 모를까.


‘사제.’


소홍의 시선이 잠깐 허공을 스쳤다. 이곳으로 몰려든 이들. 잠시 일어난 소란 때문에 백연이 있는 집 쪽에는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다. 지금 저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방주 대리뿐.


유일하게 다행인 점일까.


“저 살수는 내가 잡지.”


얼굴에 비릿한 웃음을 걸고 천천히 다가오는 마교도. 소홍이 숨을 가라앉히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바르르 떨리는 검신에 기파를 실어 내치려는 그 순간.


“단주도 아닌 잡것들이 시끄럽게 구는군.”


우웅.


공기가 떨렸다. 허공을 따라 퍼져나가는 공력 파동. 막대한 기파가 휘어지며 대기를 저민다. 한순간 주변의 기온이 낮아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냉막한 음성.


동시에, 노을빛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쭉하게 휘어졌다.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노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음에도.


“꺼져라.”


찰나, 일곱 마교도의 신형이 일제히 늘어졌다. 마기를 휘감은 그들이 제각기 무기를 꺼내들며 집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쿠웅.


진동이 울렸다. 언제 열렸는지 알 수 없는 문 사이로 늘어진 그림자. 어느새 소홍의 곁에 내려앉아 사방을 휘감고 있었다. 냉막한 눈매 너머 등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흑포라도 되는 양 길쭉하게 퍼져있었다.


“내가 이제.”


소홍을 힐끗 눈에 담은 흑랑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사방의 그림자가 그의 손 안으로 휘어드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다음 순간. 짓쳐오는 마교도들의 발밑에서 일제히 그림자가 돋아났다. 제각기 의지를 가진 듯 입을 쩍 벌린 그림자가 한번에 그들을 집어삼키고.


파바바박!


사방으로 핏물이 비산했다.


“만전(萬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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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철야방(5) +4 23.12.19 2,999 84 19쪽
138 철야방(4) +4 23.12.18 3,130 79 18쪽
137 철야방(3) +5 23.12.16 3,199 80 15쪽
136 철야방(2) +3 23.12.15 3,123 83 15쪽
135 철야방 +4 23.12.14 3,119 86 16쪽
134 재회(3) +5 23.12.13 3,210 87 19쪽
133 재회(2) +4 23.12.12 3,214 86 16쪽
132 재회 +5 23.12.11 3,307 88 17쪽
131 성화방주(3) +7 23.12.09 3,293 79 15쪽
130 성화방주(2) +5 23.12.08 3,285 85 20쪽
129 성화방주 +5 23.12.07 3,360 89 16쪽
128 사천(4) +8 23.12.06 3,337 88 19쪽
127 사천(3) +8 23.12.05 3,355 92 22쪽
126 사천(2) +5 23.12.04 3,426 87 17쪽
125 사천 +8 23.12.01 3,554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6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7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7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8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61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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