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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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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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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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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네가 만든 마을(4)

DUMMY

※※※



“당신은 이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 한데.”


풍백이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채로 중얼거렸다.


“맞습니까?”

“예.”

“이곳은 얼마나 넓은지 궁금하군요.”

“......지금부터 달려도 반대편 입구까지 두시진은 걸립니다. 산맥과 산맥 사이를 기점으로 하는지라. 풍백님의 걸음이라면 몰라도.”


그만큼 넓은 장소였다. 산맥 사이의 협곡. 그 안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 도시로부터 쭉 이어진 강과 폭포. 전부 여기서부터 신강쪽의 산까지 이어진 거대한 기문진으로 덮여있다.


기문진을 이루고 있는 두 산맥을 기준으로 선을 그으면 그 길이가 지도로 보아도 확연히 보일 정도. 왠만한 중원의 대도시보다 광활한 것이다.


“허면 어느 정도 시간은 있겠군요.”


뇌까리는 모습. 연하늘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너머의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단단히 굳어든 입매가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도 백연은 한순간 그의 표정에서 일전을 목전에 둔 장수의 표정을 엿보았다. 검객의 호승심과는 다른 면모였다. 전투를 상승의 수단으로 삼는 무림인들과 다르게 더없이 냉철한 시선. 왜 풍백에게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방주 대리를 찾으러 왔다 했지요. 저 비도를 보아하니 이 도시 안에 있는 듯 보입니다만.”


이윽고 허공에서 눈을 뗀 풍백이 백연을 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풍백께서는 어찌 하시려고......?”


백연의 물음에 그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가면을 집어든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 가면을 가져다 대었다.


“다녀올 곳이 있겠습니다. 백의가 제게 도움을 청한 것은 이런 의미였을 테니.”


말하면서 가볍게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틈새로 보이는 연하늘의 눈동자. 살풋 금이 간 가면을 뒤집어쓴 풍백이다.


그 모습을 보며 백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면서 느꼈습니다. 이 기파. 마교의 우호법이라고.”


지금 허공에 느껴지는 아주 옅은 기의 파동. 분명 그들이 신강으로 달려올때 느꼈던 기운과 같았다. 기분 나쁜 염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검제에 필적하는 괴물이라 했다. 어줍잖은 무위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닌 것이다.


“......뭐라 하셨습니까?”


그러나 반문하는 풍백의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아직 그자가 당도하기 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겁니다. 이곳의 지리는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잘 시간을 끌며 방주 대리를 찾아 나가면 마주치지 않고도 빠져나갈 법 한데.”

“아하.”


풍백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면 사이로 비치는 연하늘의 눈동자에 웃음이 담겨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걱정을 받은적이 너무 오랜만이라 잠시 당황했습니다. 괜찮겠냐 하신다면......음. 이리 답하면 될까요.”


스륵.


검집을 스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풍백의 두 자루 검중 하나가 뽑혀나왔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벼이 검을 쥐고는 허공에 비스듬히 늘어뜨린다.


“검왕을 만난적이 있다 했지요.”

“예.”

“제 검이 닿는 간격 안에는, 설사 검왕이나 검제라 할지라도 들어오지 않고 거리를 벌립니다.”


여상히 말하는 태도. 담담한 목소리가 일절 과장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있는 사실을 읊는다는 듯한 행동이다.


“백연. 모르는구나.”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소홍이었다.


“정파 무림의 검. 다섯이라고 해.”

“다섯?”

“운하검신. 검왕, 현천검제, 무당의 장문, 그리고.”


그가 풍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풍백.”

“한때 그리 묶어서 알려졌던 적도 있긴 했습니다만......지금은 잘 모르는 이가 많을 터인데. 알고 계시는군요.”

“천하오대검수(天下五代劍手). 많이 들었어.”

“어디서 들은지 궁금할 정도군요. 시간만 된다면 즐겁게 대화라도 나눠보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듯 싶습니다.”

“가시려 하는군요.”


백연의 말에 풍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연은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검객. 그가 걱정을 하고 말고 할 계재가 아니었다. 외려 그와 같이 있는 것이 해가 될 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숨이 차오르는 것은 별개였다. 가면을 쓴채로 돌아서는 풍백의 등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 까닭이었다. 저리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이들, 자신만만하게 돌아오리라 장담했던 이들 중에 몇이나 돌아왔던가.


‘마교......해악이다.’


강호무림. 정사마의 수많은 인물들이 제각각이라 한다. 백연 자신의 검 끝도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가 힘을 얻게 되면, 그의 검끝은 언제고 반드시 마교의 목덜미로 향하리라는 사실.


그는 결코 다시 교주의 무공이 지천을 뒤덮던 광경이 재현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지요. 일을 마치면 기다리지 말고 빠져 나가십시오. 저는 걱정말고.”


말하는 어투가 바람결처럼 가벼웠다. 물끄러미 풍백의 등을 바라보던 백연이 뭐라 답하기도 전이었다.


키이잉.


귀를 에는 듯한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한순간 풍백의 허리춤에 걸린 두자루 검이 살풋 빛나는 듯 싶더니, 직후 거친 칼바람이 사방에 몰아쳤다.


일순 시야에 머물렀던 풍백의 인영. 찰나지간 일어난 격렬한 검풍과 함께 흩어진다. 이윽고 바람이 멎자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갔네.”


소홍의 중얼거림. 물끄러미 풍백을 바라보던 시선을 백연에게 돌린다.


“그러게.”


만났던 순간만큼 바람결 같은 헤어짐이었다. 낭인이라 하더니, 마치 문득 불어온 바람처럼 움직이는 검객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웠다.


“가자.”


잠시간 풍백이 있던 자리를 응시하던 백연이 말했다.


이윽고 두 소년이 말없이 성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반쯤 열린 성문 사이로 접어드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높이 뜬 태양이 빛을 흩뿌렸다.



※※※



“흔치 않은 기문진이오. 노부가 평생 본 것 중에는 가장 크고 정교하군.”


숲이었다. 길게 뻗은 가파른 비탈. 그 길을 따라 내려가는 세 인영이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외팔의 노인이었다.


“어찌 된건지는 모르겠소만, 바람의 흐름으로 사람을 흩어놓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무진 공자는 어찌 매번 똑같소?”

“제 재주가 힘쓰는데만 있는지라.”


무진이 넉살좋게 웃었다. 그를 보며 팔영이 수염을 쓸었다.


일행과 떨어진 세 사람이었다. 어느 산기슭에 간신히 도착했는데, 가파른 비탈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성도가 있었다.


“백연 공자라면 저기로 올 것이오.”

“그렇겠지요. 대략적인 행동 방식은 모두 설계해두고 움직이는 녀석이니.”


저 멀리 보이는 성도를 응시하며 단휘가 뇌까렸다.


그가 아는 백연이라면 이런 상황도 어느 정도 예측했을 터. 일행이 다시 모이는 방법을 상정해놓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리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가장 확실한 목표는 저 성도. 거대한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어디를 가도 눈길을 잡아챌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무덤이라더니, 저긴 도시 아닙니까?”

“사람이 없지않소.”


무진의 물음에 팔영이 답했다.


“죽은 도시는 무덤이라 할 수 있지.”

“흐음.”

“시황제를 아시오?”

“그 정도는 압니다.”

“그의 릉(陵)은 도시를 넘어 중원을 축소해 그대로 집어넣었다는 소리도 있소이다. 이곳은 본래 그런 목적으로 건설된 것은 아닌 듯 하오만......”


팔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편을 응시했다.


“뭐, 자세한 것은 백연 공자의 설명을 들으면 알 수 있지 않겠소이까.”

“그렇겠지요.”


단휘가 걸음을 내딛으며 답했다. 손은 검에 올려둔 채였다.


이곳에 들어올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청해를 벗어나 도달한 신강. 적지라 봐야 옳다. 마교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은 예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 비록 이곳이 신강의 외곽이고, 마교의 본진인 천산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더해 실제로 마교도 몇을 이미 마주했다. 이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하물며 새외의 무인들도 있는 마당에야.


‘항상 기감을 바짝 세워놓아야 한다.’


백연과 천주산을 다녀온 이후 달라진 단휘였다. 많은 부분에서 백연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신의 사제는 스승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산 중턱을 나아갈때 쯤이었다.


‘음?’


문득 고개를 들어올린 단휘의 시야에, 한 초가집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얼기설기 엮어낸 양 초라한 모습.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모양이 잡히지 않아 거친 기둥부터 부실한 지붕까지.


“저게 갑자기 무슨.”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어라?’


초가집의 앞, 낡은 마루에 걸터앉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바삐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묘했다. 마치 눈앞에 있는데, 눈앞에 있지 않은 것만 같은 감각.


그가 있다는걸 인지하고 나서야 뒤늦게 그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백발과 수염. 선기가 흐르는 듯한 외견의 노인이었다. 언뜻 보면 신선이라고 착각할 법도 한 모습.


“저기......”


단휘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공자, 잠깐.”


그의 앞으로 팔영이 끼어들었다. 흑색 장포를 뒤집어쓴 외팔의 노인이 단휘의 앞에 서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엇 하는 것이오. 지금 저자가 적일지도 모르는데.”


날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확 깨어나는 감각이었다. 눈을 깜빡인 단휘가 한걸음 물러서며 검파를 쥐었다.


“정신 차리시오. 저자, 범상치 않소.”

“대체 뭡니까? 산 한복판에 저런 초가집이라니.”

“애초에 그런 문제가 아니오. 무진 공자. 이곳에는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저런 이가 여기에. 백연 공자가 말한대로라면 여기는 무덤이오. 평범한 사람이 드나들 장소가 아니란 말이오.”


스륵.


말하는 것과 동시에 팔영의 손안에 날카로운 비도가 잡혔다. 역수로 비도를 쥔 팔영이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노부가 먼저 확인할테니, 그대들은 거리를 두고 따라오시오.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게 조심하고.”


중얼거린 팔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리없는 살수의 움직임. 그럼에도 초가집의 노인은 여전히 무언가를 손질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누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양.


그렇게 팔영이 초가집에서 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음?”


노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새하얀 수염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흔들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그럼에도 눈매는 강인했다. 찰나 허공을 따라 움직인 눈이 팔영에게 정확히 떨어졌다.


“손님이 오셨군.”


담담한 음성이 울렸다. 노인의 눈을 응시하며 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신데 이런 곳에 있는 것이오?”


팔영은 여차하면 비도를 날릴 양이었다. 살수들이란 그러했다. 만일 이자가 정말 위험한 이라면 무진과 단휘, 두 사람은 살려야 했다. 곤륜의 객으로써 필요한 일이었으니.


여상히 질문을 던지며 틈을 본다. 그러나 팔영의 눈에 비친 노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무공 자체를 모르는 듯한 평범한 사람의 자세. 마루에 앉아 말린 식물들을 만지고 분류하는 중이었는데, 풍겨오는 향으로 보아 약재 같았다.


“별볼일 없는 늙은이일세. 어디, 차라도 한잔 하겠는가?”

“......이곳이 어디인지는 아시오?”

“과거에 친우가 살았던 장소지. 이제는 이 늙은이가 몸을 뉘이는 곳이고.”

“친우가 살았던 장소? 여기는 무덤이라 들었소만.”


팔영의 말에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수염을 매만지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래는 무덤이라 불리는가 보군.”

“검귀의 무덤. 아시오?”

“검귀......그런 이도 있었지.”


기억을 더듬듯 잠시 허공을 응시한 노인이 이윽고 팔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허나 이 늙은이는 그저 여기에 사는 사람일 뿐일세. 이 정도면 대답이 되겠는가.”

“이런 곳에서 산단 말이오. 아무것도 없는데.”

“내 재주가 좀 있어, 홀로 살아도 굶어죽지 않을 자신은 있네. 헌데 그 뒤의 사람들은......”


팔영이 노인의 시선을 따라 뒤편을 슬쩍 보았다. 어느새 그를 따라온 단휘와 무진이 서 있었다.


“괜찮은겁니까?”

“......모르겠구려. 마음 같아서는 출수를 하고 싶소만.”


휘릭.


찰나 팔영의 손에 잡혀있던 비도가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무기를 거둔 그가 다시 노인을 응시했다. 그 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마루에 펼쳐져 있던 약초를 그러모아 정리하고는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시게. 이리 만난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잔 드릴테니.”

“갈 길이 바쁘오.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겠소.”


팔영이 거절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허면 차는 되었고......대신 이거라도 들고 가시게.”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무언가를 건넸다. 작은 가죽으로 된 주머니. 경계를 풀지 않으며 그것을 받아든 팔영이 단휘에게 주머니를 넘겼다.


“이게 뭡니까?”


주머니를 연 단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새하얀 단약 두 알이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단약은 백옥으로 빚어낸 구슬마냥 맑고 매끈한 생김새였다. 풍겨오는 향이 더없이 청아했는데, 살풋 향을 맡은 것 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약이네. 그대들이 영단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네만.”

“이런걸 갑자기 주는 이유를 모르겠구려.”


팔영의 날선 목소리에 노인이 허허 웃었다.


“가져가면 쓸 일이 있을 걸세.”

“본 무인은 대가없는 호의를 믿지 않소.”

“헛허. 의심이 많구먼. 이 늙은이가 의술에 발을 들여 잔재주를 조금 익혔으니 써먹는 것 뿐이네. 무림인들은 언제나 다치기 마련이니.”

“수상한 것 투성이구려.”


팔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늙은 살수의 손끝에서 서서히 공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잠시 수염을 쓸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가라. 허면 말을 좀 전해주게.”

“......말을? 누구에게 말이오.”

“백연이라고. 아는가?”


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팔영의 양쪽에서 귀를 울리는 금속 소리가 스쳤다. 직후 번뜩이는 빛이 일었다.


찰나 두자루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우뚝 멈춰섰다. 각기 노인을 향해 양쪽에서 겨눠진 채였다.


무진과 단휘. 즉각 기파를 일으켰다. 내공 수발의 속도가 지극히 빨랐다. 오랜 기간 수련해온 두 사람. 백연의 이름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검을 빼든 것이다. 그들의 검끝을 따라 내공 기파가 일렁이고 있었다.


“허허. 다들 급하구먼.”


그러나 목을 향해 겨눠진 검을 보면서도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는 얼굴로 수염을 쓸어내리는 모습.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뭘 노리고 이곳에.”

“노리고 온 것은 없네만. 이름은 그 아이에게 직접 들었네. 직접 만나서 물어보게나.”


노인을 응시하던 팔영이 물었다.


“무엇을 물어보란 말이오.”

“다시 만나면, 뭐라고 불러야 하겠냐고 했었네. 그랬더니 그 이름을 알려주더군.”


늙수그레한 노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선인같은 행색에 단휘가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엇 하는 사람인지.


“좋은 이름이지.”

“그렇다면 전해달라는 말은 무엇이지요.”


노인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나갈때가 되면, 이곳의 문을 닫으라 하게. 무슨 소리인지 들으면 이해할걸세. 과거의 잔재는 과거에 남길때가 되었으니.”

“그것이 어떻게 이 영단의 대가가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소만.”

“나는 저 교의 종자들이 이곳을 더럽히는 것이 달갑지 않으니 말이네. 어때, 어려울 것 없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허공을 물들였다.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걸고 선 노인. 그리고 그를 마주보고 선 세 사람.


이윽고 팔영과 단휘, 무진의 시선이 짧게 교환되었다.


“......그렇게 하겠소.”


팔영이 답하는 것과 함께 무진과 단휘가 검을 거두었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노인이 수염을 쓸었다. 웃음에 중얼거림을 섞으면서였다. 그의 시선이 잠시 세 사람을 넘어 저편의 도시를 향했다. 지금쯤 저곳으로 가고 있을 사람을 향하는 눈길.


“자네는 좋은 연을 많이 만들었구먼. 이름이 헛되지 않았어.”



※※※



성도 안이었다. 그림자 사이로 사방을 따라 솟은 건물들이 한가득이었다.


제각기의 모습을 지닌 건물들. 무질서하게 늘어진 건물들이 제각기의 길을 형성한다. 크게 정비된 대로가 없다는 뜻이었다.


자연히 구역과 구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어지러운 미로처럼 이루어진 도시.


“복잡해.”


중얼거리는 소홍의 말에 백연이 피식 웃었다. 그 자신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곳에서 길을 찾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원래 계획된 도시가 아니라서 그래. 점차 커져가다 보니 이 지경이 된거라.”


본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확장된 곳이다. 길이나 이런 것을 미리 깔 생각을 했을리가 없다. 관이 주도해 일군 도시가 아닌 이상, 무질서는 필연이다.


덕분에 미로같은 도시는 외침에 강했다. 가끔 이곳에 오는 적들. 도시 자체의 구조가 그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백연이 이곳으로 걸음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했다. 마교도들을 상대로도 도시 내에서는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자신이 있었기에.


‘헌데.’


백연이 주변을 살폈다. 공기중에 묻어있는 기운이 진했다.


‘이곳에 오간 사람이 있다.’


기파가 곳곳에 묻어있다. 예리하게 세운 기감 너머로 느껴졌다.


백연은 잠시 주먹을 폈다 쥐었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찌르르한 통증. 몸 전체의 세맥을 따라 천천히 기파를 흘린다. 풍백이 그의 몸을 살핀 이후 내상의 통증이 조금 약해져 있었다. 그의 기파로 한번 치료해준 것인지.


덕분에 단기 결전을 치를 정도의 힘은 남아있다 봐도 좋았다.


‘가급적이면 빨리 다른 사람들을 만나 회복하는게 좋다만.’


생각하던 백연이 걸음을 내딛을 때였다.


일순 섬짓한 감각이 일었다. 동시에 곤두선 백연의 사방을 훑으며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찰나 눈으로 보기 전에 인지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소리.


“사형!”


외치는 것과 동시에 검을 쥐었다. 한순간 머릿속에 스친 것은 풍백의 동작이었다. 발검과 보신경을 동시에 펼치던 검객의 몸놀림.


뇌리에 새기며 여휘검을 뽑는다. 직후 세맥을 따라 기파를 일으켰다. 운연동공의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검을 뽑으며 팔을 펼치는 동작. 크게 호를 그리며 이어진 검의 힘에 그대로 보법을 더한다.


피잇-


그의 신형이 이지러지듯 일렁이는 것과 동시에 쏜살같이 한쪽 방향으로 쇄도했다. 불타는 것 같은 세맥의 고통을 억지로 무시하면서였다. 그의 검이 보법과 함께 펼쳐졌다. 오른편의 건물 위. 낮은 지붕에 몸을 실은 인영을 향해 검을 내치려는 순간.


‘이건.’


검은 장포를 두른 인영의 손끝에서 반짝이는 비도가 엿보였다. 찰나 눈에 들어온 익숙한 모습에 허공을 가르던 백연의 검이 우뚝 멈춰섰다. 지붕에 반쯤 기대앉은 인영의 코앞에 진각을 디디면서였다.


직후.


후우웅!


거친 돌풍이 뒤따랐다. 보법에 이어 흩어지는 바람결. 건물의 지붕을 덮고 있던 기왓장 몇개가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늦었군.”


힘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틀어박혔다.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몸에 휘감은 청년. 냉막한 눈매는 고통을 참으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백연을 눈에 담는 순간 기쁘다는 듯 슬쩍 휘어지는 눈매와 입꼬리.


“정말로 죽는줄 알았는데.”


신강에서 소식이 끊겼던 무영방 방주 대리. 흑랑이 백연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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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7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7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7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59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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