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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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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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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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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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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네가 만든 마을(5)

DUMMY

“흑랑! 몸이......세상에.”


백연이 입을 벌렸다.


언제나 그림자를 휘감고 다니는 흑랑. 짙은 검정의 그림자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짙었다. 엄청난 양의 피. 검은 장포 전체가 피로 물들기를 반복한지가 얼마나 지난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렀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옆구리에 크게 패인 상처 위로, 드문드문 보이는 탄 자국이 있었다. 극한의 고열이 몸을 갉아먹은 듯한 흔적.


“누구한테 당했길래 이런겁니까.”

“마교가 이곳에 들어왔다. 미안하군. 내 탓이다.”

“예?”

“뒤를 밟혔다. 네가 알려준 신강의 입구, 그쪽으로 들어올때부터......크윽.”


중얼거리던 흑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눈을 감은 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모양.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지. 우선은......”


흑랑이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잔뜩 경계하는 모양새.


“이 근처에 있다. 놈들이.”


그 순간이었다. 백연의 기감 너머,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끈적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없이 불쾌함이 묻어나오는 마기. 그것을 감지한 백연이 표정을 굳혔다.


“일반 교도가 아니군요.”

“마교 호법이 거느리고 다니는 무인들이다. 청화단이라고 하는데, 지독할 정도로 쫓아오더군.”

“추적을 떨치지 못한 겁니까? 월영신공의 보신경이라면 가능할 터인데.”

“신강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덫에 걸렸었다. 알아채는게 늦었지. 무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훨씬 넘어서까지 포위망이 자리잡고 있더군. 천라지망이라도 펼치려 하는지.”


흑랑이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백연은 가만히 검파를 쥐었다. 생각보다 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하면 마교도가 무덤에 진입한 것도......”

“그래. 내 뒤를 따라 들어온거다. 네가 알려준대로 무덤의 입구를 발견해 들어오고 난 이후에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면목이 없군.”

“그랬군요.”


백연이 뇌까렸다.


무덤이 이리 노출된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추적에 당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흑랑을 잡으려 진을 치고 있던 마교도들이, 그의 뒤를 쫓다 무덤을 발견한 상황. 재수없다면 재수없는 우연이었다.


한번 이 장소를 발견하고 나서는 이곳의 조사와 흑랑을 쫓는 것을 병행했을 터.


가벼이 검을 쥐며 생각을 회전시켰다. 백연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직 부서진 건물이나, 무언가 크게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마교도들도 이곳을 전부 파헤치지는 못한 모양.


드넓은 공간이다. 신강쪽 입구로 진입했다 하면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도 짧지 않거늘. 사방을 따라 흩어진 작은 마을들이 더 존재한다. 자연히 조사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이 도시에는 언제 들어왔습니까?”

“......이틀 전이다. 중심부로 들어가려 했는데, 자꾸만 밖을 맴돌게 되더군.”

“그럴겁니다. 아직 술법진이 잘 작동하고 있군요.”


흑랑이 들어가지 못했다면, 마교도도 마찬가지일 터.


마지막으로 이 도시를 떠날때 그리 해놓았다. 가장 안편, 도시의 최심부는 술법진으로 막혀 있다. 설령 무덤에 침입하는 놈들이 있다해도 그들의 보금자리를 더럽히지는 못하게.


이 성도를 발견했다 해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길을 알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도시의 불규칙한 건물과, 그 사이를 휘도는 바람. 길가마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나뭇가지들. 도심 한켠에 쌓인 돌탑. 전부 엮어져 술법진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흑랑이 바깥만을 맴돈 이유가 거기 있었다.


백연이 검을 뽑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목표가 정해졌다.


“이동하지요.”

“어디로?”

“안으로 들어갑니다.”


흑랑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백연이 다가가 손을 뻗어 혈도를 찔렀다. 기를 실은 손가락이 재빠르게 점혈을 하자 흑랑이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잠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한동안은 덜 아플겁니다.”

“고맙군. 그래봐야 짐덩이다만.”

“회복하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벌죠.”


여상히 주변을 응시하는 눈매. 휘날리는 머리칼이 길다. 언뜻 흐릿하게 보이는 백연의 인상에 흑랑이 눈을 깜빡였다.


섬서에서 보았던 것이 마지막이거늘. 그때가 여름이다. 이제는 겨울이다. 반년이 지난 것이다. 중원 무림의 무인들에게는 여러 시일로 다가온다.


목숨을 잃기에는 충분히 길고, 강해지기에는 짧은 시간.


눈 앞의 소년은 정 반대였다. 멀쩡히 살아있는 것도 모자라 더욱 강해진 듯 했다. 피부로 와닿는 공력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몸에서 흐르는 기세 자체가 바뀌었다.


검파에 손을 올리고 지붕 위에 꼿꼿이 서서 주변을 응시하는 자세.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의 옆태가 미려했다. 흑랑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더 수련에 매진해야겠군, 살아나간다면.


이미 그의 무위를 거의 따라잡은 듯 보였다. 적어도 뒤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흑랑 자신도 어딜가나 기재라 불렸던 몸이건만.


“......청화단의 단주가 있다. 마교 우호법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은 놈이야. 직전제자라 봐도 좋다.”


그의 말에 백연이 고개를 기울인다.


“강합니까?”

“도주중에 몇차례 손을 섞었다. 전패했어.”


짤막한 답에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무영방 방주 대리가 전패? 흑랑의 무위를 생각했을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수라궁의 사냥개들보다 강하다는 의미였다.


만전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까.


‘검룡과 함께라면 모르지만.’


단주라고 하는 것을 보아 수많은 마교도들을 이끌고 다닐 것이다. 이대일 합공을 가만 보고 있을리가 없다. 모든 전투를 일대일이라고 상정해야 한다. 심지어 우호법의 제자라면 염혈신공을 다룬다는 소리. 다수의 적을 상대로 극강의 힘을 발휘하는 무공이다. 수가 많다고 쉬이 상대할 수 없다는 뜻.


그때였다.


“백연. 온다.”


어느새 지붕 위로 뛰어올라온 사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가 흑랑을 살피는 동안 주변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모양. 소홍의 경고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이야?”

“열 대여섯.”

“그놈들은 척후다. 본대와 단주는 아직 이 근처에 없을거다. 사흘간 빙빙 돌아 크게 한번 따돌렸으니.”


흑랑의 말을 귀에 담으며 백연이 왼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나온 여휘검이 빛을 타고 반짝였다.


척후라 했다. 한놈도 살려보낼 수 없다. 전부 제거하고 가야만 뒤의 본대가 오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을 터.


‘몸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아릿한 감각이 몸을 타고 휘돈다. 아직 내상이 그대로인 탓이었다. 운연동공의 회복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반동이었다.


내색하지 않았다. 흑랑은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의 부상이고, 사형은 강해졌으나 아직 부족했다. 이 자리에서 열댓에 달하는 마교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가 검을 펼쳐야 했다.


‘창명류수검으로 간다.’


좀 더 힘을 보존하는 것에 특화된 검법이다. 적화검류만큼의 파괴력은 없지만, 오히려 다수를 상대하며 수세적인 검세를 펼치기에는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 더해 현음공의 수기는 몸을 보살피는 힘이 있었으니.


“그러고 보니, 본래 좌수검을 썼던가......?”


의아함이 섞인 흑랑의 중얼거림이 귀를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펼쳐진 기감 너머 급격히 쇄도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연은 기다리지 않았다.


휘이이.


기파가 피어올랐다. 부상당한 왼다리. 억지로 현음공의 수기를 일으켰다. 하단전에서 일어난 묵직한 기파가 근맥을 타고 휘감겼다. 등허리 아래 다리로 이어지는 장요근. 요추를 지나 대퇴골에 닿는다. 묵직한 기파가 근맥을 타고 다리에 갑옷마냥 휩싸인다.


지붕에서 한뼘 발을 들어올리는 순간.


허벅지 장요근에 휩싸인 기파가 그대로 대퇴골을 타고 강하한다. 다리 앞쪽에 실린 기운이었는데, 멈추지 않고 그대로 경골근에 실려 뻗어나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대해의 수기가 족저에 실리는 그 찰나.


콰앙!


백연은 그대로 진각을 내리찍었다. 한순간 실린 막대한 기파가 그대로 한치의 낭비도 없이 발바닥 용천혈을 중심으로 터져나왔다. 보법을 펼칠때 몸을 앞으로 밀어내는 수법. 이번에는 반대로 딛고 있는 지붕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백여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목조 건물의 지붕은 그것을 버텨낼만한 힘이 없었다. 귀청을 울리는 우지끈 소리와 함께 굳건히 서있던 지붕이 쩍 갈라지며 백연의 신형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자욱한 먼지가 허공으로 비상했다.


“무슨......!”


미간을 좁힌 흑랑에게 돌진하는 신형. 보법을 일으킨 소홍이 그대로 방주 대리의 몸을 낚아채 아래로 도약했다.


무너지는 지붕과 함께였다.


한번 충격을 받은 건물이 연쇄적으로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찰나 백연의 시야 위편으로 지나치는 검은 선율들이 보였다. 지붕 위의 그들을 노리고 날아온 암기들.


백연의 의식에서 이미 지워진 공격이었다. 전투는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는 것. 떨어지면서 이미 몸에 기파를 휘감았다. 부상당한 왼다리로 지붕을 부순 이유였다. 오른발 발끝을 타고 풀려나오는 보법 기파. 화신풍.


묵직한 수기가 사방을 따라 퍼진다. 지붕을 뚫고 떨어진 백연이 그대로 건물 이층 바닥을 밟았다. 장포를 흩날리는 소년의 신형이 먼지와 무너져 내리는 나뭇조각들을 헤치고 앞으로 돌진했다. 낡은 창문을 향해서였다.


콰직.


부딪히는 순간 오른팔로 머리를 감싼 백연이 그대로 벽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순간 탁 트인 시야가 눈앞에 들어왔다. 고요한 거리.


‘하나, 둘. 다섯......저기군.’


허공에 떠 있는 찰나. 백연의 눈을 타고 강렬한 기파가 일었다. 짧은 순간 일으킨 안법으로 사방을 파악했다. 그들이 서 있던 지붕 주변으로 펼쳐진 검은 인영들. 한순간에 척후의 위치를 전부 찾아낸 백연의 신형이 쇄도했다.


“놈들이 도망친......!”


온통 흑색 무복을 걸친 교도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쿠웅.


묵직하게 그의 앞에 떨어진 백연의 몸이 번뜩였다. 반쯤 벗겨진 회갈색 장포 아래 펄럭이는 새하얀 무복이 시야를 가렸다. 검무를 추듯 부드러이 허공을 유영하는 여휘검.


느리게 허공을 짓쳐나간 검. 이지러지는 은빛 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느리게 느껴진 것은 착각이었다.


휘이이익!


검극을 타고 묻어나온 경파 조각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검신을 따라 물방울 마냥 맺힌 수기의 경파. 언뜻 피같은 붉은색을 띄고 있는 듯 보였다. 여휘검이 매끄러운 원형의 검로를 그리며 되돌아왔다.


일검.


목이 떨어진 교도의 시체가 쓰러지고 있을때, 백연의 신형은 이미 시체를 넘어 돌진하고 있었다.


“잡아라!”


귓가에 들려오는 외침. 백연은 즉각 반응했다. 왼발을 가볍게 땅에 디뎠다가, 즉시 오른편 발끝에 기운을 실었다. 발끝을 따라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기파. 상하좌우 움직임에 거침이 없다.


‘전방위를 보법 범위로 삼으면.’


한때 들은적이 있다. 종남의 검법. 천하를 삼십육방위로 나눈다 했다. 모든 방위를 막아내기 위한 천하 일절의 검법.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발상이 같았다. 대신 검법이 아닌, 보법을 전 방위로 펼치려 할 뿐.


‘아직은 부족해.’


완성에 이를 필요가 있다. 화신풍 보법은 사방 방위를 점하지만, 그 역량이 천하삼십육검의 전방위와 같다 하기 어렵다. 그가 눈에 담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걸음이었다. 모든 간격을 그의 지배하에 둘 수 있는.


보법을 펼치며 생각한 것이었다.


찰나에 흐르는 생각을 담고 뛰어오른 백연이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화신풍이라는 말 그대로 바람결 같은 움직임. 한 건물의 이층에서 몸을 내밀고 있던 교도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것이 보였다.


휘릭.


검격 경파가 대기를 따라 흩어졌다. 검로를 따라 선명한 수기의 자욱이 남았다. 여상히 밟아 뛰어오른 보법은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 있었다. 검로 안에 상대의 목이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막 펼친 손바닥에 꿈틀거리는 마기를 일으키던 교도의 몸이 그대로 멈춰섰다. 목을 파고든 여휘검이 반대편으로 튀어나오는 속도가 빨랐다. 살갖과 뼈를 가르는 속도가 일정했다. 검에 내공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기 때문일까.


‘조금 과했나.’


즉살을 위해 거침없이 휘두른 검. 한순간 급격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두명의 교도를 격살한 직후였다. 층 아래에서 뛰어오르는 마교도들의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회수하며 검법을 펼치려는 순간, 아찔한 어지럼이 눈앞을 강타했다.


부상의 여파가 아직 극심했다.


백연은 거침없이 볼 안쪽을 깨물었다. 따가운 고통과 함께 비릿한 피맛이 입안을 채웠다. 그러나 덕분에 흐려지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죽여라......”

“격살을.”

“정상이 아니다.......”


귓가를 울리는 음성들이 많았다. 하나같이 물속에서 듣는 것 마냥 멀게 느껴졌다. 청각이 둔해지고 있었다. 몸 상태가 극히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였다.


쩌엉!


생각을 줄이며 검을 내쳤다. 여휘검에 부딪힌 교도의 검. 한번 받아치며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화신풍 보법을 일으키며 전진했다. 균형을 일은 교도의 늑골 사이에 백연의 검격이 파고들었다.


붉은 핏물이 비산했다. 뜨끈한 액체가 얼굴에 잔뜩 튀어올랐다. 무시하며 그대로 보법을 펼친다. 좁은 건물의 공간에 파고든 인영들이 많았다. 어느새 뒤편에서 등허리를 향해 짓쳐오는 마기가 실린 장법.


한 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며 땅에 몸을 바짝 붙였다. 구르듯 회전하며 뒷발로 교도의 손목을 차올린다. 동시에 백연의 오른손이 번뜩이며 움직였다. 품안에 담고 있던 투척용 단검. 선아가 준 암기가 사라지더니 직후 교도의 가슴팍에서 피어났다.


그대로 백연은 교도의 몸을 붙잡았다. 숨이 끊어진 시체를 방패마냥 돌려 날아오던 암기 두자루를 막아낸다.


터억.


둔탁한 충격이 시체를 넘어 전해졌다. 백연은 지체하지 않고 시체를 앞으로 던졌다. 그에게 달려오던 교도 둘의 속도가 잠깐 줄어들었다.


‘너무 좁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생각하며 뒤편으로 보법을 펼치려던 순간.


콰앙!


발밑을 뚫고 나오는 강렬한 충격이 있었다. 한순간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묵직한 철추(鐵鎚)가 섬뜩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밑에서 올라온 공격. 바닥을 뚫고 나온 낭아봉(狼牙棒)이 한순간 시선을 앗아갔다. 동시에 백연의 기감 위편에서도 짓쳐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양손에 검은 마기를 휘감은 마교도. 사방이 막혀 있었다.


“망할.”


백연이 뇌까렸다. 한숨을 입속에 가두면서였다.


현음공을 펼친 것 만으로도 울컥울컥 올라오는 핏물이 진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적양공을 펼치면 내상이 더욱 심해질 터.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이자리에서 마교도들을 전부 격살하고 살아나가야 하니.


생각과 동시에 백연의 눈을 타고 기파가 일었다. 소년의 눈을 따라 피어난 자색 기파가 뚝뚝 흐르며 번뜩였다.


그와 함께.


키이잉.


여휘검에 실린 기세가 뒤집혔다. 사방을 점하던 묵직한 수기가 가라앉고, 거친 기파가 올올이 풀려나왔다.


“적화-.”


혈맥을 타고 피어오른 불꽃이 터져나오듯 내달리려는 그 순간.


“공자. 여기 있었군요.”


사락.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흑색 무복의 인영이 그의 곁에 내려앉았다. 사뿐한 보신경. 소리도 나지 않는 걸음이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앉은 여인이 그를 보며 생긋 웃었다.


“찾느라 어찌나 고생했는지.”

“루주?”

“우리 공자님을 괴롭히는 잡것들이 많네요. 보기 싫으니 좀 치워버릴까 싶은데.”


가벼운 어투로 중얼거리며 손을 뻗는다. 고운 손아귀에 잡힌 부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철선(鐵扇)을 휘두르는 순간.


쩌엉!


대기가 흔들렸다. 루주의 몸에서 풀려나온 기파가 철부채를 타고 한줄기 돌풍으로 화해 뻗어나간다. 그 바람에 휩쓸린 암기들이 힘을 잃고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찰나 일어난 바람이 먼지와 나무들의 잔해마저 휩쓸어 치워버리고.


“꿈이 하늘에 닿으면.”


휘이이.


허공을 수놓은 옅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어느새 나타난 인영. 펄럭이는 장포를 길게 흩날린다. 흩어지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검룡의 눈매를 따라 옅은 자색과 분홍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황혼의 시간이 피어나니.”


그가 여상히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찰나, 허공을 가르는 검격이 검법으로 보이지 않았다. 시야 전체를 양단하는 일격. 눈이 닿는 곳 모두가 반으로 갈리는 허상이 일었다. 좁은 건물 안에서. 마치 하늘과 땅의 경계가 나타난 양.


자색과 다홍, 주홍과 붉은 온갖 색채가 섞여들며 한줄기 빛으로 화하고.


파앗!


“자하신공(紫霞神功).”


나직한 음성과 함께 시야에 빛이 명멸하는 것은 찰나였다.


감각 너머로 느껴지는 강렬한 기파가 저미듯 허공을 채웠다. 그것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유성과 했던 대련. 그 자리에서 보여주었던 자하신공은 일부분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한번의 검식에 몇차례의 변화가 들어간지 알기 어려웠다. 기파를 엮어내는 방식이 지극히 탁월했는데, 허초와 변초의 속에 담긴 일검은 인지하는 것 조차 어려웠다.


직후 자하신공의 빛살이 사그라들고, 자리에 남은 것은 수십의 검흔을 몸에 새긴 마교도들이었다.


“괜찮아?”


검을 거두며 돌아선 유성이 물었다. 내공을 한번에 잔뜩 끌어다 썼는지 창백해진 안색. 그러나 자하신공을 펼친 직후에도 검룡은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백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 좋을때 왔네.”

“성도로 오다가, 무공 기파를 느끼자마자 즉시 달려왔어. 다른 이들은......?”

“소홍 사형은 저기 있고, 나머지는 몰라.”


여휘검을 짚으며 기대어 선 백연이 숨을 뱉었다.


안도감이 몸을 휘감았다. 휘청거리는 백연을 본 루주가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


“공자, 괜찮아요? 세상에. 부상이 심한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백연이 고개를 들어 루주와 눈을 마주쳤다.


“흑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교가 그를 쫓고 있는 듯 하군요.”

“그런.”

“급합니다. 상당한 강자가 쫓아오고 있는데, 우선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당장 이동해야 해요.”


백연의 말에 루주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눈을 감고 기감을 펼치던 유성이 입을 열었다.


“몇명 도망쳤어.”

“젠장할.”

“둘인것 같은데. 쫓아갈까?”

“아니. 늦었어. 놓친 이상 먼저 움직이는게 나아.”


척후를 놓쳤다. 쫓아가 사살하는 방법도 있지만, 장담하기 어렵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을 터.


“가자. 길은 내가 알아.”

“공자, 어디로 가는 건가요?”

“부상을 치료하고, 마교를 상대로 시간을 벌 수 있는 곳입니다.”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운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바깥에서 흑랑을 부축해 다가오는 소홍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곳이 이 안에 있어?”

“있지.”

“그게 어딘데?”


유성의 물음에 백연이 답했다. 희미한 미소를 입꼬리에 건 채였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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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9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9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8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3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6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63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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