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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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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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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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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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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네가 만든 마을(3)

DUMMY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죽음을 입에 담는다. 죽음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 확신하는 모양새. 백연은 그 모습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풍백은 지고한 강자이다. 그가 지닌 일신의 무위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나 과거에 버려두고 왔다는 검성이라는 별호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히 무위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경지에 오른 이들은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든 무(武)에 이를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죽음을 몰고 올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한다 해도.


무림의 유망한 고수들중에 간간히 입마(入魔)에 빠지는 이들이 있는 이유이다. 무공을 배워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죽음이라는 것이, 주화입마를 말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말한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평범한 인간의 육체는 그런 반동을 견딜 수 있게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어찌 확신하십니까?”


백연이 물었다. 그에 풍백의 눈이 가라앉았다.


“과거, 저는 여러 무인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자연히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수많은 기인들을 마주했지요. 개중에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는 무인들도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구음신맥(九陰神脈)을 지닌 단목령이라는 무인이 있었습니다.”

“구음신맥.”


백연이 중얼거렸다.


극히 희귀한 체질이다. 끝없는 음기를 타고나는 몸인데, 그 정도가 지나쳐 스스로의 음기에 잡아먹힌다. 빙(氷)계의 무공을 익히기에는 더없이 좋은 신체이나 그 한계가 명확하다. 무공을 쓸수록 체내의 음기에 몸이 잠식당하니.


“보통 절맥증을 지닌 이들은 상극의 기운을 지닌 영약등을 통해 절맥증을 완화시켜 살아가거나, 스스로의 체질에 맞는 무공을 익히는 것이 대부분이나 이자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 오성이 지나치게 뛰어났던 탓이지요.”

“오성이 뛰어나다 하는 말은......?”

“무에 욕심이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상극의 기운을 지닌 영약을 섭취하면 약해지고, 빙공을 익히면 한계가 존재하니 그 이상의 경지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이 당신이 사용한 것과 비슷했지요.”


풍백이 백연을 지그시 응시하며 눈매를 찡그렸다. 잠시 아픈 기억을 떠올리듯.


“극양 계열의 무공을 동시에 익혀 구음신맥의 음기와 엮어내려 했습니다.”

“......결과가 어땠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주화입마에 빠진 그의 손에 다섯 사람이 살해당했습니다. 각기 그보다 배는 강한 고수들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단목령도 죽었습니다만 다른 이들의 손에 제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찢겨나갔지요.”


풍백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백연을 응시하는 눈빛에 걱정이 역력했다.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일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인건가.


“주화입마의 문제 뿐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허나 육체가 힘을 견디지 못한다 하면 그것은 다룰 수 없는 무공이라는 말이 옳겠지요.”


풍백의 말에는 틀린점이 없었다. 하지만 백연은 그의 걱정섞인 충고를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버틸만 했던 것 같은데. 그 정도의 반동이 아니었어.’


찰나 뇌리를 관통하는 듯한 강렬한 백광의 검격. 펼치는 순간 온몸이 찢어질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다시 사용하지 못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회복이 빠른 탓인지.


‘더해, 그것이 무공이 향해야 할 방향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엮어내고 있는 무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이쪽이라는 느낌.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예감이 머릿속에 강하게 맴돌았다.


‘애초에 입마의 영역에 이르지 않았다.’


주화입마. 여러 영향으로 일어나지만, 그 중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무공을 익히는 것도 포함이 된다. 진정으로 그가 죽음에 이를 무공이었다면 입마의 전조나 최소한 강력한 영향이 있었어야 할 터.


지금 자신과 단목령의 경우에는 무슨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백연은 고개를 살풋 기울이며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행동이었는데, 풍백은 바로 눈치챈 듯 했다.


“포기할 생각이 없군요.”

“한 사람의 실패가, 그것이 곧 잘못된 길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옳은 말입니다만......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위험한 길인 것도 사실일진데.”


풍백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당신의 오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암화라는 별호를 얻었다고. 그만한 재능이라면 이미 누군가 닦아놓은 길을 걸어간다 해도 더없이 지고한 경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수련을 거듭하면 십여년 이내에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인데. 위험을 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연은 가만히 풍백의 연하늘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유를 물어온다. 그에 다시금 머릿속의 생각이 마구 요동친다. 어째서냐 묻는다 하면 뭐라 답해야 할까.


잠시 침묵하던 백연이 이윽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곤륜의 길은 끊어졌습니다. 다시 이어야 할진데, 이끌어줄 이를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겠습니까.”

“그 길의 방향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시간에 걸쳐 천천히 고민하며 나아가도 될 일인데.”

“저는......”


문득 백연의 눈이 주변을 스쳤다. 고요한 길가. 기문진에 가려진 거대한 도시. 이제 적막밖에 남지 않은 무덤.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르러 곁에 조용히 앉아있는 소홍에 와 닿았다.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안심할 수 있는 여유가 없지요. 마음이 급한 사람인지라.”


백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민은 오래 했습니다. 언제나 뇌리 한켠에 담아두고 끊임없이 되묻고 있는것을. 하지만 그런 위험성 때문에 걸음을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백연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가 엮어내는 무공에 내포된 위험성을 인지했음에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에 풍백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백연을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백의에게 들은 그대로군요. 당신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은 아닙니다. 다만......생각이 확고한 듯 하니, 그 전에 하나만 살펴도 되겠습니까.”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풍백이 손을 뻗어 백연의 손목을 잡았다. 긴 손가락이 귀중한 악기를 다루듯 부드럽게 손목을 따라 휘감겼다.


“몸을 좀 살피려 합니다. 체내에 기를 흘려넣을 생각이니 밀어내지 말아 주십시오.”

“예.”


백연이 답하는 것과 동시에, 풍백의 눈이 일렁였다. 그와 함께 풍백의 손 끝에서부터 산뜻한 감각이 일어났다. 흐르는 바람결 같은 기파. 극히 가늘게 뽑아냈는데, 그것이 퍼지지 않고 그대로 손목을 따라 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운을 다루는 감각이 극히 섬세해.’


손목을 파고드는 기운을 느끼며 백연이 생각했다.


쉬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내공 운용. 기질이 독특했다. 사파나 마교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기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정순한 도가 정파의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무공을 익힌 것일까.


“읏......”


백연은 혈맥을 따라 살풋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풍백의 섬세한 기파 운용과는 별개로 내상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바람결 같은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만으로도 세맥을 수천개의 침으로 콕콕 쑤셔대는 듯한 감각.


그가 낮게 흘린 신음소리에 곁의 소홍이 걱정스레 몸을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온몸의 세맥이 화끈거리는 감각으로 달아오른다 느껴질때쯤 풍백이 그러쥐고 있던 손을 떼었다.


“후우. 그래서 상태가 어떻습니까?”


백연이 숨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러나 미간을 좁힌 풍백은 잠시간 아무말 하지 않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백연, 이라 했지요.”


이윽고 풍백이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백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풍백이 말을 이었다.


“......혹시 당신, 인간이 아닙니까?”

“......예?”


황당한 물음에 백연이 반문했다. 인간이 아니냐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내단(內丹)을 지닌 영물들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생물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기를 축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해진 수명을 벗어나고, 본래 주어진 신체 조건을 탈피하며 새로이 몸을 구축합니다.”


풍백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제 명확히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 백연을 위아래로 훑는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무인들 또한 영물들과 본질적으론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무인들은 내공심법을 통해 비교적 단기간에 하단전에 내공을 쌓고, 그를 통해 무공을 펼치지요. 덕분에 영물처럼 신체 자체가 변화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 말씀은.”

“아까 당신이 그 검격을 펼쳤을 때 당황했습니다. 스스로를 잡아먹을 검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지금 이리 움직일 수 있는가 궁금했건만.”


풍백이 당황이 섞인 눈으로 백연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울 일이었다. 아까 그를 향해 짓쳐오던 백광의 검격. 찰나 성취를 뛰어넘은 검격을 펼치고도 그 반동을 온전히 버텨냈다. 그러고도 이렇게 멀쩡히 앉아 있다.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힌 겁니까?”


풍백의 물음에 백연이 멈칫했다. 그가 익힌 여러 무공. 다양한 갈래의 무공을 만들고 익혔으나 그 중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하나였다. 그가 다시 엮어낸 곤륜의 기초 심법.


“운연동공(雲煙動功)......”


백연의 말에 풍백이 중얼거렸다.


“동공. 동공이었군요. 대체 무슨 공능과 구결로 이루어진 심법인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한가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풍백의 눈이 일렁였다. 새로운 무학을 마주한 무인의 눈. 경탄과 알 수 없는 흥분이 섞여든 시선이 단호하게 백연을 응시했다.


“그것, 터무니없는 신공입니다. 익힌 사람의 신체 구성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정도로. 다시 말해 당신의 몸은 지금, 영물이 되어가는 중이나 다름없습니다.”



※※※



적요의 장막이 대지위에 드리웠다.


드넓은 벌판. 눈에 보이는 모든 영역이 새까맣게 불타있었는데, 사방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면.


“......바람이 강하군.”


벌판 한 가운데, 우뚝 선 거인이 있었다.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와 거대한 체구.


거칠게 자란 수염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흡사 불문 지옥을 묘사한 그림의 야차(夜叉)와 같았다. 강철같은 근육으로 빈틈없이 짜여진 거구의 몸 위, 길게 늘어진 흑포가 흩날렸다. 흐르는 듯한 흑포 위로 드문드문 불티가 솟아올라 흩어졌다.


천마신교(天魔神敎) 우호법. 화천귀제(火天鬼帝).


막 세 개의 마을을 불태운 참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는데, 그 범위가 가히 광활했다.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손끝을 따라 뚝뚝 떨어져 내리는 붉은 물이 마치 피와 같았는데,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거센 화염이 들불처럼 발치를 타고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통 재밖에 남지 않은 대지 위에 피어난 화염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부족하다.”


화천귀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펄럭이는 흑포 아래 언뜻 스친 그의 왼손. 본래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질 않았다. 빈 팔목 이외에는.


십여년 전, 한 늙은이가 그에게 남긴 상처였다. 씻을 수 없는 패퇴의 흔적.


교의 일원이자 호법으로써 치명적인 일이었다. 일신의 무위를 의심하고 덤벼오는 이들이 끝이 없었다. 그러나 화천귀제는 감히 그에게 도전한 모든 이들을 한줌 잿더미로 만들어주었다.


그가 한 손을 내준 것은 검은 하늘을 손에 쥐고 휘두르던 검객이지, 교의 떨거지들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다시 이 자리에 섰다. 손끝에 흐르는 짙은 화염의 기운을 느끼며 그가 천천히 시선을 던졌다. 동쪽이었다.


공동산이 자리한 방향.


눈에 담는 순간 화천귀제의 눈동자가 옅은 광기로 번뜩였다. 일렁이는 불꽃이 일순 그의 감정에 반응하듯 흑포를 타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우호법님.”


어디선가 빠르게 그를 향해 달려온 교도였다. 화천귀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하라.”

“흔적을 찾았습니다. 하오문의 쥐새끼가 아직 무덤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더군요.”

“흐음.”


화천귀제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가 펼친 손바닥 위의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는데, 그것을 본 교도가 겁에 질린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화천귀제가 입을 열었다.


“청화단(靑火團)에게 계속 추적을 맡겨라. 청화단주라면 능히 놈을 생포하고도 남을 터.”

“예. 그리고 또 한가지 고할 것이 있습니다만, 무덤에 새로 진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몇 있습니다.”

“신강의 입구에서 말이더냐.”

“아닙니다. 서남쪽에서 온 자들인데, 저희가 아직도 뚫어내지 못한 그쪽의 기문진을 단번에 파훼하고 들어갔다고......”

“단번에?”


화천귀제의 시선이 교도에게로 옮겨갔다. 여태껏 교도의 보고를 무감하게 듣던 눈빛이 일렁였다.


“인상착의는?”

“그것이, 그쪽에 무슨 소문이 퍼졌는지 새외 무림의 잡것들이 많았던지라 정확한 정황 파악이......”

“짧게.”

“죄, 죄송합니다! 보고로는 검수 몇과 외팔의 노인, 그리고 쌍검객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교도의 말을 듣던 화천귀제의 눈이 마지막 말에 이르는 순간 번뜩였다. 동시에 그의 몸 주변을 따라 강렬한 열기가 일기 시작했다. 대기가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의 기파.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교도가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설 정도의 열기였다.


“쌍검이라.”


여태껏 무표정이던 귀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천하에 그가 아는 쌍검객은 몇 존재하지 않는다. 새외 무림을 멀쩡히 나돌아다니며 여태껏 교에서 파훼하지 못한 무덤에 진입할만한 실력자라.


“하오문에서 부탁한건가? 그걸 들어줄 자가 아닌데. 허면......”


중얼거리던 그가 허, 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펼쳐진 그의 오른손 사이의 대기가 일그러지며 비틀렸다. 한순간 그 위의 대기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찌그러지는 듯 하더니 이윽고 손아귀 사이를 따라 청색과 자색의 불티가 피어났다.


“어느쪽이던 상관 없겠군. 적화단까지 보내 확인을......아니다.”


화천귀제가 서편을 응시했다. 얼마 전 교에서 발견한 무덤이 있는 장소. 그 안에 들어선 이들이 있다. 만약 그가 예상하고 있는 자라 하면, 공동의 늙은이를 만나러 가기 전 손을 겨루기에 더없이 적합한 상대가 될 터.


“내가 직접 가지.”

“예? 하지만 교주께서......”

“시끄럽다.”


화르륵.


그의 손에서 튀어오른 청자색의 불티가 옆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것에 스친 교도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불꽃에 휘감겼다. 지극히 찰나의 시간동안 맹렬하게 타오른 불꽃이 사그라들자, 자리에 남은 것은 한줌의 재밖에 없었다.


직후 불길에 휩싸인 발걸음이 잿더미를 짓밟고 지나갔다. 흑포 자락을 따라 흐르는 화염이 꼬리처럼 거인의 등 뒤를 따라 늘어졌다. 신강에 있는 무덤의 입구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



일행의 걸음이 거리를 울렸다. 터벅거리는 걸음. 백연은 여전히 소홍에게 부축을 받는 상태였는데, 일전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체의 회복 속도도 불가해하군요. 놀랍습니다. 진심으로 무공 구결을 견식하고 싶을 정도인데.”


곁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은 풍백이었다. 애시당초 무덤에 온 것 부터가 운결의 요청이었기에, 한동안은 동행해주겠다고 했다.


“곤륜에 방문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어려울 듯 하군요.”

“장문인께서 반가워 하실텐데요.”

“백의야 언제나 그러하겠지요. 다만 제 사정이 사정인지라......”


말끝을 흐린 풍백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허리춤을 따라 매달린 가면이 흔들렸다.


백연은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얽매여 있다는 율법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예의가 아니었을 뿐더러, 묻는다 해도 말해줄 수 없는 내용일지도 몰랐다.


때로는 알면 독이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희미한 풍백의 미소는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백연은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하면 제 몸이 달라지고 있단 말입니까?”


풍백의 말. 놀라웠으나 수긍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본디 심법을 비롯한 내가기공은 육체를 바꾸는 공능이 분명 존재한다. 당장 소림의 역근세수경이 그러하다. 각종 무공이 지닌 공능은 천차만별이니 운연동공의 공능이 그렇다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근골과 세맥이 보통 무인의 것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그런 무모한 검격을 펼쳤을 때 죽었을겁니다.”

“그럼 지금은 사용해도 죽지는 않는다는 소리군요.”

“그건 맞지만......”


풍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당장은 쓰면 안됩니다. 반동이 너무 강하니. 아무리 동공의 공능이 뛰어나다 해도 신체 자체를 다시 짜내려가는 것은 지난한 작업입니다. 적어도 몇년은 더 운연동공을 연마하고 그때 가서 새 무학을 만드는 것이 어떤지.”

“음.”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군요?”

“풍백 선배님의 고견은 경청하고 있습니다.”

“진짜로 위험합니다.”


걱정 섞인 목소리에 백연이 피식 웃었다. 곁에서 그를 부축하며 걷던 소홍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제, 말 안들어.”

“그러게 말입니다. 제 말은 안들으니 사형이 좀 설득해 보는건 어떤지요.”

“제 말이라고, 들을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귀에 담으며 백연이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세요. 생각을 조금 바꿨습니다.”

“드디어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인가요?”

“반발을 일으키는 방식과 제어하는 형태를 조금 변경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반동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문제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일리는 있는데. 어째서 선택지가 하나같이 그런 방향인지 모르겠군요.”


한숨을 내쉬는 풍백. 뒤이어 소홍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프면 혼나.”

“걱정마. 애초에 문파 사람들 모두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을 만들 생각이니까. 반동도 위험도 제거할때까지 무공을 다듬어야지.”

“무공을 만든다는 말을 이리 쉬이 입에 담는 것도 놀랍지만, 그 고집이 더 놀랍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말리지는 않는 모습. 백연은 웃으며 풍백에게 조금씩 질문을 던졌다. 무학과 무공. 반동과 힘의 증폭. 풍백의 검을 다루는 방식.


하나같이 귀중한 정보였다. 쌍검을 다루는 검객은 흔치 않고, 풍백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과 대화할 기회는 더욱 흔치 않다.


그의 검을 참고해 새로운 무공에 덧붙인다면 더욱 도움이 될 터.


어느 순간부터 풍백도 그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적극적으로 답해주는 모습이었다.


“보신경은 따로 놓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본디 무학이란 전부 투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 걷는 법과 뛰는 법,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법을 흩어서 생각하지 마시지요.”

“풍백께선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풍백이 슬쩍 손을 움직였다. 찰나, 시야에 담긴 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한순간 그의 허리춤에서 번뜩이는 빛이 일었다 느낀 순간.


화아아악!


주위를 따라 격렬한 바람이 일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 줄기가 눈을 스치고 난 직후, 풍백의 신형은 이미 열발자국 정도 앞에 이르러 있었다.


“검법과 걸음을 따로 놓지 않습니다.”

“......엄청나군요.”


백연이 감탄을 담아 중얼거렸다.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의 풍백. 분명 검을 뽑았다. 발도와 보법이 일체인 것이다. 어떤 방식인지 알기 어려웠으나 그 발상만큼은 확실히 받아들였다.


“다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제 검법이자, 보법이고, 신법이며 경공입니다. 물론 제 무학이 답은 아니니 참고만 하고 넘어가시기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에 풍백의 움직임을 새기며 백연이 고개를 숙였다.


해가 머리 위 높은 곳에 자리잡을 때가 넘어서도.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답이 오가는 것이 즐거웠다. 간간히 소홍도 끼어들어 의견을 냈다. 살수 무공을 배웠던 사형의 시각은 또 새로웠다. 과거의 길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때마다 빛바랜 기억 위로 새로운 색이 덧칠되었다.


그때도 이랬었나.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도시의 앞에 흐르는 작은 개천 위 익숙한 다리의 모습도, 길을 걸으며 쉴새없이 그에게 뭔가를 묻던 녀석들도, 막 지어지고 있던 성벽 앞에 앉아 투덜거리며 설계를 이어나가던 놈도.


그렇게 걸음이 흐르고, 이어지고, 멈추고.


어느새.


그는 커다란 성벽의 앞에 서 있었다. 비죽비죽 날카롭게 솟은 바위들의 집합체. 반쯤 열려있는 성문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


아무말 없이 성벽을 올려다본다.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크기. 마주하는 지금 어째서인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인다.


“왜 그러십니까?”

“사제. 피곤해? 아프면 쉬어.”

“아니......아닙니다. 들어가죠.”


성벽에서 시선을 떼어낸 백연이 문 안편을 가리켰다. 동시에 머릿속에 해야할 일들을 다시 새겼다.


성벽 안편의 도시로 들어가면 그의 내상을 치료할 영단들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터. 그때 사용하던 창고의 위치 같은 것은 전부 선명히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에게는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으니.


일행과 합류해 몸을 치료하고, 흑랑의 신변을 확보한다. 가능하면 창고도 털어서 나가면 될 일.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음?”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백연이 멈춰섰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반짝이는 무언가.


풍백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비도 아닙니까? 저런것이 왜 여기에.”


천천히 그것에 다가간 백연이 비도를 살폈다. 거대한 성문 살짝 안편. 나무에 단단히 틀어박힌 비도였다. 얇디 얇은 비도의 형태는 분명 익숙한 물건이었다.


“흑랑의 비도.”


백연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비도에서 시선을 뗀 백연이 성문 안의 고요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 방주 대리가 있군요. 그리고.”


흑랑이 비도를 여기에 꽂아두고 갔다. 굳이 문 안편에 꽂아둔 이유는 그의 이동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이리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곧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적들도 함께.”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허공을 타고 미미한 바람결이 일렁였다.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풍백의 몸이 굳어들었다. 동시에 백연도 코끝에 옅디 옅은 열기와 탄내를 느꼈다. 한순간 착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미미한 열기. 하지만 그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풍백의 시선이 천천히 동북쪽을 향해 돌아갔다. 흩어진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연하늘빛 눈동자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방금 누군가 기문진의 안에 진입했군요. 상당히 먼 곳에서.”

“저도 느꼈습니다.”


백연이 담담히 뇌까렸다.


싸움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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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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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철야방(8) +4 23.12.22 2,996 84 19쪽
141 철야방(7) +4 23.12.21 3,008 83 17쪽
140 철야방(6) +4 23.12.20 2,986 83 17쪽
139 철야방(5) +4 23.12.19 2,999 84 19쪽
138 철야방(4) +4 23.12.18 3,130 79 18쪽
137 철야방(3) +5 23.12.16 3,199 80 15쪽
136 철야방(2) +3 23.12.15 3,123 83 15쪽
135 철야방 +4 23.12.14 3,118 86 16쪽
134 재회(3) +5 23.12.13 3,210 87 19쪽
133 재회(2) +4 23.12.12 3,214 86 16쪽
132 재회 +5 23.12.11 3,307 88 17쪽
131 성화방주(3) +7 23.12.09 3,293 79 15쪽
130 성화방주(2) +5 23.12.08 3,284 85 20쪽
129 성화방주 +5 23.12.07 3,360 89 16쪽
128 사천(4) +8 23.12.06 3,337 88 19쪽
127 사천(3) +8 23.12.05 3,355 92 22쪽
126 사천(2) +5 23.12.04 3,426 87 17쪽
125 사천 +8 23.12.01 3,554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6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7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7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7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59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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