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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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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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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DUMMY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수잠의 북부견문록 중-



*



비밀은 수 많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속성 하나는 같은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이 왠지 모를 정도로 서로를 특별하게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 속성에 대해서는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려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 시절에는, 별 것도 아닌 비밀을 아주 비밀스럽게 말하면 서로 금방 친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부언하자면 이런 작용들은 더 무거운 비밀일수록, 그러니까 비밀이 더 비밀스러울수록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일어난다.


멀락은 이와 같은 비밀의 여러가지 속성을 꿰고 있었고, 그래서 지극히 미심쩍어하면서 하임 주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수 밖에 없었다.

수도원에는 오직 다섯 사람만 알고 있는 중요한 비밀이 있으며, 하임 주교는 그 다섯 사람 중 한 명에 속한다.

멀락은 비밀의 속성과, 하임 주교의 위치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비밀을 오래 공유한 탓에, 두 추기경과 한 주교, 그리고 두 사제는 서로 간에 격식이랄 것이 거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현재 멀락은 혹시 하임 주교가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예의나 격의에 지나치게 무뎌진 바람에, 선을 넘는 농담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주교가 추기경에게 농담을 던지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주교와 추기경의 직급 사이에는 그만큼 까마득하고 엄숙한 간극이 존재한다.

다만 수도원의 비밀을 간직한 다섯 명의 회의에서는 그 간극이 어느 정도는 메워져 있었다.

실제로 그간 벌어졌던 회의에서는 놀랍게도 두 사제들이 종종 두 추기경을 놀려 먹는 일도 있었다.


농담을 건네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농담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다.

멀락과 테오도르가 과도하리만치 격식을 싫어하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무튼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농담은 적어도 유쾌한 종류의 농담은 아니다.

멀락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말없이 한참이나 하임 주교의 표정을 살폈다. 하임 주교는 여전히 문 가운데 서 있었다.

오랫동안 하임을 관찰하던 멀락은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의심의 눈빛을 거뒀다. 아무리 봐도 하임 주교는 도저히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건네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멀락은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우선 멀락은 하임 주교가 예의를 준수하는 인물이라는 점에 안도했다. 하임은 아마 농담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멀락은 더욱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임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인 것 같구만. 하긴 자네처럼 고루한 인간이 그런 농담을 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자네 말이 진실이라는 소리이고... 이것 참, 종잡을 수가 없구만. 그러니까 하임 자네 말은 우리들이 사흘 동안 수도원에서 사라졌다는 말인가?"


멀락이 하임 주교의 표정에서 진심을 유추한 것처럼, 그때쯤엔 하임 주교 역시 멀락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음에 두 추기경을 추궁하기로 마음먹었던 하임 주교는 다소 얼떨떨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제 말은 진실입니다. 그보다 두 분께선 지하에 계셨단 말입니까? 그것도 무려 사흘 동안이나?"


멀락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대신 말하라는 의미가 분명했지만 테오도르 역시 하임 주교에게 들려줄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답을 떠넘기겠다는 의사 표현이 분명했지만 길버트는 하임 주교에게 들려줄 말이 마땅치 않았다. 길버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그 눈빛의 연쇄는 다행히 루나 차례에서 종식되었다. 루나는 다소 불확실하다는 투로 얘기했다.


"지하에서 시간축이 뒤틀린 모양이군. 아마 그런 종류의 마법이겠지."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런 종류의 마법이 있습니까? 시간의 흐름을 바꾸는 마법이라니, 저는 그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루나양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겁니까?"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아. 그냥 그런 마법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이지. 나는 마법사가 아니잖아?"


대화의 당사자인 길버트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러나 길버트는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길버트는 차분하게 루나의 다음 발언을 기다렸다. 루나는 설명했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덕지덕지 덧붙이는 건 너무 비합리적인 일이니까. 요컨대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거야.

먼저 첫 번째는 우리들이 지하에서 마법 같은 시간을 보낸 경우겠지. 물론 그런 마법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 같아. 우린 이미 지하에서 몇십 큐빗을 뛰어오르는 거대한 암석을 봤으니까. 더 놀라운 마법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경우지. 대륙에서 우리 여섯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흘 전부터 갑자기 시간 감각이 죄다 엉망이 되어버린 거야. 뭐, 이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두 경우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추측인지는 자명해 보이는걸."


마지막에 루나는 '그렇지 길버트?'라는 말을 생략한 것 같았다. 길버트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진실에 얼마나 맞닿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하겠습니다. 여러 가설들 중에서 굳이 가장 복잡하고 난해한 가설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니까요. 저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인식이 뒤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망상처럼 느껴지는군요."


대화를 듣고 있던 멀락이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 옆에선 테오도르가 깊은 상념에 빠지려던 순간, 다시 방문이 열렸다.

이번에 회의실에 나타난 것은 두 사제였다.

회의마다 서기를 담당하던 그 두 사제는 역시 추기경들에게 익숙한 면면들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두 사제는 하임 주교가 처음 방으로 들어왔을 때와 거의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멀락과 테오도르의 이름을 크게 외쳤고, 낯선 방문자의 존재에 잠시 의구심을 품었다가, 마지막에 토비를 보고 까무러쳤다.

마침내 두 사제가 평정심을 되찾았을 때, 그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하임 주교가 앞으로 나섰다. 하임 주교는 좁은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한번 죽 훑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서로 나눌 얘기가 산더미인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얘기하는 것보다야 회의를 열어 착실하게 순서대로 얘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추기경님들과 손님들께서 지하에서 여러 일을 겪으시는 동안 대륙이 크게 들썩였습니다."


합리적 제안이었으므로 모두 하임 주교의 말에 동의했다.

사람들은 잠시 부산을 떨며 회의를 준비했다. 모두 앉기에는 의자가 부족했으므로 두 사제가 얼른 바로 옆 창고에서 의자를 몇 개 준비해왔다.

곧 좁은 회의실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언제나처럼 탁자의 가장 상석에는 하임 주교가 앉았다. 직급이나 관례를 생각하면 당연히 멀락이나 테오도르가 앉는 것이 맞겠지만 두 추기경은 늘 그렇듯 그 귀찮은 자리를 한사코 사양했다.

하임 주교를 기준으로 오른 편에는 두 추기경과 두 사제가, 왼 편에는 리버 일행이 착석했다.

상석에 자리한 하임 주교는 서기 역할을 담당한 사제들과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만년필을 쥔 사제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하임 주교는 회의의 시작을 공표했다.


"지금부터 대륙의 안녕과, 보전 방안 마련과, 해악으로부터의 구제와, 무지로부터의 계도에 대한 행동 계획 수립을 위한 스물 두 번째 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하임의 공표가 끝났다. 그리고 해악 어쩌고부터 전혀 듣고 있지 않았던 멀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핀잔을 주듯 말했다.


"하임, 언제나 생각해왔던 것이지만, 그 지독하게 복잡한 안건명을 간략화할 마음은 없는 겐가? 회의에 참석한 손님들을 시작부터 질리게 만들 필요는 없잖은가."


"안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문서화를 위한 형식이라고 몇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문서화를 할 때에 모호하고 포괄적인 제목은 비효율적입니다. 더군다나 실제로도 사안은 복잡하고, 또 저희들은 그 모든 사안에 대해 다뤄야 합니다.

회의명을 간략화하면 저희들이야 약간 편해지겠지만, 이 문서를 찾게 될 후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겠습니까?

아, 서기가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손님들께서 긴장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평소처럼 편하게 말해주시면 그만입니다. 저희들의 서기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두 사제가 알아서 문어체로 바꿔줄 겁니다."


하임 주교는 도무지 반박거리를 주지 않는 깔끔한 태도로 말을 끝맺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이견도 제시할 수 없었다. 다만 멀락은 투덜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쯧. 회의가 길어질 것 같은데 다과라도 좀 준비해오지 그랬나.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하임 자네는 일처리는 완벽한데 비해서 배려심이 조금 모자라단 말이야."


"...심각한 문제가 사방에 산적해 있으니 농담은 그만하고 그쯤에서 자중해주십쇼."


멀락에게 대꾸한 하임은 리버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들께선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회의는 금방 끝날 겁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고, 또 회의가 막힘없이 진척됐을 경우에 빨리 끝난다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사안이 사안인 만큼 회의가 늦게 끝나더라도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지금이 저녁 시간이긴 하지만... 설마 식사 시간이 아주 약간 미뤄졌다고 해서 불평하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불평할 작정이었던 토비는 뜨끔하며 털을 조금 곤두세웠다. 토비에게 하임의 마지막 말은 '잠깐의 배고픔도 참지 못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망설이던 토비는 결국 하임을 한번 노려본 뒤 한쪽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질문은 가급적 길버트에게만 하도록 해."


하임 주교에게 반강제적으로 동의를 받아낸 토비는 이번에는 리버에게 당부했다.


"리버. 너는 사사건건 끼어들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네 궁금증을 전부 해결하자면 오늘이 가기 전에 회의가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음, 그리고 길버트."


"예."


"최대한 빨리 끝내. 너라면 할 수 있을 테지."


토비의 표정은 간절했고, 그래서 길버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길버트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토비는 대화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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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6) 24.05.19 7 0 18쪽
153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5) 24.05.17 6 0 18쪽
152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4) 24.05.07 8 0 15쪽
151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3) 24.05.07 6 0 13쪽
150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2) 24.05.01 8 0 13쪽
149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1) 24.05.01 6 0 12쪽
148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0) 24.05.01 6 0 12쪽
147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9) 24.05.01 4 0 11쪽
146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8) 24.04.22 9 0 13쪽
145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7) 24.04.22 6 0 13쪽
14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6) 24.04.22 8 0 14쪽
143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5) 24.04.22 5 0 10쪽
142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4) 24.04.22 6 0 11쪽
141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3) 24.04.22 4 0 13쪽
140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 24.04.22 6 0 15쪽
»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4.04.22 10 0 11쪽
13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5) 24.04.22 4 0 14쪽
13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4) 24.04.22 4 0 9쪽
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4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5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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