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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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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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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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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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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4)

DUMMY

길버트의 발언은 확실히 모두에게, 그리고 심지어 발화자인 길버트 본인에게도 다소 엉뚱하게 들렸다.

더욱이 그곳은 피오의 중앙 수도원이었다. 아무튼 그곳은 일반적인 시장거리보다야 훨씬 신에 가까운 곳이었고, 그래서 다섯 명의 성직자들에게 길버트의 말은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다섯 명의 성직자들 모두 길버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챘다. 테오도르는 탄복한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것이군요!"


"허어... 어찌 그런..."


이해의 시간이 지난 후엔 공감의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신음 같은 것을 나지막이 내뱉곤 했다.

다만 그중 리버는 멀뚱한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길버트는 이해를 바라는 청중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길버트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런 말입니다 리버군. 지하에서 추기경은 고대인들이 성물을 통해 신이 되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실과 더불어 자드가 루나양을 그토록 필요로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됩니다. 예, 자드는 성물을 전부 모음으로써 더 나은 존재로 격상되고 싶은 겁니다. 그것이 신이건, 혹은 종 차원의 진화건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성물이라는 것이 스스로 전이자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저희가 이 사실을 루나양을 통해 들었던 것처럼, 자드 역시 루나양에게 전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말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확실하군요. 요컨대 자드는 현재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성물을 한 자리에 모으기만 하면, 혹은 자신이 그것들을 가지기만 하면 신이 될 거라 여기고 있는 겁니다."


줄기차게 말하던 도중 길버트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뭔가 고심하던 길버트는 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길버트는 회상하듯 말했다.


"그렇군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제가 황궁을 떠나오기 전 자드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그 말의 의미를 자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아니군요. 예, 아니었습니다. 자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옥좌에 앉고 싶은 거라면, 그는 그렇게 했으면 됐습니다. 어느 날이건 상관없이 그런 마음이 들게 되면, 자드는 그날 당장 옥좌에 앉을 수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그가 말한 곳은 지상의 옥좌가 아니라 진정으로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성물의 힘으로 더 높은 존재가 되길 원하는 겁니다. 신이, 되려하는 거지요."


마지막에 길버트가 눌러 담듯이 내뱉은 말에 사람들이 침음을 내뱉었다. 잠시 후 하임 주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서두를 뗐다.


"이건 정말... 놀라운 상황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공작은 적어도 수 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북부의 머리에서 성물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귀가 너무 딱 맞아 떨어집니다. 예..! 현재 여러분은 여기에 계십니다. 저희 수도원의 가장 깊숙한 회의실에, 저희들의 눈 앞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아, 아니요 멀락 추기경님. 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니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멀쩡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이곳에 무녀인 루나님과, 성물 전이자 두 분이 모여 계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것은 정말로 불길한 추측이지만... 아마 자드는 여러분들이 이 수도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대목에서 길버트가 하임의 말을 끊었다. 길버트는 의문스럽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자드가 말입니까? 하지만 저희들은 듀라트 영지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어떤 영지에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군요, 한 마을에 들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외부와 단절된 곳이었고..."


계속 설명할 것 같던 길버트는 그러나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길버트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윽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부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 마을에서 저희들의 행선지가 유출됐을 거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여정 자체는 들키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은 롭스 산맥의 중심부를 통과해 오셨고, 그 험난한 여로는 아무리 뛰어난 추격자들도 혀를 내두르며 도망칠만한 곳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은 결국 마지막에 무벤의 성문을 통과하셨습니다. 당연합니다. 이곳이 목적지였으니까요. 그리고 성문 앞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상을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 길드의 한 인물을 만나셨습니다."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새기던 길버트는 곧 하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길버트는 곱씹듯이 대답했다.


"성문에서 만났던 그 지롱드라는 대머리 남자를 말하시는군요. ...이해했습니다. 애초에 자드는 도둑들에게 저희의 추적을 맡겼지요. 따라서 그 남자가 저희를 보고 갔다면 자드에게 저희들이 이곳에 있다는 정보가 이미 들어갔다고 봐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공작의 치밀함에 치가 떨릴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저는 이제서야 알겠습니다. 어째서 공작이 이 시기에 전쟁을 일으켰는지 말입니다.

공작이 정보 길드를 남부의 배신자로 낙인 찍은 것은 사흘 전쯤입니다. 예, 그 시기는 여러분이 이 수도원으로 들어온 거의 직후입니다. 아마 공작은 그 전에는 도둑들을 배신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전까지 공작은 도둑들이 필요했습니다. 공작은 여러분을 찾아내야 했고, 도둑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데에 있어선 누구보다 베테랑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 가련한 도둑들은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마탑을 통해 여러분의 정보를 콜텐으로 곧장 넘겼겠지요. 그리고 공작은 여러분이 무벤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곧바로 도둑들을 배신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것은 너무 심한 처사입니다. 공작은 여태 도둑들을 마구 이용해 먹었습니다. 마치 사냥에 데리고 나서는 카니쿨라처럼 말입니다. 그러고선 사냥이 끝난 후에는 열과 성을 다해 주인을 도운 카니쿨라를 잡아 먹어버렸습니다. 살과, 피와, 뼈를 전부 남김없이 말입니다."


하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다음 순간 하임은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종내에는 순수한 감탄이 섞인 투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 저는 이제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공작은 그렇게 함으로써 한꺼번에 거의 몇 가지 일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몇 가지 일이란, 각각 한 사람이 평생을 노력해도 쉽게 이룩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우선 공작이 해결한 것들 중 하나는 명분입니다. 통일을 위한 전쟁에는 당연히 마땅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힘에 의해 억지로 통일을 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행정을 하나로 합치는 일이 수 많은 반발을 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제후들의 다툼으로 증명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경우 공작에겐 아주 적절한 명분이 있습니다."


"...연초로군. 빌어먹을 자식."


멀락이 다분히 분노 섞인 투로 대답했다. 하임은 멀락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것은 정말 기막힌 명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인간사의 문제란 대부분 돈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예, 대부분의 인간은 제 이웃의 곳간이 차는 것을 상당히 못마땅해 합니다. 하물며 그 곳간에 들어있던 것이 원래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이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자드는 그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북부와 도둑들이 교합해 남부의 곳간을 털어간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사실은 현재 무벤 시민들의 반응만 봐도 명확합니다. 실제로 시민들은 연초가 세관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분노의 방향은 북부의 대주교와 도둑들입니다.

전쟁의 명분으로 가장 효율적인 것은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일입니다. 분노는 강력한 감정이고, 분노에 사고가 침식된 순간부터 이성은 사고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예, 자드는 그 점을 이용해 훌륭한 전쟁 명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명분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도둑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하임이 잠시 얘기를 중단했다. 하임 주교는 너무 긴 얘기를 하느라 조금 지쳐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얌전히 하임을 기다려주었다. 잠시 뒤에 침을 몇 번 삼킨 하임 주교가 이어서 설명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대단한 성과입니다. 요컨대 공작에겐 두 가지의 골칫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먼저 정보길드입니다. 정보길드는 종교전쟁 이후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세력은 공작의 골칫거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시민들이 곤란한 일이 발생했을 때 찾는 것은 저희 같은 성직자나 정보 길드이지 서기관들이 아니니까요. 권력이란 결국 지지와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보 길드는 알게 모르게 시민들의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골칫거리는 당연히 북부입니다. 종교전쟁으로 이룩한 통일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남부와 북부는 엄연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남부의 시민 그 누구도 북부인을 자신들과 완전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행정의 통일로 효율성을 좇는 공작에게는 이 사실이 마땅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공작은 그 두 가지 골칫거리를 한번에 해결했습니다. 어차피 북부의 패배는 자명한 것이니 이제 대륙은 완전히 통일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정보 길드는 이미 다시 예전의 위치를 찾기 힘듭니다. 조금 전 말했다시피 권력의 본질은 신뢰인데, 도둑들은 이제 시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공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동시에 하나의 일을 더 처리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하임은 리버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빛이어서 리버와 토비는 슬며시 눈길을 피했다. 결국 이번에도 길버트가 대표로 나섰다.


"...처음에 말씀하셨던 저희들과 루나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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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4) 24.04.22 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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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4.04.22 1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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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4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5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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