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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잠꾼 님의 서재입니다.

은거고수는 슬라임을 키우기로 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귤잠꾼
작품등록일 :
2023.03.18 18:20
최근연재일 :
2023.04.11 14:22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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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글자수 :
86,038

작성
23.04.1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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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完.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DUMMY

푸릉이와 검술과 그림자의 검술은 일맥상통했다. 육합검법부터 시작해 한참 수련을 거듭하고 있는 이십사수매화검법까지. 모든 것이 같았으나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의 요소가 전투를 판가름내고 있었다.


-하! 그런 검으로 과연 저 늙은이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으읏···”


무시무시한 기세와 함께 들어오는 그림자. 푸릉이는 그 공격을 막기 급급했다. 서로 검을 섞고 있는 상황에서 푸릉이는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의 그림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지.


그것은 살기였다.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강렬한 의지, 그것을 통해 목숨을 앗아가더라도 기꺼이 검을 휘두르겠다는 그 일념이 그림자의 검에 묻어나왔다. 푸릉이의 검에는없었던.


‘안돼··· 이러다가는···’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져나간다. 혹독한 훈련 중에 급작스럽게 성사된 대결. 체력이나 몸 상태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고는 해도, 피로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순순히 쓰러지는게 편할거야.

“시···러. 윽.”

-어차피 이십사수매화검법같은걸 가르쳐줄 생각도 없었을 거야. 검술은 그냥 네가 자신을 떠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고.

“아니야!”


그림자의 이간질에 푸릉이는 아릿한 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당장에라도 저 입을, 노인의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는 저 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림자는 비틀린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놀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네가 없으면 노인은 죽겠지. 밥해줄 사람도, 자신을 돌봐줄 사람도 이 험한 산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검술을 가르쳐준다고 한거야. 원래 가르쳐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아니야···”

-애초부터 네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인가 뭔가를 익힐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지. 왜?

“그런건···”

-그딴건 그냥 너를 곁에 있게 만드려는 구실에 불과하니까.

“아니야!!!”


푸릉이의 검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몸을 지키고 오두막 뒤에 있는 노인을 의식했던 그의 검이 점점 난폭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검술과 비슷해지면서 싸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내 말이 듣기 싫으면 나를 죽여봐.

“이야아아아!!!”


체력은 바닥나고 팔은 부들거렸다. 당장에라도 검을 내려놓고 바닥에 쓰러지듯 눕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절실할수록 푸릉이의 검에는 힘이 실렸다.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념과도 같은 무게감이 실렸다.


-너는 그저 잡일을 시키기 위한 몸종에 불과하다.

“···”

-너는 그저 변덕으로 집에 들인 가축에 불과하다.

“···”

-너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채로 인간을 연기하는 금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래서···?


검에 밀려 연신 뒷걸음질 치던 그림자. 그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푸릉이의 눈빛이 그림자를 향했다. 그 눈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건 중요치 않아···”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 노인의 행각은 위선이고, 헛된 일이고, 변덕이고, 동정에 불과한—

“내가 하부지한테 많은걸 받은건 사실이니까.”

-···

“그게 중요한 거야.”


팡!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며 내는 파공음.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잠시 숨을 고르던


-어리숙하군.

“당연한거야.”

-그 어리숙한 정이 네놈을 죽음으로 몰고갈거다.

“죽지 않게 강해질 거야.”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살아갈 만큼—

“걱정은 이제 됐어.”

-···뭐?

“너는 날 위해 말해주는 거잖아. 그러니까··· 용서할게. 나랑 하부지한테 했던 나쁜 말들.”


푸릉이는 이해했다. 눈 앞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말 안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걱정과 훈계. 그것은 노인의 가르침과는 결이 다르지만··· 푸릉이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푸릉이는 검을 들었다.


“강해질게. 걱정하지 않을 만큼.”

-···힘들 것이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포기하지 않을게. 너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나를 이겨서 증명해봐라.

“웅.”

-와라.


짠 것처럼 둘의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거울에 좌우반전을 시킨 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갔다. 서로 짠 것처럼 검이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빗겨치듯 내려쳐졌고···


촤악-


살갗을 가르는 끔직한 피륙음과 함께 승부가 결정났다.


-너···

“고마웠어.”


두 사람은 서로 스쳐지나갔다. 그림자는 목을 부여잡고 놀란듯이 푸릉이를 돌아보았다. 푸릉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에 묻은 거무스레한 체액을 털어내었고···


-환검을··· 깨달은건가.

“덕분이야.”

-그런···가··· 큭.


그림자는 무릎을 꿇었다. 깊게 베인 목의 상처에서 피가 울컥 솟아났고 흰 눈밭 위를 꺼멓게 물들었다. 푸릉이가 펼친 이십사수매화검법··· 그 환검의 묘리를 이용한 승리였다.


‘검로를 순간 비틀어서 다행이야.’


동일하게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내려치는 검격. 푸릉이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초식을 활용해 가슴을 크게 베어낼 듯한 검로를 틀어 그림자의 목을 베어넘긴 것이었다. 그림자와의 전투 도중 환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푸릉이.”

-···

“그게 내 이름이야. 만나서 반가웠어.”


무언가 말하려던 그림자는 점점 형체를 잃고 무너졌다. 푸릉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검을 검집에 넣었다. 납도하면서 철컥 하며 소음이 울렸고···


“아···”


그것이 하나의 신호가 된 것처럼 푸릉이의 몸이 쓰러졌다. 몸의 상처는 없었으나 그대로 새하얀 눈 위에 몸을 뉘였다. 양초의 불이 꺼지듯 스르륵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격렬한 전투에 심신이 피로해진 푸릉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 * *



“···릉아.”

“우응···”

“푸릉아!”

“하, 하부지?”


눈을 뜨자 노인이 푸릉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릉이는 깜짝 놀라 곧바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니 오두막이었다. 푸릉이는 눈을 깜빡이며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상 위에 쓰러져 있기에 깜짝놀랐다. 곧바로 너를 여기에 데려와 눕힌 것이고··· 쓰러진지는 아마 몇 시진 쯤 된 것 같구나.”

“···하부지, 고맙슴니다. 어서 저녁 준비를···”

“아니다. 조금 쉬거라. 내가 너무 무리를 시켰구나.”


노인은 푸릉이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의 표정은 안쓰러움과 고통스러움, 그리고 미안함이 복합스럽게 섞여 있었다.


“이 늙은이의 욕심으로 너를 잃을 뻔 하였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얼마나 부끄럽고 미안하던지.”

“아니에요 하부지···”

“이제 검술은 그만해도 된다. 너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나는 무얼 그리 쫓기듯···”

“하부지!”


푸릉이의 외침에 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말할 때 말을 끊은 적도 없거니와 큰 소리로 외친 적도 없던 푸릉이였기에. 노인의 반응에도 푸릉이는 화가 난 듯한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번 봐보세요.”

“검을 왜···”

“일단 봐보세요. 아셨죠?”

“그래··· 그렇게 하마.”


푸릉이는 몸을 일으켜 검을 들었다. 노인은 주춤거리며 오두막의 벽 쪽으로 몸을 붙였고, 푸릉이는 검을 뽑은 채 심호흡을 하더니 이윽고 검을 휘둘렀다.


“하앗!”

“!”


허공을 수놓는 수많은 검격. 기초적인 육합검법부터 시작해 노인이 그동안 가르쳤던 장법, 조법, 권법, 검법 등등 모든 것을 총망라하며 순서대로, 그것도 정석적으로 펼쳐나가는 푸릉이. 노인은 푸릉이의 몸짓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분간 이어지던 춤과 같은 무공의 향연. 그 끝에서 푸릉이는 다시 검을 집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꽃잎처럼, 변칙적이고 살랑거리는 듯 유하면서도··· 의식의 빈틈에서 날카롭게 움직이는 그 검법.


자그마한 푸릉이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초식을 하나씩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환검의 묘리를 깨우친 그의 매화검법은 한 단계 발전하여 노인의 눈을 어지럽혔고, 초식이 진행될수록 오두막 안에서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화향···!”


노인은 경악했다. 푸릉이의 검에서 매화향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향이 나는구나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3성에 이르렀구나. 정말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단순히 검로를 익히고 초식을 온전히 실천한다고 매화향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고, 내공의 강약을 조절하여 적절히 조치했을 때 비로소 매화향이 피어오르는 것. 물론 짙은 향도 아니었거니와 폐쇄된 오두막 안에서 겨우 느껴질 정도로 미세했으나···


3개월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이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 3성의 초입이라면 노인이 없이 홀로 노력한다면 더욱 높은 성취를 이룩할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이제는 길잡이의 중요도 보다는 혼자의 깨달음이 중요한 시기였으니.


“하부지! 어때요?”

“···굉장하구나.”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초식을 모두 마친-정확히는 1초식부터 23초식까지지만-푸릉이는 쪼르르 달려가 노인의 품에 안겼다. 노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푸릉이를 안아주었다.


푸릉이는 꺄르르 웃으며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하부지 덕분에 많은걸 배웠어요. 욕심이 아니에요.”

“!”

“제가 할 수 있게끔 지도해주셔서··· 그렇기에 익힐 수 있었던 거에요. 욕심이었으면 이렇게 잘 하지는 못했을 걸요? 헤헤.“


푸릉이는 그렇게 말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노인은 푸릉이가 쓰러진 것을 자신이 욕심을 부려서, 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푸릉이는 노인의 지시와 가르침이 적절했노라 몸소 시연한 것.


푸릉이의 뜻을 알아챈 노인이 묵묵히 푸릉이의 등을 두들겼다.


“고맙구나. 그렇게 말해주어서.”

“푸릉!”

“그것도 오랜만이구나.”

“아··· 이, 이제 안할라구 했는데!”

“허허허.”


푸릉이는 부끄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고, 노인은 그 모습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이 웃자 푸릉이도 따라 웃었고 한동안 오두막에는 둘의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차가운 겨울에서도 이미 오두막 안은 봄처럼 훈훈했다.



* * *



어느새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혹독하게 노인과 푸릉이를 핍박하던 추위와 칼바람은 어느새 잔잔해졌고. 기온은 여전히 영하였어도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몰아치지는 않았다. 푸릉이는 그 변화가 기꺼웠다.


겨울이 지나가면 새싹이 피어오르고 산이 다시금 푸릇푸릇 생기가 돌듯이, 노인의 몸 상태도 호전되리라. 막연한 희망에 푸릉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눈과 바람이 없어진 평상 위에서 푸릉이는 즐겁게 수련에 매진했다.


그러던 2월의 어느날 노인은 푸릉이를 불렀다.


“잠시 밖에 같이 나가자꾸나.”

“웅?”

“바람이 좀 쐬고 싶어서 말이다. 이제 겨울도 조금 누그러졌기도 하니.”

“아하! 내가 부축해주께!”

“고맙구나.”


노인은 푸릉이의 부축 속에서 오두막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섰다. 쓰러진 푸릉이를 데려오는 것 이외에는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던 노인. 오랫동안 걷지 않고 눕거나 앉아 있어 다리가 후들후들 거렸지만, 푸릉이의 부축 아래 안전히 밖을 걸을 수 있었다.


‘하부지도 재활···? 을 하려는가 보다!’


항상 죽어가는 사람처럼 오두막에 누워만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푸릉이였다. 그렇기에 노인이 제안한 외출은 푸릉이에게는 청신호처럼 느껴졌다. 자신보다도 머리 두세 개는 큰 노인을 부축하며 푸릉이는 열심히 노인을 부축해주었다.


“저쪽으로 가자꾸나. 내가 검을 휘두르던 그 장소.”

“웅!”


노인은 천천히 걸어갔다. 오두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평평한 평지. 그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어 푸릉이한테는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장소였다. 푸릉이는 별 다른 의문 없이 노인을 데리고 그 장소로 향했다.


“후우··· 겨우 이곳까지 걸어오는데 이렇게 힘들다니.”

“앞으로 열심히 운동하면 되지!”

“허허, 그 말도 맞는 말이겠구나. 그럼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해보마. 검을 주겠느냐?”

“···웅.”


노인은 허허로운 표정으로 푸릉이에게 검을 받았다. 항상 푸릉이가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검. 노인은 그 검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오랜만에 잡아서 그런가 처음 잡는 것처럼 괜히 어색해보였지만···


스릉—


기분좋은 청명한 소음과 함께 검이 뽑혔다.


“푸릉아, 위험할 수 있으니 조금 물러서거라. 가능하면 저 평상에 앉아있는게 좋겠구나.”

“그치만 하부지 쓰러지면···”

“괜찮으니까 어서.”

“으, 응!”


노인의 엄한 표정에 푸릉이는 후다닥 뛰어 평상에 앉았다. 평상시의 노인과 사뭇 다른 진지하고도 엄숙한 모습. 푸릉이는 그 변화가 조금 의아했으나 아무런 말 없이 노인을 지켜보았다.


노인은 검을 든 채로 호흡을 다듬으며 혼잣말 하듯 말을 뱉기 시작했다.


“내가 24번째 초식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 기억하느냐.”

“웅! 이십사수매화검뻡··· 마지막 초식은 배우기 어렵다고.”

“지금부터 그걸 가르치겠다. 마지막 초식이자··· 내 마지막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거라.”

“···하부지?”


마지막 초식이자 마지막 가르침.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푸릉이. 그를 두고 노인은 천천히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푸릉이는 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하부지···?’


봄이나 여름 무렵 노인의 검을 자주 지켜보았던 푸릉이였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노인의 검술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움직임도, 검격도 똑같은데 다른 점이라고 하면···


멀리 있음에도 느껴지는 짙은 매화향. 겨울이었기에 매화가 핀 곳이 산에 몇 군데 있기는 했지만··· 이정도의 향을 내는 매화나무는 없었다. 그 말은, 노인의 검에서 이정도의 매화향이 난다는 말이었고.


내상으로 내공을 전혀 쓰지 못하는 노인이 자신의 ‘마지막 가르침’을 푸릉이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 하부지!”


그 의미를 알아챈 푸릉이가 서둘러 노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노인이 얕게 휘두르는 검격의 바람에 곧바로 나동그라졌다. 먼지를 털어내며 다시금 달려들려던 푸릉이였으나···


“다가오지마라!”

“읏···”


노인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춘 푸릉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신념과 결단을 느꼈기에 푸릉이는 차마 달려들 수가 없었다. 노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백이, 검술에서 펼쳐지는 강력하고 웅대한 기운이, 그리고 그 끝에 피어나는···


‘매화···향이···’


푸릉이가 코를 찡긋거릴 정도로 짙은 매화향이 바람을 타고 확 풍겨왔다. 23번째 까지의 초식이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잎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라면, 24번째 초식은··· 잔잔하였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그것이 마지막 초식의 이름이니라.”


노인은 한 줌 남은 내공과 선천진기를 그러모았다. 온 몸의 힘을 다해, 땀을 흘리고 호흡이 거칠어져도 멈추지 않는 검로. 노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초식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무인으로서 생을 마감하려 했던 그의 바람이자 굳은 의지가 지금 실현되고 있었다.


매화만리향. 매화꽃잎이 호수에 자그마한 파동을 만들고, 그 파동이 호수 전체에 퍼져나가듯··· 천천히 그러나 멀리 퍼져나가는 매화향. 그 안에서 노인의 생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의 몸이 흐릿해졌다. 검기를 넘은 검강, 그것을 넘어선 은둔고수의 내공··· 그것이 매화로 화하여 삭막한 겨울의 산 정상을 수놓기 시작했다. 아직 이파리 하나 피워내지 못한 삭막한 나무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분홍빛의 꽃잎들.


그리고 그것으로 노인의 모든 기운이 모두 소멸해가고 있었다.


“푸릉아.”

“하부지.”

“이리오너라.”

“그치만···”

“어서.”



푸릉이는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쥔 채로 터벅터벅 노인에게 걸어갔다. 시야가 희뿌옇게 변하여 노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팔을 뻗은 채 푸릉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는 어느새 매화로 변하여 발목부분까지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침내 노인의 앞에 당도한 푸릉이를 노인이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노인의 몸 안에서 풍기는 매화향이 푸릉이에게 엄습했다.


“푸릉아, 그동안 고마웠다.”

“아냐··· 내가 더···”

“너를 주운 것은, 그리고 너를 이렇게 키운 것은 내 짧은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란다.”

“...!”

“내가 없어도 너는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노인의 말에 결국 푸릉이의 자그마한 눈에서 맺힌 것이 방울져 볼을 타고 흘렀다. 어디 가지 말라는 듯이 노인의 옷자락을 꽉 붙잡은 채로, 목석같은 주름진 볼에 얼굴을 비벼가며 푸릉이는 서럽게 울었다. 있는 힘껏, 목놓아 울음을 토해내는 푸릉이의 모습에 노인은 그저 그 여린 등을 토닥여줄 뿐.


노인의 몸체가 허리춤까지 사라지자 푸릉이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이대로 더 울 수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노인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푸릉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연신 눈가를 비벼대며 울음을 삼켰다.


“장하구나.”

“하, 부지···”

“그러고 보니 내가 이름 하나 알려주지 않았구나.”

“!”

“내 이름은 현류. 화산파의 장로이자 매화검선이라고 불렸던 늙은이. 그리고···”


노인은 푸릉이의 어깨를 잡았다. 이미 가슴께까지 매화로 소멸해가는 상황에서도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너의 이름은 지금부터 청류다.”

“이, 이름···?”

“언제까지 푸릉이라는 이름으로 살 수는 없겠지. 그러니 이름을 주는 것이다. 나의 이름을 따와··· 푸른 머릿결과 흐르는 물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니··· 잘 어울리는 것, 같구나···”

“하부지!”



노인의 숨이 점점 가빠워져갔다. 푸릉이를 감싸던 손 또한 매화로 화하여 산에 뿌려지고 있었고, 목 위 부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노인. 푸릉이는 황급히 노인의 머리를 안아 들었다.


“나도··· 하부지랑 함께해서 행복했어!”

“.......”

“하부지랑 멧돼지 고기도 먹고, 물가에서 물장난도 하고, 검도 배우고, 과일도 먹구··· 무지무지 좋았어! 맨날 그러고 싶었어. 그치만···”

“...”

“하늘에서 하부지가 보더라도 자랑스럽게 여길만큼 강해질께! 그리고 열심히 살게··· 청류라는 이름에 맹세하고 정말··· 진짜루··· 흐윽···”

“청··· 류야···”


입술 밑 부분이 사라지기 직전, 노인이 말했다.


“사랑한다.”

“...나두, 하부지. 사랑해. 정말··· 정말··· 하늘만큼···땅만큼···흑.”

“사랑···한다···”

“하부지!”


노인의 말이 끝나자 바람이 푸릉이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머리만 남았던 노인의 육체는 매화꽃잎으로 순식간에 변하여 푸릉이의 품 안을 빠져나갔다. 푸릉이는 꽃잎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손을 움직여보았지만··· 바람에 살랑이며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매화꽃잎은 결국 푸릉이의 손을 전부 떠나갔다.


“으아아앙!!”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푸릉이는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무릎을 꿇고 떠나가는 야속한 매화 꽃잎을 바라보며 한없이 처량하게. 하늘에 있는 노인이 자신의 울음을 듣고 다시 내려와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푸릉이의 서글픈 울음소리는 화산을 메아리쳤다.



* * *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지나 봄이 성큼 다가왔다. 추운 겨울의 상흔을 견뎌내고 재생하는 봄처럼··· 나무에는 이파리들이 추위의 눈치를 보듯 조금씩 피어올랐고, 잡초들은 이미 땅바닥에서 푸른 기운을 솟아내고 있는 봄의 초입. 푸릉이··· 아니 청류는 오두막의 입구에 걸터 앉아 신발끈을 조이고 있었다.


“응, 준비는 다 됐구··· 빠트린건 없구.”


청류는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오두막은 오늘따라 더욱 황량해 보였으나 그것은 청류가 오두막을 떠나면서 잡동사니를 정리했기 때문. 누군가 와서 살 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기에 해둔 일이었다. 푸릉이는 자기 몸체만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오두막을 나섰다.


“출발!”



오두막을 성큼성큼 내려가는 청류. 그의 손에는 낡아보이는 서책 한 권이 있었다. 노인··· 아니 현류가 겨울 동안 홀로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써내려갔던 책. 책의 제목은 ‘화산비급’이라고 써있었다. 청류는 그 책을 손에 꼭 쥔채로 험한 산길을 경공술로 내려갔다. 허리춤에 달린 검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렸다.


평생을 화산에서··· 현류의 품 안에서만 생활해왔던 강호초출 청류. 그의 중원 무림 유랑기가 지금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십니까. 작가 귤잠꾼입니다.


‘은거고수는 슬라임을 키우기로 했다.’ 라는 소설이 15화를 끝으로 완결되었습니다.

화산의 외딴 오두막에서 청류와 현류가 서로 교류하며 성장해가는 내용의 짧은 단편...

자유연재에서 연재하는 만큼 조회수를 기대하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5월에 있을 공모전에 참여할 예정이니 제 소설이 마음에 드셨다면 한 번 찾아와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소설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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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 매화검법 23.04.10 79 3 14쪽
13 13. 말코 23.04.08 75 3 13쪽
12 12. 겨울에 찾아온 괴한 23.04.07 79 3 13쪽
11 11. 겨울의 초입 23.04.06 81 5 12쪽
10 10, 지키기 위한 검술 +1 23.03.31 82 3 11쪽
9 9. 깨달음과 성장 23.03.30 92 3 11쪽
8 8. 검법 23.03.28 98 3 12쪽
7 7. 심법 23.03.27 113 3 10쪽
6 6. 스승과 제자 23.03.24 127 4 11쪽
5 5. 심마(心魔) 23.03.23 121 4 12쪽
4 4. 노인은 괜찮다. 23.03.21 134 3 12쪽
3 3. 노인과 푸릉이의 변화 +1 23.03.20 149 3 14쪽
2 2. 푸릉이 23.03.19 161 4 12쪽
1 1. 괴생명체의 조우 23.03.19 256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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