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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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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4
추천수 :
73
글자수 :
303,156

작성
20.05.1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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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Ep 1. 미운오리새끼(5)

DUMMY

알펜시아 저택은 도시 외곽 지역의 서쪽 작은 동산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를 감싼 성벽을 나와 제법 걸어야 되는 거리여서 저택 주변의 인파는 사실상 고용인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또 제법 험한 동산을 등지고 있으니 용무가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곳에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한 알펜시아 저택 뒤로 우뚝 솟은 성채가 바로 알펜시아 기사단의 막사이자 근거지다.

동산 위에 위치한 이 성채는 제법 가파른 경사지와 수목으로 험준한 지역으로 고지대에 위치하여 영지를 살피고 방어하기 쉽다. 또한 도시와도 그리 멀지 않아 보급이 수월한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채는 알펜시아 저택에서 후문을 나와 약 30분가량을 등반해야 도착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성채는 백작가의 고용인들 뿐 아니라 기사단원 이외 사람은 출입이 뜸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바쁜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에 알펜시아 기사단의 연병장은 외부인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중 알펜시아 백작의 모습도 보이니 저택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피란과 루틴 머스턴 자작의 결투. 더군다나 결투 대상인 제피란은 올해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승부는 불 보듯 뻔한 결과지만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따분한 저택에서 결투라는 이벤트가 생겼으니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영은 그 인파들을 둘러보곤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군.”


세영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백작에게 요구할 수 있으니, 그것만큼은 고마워해야 할까? 세영은 알펜시아 백작을 곁눈질하였다.

제피란의 기억속의 백작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물론 뒤로는 음흉한 마음이 있을지 몰라도 겉은 매우 신사적인 사람이다. 가까운 예로 제피란과 세실리아를 봐도 알 수 있었다. 주변 타 영주들과 비교해 강한 재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로렌시아 지방을 차지할 수 있음에도 백작은 제피란을 양자로 들였다. 그럼으로써 로렌시아 지방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합법적으로 다른 영주들의 불만을 잠재운 사람이다. 이번 왕족 약혼식 역시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백작의 처신이 한 몫 거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소문에 민감하지.”


사람의 체면을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평판이다. 주위에서 바라보는 좋은 평판에 그만큼 체면을 차리고 위신을 세울 수 있는 거다. 반대로 생각하면 주위에서 보는 눈이 매서워지면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다. 평소 이미지 관리에 힘써온 백작이라면 자기 위신을 깎아내리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의 경우 처신을 신경 쓰며 소심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루틴 교수와의 결투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의 도움에 세영은 실소했다.

한 달 뒤 열리는 공주마마의 약혼식, 거기서 자신을 제외하려는 흑심을 넌지시 언급한다면 제피란이 연회에 참석하지 못 한 책임은 전부 백작에게 돌아간다. 오락거리가 없어 이런 소동에도 저택의 대부분의 사람이 몰려들 정도다. 조금만 계기를 만들어주면 사람들은 알아서 왜곡하고 곡해하여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자극적이게······.

이 경우 최악의 상황은 백작과 다른 파벌의 귀족이 제피란의 후견인을 자청하고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단순히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백작은 지나치게 신중하다. 실례로 제피란이 공주마마 내방 연회에 있더라도 어린 소년이 연회에 참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다른 귀족들과 제피란이 안면을 튼다 하더라도 그것이 백작에게 악영향이 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에도 백작은 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어 한다. 그 성정이 오히려 자신의 카드를 줄이는 행위가 되겠지만······.

호위 역으로는 역시 윌리엄이 제격이다. 그도 그럴게 엔시스 남작의 참배 행렬에 옛 남작가의 가신이었던 윌리엄 역시 동행할 명분으로 충분하다.


“루틴 자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때였을까? 세영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루틴 자작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과 함께 주위를 에워싸는 인파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


인파 사이로 보이는 루틴 교수는 마지못해 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마치 어젯밤 세영의 추측을 대변해주듯 자작은 등이라도 떠밀리는 사람마냥 주춤거렸다.

열 살배기 꼬마와 결투. 그것도 자기 자신이 어린아이의 지적에 흥분해 신청한 결투다. 학자이기 이전에 성인 남성으로서도 이처럼 바보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작에게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전부 비난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자작에게는 마치 연병장 전체가 거대한 공개 심문장처럼 느껴졌다.


“끄응······.”


어지간히 자리가 불편한지 루틴 교수는 묘한 신음을 흘리곤 연병장 중앙에 세영과 나란히 섰다. 그런 자작의 모습에 세영은 그저 빤히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세영의 눈빛에 더욱 불편해진 자작은 태연함을 가장하듯 큰 소리로 “크흠! 크흠!” 헛기침을 하였다.

이번 결투는 루틴 교수에게 있어 백해무익한 결투다. 더군다나 상대는 왕국 내에서도 강한 권력을 지닌 백작의 어린 자제였다. 백작가의 사정을 모르는 루틴에게 있어서 여차할 경우 백작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결투였다. 학자로서 위신을 둘째 치고 변변한 영지조차 없는 명예귀족인 자신이 백작가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것이다.

어른스럽지 못 한 결투라 하더라도 작위를 가진 이상 도망갈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결투에 임해봐야 비웃음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결투에서 제피란이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몰려드는 불안감에 자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때, 연병장 구석에 비치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목검!’


다치지 않는 정도에서 결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자작에게 있어서 그거야 말로 최상의 시나리오다. 비록 어린아이에게 결투를 신청한 머저리라는 오명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백작이 적으로 돌아서는 경우는 없어지는 것이다.

목검으로 결투를 하자. 좋아, 이거다! 루틴 교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구명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백작에게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루틴 교수의 말을 끊고 백작이 먼저 말하였다.


“자작. 이번 결투에서는 목검을 사용함이 어떠한가?”


“······.”


“······.”


예상외의 백작의 제안에 주위의 웅성임이 일제히 멈췄다. 그 백작의 권유가 얼마나 예상외였는지 당사자인 세영마저 놀란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제피란은 백작가에 있어서 미운오리새끼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로렌시아 지방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제피란이 성장해 엔시스 남작을 주장하며 로렌시아 지방을 요구하게 된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백작에게 있어서 제피라는은 단지 상징적인, 호적에 적을 올리는 이름만으로 충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세영은 예상치 못 한 백작의 권유에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 이럴까? 비유는 다르지만 그만큼 백작의 권유는 세영으로선 예상 밖인 이야기다.


“결투 자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아직 꽃도 피지 않은 봉오리일세. 여기서 지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번 어른스럽지 못한 결투에 자네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백작은 천천히,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뭐지? 어째서 제피란을 옹호하는 거지? 저 백작이? 무슨 꿍꿍이로?

그런 백작의 모습에 세영은 혼란스러웠다. 이제 와서 부자간의 정이 싹텄다?

말도 안 돼는 소리. 애초에 그럴 거면 백작가의 힘으로 결투를 무효로 해버리면 된다. 귀족의 긍지를 내건 결투라고 말은 하지만 제피란은 성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이다. 또한 목검으로 결투라 하더라도 결코 안전한 싸움은 아닌 것이다. 단단한 둔기로 얻어맞는 싸움에서 여차하다간 뼈가 나가는 것은 당연하고 손가락이 뭉개지고 심하면 두개골이 함몰될 수도 있다. 결투에서 세영 자신이 죽진 않더라도 반신불수의 병신이 될 소지가 다분한 위험한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제피란에 대한 가족애를 대대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럴 리가······. 이미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은 제피란의 사정을 알고 있을 백작가의 사람이다. 그걸 모르는 이라고 해 봐야 루틴 교수 뿐이다. 아무리 체면을 중시하는 백작이라지만 이제 와서 백작이 제피란을 아낄 이유가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에 세영의 사고가 정지한다. 마치 과부하가 걸린 기계장치가 삐걱이듯 세영은 딱딱한 고개를 들어 멍청한 눈으로 백작을 올려보고만 있었다.

세영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옆의 루틴 교수가 앞으로 나섰다.


“생각해보니 저도 어른스럽지 못 했던 것 같군요. 백작님의 말씀,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루틴 교수는 흔쾌히 백작의 제안을 승낙했다. 도망칠 구멍을 찾고 있던 교수에게 있어서 백작의 제안은 자신이 찾고 있던 구명줄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습에 세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번에도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피란, 내일 당장 펠튼 경 묘소를 방문하려무나. 일정과 예산은 준비해 둘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갑작스럽겠지만 공주마마님의 내방에 맞추려면 아무쪼록 서둘러야 하지 않겠니?”


“······.”


백작의 말에 세영은 숨을 삼켰다. 그도 그럴게 그 내용은 세영이 백작에게 요구하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출발은 내일 오전 중으로, 호위는 기사단 1개 부대를 내어줄 터이니 준비하거라.”


“······.”


“동행하는 기사장은 옛 엔시스 기사단장인 윌리엄 경이 될 거다. 그 역시 펠튼 경에게 작별을 고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니.”


마치 세영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백작의 통보에 세영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세영이 준비한 카드를 백작이 먼저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백작의 위신을 깎아내릴 세영의 생각과는 달리 백작의 위신을 더욱 확고히 다져준다.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 있을까?

세영오르선 마치 백작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느낌이었다. 굴욕을 넘어서 이해할 수 없는, 세영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혼란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세영의 대답에 백작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펜시아 가문에 어울리는 결투를 하려무나.”


백작은 짧게 격려하였다. 그러나 말이 격려지, 세영에게 결코 도망치지 말라며 못 박음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이제 10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성인 남성과 칼싸움을 벌이는데 응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게 아무리 목검이라지만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며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백작의 그 차가운 모습에 세영은 간신히 냉정을 되찾았다. 각오를 굳히고 작은 입술을 열었다.


“···진검으로, 하겠습니다.”


“······.”


세영의 대답에 순간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세상에서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적막함이 연병장에 감돌았다. 그것도 잠시, 이내 세영의 말을 이해한 무리들이 일제히 웅성이기 시작했다. “도련님!!” 얼핏 헬레나의 목소리도 들린 듯싶지만 세영은 무시한 채 백작을 쏘아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자, 잠깐, 이 무슨······.”


세영의 옆에 있던 루틴 교수 역시 세영의 대답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세영의 모습에 백작은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자작하고 끝난 이야기다.”


세영의 요청에 백작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 백작에게 세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결투를 벌이는 건 저와 자작입니다.”


“······.”


세영의 대답에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게 자신의 양아들이자 백작가에서 아무 발언권도 없는, 그저 허울 좋은 허수아비 제피란이 자신을 무시한 것이다. 제피란의 양아버지이며 백작가의 호주인 알펜시아 백작 자신을!

백작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 오른 것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영은 주눅은커녕 백작을 마주 쏘아보았다.

어차피 세영은 백작의 비위를 맞춰줄 이유가 없었다. 백작에게 굽실거린다 해도 백작에게 제피란은 이름뿐인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백작의 비위를 맞춘다 하더라도 백작가에서 제피란의 위치는 언제나 미운오리새끼밖에 되지 않는다.


“자작의, 생각은 어떠한가.”


세영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백작은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루틴 교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백작의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까? 루틴 교수는 당황하여 “네? 저기, 저는······.”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세영이 자작의 말을 끊고 선언했다.


“결투는 진짜 무기로, 상대가 숨을 거둘 때 까지!”


“너에게 물은 게 아니다!”


버럭! 세영의 대답에 백작은 화를 참지 못 하고 소리쳤다. 그런 백작의 드문 모습에 고용인들 전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고함소리에도 세영은 마주 언성을 높였다.


“이건 저와 자작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제 3자는 닥치고 있어라!

세영의 선언에 알펜시아 백작은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 하고 까득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도 뭔가 말하려는지 입을 열지만, “이, 이익! 이!” 나오는 건 분에 겨운 신음뿐이다. 백작은 붉으락푸르락 낯빛을 붉히더니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리곤 이내 세영의 옆의 루틴 교수를 사납게 노려보고선 홱 몸을 돌려 기사단 연병장을 뒤로했다.


‘나, 나는, 왜······.’


덩달아 백작의 분노를 같이 받아야 했던 루틴 교수는 억울한 심정이었다. 물론 이 모든 사태의 주원인은 자신의 결투신청 때문이었지만, 잔뜩 위축된 루틴 교수는 그 벙찐 표정만큼이나 혼란스러운 머리에 멍해 있었다. 그런 루틴 교수와는 달리 주변 인파들은 백작이 떠나자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제피란!” “도련님!” 세영을 책망하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세영은 마치 훼방꾼이 사라져 개운한 듯한 표정으로 루틴 교수를 돌아보았다.


“교수님. 결투는 진검으로, 한 쪽이 죽을 때까지 바랍니다.”


“······.”


루틴 교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이번 결투는 단순히 얄미운 어린아이에게 분통이 터져 홧김에 신청한 싸움이다. 더군다나 제피란은 백작가의 자제, 방금만 하더라도 자신을 노려보던 백작의 눈빛을 보았을 때 저 소년이 잘 못 된다면 자신 역시 살아서 저택을 나가지 못 하리라······.


“······.”


그렇다고 세영의 요청을 거절하자니 그 역시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와 진검 승부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 같았다. 물론 어린아이와의 결투에서 진지할 필요가 있느냐 변명하고 싶어도 그 결투를 신청한 당사자가 루틴 교수 본인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젠장!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복잡한 심정에 루틴 교수는 속으로 욕지기를 퍼부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이상 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백작가의 자제인 상대를 제대로 공격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승부를 포기하자니 영지 하나 없는 명예귀족인 자신으로선 그 마저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진퇴양난, 체크메이트나 다름없는 외통수다.

자작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고용인 한 명이 세검 한 자루를 루틴 교수에게 건네주었다. 결투용 세검이었다. 그러나 자작은 세검을 받기는커녕 넋 나간 사람마냥 멍하게 서서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고용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혹시 원하시는 다른 무기가 있으신지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용인의 질문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까? 루틴 교수는 흠칫 놀라며 “아니, 괜찮네.” 고용인이 건네는 세검을 받았다.

루틴 교수가 칼을 받아들자 세영 역시 자신의 작은 세검과 방패를 들었다.

그 모습에 자작의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결투에서 방패, 라고?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품위 있는 귀족의 결투에 익숙한 자작에게 방패는 또 다른 의문을 만들었다. 더군다나 보통과는 다르게 오른손에 방패를, 그리고 왼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목숨이 아깝다는 건가? 그런 경우라면 어째서 진검승부를 주장한 거지? 더군다나 왼손이라니, 분명 저 꼬맹이는 오른손잡이일 텐데? 아니, 그 이전에 저 꼬맹이는 도대체 뭘 믿고 진검승부를 요청한 거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이제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성인인 자신을 무슨 수로 이기려는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그것은 결투를 관전하던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웅성임이 커졌다.


"방패라니, 도련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글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연병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시던데?"


"정말?"


"온통 땀과 먼지투성이로 새벽부터 연습하신 모양이야."


"아, 그거 나도 봤어. 그러고 보니 한 손에 방패를 들고 연습하시던데."


"방패로 막아내고 공격하시려 하시나?"


"그럴지도, 애초에 자작님보다 도련님의 팔이 짧으니까."


"그런데 저 팔로 검을 막을 수 있을까?"


"그래서 오른손에 방패를 든 거 아니야? 왜 도련님 오른손잡이시잖아."


고용인들 나름대로 세영의 전략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그 웅성임을 들은 자작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일개 학자인 내 공격은 언제든 막고 반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어?

순간 루틴 자작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혈질 기질이 다분한 루틴 자작은 낯빛이 빨갛게 충혈된 것이 간신히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런 루틴 교수를 향해 세영은 방배 뒤로 눈을 부라렸다. 본인 딴에는 매섭게 위협하려고 한 듯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아이의 재롱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세영의 말에 루틴 교수는 기가 찼다. 그도 그럴게 열 살배기 어린아이가 자신과 진검승부를 주장하고, 저렇게 말을 하는데, 세상의 어느 누가 기가 차지 않겠는가? 아무리 자신이 학자로서 칼을 쥐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상대는 열 살 된 어린아이다.


“허, 참.”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을 것이다. 루틴 교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치솟았다. 허영으로 가득 찬 제피란의 만용에 교수는 까득 이가 갈렸다. 아무리 백작가의 자제라 하더라도 저 현실을 모르는 건방진 꼬맹이를 이 검으로 꿰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이진 않더라도 팔 한두 짝 정도는 꿰어주마!’


상대를 죽이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전의를 상실한다면 결투는 자연히 마무리 될 것이다. 그래! 이거다! 굳이 죽이지 않고 저 애송이의 전의만 꺾어 놓는다면! 루틴 교수는 뜻밖의 기사회생의 수를 보고 꺼져가던 전의를 불태웠다. 그 때문일까? 루틴 교수는 아까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치 거짓말같이 매섭게 칼을 꼬나 쥐었다. 그 모습에 세영 역시 자신의 칼을 치켜들며 어설픈 자세로 루틴 교수를 겨누었다.


“결투 시작해 주십시오.”


백작이 떠나고, 그를 대신해 백작가의 작은 영주 레이 알펜시아가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먼저 움직인 쪽은 루틴 교수였다.

“하앗!” 자작은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세영에게 칼을 내질렀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자작의 검이 허공을 꿰어낸다. 루틴 교수의 돌진에 놀란 탓일까? 무리하게 몸을 빼려던 세영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듯 구르며 교수에게서 도망간다.


“큿!”


짧게 숨을 삼키며 재빨리 몸을 바로 세운 세영은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린다. 그런 세영이 가소로운 교수는 다시 칼을 고쳐 잡는다.

이번에는 좀 더 깊게, 좀 더 멀리, 피할 수 없게!


“핫!”


짧은 기합. 교수는 강하게 발을 구르며 앞으로 무너지듯 쏘아져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꿰뚫는다!

필살의 각오로 교수는 다시 한 번 칼을 내지른다. 그러나 그런 그를 향해 세영이 먼저 움직였다.


“뭐?!”


휘익! 하고 세영의 방패가 교수의 얼굴로 빨려들어 가듯 날아들었다. 세영이 교수를 향해 방패를 던져버린 것이다. 교수는 숨을 삼키곤 순간 재치로 왼손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빠악! 제법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왼 팔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내달렸다. 그러나 이미 잔뜩 흥분한 그는 다시 한 번 세영을 꿰기 위해 검을 당겼다.

그리고 보았다.


“···무슨?!”


눈앞의 괴현상을 이해하지 못 한 루틴 교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금발 벽안의 소년이 잔인하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 채 빠지지도 않은 젖살을 밀어올린 채, 하얀 이를 보이며, 푸른 벽안이 교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방패의 가려진 틈으로, 순간 품에서 꺼내든, 세영의 오른 손의 그것이 교수를 겨누었다.

교수의 뇌리를 스치며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살기등등했던 소년의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그럼, 안녕히.”


소년은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으며 루틴 교수를 향해 작별을 고했다.

“자, 잠깐!” 교수가 말할 세도 없이, 세영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세영이 겨눈 권총이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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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p 1. 미운오리새끼(25) 20.05.22 40 0 19쪽
27 Ep 1. 미운오리새끼(24) 20.05.22 38 0 25쪽
26 Ep 1. 미운오리새끼(23) 20.05.21 40 0 25쪽
25 Ep 1. 미운오리새끼(22) 20.05.21 41 0 19쪽
24 막간 20.05.20 44 0 20쪽
23 Ep 1. 미운오리새끼(21) 20.05.20 48 0 19쪽
22 Ep 1. 미운오리새끼(20) +1 20.05.19 55 1 21쪽
21 Ep 1. 미운오리새끼(19) 20.05.19 48 0 18쪽
20 Ep 1. 미운오리새끼(18) 20.05.18 63 3 17쪽
19 Ep 1. 미운오리새끼(17) 20.05.18 58 1 13쪽
18 Ep 1. 미운오리새끼(16) 20.05.17 65 1 12쪽
17 Ep 1. 미운오리새끼(15) 20.05.17 64 0 18쪽
16 Ep 1. 미운오리새끼(14) 20.05.16 70 0 13쪽
15 Ep 1. 미운오리새끼(13) 20.05.16 75 1 13쪽
14 Ep 1. 미운오리새끼(12) 20.05.15 79 1 20쪽
13 Ep 1. 미운오리새끼(11) 20.05.15 89 1 15쪽
12 Ep 1. 미운오리새끼(10) 20.05.14 92 4 19쪽
11 Ep 1. 미운오리새끼(9) 20.05.14 92 0 19쪽
10 Ep 1. 미운오리새끼(8) 20.05.13 102 2 25쪽
9 Ep 1. 미운오리새끼(7) +2 20.05.13 110 2 18쪽
8 Ep 1. 미운오리새끼(6) 20.05.12 139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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