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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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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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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Ep 1. 미운오리새끼(28)

DUMMY

"백작이 어째서 이곳에서 노예경매를 여는 걸까?"


아직 변성기조차 오지 않은 맑은 미성의 목소리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거만할 정도로 도발적이었으며 또 악마의 속삭임 마냥 달콤했다.


"다른 이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또 여차할 경우 즉각 대처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금발 벽안의 소년은 자기 자신이 던진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였다.

그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던 카인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뒤이은 소년의 질문에 카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데 만약 노예상이 여기 있다는 걸 들킨다면 어떻게 될까?"


알펜시아 기사단 막사에서 노예상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애초에 노예상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요새에서 노예경매를 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노예상이 발각된다니······.

소년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치 못 한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생각해봐. 노예상을 급습하려면 언제가 가장 좋은 타이밍이겠어?"


"···급습이라니."


카인은 소년의 말을 곱씹으며 능청스레 시치미를 뗐다. 그도 그럴게 노예상을 습격하는 일은 극비일 뿐더러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카인의 반응에 소년은 입 꼬리로 볼살을 밀어 올렸다.


"시치미는, 백작이 원하는 건 귀족들이 서명한 거래내역서 아니야?"


"그 무슨······."


"급습을 하려면 다른 귀족들이 개입을 못 할 때가 적당하겠지?"


변명을 꺼내려는 카인의 말을 자르고 소년은 어딘지 유쾌한 듯 잔뜩 비웃음이 담긴 눈으로 그에게 설명했다.


"예를 들자면 거래 현장이라든가 거래가 막 끝난 직후쯤일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년이 언급한 시간대에 카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애당초 그 시각이면 노예상은 이 라도기어 성을 벗어나지 못했을 터······. 그리된다면 백작이 노예상과 관계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는 짓에 불과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카인의 모습에 소년은 "미안한데 말이 되거든?" 입 꼬리를 느슨히 했다.


"어차피 막사는 현재 기사단이 책임지고 있으니까."


소년의 알 수 없는 말에 카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 "그게 무슨?" 되물었다. 그런 카인의 반응이 재미있어서일까? 소년은 연방 미소를 지은 채,


"네가 희생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대단하네."


"뭐가?"


난데없는 에르나의 감탄에 서류를 검토 하던 세영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일하는 거 말이야."


"무슨 말이야?"


"아니, 그냥 뭐 앞일을 예측한다든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서."


혹시 미래 예지나 독심술이라도 부리는 거 아니야? 뒷말을 중얼거리는 에르나에게 세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일을 벌이는 거지. 상황을 보면 대충 상대가 뭘 노리고 있는지 알 수 있고 노림수를 알게 되면 자연히 원하는바 역시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거 아냐."


그게 뭐 대수라고······. 대답하는 세영에게 "그게 대단하단 거야." 에르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세영은 "그래?" 건조하게 되묻곤 다시 서류를 들춰보았다.

제법 고풍 있는 요새 집무실에서 이제 열 살 된 어린아이가 자신의 허리께 오는 의자에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꼰 채 턱을 괴며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이라니,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에르나였지만 정작 세영 본인은 자각이 없는지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넘겨보기만 할 뿐이다.

······정말 어린아이가 맞긴 한 걸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나는 세삼 의문을 품어보았다.

이제 열 살 된 어린아이가 요새 안에서 서류를 검토, 결재하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이전에 상황을 읽고 상대의 노림수를 간파하는 사실 자체가 더 터무니없다.

아직 볼살도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몇 년을 더 살아온 어른들의 속을 꿰뚫어 보다니?! 에르나로선 직접 옆에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말로만 들어본 천재를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도 그럴게 소년이 보여준 재치는 단순히 재능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지능력이나 독심술 등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상황을 읽고 상대의 노림수를 간파한다, 라······."


세영의 말을 곱씹으며 에르나는 생각에 잠겼다.

백작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생존. 눈앞의 소년이 밝힌 소년의 노림수. 소년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밝히고 노예상에 남았다. 노예상의 도주를 돕고 그로 인해 백작이 원하는 거래 명세서를 지키는 것. 노예상 쥬디 모리스를 보좌함으로서 백작이 자리 잡은 세티아를 떠나는 것.

그 명확히 밝힌 목적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우선 백작에 대한 복수의 경우 그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백작이 계획한 일을 훼방 놓는 정도, 노예상이 도주 해봐야 백작이 받는 피해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복수라고 하기 민망할 수준이다.

또 소년 자신의 생존성 역시 보장할 수 없었다.

모리스는 누가 보더라도 악덕 상인이다. 분명 소년이 보여준 재치가 놀랍긴 하지만 높은 값어치가 매겨진다면 모리스는 주저 없이 백작에게 소년을 팔 수 있었다. 현재 모리스가 소년을 팔지 않는 것은 순전히 백작을 경계하기 위함이지 그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왕실 기사라는 레이나 린드가드 역시 에르나로선 의문이었다. 자존감 강한 그녀를 단 3번의 설득으로 굴복시키다니,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왕실 근위 기사가 노예상 호위 용병을 도맡는단 말인가?


"······."


에르나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매만졌다. 지금이라도 사야를 당겨 발도한다면 소년의 목은 서재 안에서 나뒹굴 것이다.

모리스의 말대로 소년은 위험했다. 겉으로 보기에 10살배기 소년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재치와 감춰둔 꿍꿍이에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이 때문인가? 에르나는 고용주의 의뢰를 납득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알렌시스를 베라'


모리스의 제안이 에르나의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소년의 모습에 에르나는 왼 손으로 검집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스는 뭘 위해서 사는 거야?"


소년이 굳이 노예상에 남은 것도, 노예상의 도주를 돕는 것도, 또 기사단을 선동하는 것도 소년이 살기 위한 길이다. 그렇다면 소년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목적이 뭐지? 단순히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세영은 그런 에르나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눈으로 서류를 내려놓곤 "글쎄······." 작게 운을 뗐다.


"삶의 이유라······."


작은 한숨을 내쉬곤 세영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을 했을까? 한참을 생각한 세영은 이내 입을 열었다.


"몰라."


"뭐?"


오랜 시간 생각해서 내놓은 답이 터무니없어서일까? 에르나는 고개를 갸웃,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모른다고. 삶의 이유 따위······."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지 맥 빠진 표정의 에르나를 무시한 세영은 다시 서류더미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봐, 사람이 진지하게 묻는데 좀 진지하게 답해줘."


"난 충분히 진지해."


에르나의 불평에 세영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심기에 거슬린 탓일까? 에르나는 빈정대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무슨 사내 녀석이 목적 하나 없이 사냐?"


그런 에르나의 반응에 흥미가 동했는지 세영은 호오, 작게 감탄하곤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네 삶의 이유는 뭔 대?"


도발적인 눈초리에 질문을 던진 목소리 또한 빈정거림이 묻어나왔다. 그 때문일까? 에르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잔뜩 흥분해 외쳤다.


"나는 내 가문을 부흥시킬 거야!"


그 갑작스러운 선언 때문일까? 세영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너, 귀족이었냐?"


"아아, 쿤 왕국의 몰락 귀족이다."


에르나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검집에 새겨진 쿤 왕국을 상징하는 물방울 마크를 보여주며 말했다.


"왕실 기사들에게만 주어지는 검이라고!"


"흐음······."


세영은 에르나가 내민 얇은 외날 검을 바라보곤 작게 침음했다. 설마 이런 경박한 남자가 귀족이었다니······. 그런 세영의 탄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나는 다시 허리춤에 검을 꽂으며, "어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보스도 진지하게 대답해 달라 이거야."


한껏 뽐낸 탓일까 아까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진 에르나의 모습에 세영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아니지. 목표와 삶의 이유는 전혀 달라."


"···무슨 소리야?"


세영의 부정에 에르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 모습이 그리도 유쾌했던가? 세영의 입가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살아가는데 이유가 있냐? 이 병신아!'


자신을 향해 울부짖듯 외치던 소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인생의 목표는 삶의 이정표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무슨 말이야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르나에게 세영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살아 있으니까 이유도, 목표도 생기는 거래."


자신의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소녀의 말을 곱씹은 세영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


어느덧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며 해는 라도기어 성이 위치한 애기동산에 걸쳐 뉘엿거렸다.

세리스의 약혼철회 소동이 벌어진지 반나절이 지난 지금, 알펜시아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뒤늦게 접한 세리스의 약혼 철회에 급히 회의를 열었다.

칙칙한 돌 벽과 바닥과는 대조되는 제법 고급스러운 테이블에 노예상 모리스와 기사장 카인, 그리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턱을 괸 열 살배기 소년이 앉아있었다.


"···약혼이 철회되었다니."


카인은 침음이 섞인 목소리로 회의의 운을 뗐다. 앞으로의 걱정과 근심에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모리스를 보았다. 그러나 카인의 시선을 받은 모리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떨리는 눈동자만큼이나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는 모리스. 그도 그럴게 공주마마의 약혼 철회는 여간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귀족들의 연회는 짧게는 보름에서 한 달, 혹은 그 이상이 걸린다. 허영에 찬 귀족들의 사치일 수도 있으나 영지를 거치는데 보름이 걸리는 거리를 고려했을 때 멀리서 오는 귀족들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이에 맞춰 일정을 계획한 노예상에게 있어서 공주마마의 폭탄 발언은 매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믿고 있었던 백작의 배신이 그들의 목을 더욱 죄여왔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이곳을 뜨는 게······."


모리스는 초조한 마음에 다급히 말했다. 약혼이 취소되고 연회를 계속 열 구실이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귀족들은 모두 돌아가 버릴 태고, 그리 된다면 백작의 공격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늘밤이라도 당장 급습해 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에 더 머물러 있는 건 바보 같은 짓거리다. 당장이라도 백작의 영지를 벗어나 자국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노예들은 어쩔 겁니까?"


불안에 떠는 모리스에게 카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장 여기를 뜬다 하더라도 남아있는 노예들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게 귀족들에게 판매하긴 시간이 촉박하고 또 데리고 가자니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이곳에 버리고 간다면 카인이 반발할 것이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팔수도, 데려 갈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노예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카인의 물음에 모리스는 이도저도 결정을 내리지 못 한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뭘 그리 고민해?"


그 모습이 한심해 보였던 걸까?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아있는 소년은 모습과 미성에 어울리지 않는 불량한 자세로 가벼이 입을 열었다.


"노예는 팔고 간다. 생각해볼 여지도 없잖아?"


"그, 무슨······."


오늘내일 중으로 귀족들이 빠져나간다면 백작은 오늘 밤에 노예상을 습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판매한다? 거래 현장을 급습하여 귀족들의 약점을 잡는다. 그거야 말로 백작이 바라는 바 아니던가?


"괜찮아. 어차피 백작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세영의 모습에 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그대로야. 백작은 우릴 치지 못 할 거라고."


세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카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단순히 상황파악을 못 하는 어린아이인가? 거래 현장 뿐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노예상을 급습할 기회가 없을 백작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니······.

두 사람이 의문에 허우적대는 모습이 유쾌해서일까? 세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백작에게 무슨 병력이 있겠어?"


현재 요새에 주둔 중인 기사단은 중장 기사단인 4 부대가 유일하다. 제 1 돌격부대가 부재중인 지금 백작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사병들을 동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기 위한 구실이 너무 취약했다.


"아울러 설사 사병을 동원한다고 쳐도 소수의 사병으로 기사단을 제압하긴 버겁지."


제압을 못 했을 경우 결국 다른 귀족들이 개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대규모로 사병을 투입하자니 요새에 기거하고 있는 고객, 즉 귀족들의 반발로 조사조차 못 한 채 명예만 깎일 뿐이다.


"결국은 우릴 치기 위해선 1 부대가 돌아와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1 부대는 노예상의 더미상품을 회수하고 있으며 여분의 기사들 역시 예의 마을을 봉쇄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은 이번 약혼 철회는 우리에게 희소식이란거야."


씨익,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세영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세영의 답변에 모리스와 카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백작에 대한 부담감에 너무 부정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둘러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뭐 이 뒤로는 알아서들 하겠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작게 푸념한 세영은 한숨을 내쉬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천재 공주마마라······.'


이제 11살 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동생 아영이보다 어린 소녀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화려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뭘 노리고?'


앞서 이번 약혼 철회는 백작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있으나 정작 노예상을 잡긴 무리가 있었다. 하다 못 해 노예상을 확실히 잡으려 한다면 귀족들에게 사실 그대로 떠벌리고 다니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자존심 때문인가?'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것이 레이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단순히 자존심이 강해서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번 약혼 철회만으로는 노예상을 잡을 수 없다.

그럼, 그녀는 뭘 위해서?


"그리로 가게 되면 크리스 공주와 맞닥트리지 않은가."


벌써 도주로에 대한 회의까지 돌입한 모양인지 모리스와 카인은 열띤 토론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크리스?"


세영은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아니나 다를까 제피란의 기억이 되살아나듯 그녀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세리스티나의 쌍둥이 동생 크리스티나 루디아 폰 세티아. 세리스와 판박이인 외모, 성격으로 그녀에게 뒤쳐지지 않는 천재로······.


"설마······."


오늘 아침 크리스티나와 왕실 기사단 발키리아의 이동. 그러고 보니 그녀들이 향한 방향이······.


"···크리스 공주는 어째서 수도 발키가 아닌 서쪽으로 가는 거지?"


"응?! 세아크 공작령에 볼 일 있어서 아닌가?"


세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카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공녀 유리엘과 세리스, 크리스 자매의 우애는 세티아 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으니······.


"······."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공녀 유리엘은 백작 저택에 남아있단 말인가?! 애초에 앞뒤가 맞지 않았다.

11살 소녀가 어째서 귀족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약혼을 깼는지, 세리스의 쌍둥이 동생 크리스가 왜 서쪽으로 향하는지······.

세티아의 서쪽에는 세아크 공작령이, 알세스 영지 서쪽은 로렌시아 지방이, 도시의 서쪽에는, 라도기어 성의 애기 동산이······.


"설마······."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씩 맞춰졌다.

세리스의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당돌한 성격과 쌍둥이 자매, 그리고 서쪽으로 향하는 기사단.

세리스가 노리는 것은······.

그때였을까? 차츰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이 화악, 밝게 불타올랐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세영을 비롯한 모리스와 카인은 서둘러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째서 불이······."


동산의 숲에 번져나가는 불꽃에 카인은 영문을 몰라 중얼거렸다. 모리스 역시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어벙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세영은 칫! 작게 혀를 찼다.

생각해보면 정말 단순한 방법이다. 세리스 본인이 직접 병력들을 이끌고 노예상을 친다!

단순하지만 그 만큼 확실한 방법이었다.

자신이 직접 노예상을 급습함으로 귀족들의 약점을 잡는다. 굳이 약혼을 이행해 귀족들에게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또한 백작이 움직일 수 없는 지금 노예상을 몰아넣는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노예상을 토벌 할 수 있었다.

세리스와 크리스가 교묘히 바뀌어 백작의 시선을 돌리고 크리스인 양 자연스럽게 병력을 인솔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병력을 투입한다, 라······."


세티아는 어디까지나 봉건제도의 왕국이다. 국왕이라면 모를까 귀족의 영지에서 왕위 계승서열 50위 밖인 열 살배기 공주님이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평시라면 말이다.


"구호의 성소녀 기사 수도회······."


왕실 기사단이자 여신을 섬기는 수도원의 기사단. 소녀들로 구성된 이 기사단은 전시 전투보다는 구호활동에 전념하는 특수한 기사단이다.

물론 왕실 기사단인 만큼 전투 능력이 낮지만은 않지만 로얄가드나 노블레스 나이츠에 비교하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여하튼 이 기사단의 본 임무는 '구호'활동에 있다. 그 구호 활동이 전투에서든 재난에서든 관계없는 이야기란 거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 달려왔는지 여신을 상징한 하얀 날개위로 금실로 수놓은 금빛 칼날의 깃발을 높게 쳐든 기사단이 동산 아래로 몰려들고 있었다.


"···노림수가 같았나."


위험한 상황임에도 세영은 유쾌한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나 모리스와 카인은 발키리아를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운 무리들의 모습에 얼어버렸다.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왕실 기사단의 등장에 모리스는 기겁하며 숨을 삼켰다.

어째서 저들이 여기에?! 그러나 생각할 시간 따윈 없었다.

무섭게 번지는 산불과 그 뒤로 소화 작업을 착수하는 왕실 기사단. 조금이라도 저들이 라도기어성에 위화감을 가지게 된다면 끝장이다!


"알펜시아 4부대는 서둘러 진화 작업을."


무미건조한 세영의 지시가 어색하기 때문일까? 카인은 벙찐 얼굴로 세영을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재빨리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모리스는 혼란스런 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그런 노예상의 모습에 세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 병력들 소집하고, 농성 준비를."


"···싸우자고? 왕실 기사단과?"


세영의 제안에 모리스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상대는 왕실 기사라고?! 상대가 될 리 없잖아!"


"그래서? 여기서 다 같이 죽자고?"


"차, 차라리 노예들을 버리고 도망가면······."


4 돌격 부대가 화재 진압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노예들을 버려두고 도망간다면······. 그러나 현실성 없는 희망은 세영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산산이 부서졌다.


"기사단 막사에서 일개 상인이 뛰쳐나와 도망을? 어떻게? 어디로?"


"그, 그건······."


알펜시아 기사단의 막사인 이곳에서 일개 상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다. 더군다나 동산을 에워싼 숲은 화마에 번져가고 도망가는 서쪽 가도는 발키리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스는 부서진 희망이라도 주워 담으려는지 "백작, 그래 백작에게 가면······." 말도 안 돼는 소리를 늘여놓았다.


"이상하지 않아? 갑자기 화재라니······."


"······."


"사고로 발화되었다고 보기에는 화력이 너무 강해. 불이 번지는 속도랑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금세 달려온 발키리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세영의 설명에 모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런 모리스의 물음에 세영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이곤 이내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니야.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행동이라는 거야."


"···뭐?"


"단순하게 생각해. 갑자기 이 시기에 왜 산불이 일어났을까? 또 저들은 어떻게 알고 화재에 이렇게 빨리 대처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발키리아들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을까?"


세영이 언급한 의문들에 모리스의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결국 너를 잡기 위해서라고."


세영의 말이 끝나자 모리스는 혼이라도 나간 듯 멍하게 세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격하게 몸을 떨더니 이내 세영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에 세영은 컥, 외마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 하고 허공에 들렸다.


"너 때문이야. 네가 계획한 거지? 네가 백작과 짜고 날 죽이려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는 차츰 광기에 사로잡힌 듯 흡사 격류와 같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모리스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년의 목을 죄였다.


"네가 다 짜고 날 이렇게 만든 거 아냐!!"


흡사 비명과도 같은 고함소리가 집무실 밖에까지 퍼져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그 소란을 들었는지 복도에서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카인이 급하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이내 세영의 목을 조르는 모리스를 보고 황급히 그를 말렸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우선 진정하시고······."


카인의 만류 탓일까? 모리스는 차츰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세영의 목을 죄는 손아귀를 느슨히 했다.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공기에 세영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한동안 기침을 계속했다. 그러곤 이내 몸을 바로 새우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작게 중얼거리며 세영은 젖은 눈가를 소매로 닦아냈다.


"성격하고는, 네가 죽으면 나 역시 죽어. 내가 왜 우리에게 해가되는 일을 계획한다는 거야?"


세영은 투덜거리며 모리스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세영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발키리아와는 싸운다. 아니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성에 들이지 않을 거야."


화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키리아가 성에 들어온다. 그리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따라서 4부대는 화재 진압과 동시에 가도를 봉쇄, 그리고 남은 용병들은 기사로 위장해 성을 지킨다."


세영은 불안에 떠는 이들에게 해맑게 웃어 보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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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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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tra. 20.05.27 44 0 8쪽
36 Epilogue. +1 20.05.26 55 0 11쪽
35 Ep 1. 미운오리새끼(32) 20.05.26 33 0 10쪽
34 Ep 1. 미운오리새끼(31) +1 20.05.25 35 1 20쪽
33 Ep 1. 미운오리새끼(30) 20.05.25 26 0 17쪽
32 Ep 1. 미운오리새끼(29) +1 20.05.24 41 1 18쪽
» Ep 1. 미운오리새끼(28) 20.05.24 38 0 23쪽
30 Ep 1. 미운오리새끼(27) 20.05.23 32 0 23쪽
29 Ep 1. 미운오리새끼(26) 20.05.23 34 0 27쪽
28 Ep 1. 미운오리새끼(25) 20.05.22 40 0 19쪽
27 Ep 1. 미운오리새끼(24) 20.05.22 36 0 25쪽
26 Ep 1. 미운오리새끼(23) 20.05.21 40 0 25쪽
25 Ep 1. 미운오리새끼(22) 20.05.21 41 0 19쪽
24 막간 20.05.20 42 0 20쪽
23 Ep 1. 미운오리새끼(21) 20.05.20 48 0 19쪽
22 Ep 1. 미운오리새끼(20) +1 20.05.19 53 1 21쪽
21 Ep 1. 미운오리새끼(19) 20.05.19 48 0 18쪽
20 Ep 1. 미운오리새끼(18) 20.05.18 63 3 17쪽
19 Ep 1. 미운오리새끼(17) 20.05.18 56 1 13쪽
18 Ep 1. 미운오리새끼(16) 20.05.17 63 1 12쪽
17 Ep 1. 미운오리새끼(15) 20.05.17 64 0 18쪽
16 Ep 1. 미운오리새끼(14) 20.05.16 70 0 13쪽
15 Ep 1. 미운오리새끼(13) 20.05.16 74 1 13쪽
14 Ep 1. 미운오리새끼(12) 20.05.15 79 1 20쪽
13 Ep 1. 미운오리새끼(11) 20.05.15 89 1 15쪽
12 Ep 1. 미운오리새끼(10) 20.05.14 92 4 19쪽
11 Ep 1. 미운오리새끼(9) 20.05.14 92 0 19쪽
10 Ep 1. 미운오리새끼(8) 20.05.13 102 2 25쪽
9 Ep 1. 미운오리새끼(7) +2 20.05.13 110 2 18쪽
8 Ep 1. 미운오리새끼(6) 20.05.12 137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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