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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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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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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막간

DUMMY

촤륵, 뒤척임에 쇠붙이 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 거슬리는 소음에 깨어난 것일까? 레이나는 몽롱한 정신에 애써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


그런 레이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방안은 너무 어두워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빛조차 들지 않은 이곳은 횃불들은커녕 작은 촛불 하나 켜있지 않았다. 박쥐가 아니고서야 이런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레이나는 마치 눈을 뜨고도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다시 한번 몸을 뒤척였다.

촤륵, 차가운 소음이 방안에 울리며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모르긴 몰라도 쇠사슬 따위로 몸을 구속한 모양이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한숨을 내쉬려는 그녀였지만 입에 물린 재갈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촤륵, 하고 그녀의 사지를 구속한 쇠사슬 소리만 이 좁은 독방에 메아리쳤다.


“······.”


얼마만큼 시간이 지난 거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레이나는 시간은커녕 밤낮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한 조바심 때문일까? 레이나는 분한 감정에 이를 갈려고 했으나 꽉 동여맨 재갈에 그것만 잘근 씹을 뿐이었다.


“······.”


세리스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단신으로 용병들과 맞섰다. 그 결과 경박한 용병과의 대치, 이후 낯익은 소년이 나타났다. 자신을 알렌시스라고 소개한 그 열 살배기 꼬마는 주위 용병들을 지휘에 순식간에 레이나를 붙잡았다.

마치 그동안 버틴 게 거짓말이었던 것 같이, 그녀의 저항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가도를 벗어나 넓게 우회, 포위하여 레이나를 향해 돌팔매질을 지시한 소년. 대단한 계책도 아닌 간단한 지시였으나 지칠 대로 지쳐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레이나는 제대로 대처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간신히 날아드는 돌덩이들을 쳐내기에 급급했던 레이나는 용병들의 포위망에 힘을 다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아무리 레이나의 검술 실력이 발군이라 하더라도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계속되는 돌팔매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제피란 군······.’


어째서일까? 뒤에서 간수들을 부추겨 세리스 일행을 탈출시킨 소년은 노예상의 용병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어째서일까? 자신의 공작으로 풀려난 노예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년은 그들의 도주 경로를 예상해 추적하여 모두 붙잡았다.

울고불고 저항하는 노예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연행하는 소년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낀 레이나는 오한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레이나 자신이 제피란을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엘레노어에게 소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문에 세실리아의 죽음에 폐인이 된 소년에게 세리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알세스 지방으로 연행되면서도 자신만만한 소년의 모습을 믿었기에 그 감옥 같은 객실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마차에 타 연행되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레이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제피란은 알렌시스를 자청하며 나타났다. 아니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간수들을 꾀어냈으나 이후 소년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때쯤일까? 끼익, 낡은 경첩 소리가 울리며 밝은 빛이 방 한가득 채웠다.

기껏 해봐야 작은 횃불 하나의 빛이었으나 빛 한줄기 없는 이곳에 갇혀있던 레이나로선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간신히 얇게 뜬 실눈으로 어린 그림자와 그 뒤로 큰 그림자가 방안에 들어왔다.


“정신이 좀 들어?”


촤륵, 낯익은 미성에 레이나는 크게 뒤척이며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단단히 매인 재갈에 그녀의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런 레이나의 모습에 소년은 쓰게 웃으며 뒤의 용병에게 턱짓했다.

“어린놈이 버릇하고는······.” 용병은 투덜대며 레이나에게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제피란 군!”


입을 봉하고 있던 재갈이 풀리자 레이나는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그러자 소년은 짜증스레 미간을 좁히더니 “알렌시스 라고.” 푸념 섞인 한숨을 뱉었다. 뭐, 아무래도 좋나? 소년은 이어 중얼거리고는 사납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이는 본인을 포함해 구속되어있는 레이나와 옆에서 능글맞게 웃는 경박한 용병뿐이니······.


“왜 그래 보스?”


“······.”


소년의 시선을 느꼈는지 용병은 예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돌아보았다.

···이 녀석이 제일 불안해. 소년은 알 수 없는 투덜거림과 함께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피란 군, 도대체 어째서?!”


“그러니까, 나는 알렌시스 라고······.”


소년은 두통이 오는지 작게 좁힌 미간을 억누르듯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애써 가명까지 댔건만, 이래서야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소년은 무언가 체념한 듯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고. 그래, 뭐부터 답해 줄까?”


순순히 대답해주려는 소년의 모습에 레이나의 기세가 한풀 누그러졌다.


“어째서 알렌시스가······.”


“응? 그거? 별거 아닌데? 알펜시아의 알에 엔시스를 합쳐서, 알렌시스. 꽤 어감 괜찮지 않아?”


레이나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가명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소년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일까? 레이나는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어째서 노예상 따위에 들어간 겁니까?!”


물론 소년이 어떻게 노예상의 용병들을 총괄하게 된 건지 의문이었지만 레이나는 소년의 저의를 먼저 물었다. 나름대로 신뢰하고 있었던 소년이 자신을 붙잡은 사실이 그녀로선 제법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레이나의 질문에 소년은 쓰게 웃었다.


“살기 위해서···?”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게 들리는 소년의 대답에 레이나는 기가 찼다. 그도 그럴게 소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예들이 풀려날 때 스스로 노예 상인에 남은 것은 소년 자신이다. 만약 세리스와 같이 함께 도망갔다면? 레이나는 소년의 그 대답에 언성을 높였다.


“살기 위해서라뇨! 그렇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아니, 이 방법밖에 없어.”


레이나의 항변을 끊고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세티아 왕국의 대 귀족 알펜시아 백작에게 쫓기는 나야. 언제 객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이 왕국에서 내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없어.”


“그건······.”


“더군다나 이런 내가 변변찮은 영지도 없는 귀족 영애님께 몸을 의탁할 수도 없지.”


세리스가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년의 처지에서 그녀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왕국 내에서 소년을 보호한다는 것은 알펜시아 백작을 적으로 두겠다고 선언한 것임과 다름이 없다. 아무리 세리스의 가문이 백작과 반대 파벌로서 영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 가문을 이끄는 호주가 아닌 단순 귀족 영애의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


소년의 대답에 레이나는 말문이 막혔다. 소년의 말마따나 세영을 받아줄 귀족은 왕국에서도 거의 없을 것이다. 민가에 숨어 지낸다고 하더라도 이제 열 살배기인 소년이 홀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더군다나 다른 마을에서 생활하자니 이제 10살인 어린 나이로 보호자도 없이 떠도는 모습 역시 범상치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백작에게 꼬리를 잡힐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나라를 뜨자니 귀족이 아닌 자가 통행증도 없이 그 지방을 벗어나는 것도 무리가 있을뿐더러 어린 소년 혼자 무일푼으로 이동하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소년이 백작의 눈을 피해 이동하기 위해서는 노예 상인에게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 소년은 가명을 사용했다. 백작과 거래를 하는 노예 상인에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백작이 모르는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알렌시스. 알펜시아와 엔시스의 이름을 따서 즉석에서 소년이 생각해낸 가명이었다.


“물론 노예 상인에게 몸을 맡기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하지. 더군다나 이제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는 더더욱 그 필요성을 어필할 필요가 있지.”


간수들을 꾀어내 혼란을 일으키고, 그 혼란을 틈타 상인을 찾아갔다. 더군다나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선동한 혼란을 스스로 매듭지었다.

모든 건 이를 위해서라고 말하듯 소년은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이미 도망쳤던 노예들 전부 포획하여 다시 가뒀다. 막상 혼란에 도망치긴 했으나 지리를 모르는 그들의 도주 경로는 몇 되지 않았다. 성묘 행렬을 지휘하며 지겹게 지도를 보고 왔던 소년에게 있어서 그들의 도주 경로 따윈 눈 감고도 예측할 수 있었다.

소년의 설명에 내심 납득한 레이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퍼뜩 놀라며 소리쳤다.


“세리스님은?!”


도주한 노예들 전부를 붙잡았다. 그러면 혹시 세리스나 엘레노어 역시 붙잡혔단 말인가?!

레이나는 가슴을 죄어오는 불안함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년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찾지 못했어. 아무리 지도를 외운 나라도 지방 토박이인 엘레노어보다 잘 알 수는 없지.”


더군다나 세리스 일행의 존재를 알고 있는 간수들은 전부 도주 중이다. 또 용병들을 총괄하고 노예 운반에 대한 사항 전부를 노예 상인에게 위임받은 소년이 노예 장부 조작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세리스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알아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이나는 소년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내 간수들에게 생각이 미쳤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주한 노예들은 어디까지나 1차 적인 문제, 혼란의 원인이었던 간수들은 이미 귀금품을 훔쳐 타 영지로 도망가 버렸다. 아무리 소년의 지휘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간수들을 추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소년이 제아무리 노예들을 전부 붙잡았다 하더라도 간수들을 붙잡지 못한다면 일을 수습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야 실적을 보여주기는커녕 노예 상인에게 큰 타격을 입힌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런 레이나의 의문을 읽은 것일까? 소년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간수들은 알펜시아 기사단에 맡겨두면 돼. 어차피 통행증도 없는 놈들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국경을 넘어가려는 순간 붙잡히겠지.”


“아!”


대수롭지 않게 말한 소년에 비해 레이나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설마하니 거기까지 계산에 두고 선동을 했단 말인가? 마치 모든 게 소년의 손바닥 안의 장난감처럼 정확히 맞물려 떨어진다. 계책도 계책이지만 이러한 계책이 이제 갓 열 살 된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인가?

레이나는 도저히 열 살배기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는 소년의 모습에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다만 뻐금거리는 입으로 바보같이 헛바람만 들이쉴 뿐이었다.


“···더 물어볼 것 있어?”


그 모습이 의외였던 것일까? 소년은 실소하며 레이나에게 물었다. 소년의 말에 레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다시 소년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노예상에 들어간 겁니까?”


레이나로선 지금 이 상황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실적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실력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신임을 얻어야 가능했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어도 정작 상대가 그것을 볼 마음이 없다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소년은 혼란을 선동한 주동자다. 노예상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봐도 열 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말을 듣고 권한을 위임해 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람은 말이야.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기 마련이지.”


소년의 대답에 레이나는 “아무리 그래도······.” 납득가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게 노예들이 달아나고 귀금속이 털린 와중이라도 어느 누가 처음 보는 꼬마에게 전권을 위임한단 말인가? 애초에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조금 조언을 해줬어.”


소년의 대답에 레이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언이라니? 무슨 조언? 소년은 웃으며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나를 향해 되물었다.


“너는 알펜시아 백작이 왜 노예 상인과 계약을 했다고 생각해?”


소년의 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레이나는 “그야 돈 때문이겠죠.” 즉각 대답했다.

성노예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 역시 제법 비싼 가격에 매입된다. 또한 귀족들로 하여금 둘 수 있는 사병의 수에 제한이 있는 왕국 법상 이 노예는 신고 없이 좋은 병사로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왕권이 강한 세티아 왕국에서는 노예매매를 엄격히 처벌하는 것이다.

이번 소동에서 풀어준 노예 역시 대부분이 성노예로 연약한 여성들이었기 망정이지 만약 이러한 노예들을 풀어주었다면 순식간에 폭동이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아마 풀어주자마자 간수들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이런 까닭에 간수들은 성노예들만 풀어주고 재빨리 귀금속을 챙겨 도주한 것이다.

여하튼 레이나의 당연한 대답에 세영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백작이? 물론 돈이 다다익선이라고 해도 노예 상인이란 위험을 안을 정도로 돈이 필요했을까?”


소년의 말에 레이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그토록 비옥한 영토를 가진 백작이 어째서 노예상이란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것일까? 그 정도로 돈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유한 백작이 절실히 돈이 필요한 상황이란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세티아의 왕국에서 노예매매는 중죄로 다스린다.”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나에게 소년은 뜬금없이 말했다. 그 상식에 가까운 내용에 레이나는 소년이 무슨 소리를 하나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 모습에 소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한번 운을 뗐다.


“요컨대, 노예상과 거래하는 이는 백작뿐만이 아니란 이야기지.”


“······아!”


소년의 말에 한동안 생각을 하던 레이나는 이내 탄성을 내었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노예상에게서 노예를 구매한 귀족들 모두가 그 대상이 된다고!


“아마 백작은 노예 매매가 끝난 직후 노예상을 급습하겠지. 거기서 거래 내역서를 획득하여 거래한 귀족들의 약점을 휘어잡기 위해서 말이야.”


또 부수입으로 노예상이 벌어들인 돈 역시 전부 몰수해 버릴 수도 있고 말이야. 소년은 쓰게 웃으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당장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노예상인 모리스는 소년을 전면 신용하게 되었다. 아니 신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의심 많고 속이 시꺼먼 사람이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을 깨닫자 눈앞의 소년이라는 지푸라기를 붙잡은 것이다.


“뭐, 이런 연유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만······.”


소년의 설명에 레이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흡사 얼어버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뻥긋 이고 있었다.

설마 백작이 이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 몰랐던 그녀로선 소년이 말한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단순히 상황 증거만 보고 백작의 계책을 간단히 읽어낸 소년의 모습이 더욱 충격이었다.

천재? 아니, 왕국 내에서도 천재로 칭송받는 세리스를 보좌해온 그녀다. 눈앞의 정세를 읽는 열 살배기 소년은 재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레이나가 말을 잃는 것 역시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용병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제 대충 궁금증은 풀렸을 테고······.”


소년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도 대수롭지 않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레이나? 내 밑으로 들어와.”


“······뭐?”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소년의 권유에 레이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년은 다시 한번 말했다.


“노예상의 용병이 되어 달라. 말했다만?”


소년은 점점 험악해지는 그녀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요구사항을 말했다.


“그게 무슨!”


레이나는 빽! 소리를 치며 말문을 삼켰다. 감탄에 말문이 막힌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너무나도 기가 찬 요구에 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사인 자신에게 노예상의 용병이라니? 더군다나 세리스를 모시는 호위 기사에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여성의 몸으로 기사위에 오른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처럼 큰 모욕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레이나는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달아오르며 사납게 이를 가는 것이 금방이라도 소년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녀의 분노를 경고하듯 촤륵!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사납게 소리치는 레이나의 모습에 경박한 용병이 당황한 듯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그런 용병의 모습과는 반대로 소년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차분히 운을 뗐다.


“세리스를 지켜야 하지 않아?”


소년의 물음에 레이나의 노성이 잦아들었다. 그도 그럴게 노예상의 용병과 세리스를 지키는 것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레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소년의 물음에 머뭇, 이내 대답했다.


“물론! 이 목이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지킬 거다.”


왕녀를 호위하는 왕실 기사로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아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 레이나의 선언을 들은 소년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글러 먹었어. 어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지.”


“······뭐?”


소년의 조롱에 레이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그 각오를, 맹세를 비웃을 줄 몰랐던 소년의 태도에 노성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소년의 조롱은 불길에 기름을 붓는 정도가 아닌 폭약을 던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머리끝까지 울화가 뻗친 레이나보다 먼저 세영은 날카롭게 그녀를 추궁했다.


“네 목숨이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네 꼴을 봐. 세리스가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어? 생사조차 모르잖아? 일개 노예상에게 붙잡혀 이렇게 갇혀있는 네가 지킨다고? 목이 끊어져도? 여기서 네 목을 끊어놓으면 세리스가 지켜지기라도 할 것 같아?”


“그건······.”


소년의 추궁에 레이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소년이 말한 것과 같이 가슴 언저리에 박혀있는 죄책감은 가시라도 되는 양 빠지지 않았다. 그 가시가 심지가 되듯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지키지 못했다.

소년의 말마따나 세리스의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노예 상인에게 도망쳤다는 사실로 안도하고 있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제 열 살 남짓 소녀인 그녀가 수행원 하나 없이 험한 산길에 홀로 뚝 떨어진 것이다. 산의 맹수나 산적 등 갖은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


죄책감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올가미마냥 목을 죄어왔다.


“여기 붙잡혀 있는 네 꼴로 세리스를 지킨다고 말할 수 있어? 설마 네가 이렇게 붙잡혀 있는 거로 세리스를 지켜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이후 그녀가 산적이나 맹수들에게 죽는다면, 너는 그 저렴한 자기만족으로 용케 지켜냈다고 우기려는 거야?”


“나는······.”


“하나 말해두자면,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난 널 죽일 수밖에 없어. 아니,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힘줄을 끊어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못하는 몸으로 만든 후 성 노리개로 팔아버릴 수밖에. 지금 이 방 밖에만 해도 너를 안고 싶어 하는 용병들은 차고 넘쳤어.”


도저히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협박에 레이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소년의 추궁에 레이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얼음장 같은 벽안으로 노려보는 소년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멍청하게 목적과 수단을 착각하지 마.”


소년이 등을 돌리자 옆에 있던 용병이 다시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머리가 식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말을 마친 소년이 용병과 함께 나가자 그 방은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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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p 1. 미운오리새끼(26) 20.05.23 34 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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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p 1. 미운오리새끼(22) 20.05.21 41 0 19쪽
» 막간 20.05.20 43 0 20쪽
23 Ep 1. 미운오리새끼(21) 20.05.20 48 0 19쪽
22 Ep 1. 미운오리새끼(20) +1 20.05.19 53 1 21쪽
21 Ep 1. 미운오리새끼(19) 20.05.19 48 0 18쪽
20 Ep 1. 미운오리새끼(18) 20.05.18 63 3 17쪽
19 Ep 1. 미운오리새끼(17) 20.05.18 5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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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p 1. 미운오리새끼(15) 20.05.17 64 0 18쪽
16 Ep 1. 미운오리새끼(14) 20.05.16 70 0 13쪽
15 Ep 1. 미운오리새끼(13) 20.05.16 74 1 13쪽
14 Ep 1. 미운오리새끼(12) 20.05.15 79 1 20쪽
13 Ep 1. 미운오리새끼(11) 20.05.15 89 1 15쪽
12 Ep 1. 미운오리새끼(10) 20.05.14 92 4 19쪽
11 Ep 1. 미운오리새끼(9) 20.05.14 92 0 19쪽
10 Ep 1. 미운오리새끼(8) 20.05.13 102 2 25쪽
9 Ep 1. 미운오리새끼(7) +2 20.05.13 110 2 18쪽
8 Ep 1. 미운오리새끼(6) 20.05.12 137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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