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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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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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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Ep 1. 미운오리새끼(24)

DUMMY

"어째서입니까!"


노기 어린 소년의 고함이 백작의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레이 알펜시아.

14세의 어린 나이로 기사위를 받은, 통칭 소년 기사이자 백작가의 작은 영주로 불리는 그는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그래도,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언제나 차분한 모습의 소년 기사는 잔뜩 흥분하여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 알펜시아 루 알세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아들의 노성에도 라이오스는 되레 "뭐가 말이냐." 차분히 운을 떼며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레이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빠득, 이를 갈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쾅, 하고 요란한 소음이 집무실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제법 요란스런 소란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집무실로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잔뜩 독이 오른 레이가 주변 고용인들을 전부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제피란을 죽인 겁니까?!"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는 백작에게 레이는 직설적으로 추궁하였다.

그런 레이의 추궁에도 백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레이가 어떻게 제피란에 대한걸 알게 되었는지 백작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대답해줄 의무는 없었다.


"아버지!"


알펜시아 백작가의 미운오리새끼인 제피란이었지만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비록 레이 역시 제피란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거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양자라 하더라도 제피란은 알펜시아에 적을 둔 차남이며 자신의 동생이다. 더군다나 남작가의 몰락으로 친아버지가 농민들에 의해 단두대에 처형된 딱한 사정도 있다.

물론 남작의 경우 자업자득일지라도 어린 제피란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언제나 약한 이를 보호하고 불의를 참지 말라는 기사도를 맹신하는 레이로선 백작의 처신이 매우 못 마땅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막대사탕을 억지로 빼앗은 기분이었다.


"제피란을 죽인 건 영지민들이다."


잔뜩 흥분한 레이에게 라이오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도 안 돼는 주장에 레이는 재차 언성을 높였다.


"기사들이 먼저 그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거기에 주둔해 있던 것 아닙니까!"


"주변을 순찰 중이던 기사들이 주민들의 참배 행렬 습격을 깨닫고 재빨리 진압에 나선거지."


"어째서 그 지역에만 순찰을 나간 기사들이 몰려있었단 말입니까?"


"거센 주민들의 항전에 다른 지역을 순찰하던 기사들도 서둘러 합류한 것 아니냐."


"겨우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알펜시아 정예 기사단의 3개 부대가 격멸되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그럼 너는 겨우 오합지졸의 150 여명의 인원으로 기사단에게 그 정도 피해를 입힌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그야, 마을 주민들 보단 가능성 있지 않겠습니까?"


"지리에 익숙한 마을 주민들이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매복하고 있었다. 그 결과 참배 행렬도, 기사단 또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백작의 단호하기까지 한 그 선언에 레이는 결국 반박하지 못 하고 이를 악물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 주변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해봐야 여기서 열흘이나 걸리는 거리다. 십중팔구 애매한 기억에 제대로 된 증언이 나올 리 없었다. 더군다나 참배 행렬과 다른 루트로 기사단이 왕래했다면 증언의 신뢰성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래서야 백날 이야기해봐야 제자리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레이는 침음과 함께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멜리아에게서 제피란에 대한 사실을 들은 레이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아버지께서 제피란이 가진 영지를 얻기 위해 어린 소년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사실을 일개 하녀에게 들었다는 사실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올곧은 그는 당장 백작에게 달려가 확인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달리 백작이 부인하면 할수록 점점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졌다.

그도 그럴게 백작은 어떻게 참배 행렬의 습격을 알고 있단 말인가?

물론 백작의 말대로 마을을 진압한 기사들이 전령을 보내 상황을 보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백작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백작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만 했다.

백작가의 차남이 습격을 받았다. 대대적으로 이를 공고 하고 탄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기사들끼리 독단적으로 움직이며 남몰래 마을을 진압하는 것은 무슨 경우고 또한 그 사실을 백작만 알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리에서 백작이 부인하면 할수록 레이의 의심은 깊어져갔다.


"레이. 너는 약혼식 준비에 주의를 기울여라."


마치 도망치듯 백작은 화제를 바꾸며 레이를 다그쳤다.

그런 백작의 말에 레이의 미간이 살짝 굳어졌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노기서린 표정이 한풀 꺾이며 어쩐지 싫은 듯 어두워진 얼굴로 레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약혼하기에, 너무 이릅니다."


간신히 쥐어짜내듯 꺼낸 레이의 대답을 백작은 듣기 싫다는 듯 몸을 홱 돌려버렸다.

그도 그럴게 레이는 이미 성인식을 치룬 성년이다. 비록 열여섯이란 어린 나이긴 하지만 법적으론 성년인 것이다. 성인식을 올린 성년이 약혼하기에 이르다니, 말도 안 돼는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레이는 답답한 심정에 백작을 불렀지만 등을 돌린 백작은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들에게 보이는 그 등이 어쩐지 그 둘을 갈라놓은 벽처럼 느껴졌다.


"크윽, 실례했습니다."


결국 레이는 신음과 함께 백작을 뒤로했다. 더 이상 이야기해봐야 자신의 이야기가 아버지에게 전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집무실을 나오자 그를 반겨주는 것은 복도에 걸린 작은 촛대들뿐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지고 작은 촛불만이 공허한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저택의 복도가 이렇게 넓었었나? 레이 스스로 고용인들을 쫓아낸 복도는 쓸쓸할 정도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마치 혼자만 고립된 듯한 복도에서 레이는 적막감에 숨을 삼켰다.


"······."


세티아 제 4 왕녀와의 약혼식.

제피란의 죽음.

백작이, 자신의 아버지가 꾸민 그 모든 것들이 레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


가득이나 원치 않은 약혼식으로 혼란스러운 마당에 백작가의 차남인 제피란이 죽었다니. 더군다나 그 유력한 용의자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레이는 몸을 옭아맸다.


"······."


영지민들 손에 죽은 백작가의 차남. 그리고 그 영지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투입된 기사단.

백작의 말을, 아버지의 부인을 믿고 싶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


적막만 흐르는 복도에서 한동안 서있던 레이는 이내 무엇인가 결심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세티아 왕국은 대륙 남단에 위치한 작은 국경을 가진 나라다.

이 작은 왕국은 여신 발키리에노스를 섬기는데, 왕국의 수도 '발키' 역시 여신 발키리에노스에서 따왔다. 또한 왕국이 자랑하는 왕실 기사단, 발키리아 역시 그들의 여신의 이름을 빌려 사용한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발키리아의 구성원은 전원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여성 기사단이다. 그런 그녀들의 또 다른 이름은 '구호의 성(聖) 소녀 기사 수도회' 여성의 몸으로 전쟁에 나가 싸우며 부상자를 돌보며 여신께 영광 돌리는 나이트 템플러다.

세티아 왕실 직속 3 기사단으로, 왕실 근위 기사단 로얄 가드, 수도 방위 기사단 노블레스 나이츠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녀들이 바로 발키리아이다.

그런 그녀들을 대동한 채, 세티아의 5왕녀 크리스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네요. 크리스 공주마마."


흡사 세리스를 보는 듯한 당돌함에 즐거워진 걸까? 유리엘은 눈웃음을 지으며 5 왕녀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런 유리엘의 인사에 크리스는 "오랜만은 무슨, 매번 편지 주고받았잖아?" 퉁명스럽게 받았다. 그럼에도 반가움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모습이 흡사 꼬리를 살랑 흔드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굳이 지적했다가 경을 치던 세리스를 떠올린 유리엘은 그 위험한 생각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그나저나 손님이 찾아왔는데 마실 것 하나 없는 거야?"


백작가의 손님으로 객실에 머물고 있는 유리엘은 "그렇게 말씀하셔도 여긴 저희 집이 아니거든요." 난감하게 웃었다.

물론 백작가에서 붙여준 하녀가 있지만 그녀는 지금 크리스의 갑작스런 방문에 기겁하며 방을 떠났다. 본인 딴에는 차라도 대접할 요량이었지만 한창 바쁜 연회 준비에 그마저도 변변치 못 했다.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닷없이 불쑥 찾아든 크리스는 "대접이 형편없군." 요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평하는 모습에 뒤에 있는 기사들까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쌍둥이라서 그런 걸까? 그 당돌한 모습에 유리엘은 다시 한 번 떠오른 세리스를 마음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발키리아라니, 여전히 대단하시네요."


구호의 성소녀 기사 수도회.

세티아에서 자랑하는 여신의 기사단은 그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성당 기사단이다. 그도 그럴게 왕궁 경호를 맡고 있는 로얄 가드나 수도 치안 방위를 담담 하는 노블레스 나이츠와는 달리 그녀들은 왕실에 귀속되지 않은 기사단이기 때문이다.

보통 기사단의 재정은 그 기사단을 운영하는 귀족이나 왕족, 즉 군주가 부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 기사 수도회는 여신 발키리에노스의 성당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물론 왕실 기사단의 이름으로 왕실 지원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 운영자금은 신자들의 헌금이란 것이다.

그 덕분에 그녀들은 세티아 왕실에 귀속되지 않았다. 세티아 제 3 왕실 기사단이란 이름 역시 명예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들을 대동한 채, 갓 열 살을 넘긴 소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이 정도야. 공작령 첩보국에 비하면 세발의 피지."


크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슬그머니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이 내심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발키리아는 국왕이라도 비상시가 아닐 경우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성당 기사단이다.

그런 그녀들이 이제 열 한 살인 세티아의 5 왕녀, 크리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성과는 분명 대단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발키리아를 대동한 채 세리스의 약혼식에 참석한 이유는 자신의 쌍둥이 언니에게 이 광경을 과시하기 위해서일 터.


"어머. 저는 단순히 낙하산 인사일 뿐입니다."


크리스의 과시욕을 잘 알고 있는 유리엘은 짐짓 겸손을 떨며 말했다. 그런 유리엘이 한층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크리스는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러면서 작게 손을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크리스의 뒤로 기사들이 일재 경례와 함께 말없이 방을 나갔다.

과연 명불허전, 여성이라 해도 잘 훈련되었군요.

유능한 여기사로 레이나를 봐왔던 유리엘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여성 기사단의 절도 있는 모습에 유리엘은 감탄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감탄에 젖을 새도 없이, 기사들을 내보낸 크리스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일단, 내 쪽은 대충 이 정돈데, 그 쪽은 어때? 잘 돼가?"


"물론 이 쪽도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순조로워서 두려울 지경이네요."


"그래? 다행이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유리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리스는 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어째선지 아까와 같은 순수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쌍둥이 세리스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크리스의 모습에 유리엘은 느슨해진 입 꼬리를 실룩거렸다.

역시 세티아의 재상 각하. 그녀를 선택한 것은 틀리지 않았군요.

착, 깃털 부채를 펼치며 유리엘은 말려 올라간 입 꼬리를 감추었다. 마치 암살자가 칼날을 감추듯이······.


"고, 공주 마마?!"


그때쯤일까?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녀들의 웃음을 앗아갔다. 밖에서 대기하던 발키리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유리엘과 크리스는 궁금증에 방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의문에 답하듯, 방문은 조심스럽게 열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붉은 드레스에, 어딘지 모르게 뾰로통한 표정. 당당하다 못 해 당돌하기 까지 한 발걸음의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리스님?"


"···세리스?"


방 안에 들어온 소녀의 모습에 객실의 주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도 그럴게, 언제나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는 넝마가 되다 못 해 걸레가 되었고 잔뜩 심통난 표정 역시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크리스와 판밖이인 얼굴은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까지 그리고 있으니, 그녀들이 세리스를 몰라 본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든 세리스는 털썩 근처 의자에 주저앉듯 거칠게 앉았다. 그러곤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이 왔는데 마실 것 하나 없는 거야?"


"······."


역시 쌍둥이라서 일까? 갑자기 방문한 불청객은 아니나 다를까 불평부터 터트렸다. 그런 세리스의 불평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엘레노어는 난감하게 웃었다.


'이건, 데쟈뷰 인가요?'


묘하게 익숙한 광경에 유리엘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유리엘과는 달리 크리스는 세리스의 당돌한 요구에 기가 찼는지 헛바람을 내쉬며 빈정댔다.


"갑자기 찾아와서 마실 거 타령이라니, 무례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아니, 그러는 댁도 그리 예의바른 편은 아니잖아요.

그런 쌍둥이 동생의 항의에 세리스는 곁눈질로 그녀를 흘겨보고는,


"대접하고는······."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한탄어린 소리에 발끈한 크리스는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였다.


"뭐야! 이 시각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면서 대접받길 원하는 거야?!"


아니, 그러는 댁도······.

잔뜩 흥분해 떠드는 크리스의 옆에서 유리엘은 목을 타고 넘어오는 말을 간신히 삼켜야만 했다.


"격 떨어지니까, 떠들지 마."


평소 같으면 크리스의 언행에 같이 발끈해 소리쳤을 세리스였지만, 그녀는 양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그런 세리스의 모습에 유리엘은 "무슨 일 있으셨나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아멜리아의 보고대로 노예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유리엘은 이내 그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그도 그럴게 노예상과 마주쳤다면 그녀가 무슨 수로 도망쳐 왔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노예상에게 붙잡혀 감금되어 있었을 태지. 그것을 알기에 아멜리아를 시켜 노예상을 조사하라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조금. 가는 길에 노예상을 만나서."


그런 유리엘의 예상과는 달리, 세리스가 말한 내용에 그 둘은 숨을 삼켰다.

유리엘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말에, 크리스는 왕국 내 노예상이란 생소한 단어에······.


"무, 무슨. 노예상이라니? 왕국 내에서 노예 거래가 있단 말이야?!"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크리스였다.

왕국의 왕녀인 그녀는 왕족의 권위에 반발하는 노예상인의 존재에 놀라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 이내 민감한 사항임을 깨닫고 두 손을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이 문 밖의 발키리아들은 크리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도망치신 거죠?"


당황하는 크리스를 재껴두고, 유리엘은 차분한 어조로 세리스에게 물었다.

그도 그럴게 노예상이다. 더군다나 왕국 내에서 노예 매매를 하기 위해 찾아든 상인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자력으로 탈출 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십대 초반의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뭐,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있어서."


세리스의 대답에 유리엘은 머리위로 물음표를 띄웠지만 피곤하신 공주님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셨다.


"잠깐잠깐! 노예상이라니? 노예상이 왕국에서 자국의 공주를 납치했다고? 이 무슨 미친 경우가······."


세리스와 유리엘의 이야기에 흥분한 크리스는 횡설수설 떠들었다. 그런 그녀가 거슬렸는지, 세리스는 다시금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유리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노예상을 치려고. 병사들 좀 빌릴 수 있을까?"


세리스의 당돌하기 짝이 없는 요청에 유리엘과 크리스는 다시금 숨을 들이 삼켰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알펜시아 백작 저택, 즉 알펜시아 영지 중에서도 중심부다. 그 곳에서 마음대로 병사들을 움직이겠다니, 이는 백작을 무시한 처사다.

왕녀와 공작 영애라 하더라도 일국의 귀족의 영지를, 그것도 하나의 파벌을 구성하고 있는 백작의 영지에서 멋대로 움직이긴 어렵다. 아무리 왕녀가 노예상에게 붙잡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영지의 지휘권은 엄연히 지방 영주에게 있는 것이다. 비상시가 아닌 이상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에 타 귀족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방 영주가 수습하지 못 했을 경우 타 귀족이 개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백작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뿐 수습하지 못 한 것이 아니다. 지금 독단적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노예상을 수색한다면 백작을 포함한 많은 지방 영주들이 반발하고 나설 것이다.


"지금은 조금, 곤란하네요······."


세리스의 부탁에 유리엘은 난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도 그럴게 귀족들의 반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남아있는 사병이라고 해봐야 스무 명 안팎이었다. 나머지 여분의 병력은 세리스의 호위를 위해 로렌시아에 주둔해둔 상태이기에, 현재 노예상을 공략할 병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세리스의 부탁을 쉬이 승낙하기 어려웠다.


"병사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데?"


언제 혼란을 수습한 것일까? 앞에서의 추태를 떠올리는지 붉게 상기된 볼을 애써 무시한 채 크리스는 대화에 끼어들며 방문으로 눈짓을 주었다.

방 밖에 대기하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왕실 기사단 발키리아! 확실히 왕실 기사단 중 하나인 그녀들이라면 전력면에서 그 어떤 부대보다도 뛰어날 것이다.


"기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설마 세리스가 발키리아라는 전력을 거절할 줄 예상치 못 했던 크리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리스는 입술만 벙긋거리는 크리스에게 어딘지 싫은 듯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 무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곧 죽어도 네 힘은 빌리고 싶지 않아."


"뭐, 뭐야?! 나도 너 따위 도와주고 싶지 않으니까 착각하지 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역시 발끈한 크리스가 목청을 높였다.

"난 단지, 왕족의 권위를 위해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리엘이 착! 깃털 부채를 접어보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제가 발키리아를 빌려서 세리스님을 도와드리면 상관없는 거죠?"


왕실 기사단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더군다나 빌린 걸 다른 이에게 빌려주겠다니, 흡사 신용 불량자 같은 소리에 할 말을 잃은 세리스는 주륵 앉아있던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뭐, 어쩔 수 없나."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크리스가 가진 발키리아가 유일했다.

유리엘이 돌려 말한 의미를 이해한 세리스는 애써 침음을 삼켰다. 그녀로선 왕실 기사단이 이 사건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게 그녀의 호위기사인 레이나가 노예상에게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만에 하나 그녀가 노예상에게 감금된 사실이 퍼지게 된다면 그녀의 명성에 금이 가게 될 것이다. 가득이나 몰락 귀족 출신에 여성의 몸으로 로얄 가드에 입단한 레이나로선 평판은 기사의 생명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레이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다 정작 레이나를 구하지 못 한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닌가!


"그 쪽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아멜리아가 조사에 들어갔으니까요."


그러한 세리스의 걱정을 읽어낸 유리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세리스에게 답해 주었다.

눈치 빠른 유리엘의 조언에 세리스는 작게 탄성을 삼키며 안도했다.


"그나저나. 누구야? 저 아이."


혼자 이야기에서 겉도는 크리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세리스 뒤의 하녀에게 턱짓하며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넌 뭔 대 여기있는거야?" 질책하는 것만 같아, 엘레노어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도 그럴게 이 방안에는 왕녀님 두 분과 공작 영애가 마주 앉아 있었다. 도저히 일개 하녀인 그녀가 끼어있을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리를 지킨 이유는 세리스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도 그럴게 엘레노어는 백작가의 하녀였다. 혹시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엘레노어를 대동한 채 들어온 세리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소개했다.


"오늘부로 내 전속 하녀로 들인 엘레노어다."


"에, 엘레노어 세이펜시아입니다."


엘레노어는 세리스의 소개에 맞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까닭일까? 경직된 목소리만큼이나 딱딱한 동작이었다.

그러자 엘레노어를 바라보던 크리스의 눈빛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너, 귀족이야?"


어쩐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것이, 흡사 불공대천의 원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 크리스의 살벌한 모습에 엘레노어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은커녕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내가 내려준거야. 명예 남작위지."


기가 죽은 엘레노어의 모습이 안쓰러운 탓일까? 크리스의 물음에 대답한 쪽은 세리스였다.


"명색이 천재 왕녀님의 전속 하녀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자기 입으로 천재라고 말하는 거냐?"


세리스의 당돌한 언행에 기가 찼는지 크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투덜거렸지만 아까같이 엘레노어에게 향하는 짙은 혐오감은 보이지 않았다.


"전속 하녀라, 왕실에서 용납할거라 생각해?"


"용납하지 않으면? 내가 내 하녀를 직접 고르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건데?"


"뭐, 오라버니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버지께는 뭐라 말씀드리게?"


"알게 뭐야? 매일 술에 절어 사는 그런 양반."


"······."


그녀의 아버지, 세티아의 국왕 전하를 비하하는 발언에도 크리스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도 그럴게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공국의 세아크 공작이 왕국의 정무를 보고 있는 실태가 아닌가. 분명 왕실에서도 세리스의 하녀를 문제 삼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잘나가는 그녀에게 배알 꼴려있는 왕자들은 물고 늘어지겠지만, 언제나 일상생활인 세리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쌍둥의 언니의 당돌한 선언에 크리스는 포기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네가 그토록 자랑하던 레이나는 어디······."


"세리스님? 노예상을 치는 것은 좋지만 어떻게 치실 건데요?"


크리스티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리엘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 때문에 언짢아진 크리스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여기서 레이나의 이야기가 나와 봐야 그녀의 명예에 흠집만 날 뿐이다.


"여기는 알펜시아 영지로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어요. 더군다나 노예상이 잠복해있는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죠."


착! 부채를 펼쳐 크리스의 따가운 시선을 가린 유리엘은 냉정하게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막상 노예상을 치기 위해 발키리아를 움직인다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또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미지수인 것이다. 왕실 기사단을 움직이게 하기에는 그녀들에게 걸려있는 제약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세리스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며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위치는 대강 알고 있어."


"네?!"


위치를 알고 있다?

그녀의 꼴을 보아하니 노예상에서 도망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백작 저택에서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백작 저택 근처에 숨어있는 노예상의 위치를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머지는 그녀에게 물어봐."


그렇게 이야기한 세리스는 등 뒤로 작은 하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길을 따라 유리엘과 크리스 또한 엘레노어를 올려 보았다.


"그, 그럼, 자, 잘 부탁드립니다!"


어린 하녀는 자신에게 주목되는 시선에 필요 이상으로 힘차게 대답하며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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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7 Extra. 20.05.27 44 0 8쪽
36 Epilogue. +1 20.05.26 55 0 11쪽
35 Ep 1. 미운오리새끼(32) 20.05.26 33 0 10쪽
34 Ep 1. 미운오리새끼(31) +1 20.05.25 35 1 20쪽
33 Ep 1. 미운오리새끼(30) 20.05.25 26 0 17쪽
32 Ep 1. 미운오리새끼(29) +1 20.05.24 42 1 18쪽
31 Ep 1. 미운오리새끼(28) 20.05.24 38 0 23쪽
30 Ep 1. 미운오리새끼(27) 20.05.23 32 0 23쪽
29 Ep 1. 미운오리새끼(26) 20.05.23 34 0 27쪽
28 Ep 1. 미운오리새끼(25) 20.05.22 40 0 19쪽
» Ep 1. 미운오리새끼(24) 20.05.22 37 0 25쪽
26 Ep 1. 미운오리새끼(23) 20.05.21 40 0 25쪽
25 Ep 1. 미운오리새끼(22) 20.05.21 41 0 19쪽
24 막간 20.05.20 43 0 20쪽
23 Ep 1. 미운오리새끼(21) 20.05.20 48 0 19쪽
22 Ep 1. 미운오리새끼(20) +1 20.05.19 53 1 21쪽
21 Ep 1. 미운오리새끼(19) 20.05.19 48 0 18쪽
20 Ep 1. 미운오리새끼(18) 20.05.18 63 3 17쪽
19 Ep 1. 미운오리새끼(17) 20.05.18 56 1 13쪽
18 Ep 1. 미운오리새끼(16) 20.05.17 64 1 12쪽
17 Ep 1. 미운오리새끼(15) 20.05.17 64 0 18쪽
16 Ep 1. 미운오리새끼(14) 20.05.16 70 0 13쪽
15 Ep 1. 미운오리새끼(13) 20.05.16 74 1 13쪽
14 Ep 1. 미운오리새끼(12) 20.05.15 79 1 20쪽
13 Ep 1. 미운오리새끼(11) 20.05.15 89 1 15쪽
12 Ep 1. 미운오리새끼(10) 20.05.14 92 4 19쪽
11 Ep 1. 미운오리새끼(9) 20.05.14 92 0 19쪽
10 Ep 1. 미운오리새끼(8) 20.05.13 102 2 25쪽
9 Ep 1. 미운오리새끼(7) +2 20.05.13 110 2 18쪽
8 Ep 1. 미운오리새끼(6) 20.05.12 138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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