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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3,717
추천수 :
73
글자수 :
303,156

작성
20.05.19 21:00
조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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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21쪽

Ep 1. 미운오리새끼(20)

DUMMY

이해할 수 없었다.

세리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빨리 도망쳐!” 자신들을 구해주는 간수들의 모습에 넋이라도 나간 사람먀낭 앉아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로선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용병들이 자신들을 구해주는지, 앞서 전투가 벌어진 듯 쓰러진 용병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세영이 간수들의 배신을 알고 있었는지······.

애초에 사람을 붙잡아 파는 인면수심의 짐승들이다. 그들이 뒤늦게 양심에 눈을 떠서 노예들을 구해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말, 매수라도 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세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간수들을 매수해? 어떻게?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 하나 제시할 것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실익을 제시해서 그들을 움직이게 했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면서도 불가능한 현실에 고개를 작게 도리질 쳤다.


“매수가 아니야.”


세리스의 물음에 세영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도 매수하지 않았어. 애초에 나부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당연히 간수들을 매수할 수도 없고 또한 명령도 할 수 없어.”


그럼, 어떻게?


“단지 방법 하나를 제안한 것뿐이야. 상인이 지급하는 봉급과는 비교과 되지 않는 이익을 말이야.”


그 대답에 세리스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황망히 세영을 바라보며 “그런 게 어디에 있다고······.” 허탈하게 말했다.

앞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다던 세영이 도대체 무엇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언뜻 모순되는 세영의 대답에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있지. 노예상의 재산이란 게.”


“······.”


세영의 말에 세리스 일행은 숨을 삼켰다. 노예상의 재산이라니, 그게 무슨······.

그런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 세영은 설명을 이었다.


“왕국에서는 노예제도가 불법이며 극형의 처벌을 받는 중죄이다. 그런 죄인의 재산을 약탈한다고 해서 죄를 묻는 왕국의 영주가 과연 몇이나 있을 것 같아?”


“······.”


“더군다나 여기에는 공주님이 있다. 아니, 공주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세리스 네가 귀족 영애인 사실은 삼척동자가 다 아는 사실이야. 중요한 점은 그거지.”


“······.”


“세티아의 귀족 영애를 납치했다는 것 자체가 외교 문제로 들어갈 수 있어. 만약 걸리는 경우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지.”


“······.”


“애초에 네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살아서 세티아를 나갈 수 없어. 만약 들키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하더라도 조국에서 직접 목을 치려고 들걸?”


“······.”


속사포와 같은 세영의 설명에 세리스 일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세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열 살 된 어린아이의 생각이라곤 믿을 수 없는 그 모습에 세리스와 레이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잘 모르겠어요.”


세영의 설명을 이해한 것일까? 엘레노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어째서 간수들은 지금 움직인 거죠?”


세영이 말한 대로라면 그들은 좀 더 큰 이익을 위해 노예를 판매한 직후를 노리는 편이 더 바람직하지 않나? 그도 그럴게 노예를 판매함으로써 더욱더 많은 재산을 약탈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금 타이밍에 노예상을 약탈한단 말인가?

그 생각에 레이나 역시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들에게 세영은 되레 질문을 던졌다.


“그럼 노예를 판매하고 약탈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끝장이겠지. 알펜시아 백작이 그 뒤를 봐주고 있을 테니까.”


세영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세리스는 덤덤히 대답했다.

지금도 행렬의 선두에서 선발대로서 노예 상인을 호위하는 것은 알세스의 중장 랜서, 즉 알펜시아 기사단이다.


“그렇지. 노예상의 뒤를 봐주는 백작이 있는 이상 그들은 노예상에게 어떠한 위해를 끼칠 수 없어.”


세리스의 설명에 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설명이 도움이 된 것일까? 레이나와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런 그녀들을 보고 세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째서 굳이 노예들을 풀어줬을까? 도망치기 위해서야. 사방으로 노예를 풀어버림으로써 노예상의 추적을 분산시키는 것이지.”


물론 그 계책을 제안한 인물은 다름 아닌 세영 본인이지만······.

세영은 쓰게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자, 설명은 여기까지.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언제 붙잡힐지 몰라.”


짝! 세영이 손뼉을 치자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들은 재빨리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 밖은 벌써 도망치는 노예들로 복잡했다. 자신들도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뒤이은 노예상의 추격에 다시 붙잡히고 말 것이다.


“칫!”


세리스는 다급한 마음에 혀를 차며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달리려고 했다. 엘레노어의 다급한 외침이 없었다면 말이다.


“도련님!”


등 뒤로 엘레노어의 비명 같은 외침에 세리스와 레이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마차 안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일 분 일 초가 급한 이 시기에 어째서 계속 마차에 타고 있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세리스는 버럭 소리를 치며 세영을 나무랐다. 그러나 세영은 그런 세리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엘레노어를 부탁할게.”


“뭐?!”


알 수 없는 세영의 부탁에 세리스는 멍청히 그를 올려보았다. 부탁한다니? 같이 도망가면 되잖아? 그런데, 무슨······.


‘설마, 저 녀석, 진심으로 노예가 될 생각을······.’


세영으로서는 어차피 백작령으로 돌아가 봐야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열 살 된 어린아이가 홀로 로렌시아 영지를 계승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애초에 세영은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그럴 바에 차라리 국경을 넘어 노예로서 삶을 연명할 목적으로······.


“이 멍청한 놈이!”


울컥, 올라온 울화에 욕지기를 뱉어내는 세리스.

그러나 차츰 다가오는 용병들에 다급해진 레이나는 세리스를 한쪽 어깨에 들어 올렸다.


“공주님, 무례를 용서하세요.”


점차 추적을 좁혀오는 용병들에 레이나는 세리스와 엘레노어를 둘러업고서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도련님!!”


거리가 멀어질수록 엘레노의어 절규 어린 외침도 멀어져갔다. 그와 더불어 점점 노예들을 추적하는 용병들이 가까워졌다. 세영은 나무 사이로 사라져버린 그녀들을 눈으로 배웅하곤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자, 그럼······.”


어딘지 여유가 있는 느긋한 동작으로 마차에서 내려온 세영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슬슬 움직여 볼까?”


긴장감을 덜어내고자 혼잣말을 하며 세영은 각오를 굳히며 발걸음을 옮겼다.


*


로렌시아 지방의 북동쪽에 있는 산골 마을, 옆으로는 알펜시아 영지인 알세스 지방인, 그리고 위로는 국경을 접하는 엔티아 지방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엔티아 지방을 종단하듯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말틴 공화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

간수들은 노예들을 풀어주며 그 틈을 타 노예상의 짐수레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소년의 말대로 노예상이 취급하는 화약을 날려버리니 행렬이 멈추고, 용병들은 허둥지둥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붙잡힌 노예들을 풀어주고, 용병들 사이에 섞이어 거짓 증언과 선동을 하니 서로를 믿지 못하는 용병들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스스로가 돌아봐도 신이 도운 것만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소년이 제시한 방법은 ‘정답’이란 말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신들린 것 같은 소년의 혜안에 간수들은 내심 감탄했다.

사방에는 도망치는 노예들과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상황인 용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짐마차를 탈취하는 간수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몇 용병들은 그 이상을 눈치챘으나 이미 혼란에 빠진 군중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의심암귀에 삼켜졌다. 모든 게 소년의 말 대로였다.


“히이잉!”


용병들은 거친 말소리에 뒤늦게 간수들의 배신을 깨달았으나 그들은 짐마차를 몰고 엔티아 지방으로 말머리를 돌린 직후였다.


“뭐, 이런······.”


노예와 함께 운반하던 상품을 도난당하자 용병들 사이에서는 허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예 상인의 주 매매 품목은 노예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노예만 운반하는 경우는 없었다. 때에 따라서 지역 특산품이나 각종 귀금속 등을 취급해 노예 외에도 다른 품목들을 판매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한 여차할 때 불법인 노예매매를 가리는 더미 상품으로 보여주며 작은 뇌물과 함께 지역을 통과하거나 비상시 여행 경비로 충당하는 등 그것들은 노예 상인에게 있어서도 제법 유용한 상품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노예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노예‘만’ 취급하는 것이 아닌 노예‘도’ 취급한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말틴 공화국의 대상 쥬디 모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급하는 물품은 주로 귀금속이나 무기 따위로 각종 보검이나 화려한 권총 등 허영심에 찬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가품들이었다.


-노예 상인은 귀금속도 취급하지 않아?


애초에 각종 귀금속으로 온몸을 도배하듯 치장한 노예 상인이다. 그런 상인이 귀금속을 다루지 않을 리 없었다. 또한, 노예매매가 불법인 세티아 왕국에서 더미 상품 하나 없이 들어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소년의 말마따나 상품을 훔쳐낸 간수들은 소년이 알려준 길을 따라 과감히 마차를 몰았다. 그런 그들을 닭 쫓던 개 마냥 바라보는 용병들 입장에선 허탈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도 그럴게 이미 달려 나가는 마차를 붙잡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로렌시아 지방이 초행길인 그들로서는 행렬을 이탈한 마차가 어디로 가는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단하군요.’


레이나는 달리는 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온 열 살배기 소년이 간수들을 꾀어내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물론 서로서로 이용하는 관계이지만 언제 노예로 팔려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배는 더 살아온 간수들과 용케 협상하다니······. 세티아에서 천재로 추앙받는 왕녀님뿐만 아니라 자신조차도 생각지 못했다.


“···도련님.”


어깨에 둘러멘 엘레노어가 흐느끼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레이나 역시 힐끔, 고래를 돌려 마차를 돌아봤다. 혼란에 빠진 용병들과 그 사이로 도망치는 노예들, 굳게 멈춘 마차 지붕만 간간이 보였다.

소년은 남았다. 스스로 탈출의 기회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마차 안에서 그녀들을 보내듯 자리를 지켰다.

백작가에서 쫓지는 열 살배기 소년. 소년의 입장에선 도망보다 노예로 남는 편이 살아갈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왕국 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백작이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백작가의 일개 하녀였던 엘레노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소년 스스로가 몸을 의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대단한 소년조차도 세리스가 진짜 왕녀였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다.


‘지금은, 공주마마의 안위가 우선이다.’


노예로 붙잡힌 소년을 당장에 처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만 벗어난다면 소년을 구할 기회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레이나는 이를 악물고 달리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후욱, 후욱, 훅.”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레이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호흡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더 거칠어졌다. 이윽고 요동치는 고동이 가슴을 때리고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왕실 호위 기사인 그녀지만 어린애를 둘이나 업고 험난한 산길을 뛰어오르는 것이다. 더군다나 철장에 감금되어 몸 상태 역시 좋지 않은 상황에 지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하아, 하아.”


가슴을 세차게 때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거센 호흡이 가슴을 할퀴듯 터져 나왔다.


“저기 있다! 잡아!”


그런 레이나를 보고 어느 용병이 소리쳤다. 어느새 혼란을 수습한 모양인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용병들은 빠르게 노예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중 몇몇이 세리스와 엘레노어를 업은 채 달리는 레이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험준한 산길에 제법 거리도 있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레이나로선 용병들의 추적을 뿌리치긴 어려웠다. 세리스와 엘레노어를 내버린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왕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인 그녀로선 그럴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따라잡힌다.

절망적인 상황에 레이나는 칫! 작게 혀를 찼다.


“레이, 나······?”


그런 자신의 호위 기사의 모습에 세리스는 불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도 그럴게 혀를 찬 그녀는 지친 얼굴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비장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마치,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처럼······.

아니나 다를까 레이나는 주저앉듯 무릎을 꿇으며 양어깨에 둘러멘 소녀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공주마마. 서둘러, 도망쳐, 주십시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이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레이나의 모습에 세리스는 말문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분명 이해하고 있었지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세리스는 레이나를 올려보았다.


“뒤는 제가 맡을 테니, 부디 무사히······.”


“아···.”


세리스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나는 고개를 숙여 작게 경례한 후 몸을 일으켜 용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호위 기사는 맨손으로 용병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레이나!”


그 허탈함에 세리스는 그녀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세리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어, 어떡하지······?”


엘레노어는 떨리는 몸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년도 레이나도 저기에 있다.

같이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엘레노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가자.”


그런 엘레노어를 향해 세리스가 작게 입을 열었다. 몸을 떠는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엘레노어는 그 괴리감에 “어?”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도망가자.”


“자, 잠깐!”


세리스의 말에 엘레노어는 화들짝 놀라며 말을 끊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그녀는 소년과 레이나를 버리고 둘이서 도망가자며 말하는 것이다! 세리스야 소년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를 위해 몸을 던진 호위 기사도 버리고 도망치자니······.

한 때 소년을 위해 기사들의 포위망으로 돌아왔던 엘레노어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본심이 말로 튀어나온 것일까? 엘레노어는 세리스를 매도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레이나 씨는 너를 위해서······.


“그럼 어쩌라는 건데!!”


갑작스러운 세리스의 고함에 놀란 엘레노어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세리스는 위축된 엘레노어를 향해 눈을 번뜩이며 한층 더 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구하자고? 어떻게? 이제 열 살 안팎의 우리가 무슨 수로?!”


격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산길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가 마치 심문장에서 추궁의 목소리마냥 엘레노어의 숨을 죄어왔다.


“착각하지 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도망치는 것뿐이야.”


잔뜩 움츠린 엘레노어의 모습에 세리스는 퉁명스레 말하며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녀들에겐 레이나와 같은 체력도, 소년과 같은 계책도 없었다. 어린 소녀인 세리스나 엘레노어가 여기 남아봐야 다시 철장 신세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세리스의 말대로 여기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여기선 말이다.


“그럼, 어디로······.”


엘레노어는 잔뜩 울먹인 얼굴로 작게 물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욱 입을 다문 채 번뜩이는 눈빛은 독기가 흘러나왔다.

그런 엘레노어의 의외의 모습에 세리스는 내심 감탄했지만 내색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북쪽에 엔티아 지방으로 연결되는 가도가 있다고 했지?”


“······응.”


세리스의 물음에 엘레노어가 확답했다. 그 모습에 세리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이대로 엔티아 영지로 향하는 가도로 도망친다.”


*


모리스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게 갑자기 화약이 운반하는 마차가 폭발하고 행렬이 지연된 것이다.

거기서 그쳤더라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폭발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운반하던 노예들이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철장과 마차 문, 이중으로 가둬둔 노예들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그러나 그것보단 일단 도망치는 노예들을 붙잡는 게 우선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도망친 노예가 알펜시아 외의 귀족과 맞닥뜨린다면 큰일이다. 아니, 그 이전에 이 지방에 노예 상인에 대한 소문이라도 퍼지게 된다면 백작과의 거래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은 모리스는 당장 용병들을 시켜 노예들의 추적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게 또 웬걸? 용병들이 서로에게 칼질하며 싸우기 시작했고 그 혼란을 틈타 몇몇 용병들이 더미 상품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말이 더미 상품이지 하나같이 고가인 상품들은 노예매매뿐 아니라 허영심 가득한 귀족들을 위해 준비한 귀하디 귀한 상품들이다.

그제야 모리스는 일련의 사건들이 간수들이 꾸민 약탈이란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미 간수들이 탈취한 마차는 행렬에서 이탈해버렸고 노예들 역시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대상인이 된 모리스였지만 그조차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다급히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도 마차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머리가 굳어졌다. 용병들 사이에 퍼진 혼란의 파문이 모리스조차 집어삼킨 것이다. 점차 ‘어떻게 해야 하지?’에서 ‘어떻게 되는 거지?’ 부정적인 생각에 잠겼다.

걱정할 시간에 빨리 대책을 마련해 행동에 옮겨야 했지만 이미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모리스를 비롯한 용병들은 걱정만 앞섰다.

이대로 가다간 다른 귀족들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 여차하면 알펜시아 백작도 자신들과의 관계를 부인할지도 모른다. 혹여나 이 사건이 앞서간 기사단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를 토벌해 공적을 새울지도 모른다.

점차 가슴속에서 불어난 불안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된 것마냥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어떻게 되지? 불안함에 부정적인 미래만 걱정할 뿐이다.

그런 모리스가 있는 마차의 문이 끼익, 작은 마찰음과 함께 열렸다.


“······.”


걱정에 잠겨있던 모리스의 눈앞에 한 소년이 마차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밝은 금발에 보는 이로 하여금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가운 벽안,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열 살배기 소년은 그 모습과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허락도 없이 모리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는?”


소년의 모습에 모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낯이 익다. 그도 그럴게 일주일 전 아무도 없는 마을 외곽에서 본인이 직접 붙잡은 소년이었다.

간신히 기억해낸 모리스는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산 송장 같았던 소년의 모습과는 달리,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못 알아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모리스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세영은 말아 올린 입꼬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내가 이 혼란을 주도한 사람인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미성이 즐겁다는 듯 마차 안에 울렸다. 세영의 대답이 그렇게 의외였을까? 모리스는 “···뭐?”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그에게 소년은 다시 한번 대답해주었다.


“내가 저 얼치기들을 꾀어내 소동을 일으켰다고.”


“무슨?!”


모리스로선 소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꾀어내다니? 철장 안에 갇힌 어린아이가? 무슨 수로? 어떻게?

그러나 모리스의 맥없이 열린 입에선 다른 질문이 나왔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흔들리는 눈동자로 눈앞의 소년에게 물었다.

모리스의 질문에 세영은 한층 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피란 알펜시아. 알펜시아 백작가의 차남이지.”


차분한 목소리로 즐거운 듯 자신을 소개한 세영은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으며 “잘 부탁해.” 모리스를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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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14 척추요정
    작성일
    20.05.19 21:18
    No. 1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추천 박고 갑니다.
    시간 남으시면 제 소설도 한번만 놀러와 주세요.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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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7 Extra. 20.05.27 44 0 8쪽
36 Epilogue. +1 20.05.26 55 0 11쪽
35 Ep 1. 미운오리새끼(32) 20.05.26 33 0 10쪽
34 Ep 1. 미운오리새끼(31) +1 20.05.25 35 1 20쪽
33 Ep 1. 미운오리새끼(30) 20.05.25 26 0 17쪽
32 Ep 1. 미운오리새끼(29) +1 20.05.24 42 1 18쪽
31 Ep 1. 미운오리새끼(28) 20.05.24 38 0 23쪽
30 Ep 1. 미운오리새끼(27) 20.05.23 32 0 23쪽
29 Ep 1. 미운오리새끼(26) 20.05.23 34 0 27쪽
28 Ep 1. 미운오리새끼(25) 20.05.22 40 0 19쪽
27 Ep 1. 미운오리새끼(24) 20.05.22 37 0 25쪽
26 Ep 1. 미운오리새끼(23) 20.05.21 40 0 25쪽
25 Ep 1. 미운오리새끼(22) 20.05.21 41 0 19쪽
24 막간 20.05.20 43 0 20쪽
23 Ep 1. 미운오리새끼(21) 20.05.20 48 0 19쪽
» Ep 1. 미운오리새끼(20) +1 20.05.19 54 1 21쪽
21 Ep 1. 미운오리새끼(19) 20.05.19 48 0 18쪽
20 Ep 1. 미운오리새끼(18) 20.05.18 63 3 17쪽
19 Ep 1. 미운오리새끼(17) 20.05.18 56 1 13쪽
18 Ep 1. 미운오리새끼(16) 20.05.17 64 1 12쪽
17 Ep 1. 미운오리새끼(15) 20.05.17 64 0 18쪽
16 Ep 1. 미운오리새끼(14) 20.05.16 70 0 13쪽
15 Ep 1. 미운오리새끼(13) 20.05.16 74 1 13쪽
14 Ep 1. 미운오리새끼(12) 20.05.15 79 1 20쪽
13 Ep 1. 미운오리새끼(11) 20.05.15 89 1 15쪽
12 Ep 1. 미운오리새끼(10) 20.05.14 92 4 19쪽
11 Ep 1. 미운오리새끼(9) 20.05.14 92 0 19쪽
10 Ep 1. 미운오리새끼(8) 20.05.13 102 2 25쪽
9 Ep 1. 미운오리새끼(7) +2 20.05.13 110 2 18쪽
8 Ep 1. 미운오리새끼(6) 20.05.12 138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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