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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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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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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Ep 1. 미운오리새끼(22)

DUMMY

4.


알펜시아 백작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수많은 마차로 붐비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의 큼지막한 마차들은 저마다 각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휘날리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마차 주위의 사병들 역시 발걸음을 맞추어 저택을 찾았다. 그 수가 이미 백 단위는 가볍게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백작이 부유하고 저택이 넓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인원을 전부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영지를 방문하는 하급 귀족들은 저택이 위치한 근처 도시의 여관에서 숙박할 수밖에 없었다. 접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큰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왕녀님의 약혼식. 그것도 천재로 이름 높으며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세아크 재상 각하를 도와 정무에 힘쓰는 세티아의 제4 왕녀, 세리스티나 리디아 폰 세티아의 약혼식이다. 천재 왕녀님의 약혼식에 세티아 왕국의 2인자인 재상 각하도 참석한다고 하니 찬밥 신세임을 알면서도 눈도장을 찍기 위해 찾아드는 귀족들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들이네요.”


유리엘은 조소가 가득한 입매를 예의 공작 깃털 부채로 가리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권력에 몰려드는 파리 떼 같네요. 스스로 낸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눈에 들고 싶은 이유 하나만으로 먼 길을 달려온 소인배들의 행렬에 질려버린 그녀는 이내 조소 어린 웃음을 거두곤 커튼을 쳤다.


“정작 각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파리 떼들이네요.”


저들이 만약 세아크 공작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녀는 살짝 미간을 좁히는 것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때였을까? 똑똑, 방문을 두드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공작가의 장녀 유리엘이 기거하는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더군다나 방문을 열기 전 철컥, 하고 자물쇠를 해제하고 들어온 하녀의 모습에 유리엘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상대의 무례함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유리엘은 “당신은 항상 늦는군요. 아멜리아.” 작게 푸념했다.


“죄송해요, 이렇게 일찍 오실지 몰라서 말이죠.”


객실의 침입자는 단정하게 말아 묶은 금발 사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렵사리 변명을 꺼냈다.

유리엘은 부채로 표정을 가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냥감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하녀는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울상을 지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그래요 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제가 나빴어요. 미안해요.”


착! 부채를 접으며 유리엘은 담담히 사과했다.


‘미안하시다면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 주세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매섭게 바라보는 유리엘의 시선에 아멜리아는 차마 나오지 못한 푸념을 애써 삼켰다. 만약 입 밖으로 꺼냈다간 정말로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니, 푸념을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는 그녀였다.


“그, 그나저나 공주마마는 어디에 계시나요? 같이 오신 거 아니셨어요?”


아멜리아는 유리엘의 시선에 애써 식은땀을 닦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는지 유리엘은 “세리스님?” 작게 되묻곤 이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당신이 흥미로운 정보를 주었죠? 성인 남성과 결투에서 이긴 열 살배기 소년 말이죠.”


“예에, 그렇습니다만?”


“공주님께서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며 로렌시아 영지로 가셨답니다.”


“네에에?!”


유리엘의 말에 아멜리아는 크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천박한 모습에 유리엘은 착! 다시 부채를 펼쳐 표정을 숨기며 “조용히 해주세요.” 작은 불평을 내보였다. 부채 위로 사늘한 눈빛과 살짝 좁혀진 미간만이 그녀의 짜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어째서, 공주님께서, 왜, 그런 곳을······.”


그러나 아멜리아는 유리엘의 불평에도 혼란스러워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죠?”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유리엘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의 덜렁대고 무신경한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 저기, 로렌시아 지방이라면, 설마 그 산골 마을에 가셨단 말인가요?”


아멜리아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지 유리엘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불쾌했는지 유리엘은 다시금 미간을 좁혔다.


“우문이군요. 저 같은 고결 하고 우아한 숙녀가 어째서 그런 길도 나쁘고 누추하고 지저분한 산골 마을 따위를 방문해야 한다는 거죠?”


유리엘의 대답에 안도한 듯 아멜리아의 표정이 펴졌다. 다행이다. 로렌시아 영지를 찾긴 했지만, 그쪽으로 가진 않은 모양이다.


“그럼······.”


“세리스님께서 가셨답니다.”


네 녀석 이야기였냐!

아멜리아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이런 아멜리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엘은 부채로 요염한 웃음을 가리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아아, 정말이지 아쉬웠어요. 조금만 더 부채질하면 기사들의 통제를 뚫고 마을에 진입할 수 있었는데.”


막나가는 공주님이 곤경에 빠지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하아, 작은 한숨과 더불어 뒷말을 줄이는 유리엘.

······공주마마께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이런 악우를 두신 걸까?

아멜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알려준 소년이 실종된 곳도 그 마을이겠죠? 그럼 그 산골 마을을 찾아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만······.”


“뭐가 문제란 말인가요? 설마 그 소년이 여자아이라면 덮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발정난 축생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그런 보고는 올리지 않았거든요!”


우아한 유리엘의 막말에 아멜리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 아멜리아의 반응에 유리엘은 “어머.” 작게 놀라며 입가를 가렸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슬슬 두통이 오는지 아멜리아는 엄지와 검지로 양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공주님의 호위 병력은 얼마나 되나요?”


“당신도 알고 있겠죠? 레이나 린드가드. 그녀가 공주님께 붙어있어요.”


“아!”


아멜리아는 린드가드란 이름에 작은 탄성을 냈다.

그도 그럴게 레이나 린드가드가 누구인가?! 19세의 나이로 대련에서 대부분의 왕실 기사들을 쓰러트린 불패의 여검사지 않은가! 비록 여성이란 이유로 왕궁 내에서 찬밥 신세라곤 하지만 생에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천재 검술가다.

그런 이가 세리스를 호위한다면 그녀의 안전은 확실하겠지.


“그렇게 둘이서만 들어갔어요.”


“······네?”


“나만 쏙 빼놓고······.”


“······.”


“치사하게······.”


유리엘은 어째선지 몰라도 드물게 토라지며 부채로 뾰로통한 양 볼을 감추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아멜리아는 얼빠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둘이서? 어디를? 마을을? 단둘이서만?


“네에에엣?!”


간신히 사고가 돌아간 까닭일까? 아멜리아는 크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아멜리아의 고함에 유리엘은 다시금 미간을 작게 실룩였다.


“둘이서만 마을에 들어갔단 말인가요?!”


당장이라도 유리엘의 멱살을 잡아 흔들 것 같은 기세로 아멜리아가 되물었다.


“그래요. 문제가 있나요?”


요염하게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유리엘은 잔뜩 흥분한 아멜리아에게 되물었다.

왕실 기사단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검술가가 붙어있다. 설령 무슨 일이라도 당하려고······. 더군다나 아무리 기사들이 막나간다고는 해도 귀족가의 영애로 보이는 세리스를 해하진 못 할 것이다. 그들로선 기껏 해봐야 마을 밖으로 내쫓든가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구속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뭐, 쫓겨났을 경우를 대비해서 호위 사병 중 일부를 마을 근처에 대기시켜 놓았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유리엘에게 아멜리아는 다급한 심정으로 현 상황을 보고했다.

말틴 공화국의 노예상이 산골 마을에 머물러 있다. 그 노예상의 이름부터 해서 성품과 기호, 거느린 용병들의 수까지······.

아멜리아가 보고를 마치자 유리엘은 다시 한번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어머.”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역시 우아하게 놀라는 공주님이다.


*


“백작에게 복수할 거야.”


모리스는 당돌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소년의 선언을 떠올리며 침음했다.

그도 그럴게 세티아 왕국에서 강한 권력을 지닌 백작이다. 더군다나 현재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백작의 직할령인 알세스 지방에서, 무슨 수로 백작에게 복수한단 말인가? 오히려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일이다.


“······.”


자신을 알펜시아 백작가의 차남으로 소개한 소년.

어째서 알펜시아의 차남이 외진 산골 마을에 있었던 것일까? 투숙객은커녕 마을 사람조차 없는 그 유령마을에서, 어째서 소년 혼자···? 더군다나 그 알펜시아의 차남을 자칭하는 소년은 아버지가 되는, 즉 알펜시아 백작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모리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년의 말대로 백작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생각해봐. 세티아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백작이 왜 당신과 계약하는 위험을 지니겠어?”


소년의 말대로 부유한 백작이 모리스 자신과 계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순히 돈이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백작은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벌어들일 수익에 비해 위험이 너무 크다.

세티아 왕국에서 노예매매의 처벌 강도는 유독 높으며 관련 귀족의 영토를 왕가에 반환해야만 했다. 영지를 잃은 귀족은 결국 명예직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 귀족들도 한순간에 몰락 귀족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세티아에서 노예 상인에게 불모지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펜시아 백작은 노예상인 모리스에게 서신을 보내며 경매의 딜러로서 계약하였다.


“백작이 원하는 게 정말로 금전이라고 생각해?”


마치 모리스를 비웃는 듯 소년은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하듯 물었다. 그러나 모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의 질문은 모리스의 가슴 언저리에 박혀있던 가시나 다름이 없었다. 애써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고 눈앞의 이득을 좇아 국경을 넘어 이곳 세티아까지 왔다. 이번 거래만 잘 성사된다면 불모지인 세티아의 노예 상권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백작의 지원을 받아 무역상권 역시 독점할 수 있다. 비록 백작이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백작의 서명이 들어간 딜러 계약서가 존재하는 한 백작과 자신은 한배를 탄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다.

그 계약서는 말틴 공화국에 있는 상단에서 보관 중이다. 행여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다면 상단에서 계약서를 공개해 버린다면 백작은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게, 과연 그럴까?”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모리스의 생각을 비웃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작은 악마는 애써 외면했던 현실을 강제했다.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그 유령마을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며칠 전 산적들의 약탈로 인해 마을주민들이 몰살당했다는 마을.

알펜시아 기사의 설명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마을 전원이 몰살당한 대규모 약탈이다. 그런데도 마을에는 식량이 남아있었다. 더군다나 마을 곳곳에는 갖은 생필품들 역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중에는 제법 고가의 귀중품 따위도 있는 것이, 도저히 약탈을 일삼는 산적들의 소행으로 보이지 않았다.


“약탈이 아니니까.”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모리스의 의심에 소년은 확답했다. 그리곤 마치 악마와 같이 잔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산적이 아니야. 네가 죽인 거지.”


“뭐?”


그 말에 모리스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내가, 누굴, 죽였다고?


“네가 그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소년의 말에 모리스는 발끈해 소리쳤다. 그도 그럴게 자신이 마을주민들을 학살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소년의 주장에 모리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래. 네가 죽였어. 백작은 그렇게 발표할 거야. 공화국에 말이야.”


잔뜩 흥분해 성을 내는 모리스를 눈앞에 소년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개연성 따윈 이어붙이기 나름이니까.”


가령 노예 운반 간 마을주민에게 들켜 주민들을 몰살시켰다거나. 눈앞의 소년은 살벌한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차분한 어조 때문일까?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목을 조르는 듯해 모리스는 숨을 삼켰다.

그런 모리스의 모습에 소년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산적보다는 노예상의 학살이 더 자극적이지 않아?” 마치 놀리는 듯 말했다.


“여기서 만약 네가 마을주민들을 학살했을 경우, 어떻게 될 것 같아?”


“······.”


타국의 노예 상인이 자국의 영지민을 학살하다니? 더군다나 모리스 자신의 상단을 공화국에서도 많은 집정관들과 얽혀있는 거대한 상단이다. 모리스의 뒤에는 공화국 집정관들이 있다. 이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를 계기로 세티아 왕국과의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티아로선 명분도 있겠다, 이 기회에 말틴 공화국을 비난하며 참전하는 주변국들도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져 버린다. 누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수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목에 가시마냥 가슴 언저리에 박혀있던 불안감이 점점 선명해진다. 모리스는 올가미마냥 목을 죄어오는 그림자에 마른침을 삼켰다.


“백작은 당연히 비공식적으로 공화국에 이 소식을 전하겠지. 노예 상인이 알펜시아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세티아로 들어왔으니, 백작으로서도 이를 무마시키고 싶다고 말이야.”


“······.”


“그렇게 되면 간단한 손익 문제지. 과연 공화국의 집정관들이 전쟁을 감수하고 너의 결백을 주장하던가, 아니면 네 상단을 말살하는 것으로 없던 일로 만들던가.”


백작은 자신의 약점을 노출 시키며 공화국의 집정관들과 대화를 할 것이다. 전란을 피하는 대신 상단을 급습하여 계약서를 제거하도록······.


“집정관들 처지에선 괜히 왕국의 백작과 함께 몰락하느니 뒤를 봐주던 상단 하나 정리하는 편이 훨씬 수월할 테고, 상단의 재산 역시 집정관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테니 이보다 좋은 선택이 있을까?”


“······.”


자신이 백작에게 제거된다면, 상단에서 그 사실을 알고 계약서를 공개하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백작의 서신을 받고 상단이 해체되는 쪽이 빠를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지금도 백작의 전령이 국경을 넘어 공화국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리스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거세게 도리질 치며 부정했다.


“백작이 배신하다니, 무엇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도 그럴게 백작이 자신을 제거해 얻는 이득이 무엇이란 말인가? 애초에 대면한 적도 없는 타국의 상인을 굳이 영지로 초대하여 제거하는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티아에서 노예매매는 중죄이며 당사자는 극형으로 다스리지.”


“······.”


“요컨대 네게 노예를 사가는 귀족들 모두 처형 대상이란 거야.”


노예 거래의 거래 명세서. 그것으로 백작은 귀족들의 약점을 잡아 왕국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세서를 가지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노예 상인, 쥬디 모리스 자신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리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흐릿했던 살의가 뚜렷하게 형태를 갖추며 올가미마냥 서서히 목을 죄어왔다. 그럼에도 모리스는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년을 고용했다. 용병들의 지휘권을 내어주며 자신만만한 소년에게 작은 희망을 걸었다.

제피란 알펜시아. 현재 알렌시스란 이름으로, 알펜시아 기사단을 때어놓고 노예 상단을 통솔하고 있는 백작가의 차남.

···믿어도 될까?

이제 열 살배기 어린 소년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 과연 백작의 아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을까?

모리스는 불안과 초조함에 혼잣말을 이었다.

그때쯤일까? 마치 불안에 떨리는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에르난데요.” 경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모리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벌컥, 거칠게 문이 열리며 경박한 용병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동쪽 대륙의 외날 검을 어깨에 걸친 채 건들거리는 그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능글맞게 웃으며 고용주를 내려다보았다. 노예들의 탈주 소동 때 레이나와 맞붙었던 그 경박한 청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고용주의 호출에도 그는 건들거리는 자세로 실실 쪼개며 물었다.

그 불손한 태도에 화가 뻗친 모르스였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그에게는 지금부터 중요한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니까······.


“에르나라고 했던가?”


모리스의 질문에 “그렇습니다만?” 에르나가 불손하게 대답했다.

모리스는 미간을 찡긋거렸다. 그러나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르곤 다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알렌시스는 어떤가?”


“작은 보스요? 뭐 싸가지와 더불어 엄청 깐깐하던데요.”


모리스의 물음에 에르나는 질색하며 답했다.


“그래도 시키는 일이 제법 효율적이라 다들 불만을 접어두고 있어요.”


이제 갓 열 살 된 어린아이의 명령과 지적을 받는 것이 불편한 용병들이지만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지시에 다들 납득하며 따르는 모양이다.

모리스는 에르나의 대답에 작은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입을 열었다.


“내가 신호를 줄 경우, 알렌시스를, 베라.”


“호오.”


뜻밖의 명령에 에르나는 내심 놀랐는지 탄성과 함께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설마 자신이 임명한 통솔자를 스스로 제거하려 들다니, 무슨 이유일까? 에르나는 호기심이 일었는지 흥미로운 얼굴로 모리스를 바라봤다.


“일을 잘 처리해 준다면 보수는 원하는 대로 주지.”


“호오, 그것 참······.”


모리스의 선언에 에르나는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알렌시스를 베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모리스는 더 이상 에르나에게 아무것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이내 에르나 역시 설명을 듣는 걸 포기했는지 웃는 낯으로 “알겠어요.” 빈정거리듯 웃으며 방을 나갔다.

딸깍, 방문이 닫히고 방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위험해. 그 녀석은 위험해. 믿을 수 없어······.”


백작을 향한 칼날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 녀석도 백작의 함정이 아닐까? 그도 그럴게 백작가의 차남이고······.

적막한 방 안, 모리스는 깊어지는 의심암귀에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초라한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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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p 1. 미운오리새끼(24) 20.05.22 36 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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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1. 미운오리새끼(22) 20.05.21 41 0 19쪽
24 막간 20.05.20 42 0 20쪽
23 Ep 1. 미운오리새끼(21) 20.05.20 48 0 19쪽
22 Ep 1. 미운오리새끼(20) +1 20.05.19 53 1 21쪽
21 Ep 1. 미운오리새끼(19) 20.05.19 48 0 18쪽
20 Ep 1. 미운오리새끼(18) 20.05.18 63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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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p 1. 미운오리새끼(14) 20.05.16 70 0 13쪽
15 Ep 1. 미운오리새끼(13) 20.05.16 74 1 13쪽
14 Ep 1. 미운오리새끼(12) 20.05.15 79 1 20쪽
13 Ep 1. 미운오리새끼(11) 20.05.15 89 1 15쪽
12 Ep 1. 미운오리새끼(10) 20.05.14 91 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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