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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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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글자수 :
391,305

작성
20.04.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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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서임식 (4)

DUMMY

정기 서임식은 신년마다 이루어지는 하례식(賀禮式)의 한 과정으로 치부한다. 성인을 맞이한 귀족 자제들에게 대충 사작을 던져주는데, 거창한 행사 같은 건 없었다. 연례행사인지라 국왕의 대리인이 한자리에 모인 귀족 자식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설교하며 귀족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강조한 뒤 일괄적으로 사작임을 부여하는 반지를 하나씩 부여하고 끝낸다. 길어봐야 반나절의 반 정도면 끝난다고 한다. 반지조차도 받는 게 아니라 배급받듯이 강당을 나가면서 기사가 하나씩 지급하는 것이다.

기념 서임식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펠릭스가 아는 서임식은 이쪽이었다. 국왕과 고위 관료들이 홀에 서서 귀족임을 받아들이는 거창한 행사 말이다. 하지만 국왕이 일일이 서임하는 경우는 드물고, 서임 받는 자 중 가장 출중한 자가 대표로 서임을 받았다. 일반적으로는 기념 서임식이 열리도록 영향을 강하게 끼친 자가 받는다.

다만 무조건은 아니었다. 국왕의 자식이 태어났다거나, 상서로운 징후가 나타났다거나 하는 등의 기념 서임식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라 덕이 높은 사람이 대표를 맡는다.


'근데 지금 내가 그걸 신경 쓸 상황은 아니고···.'


서임식 과정은 간단했다. 홀에 마련된 결계 마법진 안에 들어가 자신의 용력을 과시하는 것. 기사는 오러를, 마법사는 마력 결정을 뽑아내 경지를 입증한다. 긴장해서 오러나 마력을 운용하지 못하면 서임식에서 퇴출당한다. 이런 기념 서임식은 몇 년에 한 번 있을 정도로 드물다. 익스퍼트 상급이나 5서클 마법사가 등장해야만 비로소 열리고, 수도 근처에 없으면 참가할 수도 없다. 사작을 못 받으면 귀족 취급도 안 해주므로 꼭 필요한데, 그런 작위도 없이 왕도에 오래 머무는 건 보통 재력으로 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다음 서임식을 기다리기 위해 왕도 밖으로 나가 몇 년간 돈벌이하며 1년 정도 왕도에 체류할 돈을 모으는 게 대부분. 그런 꼴을 겪기 싫으면 단번에 성공해야 하고, 이런 긴장감 때문에 실패한다. 악순환이라면 악순환이지만, 어중이떠중이를 골라내는 데에 이만한 압박감이 없다. 서임식에 거물이 다수 참가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뭐, 나는 상관없는 일이네."


펠릭스는 검 위에 바로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 올렸다. 엘룬은 펠릭스의 용력에 화들짝 놀란다.

엄청난 훈련 끝에 겨우 시녀장 후보까지 다다른 엘룬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나타난 마나 블레이드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바로 눈앞에서 본 경험은 없었다. 연병장이나 훈련장 근처에서 배치되어 사작을 보조하는 임무가 아닌 이상에야 하인이 오러라면 모를까 마나 블레이드를 볼 일은 평생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궁에 찾아온 외국 사절단이나 타국 귀족이 머무르는 별궁에서 대기하던 펠릭스를 찾아온 검사관이 자격을 증명해달라고 말하며 검을 건넸을 때까지만 해도 별일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별궁 뒤쪽 공원에서 다수가 보는 앞에서 검증을 받아야 했다.


"놀랍군. 저토록 정순한 마나 블레이드라니···."

"상급은 되겠군.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을꼬."


청력을 키운 펠릭스의 귀에 멀리서 지켜보는 대귀족들의 평가가 들어왔다. 펠릭스는 마력을 정제하지 않았으나, 마력을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마나부터 사용해서 사용한 마나 블레이드라서 지극히 정순한 마나가 생성했는데, 그 점을 놀라워했다. 그들은 펠릭스의 진짜 실력을 모르지만, 겉으로 보인 것만으로도 경이로워한 것이다.

이 점은 펠릭스에게 부정적인 것이었다. 서임만 받고 냉큼 탈주할 애초 계획이 크게 뒤틀린 탓. 골렘과 비공정만 해도 지금까지의 계획을 재설립해야 하는 지경인데, 괜히 정치에 휘둘려 이역만리 타향을 돌아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쪽 개척지에 야만인이 가득하다던데. 그쪽으로 보내면 될 듯하오."

"이 일에 한정해선 모두들 얄팍한 권모술수는 접어둡시다. 다른 녀석들이 회유하면 두고두고 회자될 웃음거리로 전락할 거요."

"옳소. 익스퍼트 최상급이나 마스터 하급이라고 생각했건만. 샤메드께서 오슬레아의 앞날에 축복을 해주셨으니 개척에 몰두합시다."


배경이 전혀 없는 펠릭스의 처지는 뻔했다. 왕도에 거주하는 대귀족에게 있어 퀸으로 이곳저곳에 좌우될 것이다.


'양판소 세계관이면 고위 귀족들 머릿속에 돌이랑 새로 가득해야 하는 거 아냐?'


주인공이 얍 하고 뭔가를 하면 헉 소리를 내며 당했다! 외치는 게 고위 귀족의 역할이다. 주인공이 빛나도록 아래 깔리는 마지막 밑 접시 같은 존재인데, 나누는 이야기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어느 마을이 위험하니 그 위주로 돌다가 개척촌에 밀어 넣어 몬스터 군락을 토벌하고, 어느 지점의 광맥이 탐사 완료될 때까지 머무르게 한다느니, 넝쿨째 굴러 들러온 호박을 어떻게 대할지 합리적인 수준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개척지를 장원으로 만들거나 사탕수수를 길러 사치를 부리겠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나왔다.


'그냥 여기서 튈까?'


섣부른 행동을 계획하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엘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란소스님. 이만 마나 블레이드를 거두셔도 될 듯하옵니다."

"응? 아아."


마나 블레이드를 유지하는 게 어렵지 않다 보니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선명한 마나 블레이드는 햇빛을 받아 사방으로 광채를 과시했다. 주위의 기사는 선망과 질시 섞인 시선을, 마법사는 두려움과 경악으로 가득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작게 숨을 내쉬며 한 호흡 만에 마나 블레이드를 거두었다. 긴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연함이 펠릭스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이렌도르 경은 혼탁한 마나 블레이드를 꺼내는 데도, 거두는 데도 열 호흡 이상 걸렸거늘."

"그뿐만이 아니오. 실페온 경은 종종 마나 블레이드가 아닌 오러와 혼동할 정도로 옅은 걸 꺼내는 데 식사 한번 할 정도로 오래 걸린단 말이오."


대귀족은 은근한 신경전을 벌였다. 엄청난 천재가 등장하며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보이자, 반대 파벌의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하찮은지 공공연히 떠들었다. 그럴 때마다 해당 파벌의 귀족도 지지 않겠다는 듯 각자의 무력을 비교하는 말을 주저 없이 꺼냈다.

그들은 정치적 언사였지만, 펠릭스에겐 귀중한 정보였다. 마나 블레이드가 보석처럼 선명하고 맑은 형태인 게 아니었다. 그것은 기사가 지향해야 할 '완벽한 마나 블레이드'였고, 보통은 우유처럼 탁하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비눗방울처럼 형태가 뒤틀렸다.

마나 블레이드를 구분할 줄 모르는 일개 보병, 기사는 마나 블레이드의 차이를 모르지만, 왕도의 큰손들은 그걸 명백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그냥 튀는 건 안 될 것 같다. 젠장.'


펠릭스의 고민은 나흘 뒤 현실로 다가왔다.

국왕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실력파 앞에서 마나 블레이드를 뽑았다. 나흘 내내 '긴장 때문에 못 뽑았다고 할까?'라고 고민했지만, 대표자 역할이 실패하면 해당 서임식 해당자 전체가 취소된다고 하기에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조지는 건 본인의 선택이니 거리낄 게 없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함께 조지는 건 양심에 굉장히 찔린 까닭이다.

선명한 마나 블레이드를 본 국왕과 대신들은 박수로 맞이하였다. 본래 박수까지 하는 경우는 없으나, 소드마스터 상급의 등장은 절로 박수를 자아냈다.


"훌륭하다. 오슬레아의 앞날이 밝으니 어찌 오늘을 기쁜 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충의를 받아 기꺼울 따름이다. 하나하나 서임하고 싶은 마음은 산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크나, 국정을 소홀히 할 수 없어 그대들의 대표에게만 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펠릭스 란소스, 앞으로 나오라."


펠릭스는 결계에서 벗어나 계단을 하나씩 오른다. 그 속도에 맞춰 국왕도 계단을 하나씩 내려간다. 두 사람이 만나는 중간 단층.

마나 블레이드를 선보이기 위해 받은 검을 거꾸로 잡고 손잡이를 국왕을 향해 내민다. 그 검을 받아든 국왕이 펠릭스의 어깨 위에 얹는다.


"인데브의 펠릭스 란소스."

"예, 폐하."


펠릭스가 대답하며 무릎 꿇는 행동을 기점으로 서임식이 시작하고, 주위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이 허리띠를 어깨에 걸친 채 결계 안으로 들어간다. 기사는 검을, 마법사는 스태프를 시종에게 건넨다.

국왕은 시종들의 행동을 기다렸다. 자격을 증명한 자에는 허리띠를 채워주고,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자는 목에 허리띠가 채워져 가축이 도축장 끌려가듯 경계 밖으로 끌려나간다. 서임식에 임한 인원 67명 중 오러 혹은 마력 결정을 형성한 자는 반보다 적은 29명.

모든 시종이 허리띠를 채우고, 약간 뒤에 서서 대기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주신 샤메드님과 용자 조르지오, 성인 라피헬라, 현인 마카사, 장인 브롤터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사작으로 서임하노니."


국왕이 말하는 동안 시종들이 검이나 스태프를 허리띠에 채웠다.


"용감하고 자비로우며, 지혜롭고 또한 우직할 지어다."


왼쪽 어깨를 한 번, 머리 위로 둘러서 오른쪽 어깨를 한 번, 다시 머리 위로 돌리되 어깨가 아니라 목을 한 번 쳤다.

펠릭스가 검을 받는 동안 뒤에서는 검이나 스태프를 허리에 고정한 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절차상 그들이 무릎을 꿇은 건 한순간이었지만, 사작을 받은 건 똑같았다.


"국왕 폐하 만세! 폐하의 뜻을 널리 떨치겠나이다!"

"만세!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오슬레아여, 영원하라!"


결계 마법진 안에서 29명의 외침이 홀을 울렸다. 서임식은 이것으로 종료.

대표가 아닌 사작 무리는 왕궁 밖으로 나가 각자의 삶을 시작한다. 귀족 출신이라면 본가로 금의환향을, 평민 출신이라면 일가를 이루기 위한 후원자 물색 또는 고용주를 찾으러 왕도를 돌아다닌다.

그러나 서임식 대표는 달랐다. 기념행사이므로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여운을 감당할 다른 장소가 필요했다.


"란소스 경. 그대를 연회에 초대하고자 하는데, 참여하여 빛을 내주겠는가?"

"폐하의 초대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응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도다. 경에게 붙인 시녀가 자세히 안내해줄 걸세."

"황송합니다."


펠릭스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귀족이 아니라 국왕의 우산을 쓰기로 했다. 양판소는 중세 유럽 고증보다 조선에 좀 더 가까웠다. 왕의 권력이 막대하고, 권신이 있는 그런 단일국가로서의 면모. 국왕과 귀족이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특정 이권이나 국가운영 방향성을 놓는 경우고, 아예 반역을 노리는 극단적 경우를 제외하면 일단 국왕은 귀족과 비교해서 우위에 있다.

왕권이 취약할 수는 있어도 왕 그 자체의 의미가 유명무실한 경우는 못 봤다. 이곳도 그럴 것으로 생각해서 왕당파가 차라리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판단이 절반만 맞고 절반이 틀렸다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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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임식 (3) +1 20.04.19 239 6 12쪽
13 서임식 (2) 20.04.18 240 5 12쪽
12 서임식 (1) 20.04.18 245 6 14쪽
11 마나 블레이드 20.04.16 252 5 12쪽
10 신체 단련 (2) 20.04.15 249 5 12쪽
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5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7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3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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