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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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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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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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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트렐라드 변경백령 (3)

DUMMY

네리카는 밀랍 판과 음료를 가져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펠릭스는 함셰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화가의 의도를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이을 수 있는가에 대한 토의였다.

함셰르는 '화가 본인이 왜 그렇게 그렸는지 설명한 글을 남긴다.'라는 원론적인 주장을 펼쳤고, 펠릭스는 '화가 전부는 아니다. 대중이 생각하는 방향과 바라는 방향이 곧 문화다.'라는 가변적인 주장을 펼쳤다.


"···말씀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 미처 반응을 못 했군."


무척 즐겁게 이야기하던 까닭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함셰르는 쟁반 위의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달콤새콤한 사과주가 목을 축인다.

격렬하게 이야기를 나눈 펠릭스도 음료로 목을 축였다. 오래간만에 이야기할 상대가 생기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수다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방금 그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가 뭐에요?"

"처음 만난 사이에 어떻게 말을 틔우겠습니까. 공통된 주제로 말문을 열어야지요. 그러나 모임이나 세미나라면 모를까, 도련님과 저는 일면식도 없고 어떠한 이야깃거리가 있어 발길이 겹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가장 무난한 종교적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했지요."


거의 다 거짓된 대답이었다. 나이 육십이 넘은 5서클 마법사가 7살 귀족과 '이야깃거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시쳇말로 '급이 안 맞는다.'라고 한다. 진의는 당연히 펠릭스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함이다.

진실이라고는 이런 식으로 지식의 차이를 실감시키면서 말문을 틔운다는 점 단 하나.


'쓰읍.'


당연히 이러한 의도는 펠릭스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진실 일부만 말하면서 얼버무리는 화법 아닌가.

파고들어 봐야 답을 해줄 리 없고, 답을 듣는다 한들 진위를 파악할 분별력도 없으므로 펠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과주 한 잔에 사과 몇 개가 필요한지 아십니까?"

"두 개? 아니, 세 개 정도는 될 것 같네요."

"허허, 아니요. 다섯 알 만큼 필요합니다. 술로 만들 때 천사께서 며칠에 한 번씩 한 모금 마신답니다. 오래 숙성할수록 조금씩 줄어들지요."

'발효라는 게 그렇긴 하지. 머그잔보다 약간 더 큰 정도인데 그만큼 많이 필요하다고?'


함셰르는 펠릭스가 흥미를 느낀듯하자, 다음 말을 이었다.


"술을 숙성시키는 통에는 이 잔을 100번 정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술통 하나를 꽉 채우기 위해선 사과 몇 개가 필요할까요?"

'유치원이냐?'


욱하고 올라오는 말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목 아래로 삼키는 펠릭스. 어른에게 내지르면 안 된다는 점에 당장은 참았지만, 참고 생각해보니 함셰르는 그 나름대로 열심히 교육하는 태도라는 걸 깨달았다.

수학! 단순한 덧셈과 뺄셈을 넘어 사칙연산과 미지수까지 단계별로 밟아가다가 숫자보다 영어가 많아지는 학문! 그 수학에 흥미를 붙이기 위한 수단은 실용성이다. 고등수학을 배우면 '이거 익혀서 어디에 써?'라고 의문을 갖지만, 지금 함셰르가 말했듯 간단한 요소로 현실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펠릭스는 답이 사과 500개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지만, 고개를 돌려 네리카를 바라보았다.


"네리카."

"네, 넷."

"사과 몇 개가 필요할 것 같아?"

"흡."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웃음을 억누르는 함셰르.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주위의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건 흔한 일이었고, 아이다운 행동이었다.

함셰르의 짐작과 달리 펠릭스의 저의는 네리카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아이라면 모를까 네리카는 백작이 붙인 하인이었고, 무식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곱셈, 더 나아가 암산할 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 세 자릿수 곱셈 암산은 보편적인가?


"···모르겠습니다."

"답은 500개입니다. 허허, 여길 봐보십시오."


네리카는 모른다고 대답했고, 펠릭스의 체면을 위해 함셰르가 밀랍 판을 바로잡으며 쇠침으로 덧셈과 곱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5를 99번 더하는 것은 5알에 100회 곱하는 것과 같다는 것.

그러나 펠릭스는 수학적 과정보다 다른 부분에 더 집중했다.


'로마자네?'


아라비아 숫자처럼 한두 획으로 표시되지 않고 무궁무진한 획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5 * 100 = 500'을 'V mult C equal D'로 표기되는 기적.

숫자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연산기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아 글자로 표시했다. 한국어로 의역하면 'V 곱하기 C 은(는) D'라는 환상의 문구였다. 펠릭스가 미간을 구기며 밀랍 판을 노려보자 함셰르는 허허 웃었다. 수학과 친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했던가.

펠릭스는 이 양판소 세상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감이 생기다가도 없어지길 반복하자 매우 개 같았다.


"아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천천히 배웁시다."

'컬쳐쇼크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뭔가를 마주한 느낌인데.'


아라비아 숫자는 양판소에서 흔히 언급되는 주인공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는 데에 비해 수학기호는 정말 아예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도리어 충격이 덜했다.

철침으로 밀랍 판을 긁으며 글자를 쓰는 함셰르의 수학 설명. 이건 어떤 숫자고, 이건 어떤 의미인지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기회는 이때다.'라는 식으로 공부에 흥미를 유도했다. 그런 면에서 함셰르는 유능한 가정교사가 맞았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빼고.'


알파벳과 비슷한 문자이기는 했지만, 영어와는 크게 차별되는 요소가 많은 언어였다. 양판소라면서 어째서 한글을 사용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는데, 아라비아 숫자와 마찬가지로 한글 보급 운운하던 양판소가 여럿 있었던 게 떠올라 빠르게 이해했다.

함셰르가 사용하는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점이 많이 쓰였다. 알파벳 O라고 해도 위에 점이 있거나 없거나, 어쩔 땐 위에 두 개가 있기도 하고, 가운데에 점이 박히기도 했다.


'성조 구분을 위해서구나. 하긴, 성조 없는 언어가 더 드물긴 하지.'


지구에서는 중국티베트어족과 인도유럽어족이 양분하다시피 차지한다. 성조가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나 한국어는 성조가 완전히 없어진 언어에 속한다. 정확히는 있으나 마나 한 언어.

그런데 이 세계의 언어에는 성조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펠릭스였지만, 자세히 파고드니 마치 호흡이나 혀의 위치 따위의 거슬림이 느껴졌다.


'문자도 배우긴 해야 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펠릭스 옆에서 네리카도 고개를 기웃하며 밀랍 판을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말고 곁에서 흘려들어야 하지만, 펠릭스의 가벼운 물음이 그녀의 호기심을 끌어냈다.

아무리 안 듣는 척한다고 해도 가르치는 함셰르의 시선에는 네리카의 관심이 보였다. 본래라면 질타하고 변경백에게 고하여 교체해야 마땅하지만, 펠릭스의 지적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고 대화 상대가 필요한 외둥이며 질문을 받았던 데다가 이번 교육이 일생에서 마지막 강습일 것이므로 자비롭게 넘어가기로 했다.

A4 용지보다 좀 작은 A5 용지 면적 정도의 밀랍 판에 너르게 적히는 수학에 대한 강의.


'그래도 이렇게 기초를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펠릭스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이 세계에서의 상식을 차곡차곡 쌓자고 다짐했다. 가르쳐줄 사람이 있고, 썩 유능했다. 자신을 아이 대하듯 가볍고 부드러운 접근법으로 다가오는 게 거슬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몸은 7살이니 아이가 맞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함셰르의 잘못은 아니었다.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지식의 공유와 전파가 올바르게 작동한 건 인쇄기의 등장이 아니라 인터넷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인터넷보다 더 뛰어난 정보전달 매체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펠릭스에게 절실한 건 정보의 상대성이다. 지금 수학기호에 관한 이해처럼 사소한 부분에서 오해가 터질 여지가 컸다.

극심한 괴리감으로 구토하는 건 2년 전, 한 번으로 충분했다.


* * * *


네리카는 트렐라드 변경백을 섬기는 기사의 딸이었다. 그러나 출산 과정에서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고블린을 토벌하다가 측면에서 오크 떼가 강습하여 진형이 무너진 탓에 지휘관을 구출하다가 전사했다.

고아가 되었으나, 신원이 확실한 데다가 전사한 아버지의 공훈이 있었던 덕분에 변경백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다. 일가족의 재산을 사기당하지 않고 처분하였고, 영주성에서 시녀로 지내어 비바람이나 굶주림을 겪지 않았다.

새로운 주인으로 남작가의 차남을 섬기게 되었는데, 4살 아래였다. 처음 만난 날 가정교사의 질문을 건넨 것이 인상에 깊게 남기도 했고, 지금까지 시녀장에게 받던 교육과 전혀 달라 흥미가 생겼다. 사과 5개를 100번 담을 수 있으면 통에 몇 개까지 들어가는가?


'500이었지.'


펠릭스를 처음 섬기는 네리카였지만, 주위 시녀들의 말로는 괴짜니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4년 동안 곁에서 보조하며 겪은 바에 따르면 괴팍하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것보다는 신비롭다는 감상이 먼저 떠올랐다.

어제 자신의 성인식이 있었다. 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씩 15살이 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세례 하는 일이다. 강제성은 없지만, 세례식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신성력으로 회복이 느리거나 약하다든지, 축복을 흘려버린다든지 하는 일 때문에 세례 유무로 신분이 갈라지기도 했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일단 기사의 딸이고, 영주성에서 일하는 시녀라 변경백이 사재에서 사례금이 전달되었다. 변경백이 돈을 대신 내주었는데, 펠릭스가 선물을 주었다. 성인식 기념 펜던트라면서.


'고맙긴 하지만 대체 왜지?'


전속 하인에게 선물을 주는 귀족이 없는 건 아니다. 수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모르는 곳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부탁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그건 여유가 있는 귀족일 때나 가능한 것이고, 펠릭스처럼 어리고 재산도 없는데 귀한 선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건네니 당혹스러웠다.

펠릭스가 선물을 준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한 판 합시다."

"아니, 선생님. 오늘 30판째입니다. 수업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가르칠 게 있어야 수업을 하지. 얼른 패 돌리십시오, 도련님."

"으, 이번엔 뭘 거실 겁니까?"

"마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배우신다 한들 익히는 건 별개입니다만."


펠릭스가 함셰르의 말대로 하는 패는 트럼프. 둘은 나무를 대패로 밀면 나오는 얇은 목판을 세공해서 패로 만든 트럼프 카드로 오락을 즐겼다. 카드놀이라고 해서 가볍게 임했던 함셰르였지만, 몇 번 패를 섞어보더니 맛 들렸는지 매일 게임을 제안했다. 펠릭스가 질려서 관두려 하니 내기를 걸었고, 하나하나 받아내기 시작한 것.

네리카에게 건넨 펜던트도 함셰르에게 따낸 물건 중 하나였다. 쓸모가 없었지만, 외견은 보기 좋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넘기는 거라면 함셰르의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리카에게 성인식 기념으로 선물해준다고 하니 별말 없이 허락해줬다.


"···19."

"21. 제가 이겼습니다."

"아아니, 어떻게! 대체 왜!"

'내가 만든 걸 내가 섞으니까 당연히 밑장 빼는 거지···. 딜러에게 안 대여 봤구나.'


펠릭스는 이번에도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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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5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7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2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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