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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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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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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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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트렐라드 변경백령 (4)

DUMMY

"어휴···. 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루에 블랙잭 31번 하고 얻는 마법 이야기. 지금까지 국어, 수학, 시 등의 기초교육과 교양 위주였다면 이번엔 마법학 입문.


"마법, 그리고 모든 이변의 기본은 마나입니다. 마법뿐만 아니라 신성권능, 주술 등의 모든 행위에 마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주술을 쓸 수 없고, 성직자가 마법을 발현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 아닙니까?"


펠릭스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다른 기술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직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법사 직업은 마법사 기술만 쓸 수 있고, 주술사 직업은 주술사 기술만 쓰는 것이 불문율.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어떤 이유일까.


"마나는 모든 힘의 원천이고 만능이므로 활용에 따라 다릅니다. 마법사가 마나를 다루면 마력이고, 성직자가 마나를 다루면 신성력, 주술사가 마나를 다루면 주력이라고 부르지요. 마나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마법사가 주술을 사용할 수 없고, 성직자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요. 흙을 마나라고 생각해봅시다. 물을 부으면 진흙이 될 것이고, 채에 털면 자갈만 남겠지요. 진흙이 쓰이는 장소에 자갈이 쓰일 수 없고, 자갈이 쓰일 곳에 진흙이 쓰일 수 없듯이 마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력과 신성력의 본질은 마나이되, 마나와 다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셰르의 설명은 펠릭스의 귀에 쏙쏙 들어갔다. 힘의 원천은 마나지만, 한 번 필터를 거치므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없다는 설명.


"기사의 오러는 마력입니까?"

"오러는 순수한 마나에 가깝습니다. 거의 변화가 없지요. 그래서 주술사가 오러를 사용하기도 하고, 성직자도 오러를 다룰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마법이나 신성력이 정교한 마나 활용이라면, 오러는 무식한 마나량에 좌우됩니다. 세밀한 기교도, 예민한 감각도 필요 없이 마나 보유량 하나만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마법사도 마나를 많이 가지고만 있다면 오러를 흉내 낼 수 있지요. 그다음 단계는 불가능합니다만."

"그···렇군요. 그런데 다음 단계라뇨?"

"오러는 무궁무진한 마나의 응집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차가워지면 물이 되지만, 마나는 한층 더 고차원적인지라 오러는 마치 끓는 물의 수증기와 유사합니다. 억지로 압축하였기에 순리에 맞게 다시 회귀하는 건데, 기화를 막는 방법이 바로 오러의 다음 단계입니다. 마나 블레이드라고 부르지요."


펠릭스는 턱을 매만지며 함셰르의 설명에 집중한다. 오러, 마나를 강제로 압축시킨 기술. 연습한 것 그대로였다. 심장의 마나를 끌어올려 신체 일부에 입히는 방식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코팅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무식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답이었고, 다음 단계가 있었다.

직역하면 '마나 칼날'이라는 명칭이고, 수증기처럼 기화하는 오러의 마나를 억누르는 기예다. 풍선과 같은 이치였다. 오러가 폐활량이라는 재능으로 바람을 계속 불어 기압을 유지하는 식이라면, 마나 블레이드는 풍선에 숨을 불어넣어 기압을 유지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마나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고, 마법이나 주술처럼 마나를 정교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다.

함셰르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펠릭스의 고민은 깊어진다.


'내가 마나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재능이 있는 건 맞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방식이 고민이네.'


함셰르는 간단한 예시로서 흙을 언급했다. 진흙과 자갈은 용도가 다르다고 했지만, 순수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펠릭스에겐 상관없었다. 문제는 예시에 언급된 물과 채 같은 역할을 해줄 방법 혹은 수단!

밀랍 판에 적히는 내용을 노려보는 펠릭스. 함셰르가 가르쳐주는 마법학 입문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마법학이지 마법은 아니었다. 글귀의 요약은 '마법이란 무엇인가?'였다.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가정교사에게 배우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정식으로 마법사 아래에 제자로 들어가거나, 거액을 들고 마법사에게 부탁해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함셰르가 설명해주는 내용은 몹시 흥미로웠지만, 그렇다고 당장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찔끔찔끔 핵심에 가까운 이야기가 나오긴 해. 아, 근질근질하다.'


펠릭스 옆에서 함셰르의 강의를 듣는 네리카. 마법학 입문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는다.

마법의 근원은 마나에 있고, 마나는 모든 힘의 원천이다. 샤메드가 주신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세상에 퍼진 마나가 샤메드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까지. 기사의 딸인 네리카는 유일무이한 독자라 아버지가 남긴 비법을 알고는 있었다. 트렐라드 변경백이나 되는 높은 사람이 한낱 기사의 재산처분을 도운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걸 본다고 해서 네리카가 마나를 다룰 순 없었다. 글자를 모르기도 했지만, 읽는 것과 체득하는 건 엄연히 별개였으니까.


'뭔가···, 감이 오는 것 같은데···.'


함셰르의 뛰어난 언변으로 설명된 마법학 입문 과정은 네리카의 지식을 자극했다. 어째서 그 내용이 그렇게 쓰였는지. 왜 그런 부연설명이 붙어있었는지. 차근차근 이해되기 시작했다.

펠릭스와 네리카, 두 사람의 희비가 교차하는 강의였다.


* * * *


그날 이후로 펠릭스는 오락거리를 개발하느라 날밤을 지새웠다. 트럼프 정도는 목수에게 묻고 대충 가져가는 불쏘시개에 불과했지만, 그 외 물건들은 쉽게 만들 수 없었다. 가령 화투라던가 마작이라던가 주사위 게임이라던가. 하나같이 여러 가지 재료 혹은 정교한 그림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애쓰게 된 이유는 함셰르가 블랙잭을 접었기 때문이다. 펠릭스가 노골적으로 마법을 배우고자 하며 내기를 걸었다가 자존심을 건드려 아예 내기 성립을 안 했다. 오락거리가 드문 시대라 간단한 블랙잭 하나만으로 장신구를 걸 정도로 몰두했지만, 마법만큼은 아니었다. 이 부분은 펠릭스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게임 한 판 하죠?"

"괜찮습니다. 수업합시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지구와 비슷해졌다. 놀고자 하는 학생과 진도를 빼려는 교사의 구도.

지금까지 함셰르가 블랙잭에 열중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펠릭스가 천재에 속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고등교육 과정을 수료한 펠릭스에게 함셰르가 가르칠만한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년 동안 문자, 숙어, 예의범절 등을 가르치는 게 고작이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흡수하는 펠릭스가 장했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가르칠 맛이 나지 않았다.


'가르치기보단 토의가 되어버리니 원.'


공부에 흥미를 붙이는 방법은 관심과 실용성을 체감시키는 일. 그러므로 이걸 해내느냐 못하냐에 따라 가정교사로서의 격이 달라졌고, 함셰르는 굉장히 높은 축에 속했다. 대화를 거치며 공부할 필요성을 강변하는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펠릭스는 정면에서 받아쳤다. 맞서거나 받아내는 게 아니라 반박하며 논리를 파훼했다.

처음에야 반박을 반박하며 재미있게 대화했다. 그런데 그게 한두 번이 아니고 근본적인 재능의 영역을 실감할 정도가 되자 회의감에 젖었다. 그걸 잠깐이나마 잊게 해준 것이 카드게임이었고.


'너무 빠져들었지. 노름에 패가망신하는 작자들이 있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어.'


재능의 벽을 실감해버린 탓에 오직 운으로만 대결하는 트럼프에서도 승리해보고 싶었다. 그조차도 잘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토의할 때보다는 승률이 높았다.

그러다가 마법학 입문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제야 함셰르는 펠릭스가 매달리는 분야를 찾아냈다. 마법, 마나를 활용해 만들어내는 이변의 한 종류.


"함셰르님?"

"아아, 듣고 있습니다."


트렐라드 변경백의 집사장은 함셰르의 보고를 듣고 간만에 식은땀을 흘렸다.

골칫거리로 여기던 펠릭스가 천재라고? 그것도 별종의?


"재차 말씀드리자면, 그분은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르칠 수 있는 분야는 예법과 자세 정도. 학식이 뛰어난 분을 초빙하여 지성을 갈고 닦는 편이 좋을 겁니다."

"5서클 마법사이신 함셰르님보다 뛰어난 분이 텔로드에 계실 리 없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죄송하게도···."


함셰르가 점잖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 집사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텔로드에서 가장 뛰어난 가정교사 중 하나가 이렇게 저자세로 굽히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더 말하면 강권이 되므로 집사장은 함셰르의 청탁을 받아들인다.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이었음에도 맡아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하다못해 좀 젊었으면 모를까, 이제 육십이 넘은 노인에게는 무리가 맞았다. 경지에 오르지 못한 마법사에게 60이라는 나이는 살 수 있는 날보다 살아온 날이 몇 배로 많은 연령. 지금까지 맡아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집사장은 영주성을 떠나는 함셰르를 배웅하고서 재무감에게 함셰르의 삯을 준비해두라 일러두고 변경백에게 찾아갔다.


"숲을 옆에 끼고 싸우면 측면을 강습 당할 위험은 적겠지만, 몬스터가 출몰하면 낭패를 볼 겁니다."

"가장 좋은 수단은 정석적인 정면대결이지만, 그러면 수적으로 열위인 아군이 포위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비대를 동원하거나 발 빠른 정예부대를 꾸려 수뇌부를 압살해야 승산이 있습니다."


트렐라드 변경백 안에 들어온 도적단 처리를 위해 브리핑하는 회의실에 집사장에 들어갔다. 트렐라드 변경백은 기어코 붕괴한 어느 남작령을 도적단이 점거한 탓에 토벌계획을 수립하는 중이었다.

도적의 수는 1만에 달했다. 그들 중에서 진짜 도적은 백이 안 되겠지만, 피난 과정에서 섞인 빈민이 문제였다. 머릿수로만 따지면 대단한 위협이었고, 농기구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맞으면 치명적이다. 특히나 남작령 내에 남아있을 무기를 고려하면 무장 상태가 어느 정도일지 감이 안 왔다. 그래서 회의가 길게 이어졌고, 집사장은 심각한 분위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변경백 곁으로 가서 용무를 꺼냈다.

함셰르의 퇴직, 펠릭스의 재능 그리고 한계.


"경들, 잠시 휴식을 취하지. 식사라도 들고 다시 모이자고."

"옛, 주군."


묵례 후 자리를 비우는 귀족들. 트렐라드 변경백은 의자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쉰다.

국경 너머의 알카탄 공국과 지세트 백국에서 고의로 유민을 넘기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는 거래 상대로부터 받은 정보다. 카팔라 제국이 대외활동에 무심해지는 틈을 타 영토를 노려보려는 약국의 발버둥이라는 정황증거.

오슬레아 대왕국이 약국은 아니다. 알카탄 공국의 7배, 지세트 백국의 20배는 될 영토를 지녔다. 그러나 당대의 국왕은 육지보다 바다에 관심이 많아 국경지대의 관심이 소홀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바다 쪽 영지는 한창 조선소를 짓는다, 배를 만든다, 기술자를 모집한다 등등. 북새통이 따로 없을 정도로 활발했다.


"···올해로 11살이었지. 어찌하면 좋겠나?"

"함셰르님께서 물러난 이상 텔로드 내에서 초빙할 명사는 없습니다. 기사 서임을 위한 밑단계를 준비함이 어떠한지요."

"호인이라는 정도가 아니야. 피 한 방울도 안 섞이고, 계약에도 없는 자식 교육이라니. 누가 들으면 죄다 내게 자식을 떠넘기겠어."

"재능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썩히기 아깝습니다. 투자한다고 생각해주십시오."

"투자! 이미 충분히 조치했다고 생각하는데 더 해야 하나?"


변경백은 말하다가 두통이 느껴져 이마를 짚었다. 기사라는 건 어렸을 때부터 전투병기로 키우는 게 정답이고, 마법사라는 건 마탑에 보내는 게 정답이다. 펠릭스에게 내린 조치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교양 교육에 불과했다.

그런데 천부적인 재능의 보유자라고 하니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쑤셔왔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겠지. 은퇴한 기사 중에 의향이 있는 자를 찾아 교육을 맡겨라. 이렇게 된 이상 전력으로 키워서 써야 타산이 맞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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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임식 (1) 20.04.18 245 6 14쪽
11 마나 블레이드 20.04.16 252 5 12쪽
10 신체 단련 (2) 20.04.15 249 5 12쪽
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1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5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5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7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3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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