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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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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0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작성
20.04.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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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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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신체 단련 (2)

DUMMY

그 뒤로 일과는 전보다 간단해졌다. 가정교사로 지내던 함셰르는 매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날에 따라 달라졌다. 사흘 동안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태평하게 다음 게임을 준비할 수 있었던 여유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셀튼 이드쿨라는 영주성에 상주했다. 매일 기사가 어떻게 몸을 조지는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펠릭스는 상관없었지만, 네리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골골거렸다.


"우는 걸 보니 아직 여력이 있어 보이는구나. 한 바퀴 더."

"으아앙!"


네리카는 셀튼의 말에 한껏 울었지만 매서운 눈매를 못 이기고 연병장을 달린다.

펠릭스는 고개를 움직여 네리카를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마다 네리카의 체내에 마나를 불어넣어 주었고, 힘들 때마다 심장에 넣어둔 마나가 혈관을 타고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쥐가 나지 않도록 근육에, 호흡 곤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폐에, 균형을 잃지 않도록 달팽이관에. 신체 곳곳에 파고든 마나는 활력이 없어도 만들어냈다.

울거나 말거나 셀튼은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기사 수업을 받기 시작한 이후 식사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처음 볼 때와 비교했을 때 부쩍 커졌다. 2큐빗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던 키가 어느새 3큐빗에 가까워졌다. 성장기 소년이라지만 너무 빨랐다.


"벌써 열 바퀴를 다 도셨습니까?"

"아침에 끝냈다. 낮에는 병사가 돌아야 하잖나."

"놀랍군요. 천이백 보의 연병장일진데."

"매일 달리다 보면 근육이 붙기 마련이지."


펠릭스는 마나를 사용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마법사조차 마나를 감지하지 못하는데 기사라고 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들키지 않는다면 왜 안 쓰겠는가? 단련을 위해서이므로 활용을 했다가 안 하길 반복할 뿐이다.

거의 1년 동안 셀튼에게 배운 거라곤 달리기 하나였다. 균형 잡기나 팔 근육 단련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오전에 달리기가 끝나고 여력이 남으면 하는 일이었다. 무식한 단련이었으나, 그런 만큼 기초를 닦는 데 좋았기에 아무 말 않고 따랐다.


"다음부터는 네리카와 발을 맞춰주십시오. 혼자 도니 많이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뭐···, 눈이 좀 있긴 하지."


네리카는 긴 머리카락을 자르면서까지 훈련에 임했다. 트렐라드 변경백이 '기사의 딸이니 기사가 되어도 괜찮겠지.'라며 정식으로 밀어준 덕분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칼은 이제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하인들 사이에서 경원시 되었다. 업무에서 밀려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경백이 허락한 시점부터 네리카는 하인이 아니라 준 귀족이었다.

변경백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간단했는데, 펠릭스에게 종자를 붙일 여유가 없어 네리카를 맡기기로 판단한 탓이다. 기사의 갑옷 착용과 무기 손질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옆에서 도울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역할에 네리카를 점찍었다. 서로 잘 붙어 다니기도 하거니와 네리카에겐 물려받은 마나 수련법이 있었다. 익스퍼트가 되면 이득이고, 못하면 종자로 넘기면 됐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시녀의 결혼 상대를 찾아보라며 인심을 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찌 보면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다른 이유는 곁다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련님께 지구력 훈련은 무의미한듯하니, 내일부터는 다른 단련에 집중하겠습니다."

"호오, 그게 뭐지?"

"검 다루는 방법입니다. 검술은 이다음 과정입니다."

"무슨 차이길래?"

"검명(劍鳴)을 들을 줄 알아야 진정한 검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검명을 들은 기사와 아닌 자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건 또 무슨 무협지야?'


검의 울음소리, 라는 참신한 단어가 나오자 펠릭스는 눈매를 찡그렸다. 셀튼 이드쿨라는 묵례하며 기분을 해친 걸 사과했지만, 펠릭스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그 어느 양판소에 검명이 나오는가? 퓨전 환협지가 아니고서야 언급되지도 않는다.

개소리라고 취급하며 넘기기엔 셀튼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진짜 그런 게 있는 것처럼.


"검명이란 뭐지?"

"음, 나중에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저기 저 애가 돌아오고 나서요."

"헥헥!"


펠릭스가 고개를 돌리니 어느덧 한 바퀴를 다 돌고 다가오는 네리카가 보였다. 숨이 벅차오르는 듯 헐떡거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


셀튼의 뜬금없는 말.


"최근 부쩍 컸지요."

"그렇지."


당연한 말이었다. 매일 아침 불어넣은 마나가 일상활동을 도우니 영양분이 다른 곳에 스며들 수 있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키도 반 뼘 정도 커졌고, 발육도 좋아졌다. 칼로리의 승리라면 승리랄 수 있겠지만, 저체중에서 보통 체중이 된 정도에 불과했다.

펠릭스의 무덤덤한 말에 셀튼은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무심하시군요."

"···아, 그런 의미인가?"

"귀족가에서 손님에게 하인으로 이성을 붙이는 건 그런 이유지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탓인지 그렇게 안 보여. 믿겠나?"

"흠."


셀튼은 펠릭스에게 시선을 떼 네리카를 바라본다. 전장에서 죽은 후배 기사의 머리카락을 똑 닮은 여인. 불타는 듯한 주황색 머릿결을 휘날리며 전장을 날뛰었고, 지휘관을 살리다가 목숨을 잃었다. 토막 난 시체를 수습하며 얼마나 원통했던가. 딸이 있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소식이 끊겨 챙겨주지도 못했었다.

홀로 남은 아이가 영주성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영주가 직접 챙길 거라고 생각이 안 닿았으니까.


"잘 돌봐주십시오. 혼자 큰 아이입니다."

"직접 말하쇼."

"낯간지러워서···."

"늙은이가 주책이야."

"허허."


드물게도 셀튼이 웃었다. 본인도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늙어서 괜히 잔걱정만 늘었다.

네리카가 다가오자 펠릭스는 양동이 통에 담가둔 물을 네리카에게 뿌렸다. 차디찬 지하수를 뒤집어쓴 네리카.


"아, 차거!"

"빨리 쉬어. 다른 곳 가야 하니까."


신분이 달라 차마 쓴 말은 못하고, 우물가에서 옷을 짜기 시작한다. 작게 투덜투덜하는 내용은 청력을 키운 펠릭스는 물론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셀튼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겐 귀엽게 보일 뿐이지만.


"준비 끝났어요."


훈련할 때 입는 허름한 옷 위에 일상복을 덧입었다. 펠릭스는 진즉에 씻고 갈아입은 상태였다.

연병장에서 좀 떨어진 장소. 그곳은 작은 골방이었다. 옥탑방과 비슷한 공간이었는데, 주위에 여러 채가 있었다. 외견만 보면 창고로 보이는데, 주위에 인적이 드물었다.

영주성을 둘러싼 성벽 바로 아래의 추레한 외딴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대체 왜···."


네리카는 의문을 표현했지만, 펠릭스는 대충 어떤 느낌인지 바로 파악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승려가 외딴 별채에서 지낸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 둘러싸여 깨달음을 위해 수양한다는 내용. 지금 셀튼이 하는 것도 비슷한 것 같았다.

오두막 안쪽은 텅 비어있었다. 그저 검 몇 자루가 덩그러니 거치 되어 있었다.


"모든 물질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애니미즘이?'

"정령은 생명의 권화(Personification)이고, 거대한 순리에서 분리된 한 줄기 중 하나입니다."

'아, 정령.'


펠릭스가 기억하기로 최근 양판소로 갈수록 정령에 대한 언급조차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의 실력을 표현하는 장치로 정령이 선택되지 않은 쪽에 가깝지만, 그보다는 굳이 정령이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정령을 넣어야 하는가?

셀튼이 꺼내는 말은 그 의문에 나름의 답이었다.


"검이란 땅속에서 캐낸 금속을, 나무를 태운 불로 녹여내, 물로 식혀, 바람을 가르는 예리함을 품습니다."

'얼핏 듣기론 4원소 이론인 것 같긴 한데, 오행 같기도 하고.'

"따라서 검에는 자연이 깃들었고, 작은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검을 만드는 데에 있어 자연원소의 모든 것이 사용되므로, 그 자체로 자연의 순리 중 하나라는 말.

셀튼은 오른손으로 진검을 들었다. 왼손은 손목 아래로 아무것도 없어 한 손만으로 검을 쥐고서 눈을 감았다. 서서히 검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렁인다.


"와아···."

'아, 저래야 오러인가?'


감탄을 흘리는 네리카와 달리 펠릭스는 오러를 분석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건 오러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검에 입혀진 오러는 빛을 산란하며 찬연한 자태를 자랑한다.

셀튼이 펼친 오러는 펠릭스의 것보다 옅었지만, 중후했다. 한눈에 보이는 중량과 예리함은 고속으로 회전하는 톱날을 보는 것처럼 살벌했다.

마나를 움직인 탓인지 셀튼은 식은땀을 흘렸다. 겨우 1분간 유지했을 뿐인데도 그러했다. 서서히 마나를 갈무리하며 오러를 거두고, 검집에 검을 돌려보내고서 눈을 떴다.


"이것이 오러입니다. 검명을 들은 자만이 가능하지요. 도련님께서 나아가실 길입니다."

"···놀랍군. 어떻게 하는 거지?"


질문을 하긴 했지만, 펠릭스는 자신의 마나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순환, 마나의 흐름이 없었다.

오러는 원소가 서로 맞물리듯 마나를 회전시켜야 이룰 수 있는 경지였다. 함셰르는 마나만 많으면 가능하다고 말했었는데, 아주 당연한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나를 고속으로 증발시키는데 쥐꼬리만 한 마나만으로는 오러를 만들 수 없다.


"검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검도 도련님을 받아들일 겁니다."

'검의 제작과정을 말한 건 다 순환이라는 깨달음을 유도하기 위해서겠지. 마나는 기본적인 에너지고. 모든 걸 베는 죽음의 칼날이 되지만, 그런 예리함을 만들 수 있는 건 오러라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세계와 다를 바 없으니, 격으로 찍어누르는 거야.'


펠릭스는 셀튼이 자신의 앞으로 내민 진검을 받아 검집에서 뽑았다.


"어째서 창은 쓰지 않는 거지?"

"창은 오러를 받아들이기에는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통째로 철로 만든 창이라면 가능할 수 있으나, 깃대와 다를 바 없고 무거워 실전에 쓰기란 어렵습니다."


왜 판타지에서 오행이 아니라 4원소가 쓰이는가, 에 대한 해답이었다. 나무는 오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정확히는 오러라고 하는 '세상의 이치'를 담을 그릇이 아니었다. 오행에서 나무는 생명을 의미한다. 나무 그 자체가 생명인데, 그 안에 세계를 쑤셔 넣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발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펠릭스는 오러의 이치를 깨달았지만, 바로 마나를 불어넣지는 않았다. 검이 손바닥에서 마나를 끌어가려는 것처럼 흡착력이 느껴졌지만, 허락하지 않는다.


"큼."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양하면 검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펠릭스의 불편한 기색을 조급함 때문이라고 받아들인 셀튼이 가볍게 달랬다. 익스퍼트 기사가 되기 위한 벽. 이걸 넘지 못해 평생 이름뿐인 기사로 살아가는 자도 적지 않았다. 오히려 절반 이상이 그랬다.

무수한 귀족이 마법의 문을 열지 못해 오러의 길로 내려왔다가, 그조차도 못해서 무너졌다. 그렇기에 평생 오러를 느끼지 못한다 하여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부러울지언정.


"어?"

"아?"

"뭐···?"


네리카의 의문. 펠릭스의 당혹. 셀튼의 경악.

네리카의 검에는 셀튼과 비교하면 심각하게 옅었지만, 오러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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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단련 (2) 20.04.15 249 5 12쪽
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5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7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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