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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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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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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트렐라드 변경백령 (2)

DUMMY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비추는 등대인 성당에서 펠릭스가 잠들었을 무렵, 트렐라드 변경백령은 금일 저녁에 들어온 보고서를 읽고 간만에 이마를 짚었다.

인데브 남작령에서 모집령에 응했다고 하길래 나름 쓸만한 강병(强兵)이 오겠구나 싶었더니 둘째 한 명만 왔다. 그 어떤 호위병사도, 재물도, 권리증서도 없이 정말 한 명만 달랑 보냈다는 점이 실로 골때리는 일이었다.


"고정하십시오, 주군. 인데브 남작령이 무사하니 주위가 그나마 정리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맞다. 맞아."


변경백의 곁에서 영지의 중대사를 돕는 집사장이 주인의 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런데 왜 하필 둘째냐? 그 멍청하다고 소문난 백치잖나. 나보고 애를 죽이라는 게 아니면 대체 뭐지?"

"아마도···, 짐작하신 내용이 맞을 겁니다. 이 근방에 데릴사위나 양자가 필요한 가문은 없으니까요."


상황이 그러했다. 당대 트렐라드 변경백령의 후계자는 유독 남자가 많았다. 예전처럼 여자 후계자가 있었다면, 데릴사위 자리가 넉넉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남이 대부분이 되었고, 데릴사위 자리는 지극히 희소해졌다. 고로 남자로 태어난 자식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부인 자리를 노리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방향을 찾아야 했다.

인데브 남작이 무능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남작령은 아니었다. 데릴사위가 갖춰야 할 자격은 크게 세 가지다. 혼수품, 혈통, 능력. 그런데 이 중에서 혼수품과 능력이 없으니, 혈통만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꼬락서니다.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아이를 전장에 내몰 순 없다. 방법이 있나?"

"되돌려 보내거나, 성당에 맡기거나, 주군의 덕을 내세울 증거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수재는 아니더라도 범재 정도만 되어도 다른 귀족 집안에 집사나 시동으로 넘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소문난 둔재에게 이런 일은 금물. 그렇다고 분명한 귀족 핏줄을 노동에 투입하는 건 변경백에게나 남작에게나 위신에 손실이 있다. 이미 이런 일에 7살을 보낸 상황에서 인데브 남작은 당사자의 위신 하락을 감수했을 테니 상관없겠지만, 트렐라드 변경백은 사양하고 싶었다.

첫째, 되돌려 보내는 건 의무에서 해방이다. 인데브 남작에게 '이번 모집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라는 해방. 7살 아이지만 직계 후손을 보낼 정도로 절박하다는 표현이고, 이 이상으로 정성을 표현할 방법은 친정(親征)뿐이다. 만약 보잘것없는 패물이나 병사를 보낸 거였다면 돌려보내는 의미가 뒤집혀 '넌 기대를 배신했다.'였겠지만 말이다.

둘째, 성당에 맡기는 것. 이 또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일단 종교 집단에 빚지는 것도 있지만, 그 아이가 커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게 될지가 불안요소로 작용한다. 변경백에게 우호적이라면 모를까, 버렸다고 생각하면 꽝으로 안 끝난다. 애초에 모집령의 이유는 토벌이었다. 토벌을 위해 모집한 인력을 성당에 맡기면 뒤에서 수군거릴 명분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셋째, 덕을 내세울 증표로서 기르는 일. 이게 그나마 가장 무난했다. 인데브 남작에게 욕을 독박씌우고, 트렐라드 변경백 본인은 인자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굳이?


"······."


멍청함. 그것이 유일한 족쇄.


"종자가 필요한 기사가 있던가?"

"없습니다. 있더라도 사흘이면 찾아내 종자로 들였지요."

"···제자가 필요한 대장장이는?"

"없습니다. 최근 군사활동이 잦아 일감이 밀린지 오래라 제자나 일꾼은 모두 충분히 들였을 겁니다."

"하, 진짜."


변경백은 체면을 벗어던지고 탄식했다. 이토록 답이 안 나오는 물건은 오래간만이었다. 차라리 장물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엮인 증표였다면 동참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라?


"내 자식에게 이런 상황에 대한 교훈을 남겨주고 싶군. 후대에 두고두고 내 이름이 걸린 판단이 언급될 테니까!"

"고정하십시오, 주군.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집사장은 변경백의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욕을 봤다. 많이 봤다.

트렐라드 변경백은 속은 좁을지언정 도량이 좁지는 않았기에, 집사장의 애원에 차차 진정했다. 아무리 잠들기 직전에 이런 개대가리 놀의 광대 짓 같은 보고를 들었어도 체통은 지켜야 했다. 그리고 겨우 7살 아이에게 괘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편없는 조처를 내리지 않을 인내심도 있었다.


"인데브 남작. 두고 보자고···."


영주성의 밤과 함께 변경백의 주름도 깊어졌다.


* * * *


다음날 낮. 정오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부족한 시간.


"어린아이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많이 힘들었을 테지."

"···?"


트렐라드 변경백은 늦게 잠이 들어서 약간 피곤했다.

펠릭스는 고위귀족이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가엾게 여기는 모습을 색다르게 느꼈다. 남작은 머저리고, 자작은 허풍쟁이고, 백작은 어수룩하고, 후작은 띨띨하고, 공작은 그럴듯한 허수아비가 아니었단 말인가!


"앞으로는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적당히, 방과 하인을 배정해주마. 고향처럼은 아니더라도,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으응? 뭐라고?"

"백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를 표한다. 당연한 이치이고 순리였다.

트렐라드 변경백은 소년이 변경백이 아닌 백작이라고 말한 것 정도에 꼬투리를 잡지 않았고, 둔재라 하더라도 교양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점에 더 주목했다.


'그래, 멍청해도 착하면 됐지. 다만 가문을 이끌 재목이 아니긴 하군.'


변경백은 펠릭스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둔재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것이 심성이 나쁘다는 의미로 직결하진 않는다. 인데브 남작의 평가가 능력 위주라고 생각한다면 둔재라고 퍼져도 이상할 게 없다.

이 경우 '오죽했으면 둔재라고 불릴까.'라는 순박함이 문제로 떠오른다. 선의를 위해 실익을 동원하는 정도만 아니면 트렐라드 변경백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먹여 살리게 된 건 그였으니까.


'어휴, 모르겠다. 내 자식도 아니고. 밥보 하나 더 늘어난다고 기울어질 가세도 아니니. 건강하게만 커라. 건강해져서, 인데브 남작 괴롭히는 데에 좀 쓰게! 계승권 분쟁이라던가, 상속 문제라던가!'


트렐라드 변경백은 자포자기에 가깝게 넋두리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마침 일손이 남는 가정교사가 있으니 네게 시동과 함께 붙여주마. 교양을 익히며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격을 익히도록 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거짓이다. 손이 남는 가정교사는 없다. 어디까지나 소년이 부담을 가지지 않게끔 여유를 부린 것에 불과했다. 실상은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도시 내 명사 중 한 명에게 가정교사를 맡아달라고 서신을 작성했고, 집사와 상의해서 보호에 적절한 시동을 골라냈다.

트렐라드 변경백은 가볍게 손짓했고, 밖에서 대기하던 두 명이 병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온다.


"저분은 텔로드에서 저명한 마법사시다. '텔로드의 함셰르'라고도 불리시지. 그리고 저 아이는 네가 거느릴 시동이고, 만일의 상황에 보호해줄 보디가드이니 떼놓지 말거라."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란소스 경. 앞으로 란소스 경께서 수학하도록 도와드릴 함셰르입니다."

"도련님을 곁에서 보필할 네리카입니다."


환갑은 되어 보이는 노인 한 명과 아직 어린이와 소녀 사이 그 어딘가 연령대의 어린 소녀가 한 명.

펠릭스는 트렐라브 변경백에게 묵례하며 감사를 표했고, 네리카는 펠릭스와 함셰르를 데리고 백작관 밖 별채로 향했다. 손님이 머무르는 영주성 내 저택이었고, 펠릭스는 방을 하나를 배정받았다. 가정교사는 출퇴근이고, 네리카는 곁에서 보좌하므로 옆의 작은 방에서 지낸다.


"듣자하니 먼 길을 이동하시느라 피곤하실듯한데, 괜찮으신지?"

"예, 성당에서 푹 쉬어서 괜찮습니다."

"허허, 건강하시군요. 젊음은 좋지요."


함셰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데브와 탈로드의 거리는 말을 타고도 열흘은 걸리는 거리다. 성직자의 기력 보조가 있으면 보름 정도면 주파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가 휴일도 없이 보름 내내 걷는 건 고행이나 다름없는 일. 하루 쉬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젊다 못해 어린아이는 체력회복 속도가 높다. 본인이 피곤한지 모르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네리카라고 했나?"

"예, 어르신."

"공부를 시작할 터이니, 점토판이나 밀랍판을 가져오도록 하여라. 마실 거리도."

"예, 알겠습니다."


변경백 앞에서 간단한 자기소개는 하였으나, 이런 관계에서는 정식으로 하는 긴 소개가 필요했다.

네리카가 필기도구와 음료를 가지러 밖으로 나간 사이, 함셰르가 목을 가다듬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는 텔로드의 5서클 마법사입니다. 크락스의 렌바르드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녹사프 학파에서 수학했습니다. 텔로드에 정착한 지는 17년이 되었군요."

'뭐야, 인맥 자랑인가? 아니지. 이 시대의 이력서구나. 가정교사 자격으로 말하는 거니까 학연 늘여놓는 거네.'


대뜸 본인의 마법 경지와 어디에서 교육받았다는 걸 말하니 펠릭스는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자기 자랑을 하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들어보니 한 번은 들어봐야 할 내용이었다.

지구로 본다면 '난 어느 대학교 교수 아래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했다.'와 같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저는 펠릭스 란소스 오브 인데브입니다. 올해로 7살이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일곱이라, 앞날이 창창하군요. 어제 성당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얀 기둥과 벽, 그리고 천장과 벽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무슨···.'


펠릭스는 함셰르의 뜬금없는 말에 곤혹스러웠지만, 솔직하게 말해보기로 했다.


"텔로드 성당의 명화는 오래되었지요. 700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마법으로 해결했거나, 덧칠했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덧칠이라, 어려운 단어를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지속적인 관리를 하느라 도련님께서 어제 보신 그림은 700년 전 그림과 다릅니다. 그럼 그 그림은 과연 700년 전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와 생각이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을까요?"


함셰르는 지구에서 '테세우스의 배'의 논리와 유사한 질문을 던졌다. 700년 전 화가가 종교화를 그릴 때의 의도와 생각이 온존되고 있느냐는 점.

지구에서도 명쾌히 해결되지 못한 난제였는데, 함셰르는 펠릭스의 대답을 기다리려는 듯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다. 맞은편에 앉은 펠릭스는 솔찬히 고민한다. 이 문제에 정답은 없다. 그럼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신을 향한 경외를 품는다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대답은 좋으나 의도에서 빗나갔군요. 명화의 연속성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화가의 의도가 전해지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아, 대체 뭔데?'


테세우스의 배가 의미하는 바는 물질의 연속성이고, 동시에 정체성의 상태다. 펠릭스의 대답은 '그걸 종교화 대작이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한, 그것은 처음 그린 사람의 의도대로 종교화가 맞다.'였는데, 함셰르는 다른 부분을 짚었다.

700년 전 화가는 종교화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남기려 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복원과 보수는 오래 남기길 원합니다. 제가 그림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색바랜 부분 위에 색을 입히면 주위 색과 달라집니다. 정교한 그림일수록 그렇고, 큰 그림일수록 작은 부위의 결점은 크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복수는 있을 수 없고, 화가의 의도는 보수가 많아질수록 뒤틀린다고 생각합니다."

'귀족이라고는 들었는데, 일곱 살 맞나?'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펠릭스의 말을 들은 함셰르는 당혹스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교육의 근본은 생각의 활성화에 있다. 논제를 두고 '왜?'를 계속 물으며 아이가 생각하는 시야와 방법을 넓히는 것이 기본.

대부분의 아이는 생각을 포기한다.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따라서 귀족의 가정교사는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때려 박는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지내며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도 주 역할 중 하나다. 무작정 똑똑하다고 귀족의 가정교사를 맡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펠릭스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긴커녕 논거와 추리를 꺼내 논증했다. 교육과정 몇 개는 건너뛴 수준이 아니었다.


'말년에 재밌는 아이를 맡게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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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5 8 12쪽
»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5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7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3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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