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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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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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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서임식 (3)

DUMMY

펠릭스는 자기 생각을 크게 수정했다.


'이 미친 신 같으니라고! 양판소의 범주를 대체 얼마나 넓게 설정한 거야!'


골렘과 비공정의 시초는 정확히 말해서 양판소가 아니었다. 애초에 골렘은 유대인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공정은 일본 RPG 매체에서 등장했다. 두 개념 모두 다른 방식이었으되, 한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양판소의 소재 중 하나로 먹혔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기갑물이고 항공물이고 양판소의 기둥 중 하나였던 대여점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점에 있다. 마치 게임계의 아타리 쇼크처럼 대여점의 몰락은 질 낮은 양판소가 설 자리를 깡그리 날려버렸다. 골렘 기갑물과 비공정 항공물은 이런 시대적 몰락 속에 사라졌다. 그 뒤는 웹소설 시대가 열렸고, 출퇴근이나 휴식 시간에 짧게 즐기는 펄프 픽션 성격으로 돌아갔다.

펄프 픽션은 짧은 문구에 강한 몰입감이 필요했으므로 일상에서 접하기 쉬운 소재가 주로 쓰인다. 헌터 장르, 아포칼립스 장르, 재벌 장르 등. 접근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펠릭스는 처음에 말할 때 판타지라고 선을 그었다.


'게임 판타지 요소도 들어있는 거 아냐?'


문득 생각이 들어 펠릭스는 아주 작게 중얼거려보았다.


"상태창. 인벤토리. 스킬창."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후유. 다행이다. 겜판은 안 섞였어.'


진짜로 눈앞에 스테이터스 알림창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을 테지만, 무척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안심할 뿐이지, 골렘과 비공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궁 입구를 들어서면 보이는 건물 뒤에 가려져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실전배치다. 은폐와 엄폐를 동시에 하는, 그야말로 최고의 전력.

왕궁이 뚫릴 일은 없을 테니 예식용으로도 볼 수 있을 테지만, 그걸 넘어가더라도 펠릭스에게 다가오는 충격은 절대 작지 않았다. 인데브와 트렐라드에선 아예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아주 당연하기 때문에 말 안 한 걸 수도 있고, 왕의 전유물일 수도 있었다. 펠릭스로선 되도록 후자인 편이 좋았다. 그래야 멘탈 관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가 서임식까지 지내실 곳이옵니다. 저는 식사를 가져오겠사오니, 불편한 게 있으시면 대기하는 시종에게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러지."


방이 아니라 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넓은 공간.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언급되던 화려하고 부드러운 곡선형 로코코 양식 장식으로 가득했다. 건축물은 위풍당당한 바로크, 내부 인테리어는 세세한 로코코.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미관이었다.

펠릭스는 문가에 가만히 서서 안쪽을 훑어보았다. 폭과 높이가 긴 창문, 유려한 커튼, 백색 침대, 광질한 목제 가구, 바닥에 깔린 도자기 타일, 천장에 붙인 목재까지. 하나같이 익숙했다.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제조법으로 만든 물건이라 눈에 밟히다 못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기계식 정밀함과 전근대 사회의 장인 손재주가 엇비슷하다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약간의 기술을 익힌 일반인이 옛날의 장인이 만드는 최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을, 펠릭스는 몰랐다. 그러니 당연히 오슬레아 대왕국의 정상급 장인이 섬세한 세공으로 하나하나 만들어낸 예술품 수준의 가구를 보고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이었다면 인터넷 주문으로 손쉽게 접할 수 있으니까 더욱.


'끄으응···.'


두통으로 얼굴이 구겨졌다. 지끈거리는 감각은 마나를 풀어 회복할 수도 없었다. 물리적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펠릭스가 불편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방안에서 대기하는 하인과 병사는 표정이 어두워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눈앞의 소년은 소드마스터고, 기분이 상하면 바로 목이 날아갈 처지였다.


"이봐."

"네, 넷!"

"식사를 가져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해결하나?"

"그렇사옵니다. 왕궁에는 식당이 없어 그때그때 시장하신 분의 방에 식사를 전달하옵니다."

"어째서 없는 거지?"

"정기적으로 식사를 위해 모일 경우, 위험해질 소지가 있는지라 폐쇄하였사옵니다."

"아, 그런 건가."


테러의 기본은 긴장이 풀어지는 시간에 다수를 효과적으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지구에서는 테러라고 해봐야 폭탄 정도지만, 이곳은 달랐다. 마법이 있으니 맨몸으로 들어가도 대형사고를 일으키기 쉬웠다. 더군다나 식사 시간은 사람 대부분이 긴장이 풀린다.

본의 아니게 호텔의 룸서비스가 되어버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긍할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텔로드에서 지낼 때 식당을 본 적이 없어 그럭저럭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리고 저건?"

"요강이옵니다."

"흠."


방구석에 놓인 상자가 하나. 의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했고, 탁자라고 하기에는 낮았다. 그래서 뭔가 했더니 요강. 가까이 다가가니 변기 커버처럼 들어 올릴 뚜껑이 있었고, 젖혀보니 아래에 금속제 통이 들어있었다.


"흠."


헛기침만 나오는 상황. 양판소 세계관에 화장실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반반이었다. 텔로드에 없기도 했지만, 상수도는 고대 로마를 제외하면 1582년에나 영국 런던에 건설됐다. 1761년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펌프로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1571년에 레판토 해전이 있었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러므로 상수도의 꽃인 화장실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배수시설 정도는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왕궁에도 요강을 쓴다.


'밤에 밖에 나가면 암살자를 마주칠 수 있으니 나오지 않도록 이런 걸 배치한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한국에선 호랑이가 물어가니까 방에 요강을 두고 밖에 나갈 일을 줄였다. 그러나 큰 기대는 되지 않았는데, 텔로드도 푸세식 변소였다. 마법을 활용한 편리한 인프라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소망에 불과했다.

지금은 익숙해졌으므로 근대적 화장실이 없어도 괜찮았지만, 기대가 날아간 건 아쉬웠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뚜껑을 내리고 탁자로 다가갔다. 테라스나 베란다가 없는 통짜 방이었고, 탁자는 식탁을 겸했다. 엘룬은 뒤에 하인 세 명을 끌고 나타났는데, 하나같이 양손에 큰 쟁반을 들고 있었다. 엘룬은 쟁반 위를 덮은 뚜껑을 열어 음식을 차근차근 하나씩 탁자에 내려놓았다.

따뜻한 빵, 버터와 나이프, 치즈 얹은 크래커, 잘 구운 고기, 진한 스튜, 거위 바비큐, 과일, 암염 덩어리들. 그리고 와인 한 병.


"많군."

"식사를 마치시면 말씀해 주시옵소서."

"혼자 먹는 게 이거라고?"

"아···, 기사님께선 대식가이신지라 이것이 표준이옵니다. 다음부터는 양을 줄이겠사옵니다."

"이게 표준이라고?"


대식가라는 정도로 보기 어려웠다. 아무리 하루에 2끼 먹는 게 표준이라지만 너무 많았다. 팔뚝만 한 빵이 3덩이, 주먹만 한 버터 한 덩어리, 치즈 얹은 크래커는 손바닥처럼 큼직한 게 10개, 스테이크는 양 손바닥 크기에, 스튜가 담긴 그릇은 양은냄비 정도로 크고 깊다. 거위 바비큐는 축구공보다 크고, 과일은 사과 하나에 포도 둘이다. 간을 맞추는 소금이야 넘어가더라도, 지나치게 많았다.

기사의 평균 식단이 이 한 끼.


'돌겠군. 무슨 미국 수영선수가 하루에 1만 칼로리를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온종일 운동하는 사람 만큼 먹는다지만, 눈앞 식단은 단독으로 2만 칼로리는 나올 것 같았다.

펠릭스는 일단 자리에 앉아서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스튜로 입가심하고, 고소한 빵을 먹고, 바삭한 크래커로 식감을 느끼고, 거위 살점을 쭉 찢어 기름기를 맛보았다. 맛이 없다면 거짓말이고, 지금까지 먹은 거라고는 빵과 빵에 빵이라서 이런 호화로운 식단을 만끽하는 건 즐거웠다.

한 절반 정도 먹을 때까지만 말이다.


"끄윽."

"······."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육체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소화능력을 촉진한들 위가 커질 수 있는 부피는 몸 이상으로 커질 수 없었다. 펠릭스는 12살 몸으로 먹을 수 있는 한계까지 먹어봤다. 1년 동안 셀튼 아래에서 훈련하며 마나로 신체를 자극해 성장을 키우긴 했지만, 그래 봐야 애 수준을 넘지 못했다.

한마디로 꼼수의 패배였다. 엄청난 식사량을 감당하며 뼈를 깎는 운동을 해온 기사의 특성은 강함뿐만이 아니었다.


"다 드셨으면 이만 물리고자 하온데, 허락해 주시겠사옵니까?"

"그, 그래···."


스스로 미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먹어치웠다. 멀건 오트밀이나 맥주를 먹다가 기름지고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중간에 욕심이 생겼다. 다른 건 몰라도 거위 통구이만큼은 중간에 포기했어야 배 터질 걱정은 안 했을 것이다.

펠릭스는 의자에 앉아 차근차근 그릇을 치우는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손놀림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발걸음 역시 차분했다. 모시는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존재한다는 기척 자체를 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여기는 자들의 몸놀림에 펠릭스는 놀랐다. 텔로드에서 봤던 하인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지금까지 인지하지 않았으나, 본인을 극도로 낮추는 어법도 거슬렸다. 사극에서나 들을 만한 대화법이었으니까.


"서임식은 얼마나 걸리지?"

"예정된 날짜는 닷새 뒤이옵니다."

"그때까지 내가 익혀야 할 건?"

"서임 받는 사작을 대표하는 소드마스터로서 국왕 폐하 앞에서 보일 예법이옵니다."

"내가 대표라고?"

"예, 그렇사옵니다."


엘룬은 차근차근 서임식에 관해 설명했다. 국왕이 직접 나서는 서임식은 '정기 서임'과 '기념 서임'으로 나뉘었다. 정기 서임은 매년 신년에 진행한다. 여기에서 기사 혹은 마법사로서 서임을 받아 '사작(仕爵)'이라는 작위를 받는다.


"···사작?"

"예, 기사(Knight)와 마법사(Magician)의 통칭이옵니다. 과거에는 기사작과 마법사작으로 구분하여 쓰임을 달리하였으나, 카팔라 대제의 통합작위 선포 이후 한데 묶이게 되었사옵니다."


고증과 판타지 설정의 괴리가 중 하나가 마법사의 귀족화였다. 대부분의 양판소에서 마법사는 국가 아래에 소속된 직책으로 보지 않았다. 이건 정통 판타지에서 마법사라는 존재가 '현자' 혹은 '조언자'에 해당하는 비 귀족적 존재인 까닭이다. 이게 아니라면 '귀족인 마법사'이거나 '마법사인 귀족'으로, 기사작 따위가 아니라 아예 남작 이상으로 설정해 충돌을 회피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둘을 같이 취급하는 사작이란 별개의 작위를 제시했다. 마법사도 현실의 기사처럼 신분제 아래에 끼워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호오."


사작이라는 작위에 무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있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의 자식은 모두 단승작위로서 사작을 받는다. 평민과 다른 계급이라는 증명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즉 15살이 되는 귀족 가문 자식은 신년에 서임식을 할 때 사작이 된다.

반면 지금 펠릭스가 나서는 건 비정기인 '기념 서임식'이다. 이때는 그저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서임식이 아니라 실력 혹은 공적을 세워 귀족으로 발돋움하는 행사다. 신년을 맞이하여 열리는 정기 서임식과 달리 서임 받는 자들의 수준은 전혀 달랐다.


"거기의 대표가 나라고?"

"그러하옵니다. 란소스님의 소드마스터 달성을 기념하는 서임이온지라."

'서임만 받고 튈 생각이었는데. 눈에 안 띄는 건 기대할 수 없겠다.'


이런 행사에서 주인공은 묻힐 수 없고, 주위에서 무관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높이 10m에 이르는 골렘이 있으니 소드마스터가 급하진 않겠지만, 굴러들어온 10대 초반의 소드마스터는 야심가를 즉각 반응하게 하는 인재다.

그저 단순하게 대단한 경지에 불과했다면 배짱을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골렘과 비공정이 존재한다면, 소드마스터는 귀중한 전략자원이나 다름없다.


'일단 서임부터 끝내고 결정해야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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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임식 (2) 20.04.18 240 5 12쪽
12 서임식 (1) 20.04.18 244 6 14쪽
11 마나 블레이드 20.04.16 252 5 12쪽
10 신체 단련 (2) 20.04.15 248 5 12쪽
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4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6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6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4 6 12쪽
2 각성 20.04.08 432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2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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