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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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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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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DUMMY

펠릭스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당연히 베로니크였다. 부모는 사제의 축복이나 신의 영향으로 건강해졌다고 가볍게 여겼지만, 친밀했던 베로니크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변화를 직감적으로 느꼈다.

주위의 멸시를 못 이겨 자신의 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던 아이였다. 건강해졌다고 해도 마음마저 바뀔 리 없으니 활동영역은 여전히 전과 비슷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의 펠릭스는 부모가, 가신이, 하인이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본질적인 변화가 없으면 나타나기 힘든 변화였다.

베로니크는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도 틈틈이 펠릭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다녔다. 하지만 둘째는 신경 쓰지 말라며 근신을 명령했고, 하인들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다.


"뭔가 조치는 취해야 할 것 같은데요."

"동감이야. 전처럼 가만히 방에 박혀있으면 손도 안 가고 좋았을 것을."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은 인데브 남작은 혀를 찼다.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시키기에는 다소 어린 데다가 둘째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킬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카팔라 제국의 정책변화로 수많은 소국이 몸살을 앓고 있어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으느라 안달이었다. 무거운 세금을 피해 도망친 유민(流民) 정도면 조치할 수 있지만, 도적 떼로 변한 자들도 적지 않아 군 유지비에 비상이 걸린 지 오래였다.

어지간한 둔재라 하더라도 후계자가 변을 당할 때를 대비한 예비로서 준비작업 자체는 치르는 게 보편적인 승계과정이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에서 물 새듯 흘러내리는 줄어드는 재정 상태와 심각할 정도의 멍청함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여유가 있었으면 명석한 민며느리를 들여볼 수나 있고, 범재 정도만 되었어도 돈을 빌려 소양 정도는 가르칠 의향이 있었다. 둘 다 아니라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직도 답변이 없나?"

"네. 주위에서 유난히 데릴사위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네요. 있더라도···, 그 애를 데려갈 가문은 없겠죠."

"끄응."


펠릭스가 태어난 세대에 남자아이가 귀한 때도 아니었다. 적어도 근방에서는 말이다. 외척이나 경영에 방해되는 배우자를 원치 않는 여자가 어수룩한 남자를 일단 앉혀놓고 실권을 쥐는 경우도 많다. 당장 베로니크의 배우자를 그런 자를 골라야 최선이다.

그런데 어수룩한 정도가 아니라 멍청한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실권이 중요하다고 해도 위엄은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최소자격이라는 게 있는데, 멍청함은 논외였다. 큰 실수로 가문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소탐대실이다.


"밥벌레 신세군."

"안타깝지만···."


평화로운 시대라면 멍청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하필 카팔라 제국의 제위 교체기라는 게 문제였다. 황위를 놓고 경쟁하는 자들의 변덕으로 소국의 정치가 격변하는 난세에 멍청함은 큰 문제다.

인데브 남작은 맥주잔을 기울였다. 수질이 좋지 않아 식수로 맥주를 쓰는 자신의 영지에서 거액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하다. 작황도 평균이고, 영지에 순도 높은 광맥을 캐는 광산이나 질 좋은 나무를 벌채하는 벌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류의 일부라도 오가는 상업중심지도 없었다. 그야말로 변방의 촌구석. 이런 장소에 주신 샤메드를 섬기는 사제단이 찾아온 건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성당은커녕 가정신을 섬기는 수도원 하나뿐인 영지에 주신의 사제단이라니?

뭔가 중요한 일인가 싶어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그 기대는 나락으로 고꾸라졌다. 둔재에 불과한 둘째에게 볼일이 있었고, 겨우 3일만 머물다가 떠났다. 그 어떤 소득도 없이 끝났다.


"후우."


본인의 한심함에 한숨을 흘린 인데브 남작. 더 나아질 구석이 없다면 나빠질 구석을 일찍 잘라내는 편이 옳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베로니크가 둘째에게 의존할 조짐이 보인다는 건 진즉에 눈치챘다. 안식처는 필요하지만, 가족끼리 의존하는 건 잘못된 길의 징조로 진화하기 쉽다.

첫째에게서 둘째를 떼어놓는 게 옳지만, 어떤 방법으로 보낼지 쉽게 결단하기 어려웠다. 친족살해는 큰 죄악이므로 일찍이 논외, 데릴사위로 보내는 건 받아줄 가문이 없어 논외, 자식이 없는 가문에 양자로 보내는 건 둔재를 보낼 수 없으니 논외. 진퇴양난이다.


"수도원으로 보내는 방법은?"

"기부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맨입으로 보낼 수 없으니까. 당장 급여가 밀린 기사 봉급만 200골드야. 이번 달에 세금이 예정대로 들어오면 해결되겠지만···."

"추가지출이 없을 때의··· 이야기겠죠."


남작과 부인의 고심이 깊어지는 것도 모르고 펠릭스는 성안에서 종횡무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세계관인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둔재라 하더라도 일단 남작의 자식이라 병사가 붙었다. 통행은 당연히 공식적으로 허가되지 않았다. 강제로 붙잡아 방에 가두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건 남작이 드러낸 최후의 양심이다.


'엘프랑 드워프가 사람이랑 같이 지내잖아? 이게 뭐야?'


펠릭스가 길거리를, 정확히는 대로변을 거닐며 본 풍경은 놀라움 투성이였다.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명백한 엘프와 드워프를 실물로 보게 된 것도 있지만, 그들이 도시에서 산다는 것 때문이었다. 고고한 엘프의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던가, 우직한 드워프의 거친 태도는 없었다. 사람과 똑같이 지내고, 평범하게 대화했다.

판타지는 판타지였는데, 양산형인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건축양식은 19세기 유럽에서 볼만한 반듯한 건축물이고, 유리는 보편적으로 보급되지는 않았는지 유려한 건축물에만 있었다.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방증이다. 벽돌, 석회 반죽, 잘 다듬어진 목재, 마차 등등.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를 중점적으로 찾아다녔다. 호위를 맡은 두 병사가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말을 걸고 다니지 못한 게 펠릭스의 한이었다.


'대체 뭐임?'


엘프와 드워프라고 속으로 부르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도 통용되는지는 몰라 병사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귀 큰 사람은 뭐야?"

"엘프입니다."

"저 키 작은 사람은?"

"드워프라고 부릅니다. 휴먼과 달리 손재주가 뛰어납니다."

"어···."

'똑같잖아!'


그런 걸 주문했으니 당연히 똑같을 수밖에 없다.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와 땅속의 종족이라는 드워프가 도시에서 배회하고 있으니 적응 안 되지만, 정작 그런 사람은 펠릭스뿐.

펠릭스를 호위하는 기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호기심이 왕성한 건 좋지만, 주군의 자식이니 단어 선별이 어려웠다. 괜히 부연설명을 붙였다가 주군의 귀에 들어가면 경을 칠 수도 있다.


"성안에는 없던데, 밖에서는 흔해?"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만, 오슬레아 대왕국에서는 드물지 않습니다."

"왜?"

"3천 년 전에 마왕을 토벌한 친우인 까닭입니다. 마왕의 앞잡이였던 오크, 중립을 지키며 최후의 승자를 노린 수인과는 달리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들이지요."

"아아···."


호위병사의 설명에 펠릭스는 상황을 이해했다. 대략 3000년 전에 마왕이 출현했고, 그 마왕을 토벌한 종족 셋이 대세를 차지했다는 이야기였다. 보통은 인간의 혐오스러운 성정이나 모략으로 다른 종족을 밀어내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는 그런 거 없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한 거였다.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휴먼. 세 종족은 서로를 지적 생명체이자 사회적 존중을 성립했고, 그 외 종족을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마계에서 이끌고 나온 몬스터가 세상을 어지럽히는데,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을 배신하는 건 어리석다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크도 있고, 수인족도 있다. 그리고 마족과 그 밖의 몬스터도 잔뜩 있다.


'휴, 양판소 맞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 은근히 소망하던 세계관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만족이었다.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인류가 나타내는 영역이 휴먼에 엘프와 드워프를 더했다고 생각하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도시 순회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며, 펠릭스는 병사에게 물었다.


"마왕을 무찌른 사람들은 얼마나 강했어?"

"전설 속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마력만으로 검을 만들었다거나 운석을 소환했다고 하지요.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마족의 눈을 화살로 명중시켰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오오···."


마나의 존재도, 마법의 규모도 알아낸다. 정말 가벼운 문답이었지만 그 대답으로 전설 속에 나올 법한 마법의 규모를 알아냈다. 양판소에서 9서클 마법으로 곧잘 등장하는 메테오가 전설 수준이라면 적어도 6서클 정도는 어렵더라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펠릭스는 병사에게서 계속 정보를 끌어냈다. 호위병사는 그저 주워들은 전설을 읊는 정도에 불과했고, 전혀 어려울 게 없는 대답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막장 직전의 양판소이긴 한데···. 게임으로 할 때랑 직접 그 세계에서 사는 건 체감이 다르구나.'


당연한 순리지만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엄연히 다른 법. 펠릭스는 혀를 내두르며 세계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차츰 바꿨다. 세계관 바깥에서 볼 때는 설정에 불과하지만, 안에서 겪을 땐 앞뒤가 있었다. 원인 없는 결과 없고,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이 파고들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여전히 가볍게 여긴다면 설정집 탐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펠릭스는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더 깊이 파고드는 걸 멈춘다.


'신이 괜히 경고한 게 아니었구나.'


전생자가 아니라 표류자가 될 거라는 경고가 떠올랐다. 현실이 아니라 설정이라고 인식할수록 괴리감이 커졌고, 위화감이 증폭됐다. 마치 세계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상식을 거부하면서 생기는 괴리감을 비료 삼아 싹트는 건 다름 아닌 광기. 자칫 한눈팔면 정신을 잡아먹을 괴물이 바로 옆에서 웃고 있었다. 광대같이 시선이 향하도록, 신경이 쏠리도록, 주목하도록.


'이게 그 SAN 체크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근데 그건 보통 양판소가 아닌데?'


펠릭스는 기합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깊게 빠지지 않았고, 아직 미래가 창창하다는 희망이 광기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스스로 인지하고 있듯 한 번 인식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젠장! 앞으로 계속 이런 걸 달고 살아야 하는 건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머리가 좀 아파서."


헤벨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애가 갑자기 인상을 팍 쓰며 말이 없어지니 걱정된 기사가 상태를 물었다. 펠릭스는 괜찮다고 대답은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 자신을 과시하며 똑바로 바라보도록 부풀리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쪽 세계관이랑 딱히 다를 것도 없잖아? 이 우주의 창조자가 누구인지, 어째서 이 우주를 만들었는지까지 아네? 그리고 이 세상의 진실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자 세상의 주인공이었으며 결말이다. 어느 의미로는 이 세계의 존재의의가 바로 자신이었다.


"우욱."

"도련님? 도련님!"


급격히 치밀어오른 구토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침에 먹은 오트밀과 우유를 게워냈다. 펠릭스의 본능은 자기보호를 위해 기절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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