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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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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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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DUMMY

2년 뒤, 인데브 영지.

카팔라 제국의 정쟁(政爭)으로 유민의 수는 더욱 늘어났고, 도적 무리의 활동도 정비례했다. 베로니크는 열다섯 살을 맞이하여 성인식을 올렸고, 군사 경험을 쌓기 위해 토벌대를 지휘하며 도적을 내쫓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곱 살이 된 펠릭스는 작년처럼 아무도 축하해주는 사람 없이 방에서 생일을 보냈다.


'따지고 보면 태어난 쪽도, 낳은 쪽도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건데 말이지···.'


펠릭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까지나 기억이었던 탓에 희미해지는 것도 여럿 있었다. 펠릭스로서 살다가 '전생엔 그랬지'라는 식으로 뭔가를 떠올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2년 전에 세운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성 바깥은 아니더라도 연무장 정도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필 구토하며 쓰러졌다는 소식이 인데브 남작의 귀에 여과 없이 들어가서 외출금지령이 떨어졌다. 사제에게 축복을 받아 건강해졌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이 해석이 전생했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잠깐 외출한 것만으로 혼절한 건 사실이라 펠릭스는 외출금지에 순응하며 성안에서 지내기로 했다. 정말 심심하고 따분했지만, 마나를 다루는 훈련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고뭉치로 찍혀서 하인도 밥 가지러 올 때를 제외하면 안 오고. 기껏해야 세안용 물 주전자와 요강 비우는 것조차 정기적이 아니라 별도로 요청해야 하니 사람이 올 일도 없어.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 아이에게 할 짓은 아니네!'


식사는 묽은 오트밀과 삶은 달걀 하나고, 그나마도 하루에 두 끼였다. 한창 성장해야 할 나잇대의 아이에겐 턱없이 부족하다. 성장판 자극을 위해 방 안에서 스트레칭이나 뜀박질을 하고는 있으나, 아이의 활력은 어른에 비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억지로 몸을 움직이던 펠릭스가 탈력감에 두통을 앓을 정도.

사용하는 열량에 비해 섭취하는 열량이 적으니 벌어지는 해프닝이었다.


'뚫고 나갈까? 나가려면 진작 나갈 수 있긴 한데.'


하루도 빠짐없이 마나를 운용한 덕분에 나름 염력은 사용할 수 있게 된 지 오래. 5m 정도 떨어지면 현격히 힘이 떨어져 염력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 되지만, 적어도 5m 안에서는 효과적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하여 자물쇠를 몇 번이고 풀었다가 잠그기를 반복했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연습으로 쏠쏠했지만, 지금은 너무 시시했다. 자물쇠 따기가 쉬워진 게 아니라 자물쇠 1개로만 연습해서 문제.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듯 마나를 체내에 쌓고는 있지만, 비교 대상이 없으니 자신이 과연 잘 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어서 더욱 난해했다. 작년에는 작정하고 마나를 갈무리하지 않고 흩뿌려보기도 했는데,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시골 영지라서 마법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건 마나를 사방팔방에 흩뿌린 지 열흘째가 되어서였다.


'나도 열다섯이 되면 성인식을 치를 수 있을까? 그럼 아직 8년이나 남았는데···. 너무 멀어!'


꽃 같은 양판소의 시작은 크게 세 가지다. 기습받아 전멸 직전인 고귀한 신분의 누군가를 구출해주거나, 몬스터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해주거나, 용병단에 들어가는 전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목적의식의 결여로 인한 수동적인 진행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뒤집어보자면, 삶이란 과거가 있어야 하는데 대뜸 다른 세계에 떨어진 상황에서 뭔가를 주도적으로 하고자 나설 순 없다. 비슷한 상황으로는 갑작스러운 보직 이동이나 부서변경이 있다.

펠릭스에겐 그런 과거가 만들어질 틈이 없었다. 뭐라도 하면서 지내야 하는데 그조차 없으니 누군가가 내밀어 주는 외부의 손길이 필요했다.


'수동적인 뭔가를 바라게 되다니. 이게 아닌데.'


주인공이란 늘 본인이 주도적이어야 한다. 주위를 선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본인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면서도 해결할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못 참을 건 아닌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히니 답답할 따름.

펠릭스는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뭐라고 부르는지 모호했지만, 오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걸 손가락에 머금어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봉 휘두르듯이 쓱쓱 흔들어봤다. 오색찬란한 빛의 산란이 눈을 어지럽힌다.


'마나라고 하는 게 빛까지 깨트리는 걸 봐선 분명 실존하는 건 맞는 것 같긴 한데.'


손가락에 두른 것을 과연 오러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일단 오러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나가봐서야 알 수 있을 것이고.

펠릭스는 오러를 거두고 양손으로 마나를 움직여보았다. 두 손바닥 사이 허공에서 발화하는 마나. 테니스공과 축구공 사이 크기를 왔다 갔다 한다. 어디 한 번 터뜨려봐야 위력을 알 수 있을 텐데, 방안에만 있으니 가늠할 수 없었다. 양판소에서 흔하게 언급되는 투명화 마법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단순히 불을 붙이면 되는 파이어볼과 다르게 광학을 다루는 투명화는 독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내 몸 가지고 실험할 수야 없지.'


가장 중요한 건 인체실험이라는 것이다. 임상시험이 자유로운 것도 아닌데 자신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어 자유자재로 시험하는 담력은 없었다. 대비 없는 강행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오러도, 마법도 모두 독학할 수 있는 한계까지 익혔다. 뭔가 능력을 발휘할 상황이 필요하다.

펠릭스가 바라지 마지않던 일은 근신 2년 하고도 3개월이 더 지나서였다.


"모집이라고?"

"강제성은 없어서 의무는 아니지만요."


인데브 남작은 훌륭하게 사태를 정리하며 유랑민 정착과 유도, 도적 토벌과 처형을 수행했지만 그러지 못한 변경영지가 더 많았다. 평소에 쌓아둔 패물과 단결력 덕분에 해낸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데브 남작령의 상위영지인 트렐라드 변경백령의 주인이 모집을 명령했다. 당연히 의무는 없지만, 응하지 않으면 나중에 되돌아올 무언가가 있음을 잘 안다.


'금전은 안 된다. 여유가 없어서 급여도 밀리는 상황이야. 기사와 병사도 안 돼. 교대로 토벌과 휴식을 반복하고 있는 지금조차 피로를 호소하는 탄원이 쌓이고 있어. 그런데 모집이라···.'


현금, 물자, 인력. 셋 모두 여유가 없었다. 하필 후계자 교육 중이라 그 어떤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모집령이 떨어졌다.

인데브 남작은 부인과 논의를 시작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둘째를 보내는 건?"

"당신, 아무리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거요."


배우자의 말에 인데브 남작이 정색하며 거절의 뜻을 내비쳤지만, 배우자의 시선이 한쪽을 향하다가 다시 남작을 향한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남작도 익히 잘 아는 방이었다.


"내가 봤을 땐 심하지 않았는데."

"집착에 가까워요. 2년 동안 만나지 않도록 했더니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친족에게 약해지는 건 도리가 아니거늘. 나 원 참."


외척이면 차라리 이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친족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가주는 가문을 말아먹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둘째를 사지로 내모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로서는 비정한 선택이라도 해야만 한다.


"···쯧. 적어도 전처럼 졸도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건만."


이 말을 끝으로 펠릭스의 처우는 확정되었다.


* * * *


일주일 뒤.


"잘 부탁하리다. 믿고 맡기겠소."

"각하께 심려 끼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트렐라드 변경백령의 수도 텔로드로 향하는 순례객에 펠릭스가 더해졌다. 수도원끼리 정기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행렬이 있고, 거기에 여행객이나 발길이 급하지 않은 용무가 있는 자들이 한데 모여서 움직이는 드문 군집이다. 인데브 남작령은 규모가 작아 모여봐야 30명을 넘기지 않았으나, 대도시일 경우엔 천 명이 넘는 규모까지 불어나기도 한다.

순례를 지휘하는 사제에게 인데브 남작이 '약소한 선물'과 편지를 맡겼다. 이런 행렬은 제대로 된 경비를 받는 무리와 꽁무니를 쫓는 무리로 나뉜다. 인데브 남작은 펠릭스를 중요한 쪽으로, 즉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무리에 넣는 대가를 낸 것이다.


"각하께 에브린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사제는 짧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순례객 군집을 향한다.

남작은 착잡한 표정으로 순례자 무리를 바라보았다. 치안이 어지러워지자 사제와 성기사가 삯을 받는 모습은 작금의 현실이 얼마나 막장인지 보여주었다. 도적도, 몬스터도 없을 때는 대금 없이도 평화롭게 가도를 거닐 수 있었다. 몇 년째 이런 일이 이어지자 당연한 듯이 수금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낸다.


'내가 어렸을 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내 대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지금이라면 취소할 수 있습니다."

"아니, 됐다. 탄생과 죽음은 신께서 점지해주시는 것. 가서 죽는다면 거기까지인 거겠지."


오랫동안 함께해온 호위기사의 말에 남작은 고개를 느리게 내저으며 거절했다. 지금 남작령의 상태에서 내밀 수 있는 최선의 카드는 펠릭스고, 직계 혈통을 보낸다면 불평은 있어도 불만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이 7살이라 할지라도.

7살을 전장에 세우라고 내몬 인데브 남작 당사자의 평가는 떨어지겠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가문과 영지를 건사할 수 있다면 마땅히 긍정해야 한다.


"돌아가자. 아직 일이 덜 끝났으니."

"예, 각하."


인데브 남작이 혈족을 사지로 내모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되 책임감으로 덮느라 애쓰는 사이. 펠릭스는 순례객 사이에서 바깥세상을 향한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 전생의 상식과 충돌하며 미치지 않도록 절제해야 한다는 위기감은 있었지만, 기대감은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누나와 작별인사를 건네지 못한 건 마음에 걸리지만, 자신을 떠나보내려는 남작의 분위기는 그걸 허용할 것 같지 않아 조용히 있었다.


'뭐, 이젠 내 알 바 아니지.'


인데브 남작이 자신을 방에서 꺼내 냅다 보낸 상황부터가 호의적이지 않았다. 눈치가 어지간히 있지 않은 이상 좋은 목적으로 보내는 건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험한 분위기였다.

지난 2년간 손에 오러를 코팅할 수 있는 데다가 주먹구구식으로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덕분에 공포는 전혀 없었다. 근접 전투라면 오러를, 중거리 전투라면 불덩어리를 던지면 끝이다.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여정에 임했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 한들 산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진 덕분이었다.


'손꼽아 기다리긴 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니까 걱정이네. 어떻게 행군하지?'


순례행렬 그 어디에도 마차나 말이 없었다. 깃발을 든 기수 정도만 눈에 보였을 뿐이다. 그럼 몇 날 며칠이고 걸어야 한다는 건데, 7살 아이의 보폭으로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한들 한계가 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니 지칠 때 보조하면 되겠지만, 주위에서 어떻게 볼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에브린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어떻게 행동하겠다 다짐하기도 전에 행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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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4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7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2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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