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9,947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작성
20.04.10 06:00
조회
286
추천
4
글자
11쪽

트렐라드 변경백령 (1)

DUMMY

잔뜩 긴장하며 강행군을 걱정하던 펠릭스였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군대의 천리행군처럼 이를 꽉 물고 장거리를 이동하느라 개고생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그런 건 일절 없었다. 사제가 신의 피로 감소와 체력 증가 축복을 건 덕분인데, RPG 게임에서 힐러가 버프를 걸듯 간단하게 부담을 덜었다.

펠릭스는 편하다는 감정 이전에 신성력이 몸 안에 스며드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 치를 떨었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본인만 꺼림측하게 여기는 건지 펠릭스는 모른다. 확실한 건 신성력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는 점.


'하긴, 신이 있으면 신성력도 있기는 하겠지. 이런 식인가···.'


심장의 마나를 움직여 신성력이 몸에 스며든 것처럼 조금씩 적용해보았다. 신성력은 골수와 신경계에 파고들었다. 안개가 이슬이 되는 것처럼 뼈와 살 속에 힘이 느껴졌다. 그걸 그대로 따라 해보았고, 마나는 신성력에 연료를 공급하듯 끝없이 공급되어 힘이 강화되었다.

기존 효과인 피로 경감과 체력 향상 효과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기분이다.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자버프라니. 이러면 성박휘 같잖아?'


막상 힘이 강해지는 걸 느끼면서 떠올린 건 어느 RPG 게임의 직업이었다. 처음 접한 시점에선 수많은 패치와 너프가 있어 예전만큼의 악명은 없었으나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바퀴벌레가 따로 없는 존재로 인식됐고, 그 어느 게임에서도 이만한 퍼포먼스 이상의 임펙트를 가져온 성기사는 없으니 호칭이 굳어졌다.

펠릭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위의 보폭에 뒤떨어지지 않게 걸으면서 다른 부위에도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신성력이 신체에 파고든 길은 신경계였다. 피부의 말초신경계를 통해서 들어와 온몸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심장도 신경계와 연결되어있고, 척수와 뇌에 직결된 중추신경계다.


'오···, 이렇게 하는 건가.'


손가락에 마나를 머금을 때는 조잡한 무협지 지식을 활용해 혈관으로 이동했었다. 심장의 마나를 피에 실어서 온몸으로 보내고, 원하는 부위에 방출하거나 머금는 방식이었다. 조잡한 마법 역시 그런 식으로 실현했었다.

펠릭스는 신경계가 마나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창작물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하는 부위로 손만 쓰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의 신경계는 곳곳에 퍼져있지만, 손이 가장 촘촘했으니 그만큼 위력조절과 용량을 끌어올리는 데에 용이하다.

공부할 만한 거리가 생긴 덕분에 오래 이동하는 데에 심심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에 감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눈뜨면 밥 먹고 이동하느라 바빠 뭔가 대단한 사실을 접할 기회도 없었던 탓이다.


'이렇게 하니 마나 활용량이 두 배가 되네. 신경과 혈관을 둘 다 쓰니까 반응속도도 다르고. 아, 그런가. 양판소에서 기사나 마법사가 초인이 되는 이유가 신경계가 발달해서 그러는 건가?'


반사신경이라는 게 있다. 반응속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고, 집중력의 효율을 좌우하는 요소다. 익스퍼트 기사가 일종의 초인 예비군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건 신경계가 발달하여 전장 한복판으로 달려나가도 보통 병사가 휘두르는 칼날을 하나하나 분석하거나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유로 발달한 반사신경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양판소에서는 그런 걸 짚지 않고 '그냥 그러하다.' 수준으로 넘어간다. 펠릭스 역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 이유는 찾지 않았다. 그게 편하기도 하고, 판타지 세계관인데 고증과 현실성을 따질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세계관에 직접 사니까 사소한 부분이 눈에 걸리고, 이유를 찾다가 깨닫는 것뿐이다.


"수사님, 텔로드가 보입니다."

"오···. 에브린께서 보우하사 이번 순례가 무사하였군요."


무리보다 훨씬 앞에서 길을 걷던 두 명이 뒤로 돌아와 순례행렬 책임자에게 도시가 보인다고 말했다. 근처에 있기는 했으나, 가깝지 않았던 펠릭스는 그 말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청각 신경에 마나를 불어넣어 주위의 소리를 크게 듣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에브린 수도원의 수사는 두 선행자에게 가볍게 감사를 표하고, 뒤돌아 큰 목소리로 말했다.


"텔로드가 가까워졌습니다! 에브린님의 가호 덕분에 여러분 모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반나절 더 걸어야겠지만, 성문까지 힘냅시다!"

"오오···!!"


마흔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신앙심을 보였다. 들짐승이 나타나지 않았고, 몬스터도 없었다. 도적도 없고, 도둑도 없는 평온한 여정이었으니 크게 안심했다.

펠릭스는 청각을 키웠다가 사람들의 탄성이 벼락처럼 들려 움찔했다.


"으익···."

'무작정 감각을 높인다고 능사는 아니었어. 이런 실수가.'


성직자가 뒤돌아서 크게 말하려 하는 건 준비 동작이 보였기에 대처했지만, 갑작스러운 큰소리는 청각 마비에 딱이었다. 고막이 터지거나 하는 실질적 피해는 없었으나, 예민하게 키워둔 신경계가 뇌에 큰 충격을 주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띵한 감각에 균형을 잃을 뻔 했지만, 옆에 서 있던 성직자가 쓰러지는 걸 받아주어 막았다.


"괜찮니?"

"앗, 예. 감사합니다."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업어줄까?"

"괜찮아요. 다 왔는걸요."


펠릭스의 정체를 모르는 수사였기에,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행렬을 이끄는 늙은 수사에게 소년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을 받아 성경 구절을 외며 걸으면서도 소년의 안색을 살폈었다. 성인보다 보폭이 작을 텐데도 기특하게 잘 따라오던 소년이었다. 어째서 도시로 향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보통은 이렇게 대견스러운 아이가 집안을 잇기 마련이다.


'내가 모르는 개인 사정이 있겠지. 에브린이시여, 아이의 앞날을 돌봐주소서.'


수사는 속으로 신의 가호를 빌었다. 부모, 형제자매 없이 먼 길을 떠난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호의였다.

그걸 모르는 펠릭스는 다시 마나를 가다듬으며 피로 경감과 체력 향상을 해주는 자버프를 올렸다.


* * * *


트렐라드 변경백령, 수도 텔로드 근교.

가도의 검문소에 다다르자 순례 행렬은 경비병에게 차근차근 통행세와 방문 이유, 목적 등을 말하기 시작했다. 검문소에는 인데브 남작령에서 출발한 마흔 명 외에도 백 명 정도가 자리를 깔고 있었다.


"저희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에브린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일단 터에서 성직자들과 사람들은 헤어진다. 이 부근부터는 순례라는 이유로 동행할 수 없고, 신의 자식과 일반인의 구분이 엄격한 까닭이다.

검문소의 병사들은 수사의 신분과 징표를 확인하고 별다른 물음 없이 통과시켰다. 수사복을 입지 않은 펠릭스가 걸림돌이었지만, 정체가 누구인지 밝히고 늙은 수사가 신분을 보증하자 어렵지 않게 같이 통과될 수 있었다. 귀족은 검문 대상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성직자가 신의 이름으로 보증하면 어지간한 기사나 병사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

약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시간만 지체한 성직자 무리는 텔로드에 입성했다. 정확히는 텔로드 성벽 내의 성당이었다.


"오래간만이군요. 석 달 만이던가요?"

"그렇습니다, 사제님. 여기, 세례자 명단과 장례자 명단입니다."

"감사합니다. 허, 인데브 남작령의 인구는 십몇 년째 상승세로군요. 남작의 유능함이 유독 돋보입니다."

"철인이지요. 토벌을 나갈 때마다 저희를 닦달해서 자주 보기는 꺼려지지만 말입니다."

"유들유들한 걸 보니 동행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래."

"허허, 에브린님의 널리 뜻을 펼칠 수야 있다면 응당 그래야지요."


성당의 사제와 수도원의 수사가 털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을이었다면 영지의 소출이 적혀있었을 테지만, 이제 막 밭에 씨를 뿌릴 때라 겨울에 태어나고 죽은 자들의 명단이 건네는 전부였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겨울은 혹독하진 않았지만, 온화하지도 않았다. 대비를 소홀히 한다면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의 날씨는 되었다.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처참합니다. 마을 하나가 전소된 곳도 있어요."


인데브 남작령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상황이 안 좋았다. 특히 변경일수록 문제가 많았다. 모두 인데브 남작처럼 유능했으면 탄생자 명단이 장례자 명단보다 길었을 것이다. 현실은 그 반대였고, 심한 경우엔 두 배 이상 차이 나기도 했다.

늙은 수사는 가볍게 성호를 그었고, 사제는 가볍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자리에서 나누기에는 무거운 주제였다.


"저 아이는?"

"인데브 남작의 둘째입니다."

"둔재로 소문난 아이였다고 기억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군요."

"주신 샤메드의 사제단이 다녀간 이후로 그런 평이 가라앉았어요. 건강이 좀 나쁘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번 행렬에서 그런 기색은 찾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닐 터. 신들의 관심을 받은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요. 일단 범상찮은 앞날이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펠릭스는 태연하게 성당 내의 실내 장식을 구경하면서 청각을 키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수도원이 성지도 아닌 대도시에 순례하는가 궁금했는데, 이런 걸 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을 한 것이다. 예지보다는 직감이겠지만, 둘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펠릭스는 그 날을 기점으로 전생했고, 신적 존재와 계약을 했었으니까.


'이곳에서도 연륜은 통하는 건가?'


노인의 많은 경험은 어느 의미로 예지와도 같았다. 하물며 이런 시대에 늙은 성직자는 어느 정도일까.


'조심해야겠어.'


한국에서 지낼 때 연륜을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큰 사고를 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겪어봐야 안다지만, 여기에서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가 끊기고 잠시 뒤, 늙은 수사가 다가오자 펠릭스는 천장의 종교화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수사를 바라본다.


"도련님. 저의 용무가 끝났으니, 백작님을 뵈러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피곤하시다면 오늘은 쉬고, 내일 갈 수도 있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어···. 내일 갈게요."

"허허, 알겠습니다. 재미없는 밤과 맛없는 식사겠지만, 부디 넓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방금 들은 이야기도 있고, 두각을 세울 필요가 없으니 휴식을 받아들였다. 길을 걷는 내내 마나를 사용해 피로를 없앤지라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모르는 법. 정비된 가도라고는 하지만 흙길과 흙먼지는 막을 수 없다. 지저분한 몰골로 백작을 찾아간들 좋은 첫인상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수사는 소년의 뜻을 받아들였고, 하룻밤 머물 준비를 시작했다. 성당의 불빛은 한밤에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등대였으니, 잠을 청하려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서임식 (4) 20.04.21 227 5 11쪽
14 서임식 (3) +1 20.04.19 239 6 12쪽
13 서임식 (2) 20.04.18 240 5 12쪽
12 서임식 (1) 20.04.18 245 6 14쪽
11 마나 블레이드 20.04.16 252 5 12쪽
10 신체 단련 (2) 20.04.15 248 5 12쪽
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4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7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6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3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2 6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