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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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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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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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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신체 단련 (1)

DUMMY

펠릭스가 함셰르가 가정교사 직을 내려놨다는 걸 들은 건 사흘 뒤였다.

함셰르는 '더 가르칠 게 없다.'라는 이유로 내려놨지만, 펠릭스는 달랐다. '마법은 가르쳐줄 수 없다.'라는 강경한 자세. 지구의 문화를 어떻게든 구현해서 구워삶으려면 펠릭스에겐 경천동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나간 건 지나간 일. 더럽고 추하게 떠난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땅바닥에 질질 늘어질 수는 없었다.

소식을 전달한 집사의 말로는 집사장께서 은퇴한 기사를 스승으로 붙여준다고 했다. 검술 혹은 다른 무술이라도 배워 변경백령에 도움이 되라는 말이었다. 본래 기사로서의 훈련을 시작하는 나이가 5살로, 11살인 펠릭스에겐 6년이나 늦은 일이었다.


'이번엔 오러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은 순수한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몸이었다. 그리고 마법학 입문 과정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마나 자체를 다루는 사람은 신화나 민담에서나 나올 정도로 희박하고, 마력을 느낀다고 했다. 마법사는 성취가 올라갈수록 마나에 예민해지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흙을 채에 털면 자갈과 돌멩이 같은 큼직한 마나 덩어리, 즉 마력 같은 건 쉽게 느낄 수 있지만, 모래알처럼 작은 순수한 마나는 느낄 수 없었다.

함셰르 앞에서 마나를 움직여 보았지만,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잘 됐기도 해. 계속 어린애처럼 굴 수 없으니까.'


펠릭스의 식단은 어중간했다. 고기는 며칠에 한 번씩 먹을 수 있고, 평소에는 빵이 고작이다. 나름 귀족이라고 굶지는 않았지만 풍족한 식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평할 수도 없었는데, 트렐라드 변경백은 계란물 푼 오트밀과 묽은 맥주로 식사를 때웠다. 먹을 걸 가지고 고민하기에는 사정이 열악했다.

그래서 키나 체중이 굉장히 왜소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저체중에서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 하지만 펠릭스에겐 문제 되지 않았는데, 열량 대신 마나를 활용할 수 있어 식단에서 자유로웠다. 문제는 체격이라는 건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 다른 사람들도 왜소하거나 식사량을 줄이는데 비슷하거나 적게 먹은 펠릭스가 거인으로 성장하면 누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볼 것이다.

원한다면 언제든 뼈와 살을 불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계기가 필요했는데, 기사 수업은 이 역할을 맡아줄 수 있었다.


'근육이 붙었다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성장판 자극도 있고. 이 양판소 세계에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게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거야.'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지난 4년간 영주성에서 지내며 접한 기사들의 평균 체격이었다. 일반인과 비교하면 확실히 컸다. 머리 하나 정도 차이 날 정도. 끼리끼리 놀아서 품종 개량하듯 혈통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전혀 없진 않았다.

펠릭스는 귀족 혈통이고, 기사 수업을 받아 몸을 키우자고 다짐했다. 아직 성장기가 찾아오지 않아 항상 옆에 붙어 다니는 네리카를 올려다보면 괜히 열등감이 들었던 탓에 더욱 결연하게 다짐했다.


* * * *


기사의 죽음은 전장에서 겪는 게 일반적이다. 전장의 꽃이자 주력이기에 침대에서 곤히 숨을 거두는 경우가 드물다.

그렇기에 은퇴기사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큰 부상으로 싸울 수 없어진 부류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부류. 펠릭스를 가르치는 부류는 전자였다. 오른쪽 다리는 허벅지 중간 부분이 잘려나가 목발이 없으면 걸을 수 없고, 왼팔은 손목 아래로 없었다.


"셀튼 이드쿨라입니다. 앞으로 도련님께서 성장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펠릭스 란소스 오브 인데브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편히 하대해주십시오. 오늘은 가볍게 체력부터 점검해보겠습니다. 연병장을 한계까지 뛰어보십시오."

"몇 바퀴 뛰는 게 아니라?"

"전쟁은 지구력 싸움입니다. 전속력으로 달려 충돌하는 건 아랫것에게 맡기는 일입니다."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가 기사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셀튼 이드쿨라. 펠릭스는 납득가는 면이 있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 감이 안 왔지만, 마라톤이라는 종목에 선수가 있듯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체력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페이스 조절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대충 열 바퀴쯤 돌면 되겠지. 여긴 이온음료도 없으니까. 뛰다가 체온이 올라가면 보통 그 지점에서 탈진해서 쓰러지고.'


운동을 하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체온이 올라간다. 일상에서는 운동을 멈추고 땀과 바람이 몸을 식혀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장기전에서는 한계가 있는 법. 달리기 선수가 물을 좀 마시다가 몸에 뿌리는 게 체온을 낮추기 위해서다.

연병장 테두리를 뛰는 펠릭스의 눈에 구석진 우물가에서 몸을 씻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꼭두새벽에 나와 훈련하는 병사였다.


'상비군은 아니고, 민병 정도겠지만···. 영주성에서 훈련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다는 거겠지.'


텔로드의 민병 혹은 동원병. 만일 적이 텔로드 근처에 나타난다면 출병할 병사였다.

고개를 더 돌리니 셀튼 옆의 네리카가 보였다. 두 사람은 꽤 길게 대화하는데, 셀튼이 고압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담담했다.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쌍방으로 이야기가 오가는 이야기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모습.


'그나저나 멀리서 네리카 머리카락이 더 두드러지네.'


선명한 오렌지색 머리카락. 밝은 갈색 머리카락 정도가 아니라 귤이나 오렌지에 가까운 색이었다. 펠릭스의 머리카락은 평범한 흑발이라 비교됐다.

시동이나 시녀의 외견은 눈에 띄는 신체적 특징이 많았다. 누가 누구인지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함셰르가 말했던 적 있었다. 귀족은 자기 저택이 아닌 이상 다른 곳의 하인의 이름을 외우지 않으므로 신체적 특징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이들을 선호했다. 무례하다면 무례했다고, 능력 있다면 능력 있다고 말하는 데에 효과적인 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다.

육손이나 주근깨 등의 특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숨기려고 하면 숨길 수 있어 선호되진 않았다.


'이것도 양판소 특유의 다채로운 색감을 해명하기 위한 것 같긴 한데.'


멜라닌 색소가 알파이자 오메가인 털 색감. 다채로울 수 없다. 그런데 보라색과 파란색, 더 나아가 분홍색까지. 현실적이지 않은 요소다. 염색이라면 모를까.

그래서인지 이 세계관에선 '그런 쪽이 선호되었다'라는 식으로 흘러갔다. 자기 개성의 표현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 신기하다면 신기하게 다가왔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긴 하지.'


신이 실존하는 이상 '그렇게 창조됐는데 문제라도?'라는 식으로 나오면 할 말 없는 건 펠릭스였다. 사람이, 그리고 생명체가 어두운 색감으로 진화한 건 숨기 위해서다. 포식자로부터, 위험으로부터. 반대로 과시를 위해선 발달했다. 공작새라던가 독버섯이라던가. 선명하고 밝은 색감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마법이 있는데 들짐승이나 몬스터를 상대로 숨기만 할 리 있겠는가. 과시를 위한 진화도 있을 수 있었다.


'근데 몇 바퀴 뛰었더라?'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흔히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분명 여러 바퀴 뛴 것 같은데 정확히 몇 바퀴 뛰었는지 생각이 안 났다.

얼마나 더 뛸까 고민하던 펠릭스. 온몸에 두르던 마나를 두르는 게 습관이었는데, 이번에는 모두 심장에 갈무리했다.


"윽."


마나를 거두고 한 걸음 내딛자마자 올리오는 건 욱신욱신한 고통. 제대로 못 먹은 몸이라 뼈가 바로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무릎관절에서 솟구치는 뾰족한 감각도 어지간한 게 아니었다.

약골로서의 고통과 성장통이 겹치자 한 걸음 움직이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세 바퀴 돌고 끝내려 했는데···. 한 바퀴조차 못 뛸 것 같은데!'


열 걸음을 뛰자 단숨이 올라오고, 스무 걸음을 뛰었을 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서른 걸음엔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흔 걸음에는 허리가 휘청했다. 쉰 걸음에 이르자 무릎을 꿇었다.


"허억···. 헉."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쓰린 건 둘째치고 뼈와 관절이 시렸다. 평소에 마나를 운용하고 다녀서 전혀 몰랐는데, 신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펠릭스가 무릎 꿇고 주저앉자 셀튼은 네리카에게 조치를 요구했다. 셀튼이 말한 대로 우물가로 달려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펠릭스 위에 뿌렸다. 물을 끼얹자 체온이 크게 낮아지며 호흡이 진정되었다.


"괜찮으신가요?"

"괘, 괜찮아. 괜찮아···. 숨 좀 돌리고."


숨을 돌리며 심장에서 마나를 풀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마나가 신경계와 혈관을 달린다. 피로를 빠르게 날려버리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폐를 한껏 부풀려 크게 심호흡한 뒤, 벌떡 일어난다. 초조하게 선 네리카는 펠릭스가 일어나자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쉰다.


"아까 무슨 말 한 거야?"

"네?"

"기사랑."

"아···.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전투에 참가하셨던 분이셨다고 해요."

"아."


네리카와 지낸 지 오래돼서 여러 이야깃거리를 나눴었다. 네리카는 펠릭스의 가정사를 알고, 펠릭스도 네리카의 현실을 알았다. 천애 고아가 되었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건 변경백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

셀튼 이드쿨라는 펠릭스가 다가오자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 어디에도 경련이 없었다. 강렬한 운동을 한 뒤에는 흥분 때문에 근육이 꿈틀거려야 마땅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안 보였다. 그럼 마지막에 풀썩 쓰러진 건 무엇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군.'


마지막에 쓰러진 건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6바퀴를 뛰는 자세는 지나치게 강건했다. 팔을 흔들고, 무릎을 허리까지 높였다. 어떤 자세가 달리기에 효과적인지 잘 아는 것 같았다. 허리까지 다리를 올리고, 땅을 팍 박치는 자세는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달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기껏해야 속보(速步)의 영역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셀튼은 시선을 거두고 펠릭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공허한 눈이다. 열망, 상심, 기대. 그 어떤 것도 없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느껴졌다.


"연병장 7바퀴, 고무적인 체력입니다. 도련님께서 기사가 되기에 충분한 잠재력이 느껴집니다."

"기사가 되려면 얼마나 돌아야 하지?"

"백 바퀴는 돌아야겠지요."

'미친! 기계냐?'

'과연 얼마나 밑천을 드러낼지 볼까.'


백 바퀴라는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전장에 맨몸으로 나가는 게 아니기에, 백 바퀴라는 건 모든 기사의 지향점이었지 달성할 교양이 아니었다. 그러나 셀튼은 그 부연설명을 쏙 빼고 100바퀴를 공언했다.

갑옷과 무기를 착용하고 연병장 100바퀴! 연병장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므로 애초에 명확한 기준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종의 관용어구로 쓰인다.


"백 바퀴라···."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군. 가능하다 이건가?'


텔로드는 변경백령이라 연병장이 넓은 편이다. 둘레가 1,000보(步)가 넘는다. 달리기를 외곽만 달려서 하진 않고 여유를 좀 둔다고 쳐도 천 보에 육박하는 둘레를 백 바퀴 돌 수 있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말이다. 그것도 보통 말이 아니라 준마.


"네리카."

"예."

"나랑 같이 뛰자."

"예?"

"혼자 뛰면 심심해. 기사님, 괜찮겠나?"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아비에게 빚도 있으니."

"괜찮다잖아."

"으으···. 알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단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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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4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6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6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4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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