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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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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8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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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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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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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각성

DUMMY

오슬레아 왕국 서부, 인데브 남작령.

왕국 변경의 조그만 남작령이라 소란스러운 일이 드문 곳인데, 그날은 유난히 분주했다. 가문과 작위 계승을 할 때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전례 없는 소란이었다.


"음식재료는 주방으로 바로 가져가! 창고에 들어있던 건 어디 구석에 쑤셔 넣어두고!"

"가구 만들 나무가 부족합니다, 어르신."

"어디에서든지 긁어와! 집을 해체해서라도 가져오라고!"


남작이 거주하는 성의 바깥. 2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 무리는 이들이 머물 공간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관리하기 어려운 흰색 사제복을 입은 이들을 이끌고 인데브를 찾아온 자는 접견실에서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늙은 사제는 최근에 내려온 신탁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신탁이 자주 내려오는 것도 아니거니와, 마왕을 무찌른 다음에는 긴 휴식을 취하겠다며 활동을 자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위대한 주신 샤메드께서 사소한 일로 신탁을 내리신 것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한낱 아이에게 계약이 완수되었다니···. 영웅도 태어나지 않은 지도 삼천 년이 지났거늘.'


의문을 품었으나 그걸 밖으로 내색하지 않을 정도의 절제심은 있었다. 사제 앞에는 인데브 남작이 초조하게 앉아있었고, 시골남작답다면 답게 상황변화에 침착하지 못했다. 덕분에 목적은 한결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싫었다. 오랜만에 내려온 신탁을 수행하는 데에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없으니 본인의 위신을 세울 방법이 전혀 없는 게 불만. 교단의 늙은이들이 괜히 사양한 게 아니었다.

잔에 담긴 맥주 한 잔을 모두 비워갈 무렵. 잘 차려입은 소년이 접견실에 들어왔다. 앳된 티를 벗지 못하여 소년보다는 아기라고 불러야 할 외견이다.


"총명하군요. 나이가?"

"올해로 다섯이 됩니다."

"허허, 샤메드께서 보우하심이라. 아가야, 너에게 신탁이 내려왔단다."

"···?"


늙은 사제는 오른손에서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갔다. 오른손은 서서히 빛을 발하고, 강력한 해주(解呪) 권능을 머금었다.


"샤메드께서 말씀하시매, 계약은 이것으로 끝이라 말씀하시었다."


어린 소년은 두려움 때문에 굳었고, 늙은 사제는 어렵지 않게 소년의 정수리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 어떤 저주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주교급 이상의 신성력으로 해주 권능을 불어넣으라는 신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신 샤메드의 신탁이니 의혹을 꾹 참을 뿐이었다.

그런데 보통이라면 아무런 이상도 없어야 하는데, 소년이 푹 뒤로 넘어갔다. 사제가 황급히 왼팔을 뻗어 쓰러지는 걸 부축해 막았다.


"헙!"

"됐습니다. 긴장 때문에 기절한 것뿐이니."


인데브 남작은 자식의 무례에 사제가 호통을 칠까 기겁했으나, 늙은 사제는 인자한 모습으로 남작을 진정시켰다. 저주와 충돌했다면 쓰러질 게 아니라 고통에 몸부림쳤어야 하고, 아무런 저주가 없다면 손 위에 물이 흘러내리듯 반응이 아예 없어야 했다. 그런데 뭔가 걸리는 반응이 느껴졌다.


'기이한 일이로군. 육십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방금 그건 마치 무언가를 건드린 듯한···.'

"피, 피곤하실 텐데 이만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각별히 모시겠습니다."

"허허허.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곳에 오래 있는다 한들 불편함만 끼칠 터이니 3일간 쉬었다가 떠나겠습니다. 그럼."


시골남작에게 접대를 받아봐야 허전함만 느낄 뿐이라고 여긴 사제는 사양했고, 시골남작은 감격에 겨워 신앙심이 절로 생겼다. 겨우 3일이지만 사제와 수행단이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했고, 큰 소란 없이 사건은 일단락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이었으니.


"펠? 깨어났니?"

"······."


다음 날 아침, 누나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며 동생의 상태를 보러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이 차이가 여덟이나 되었고,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이므로 또 다른 계승권 보유자인 동생을 견제할 이유는 충분한 데도 동생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이 또한 시골 영주 핏줄다운 순박함이었다.

펠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5살 소년, 펠릭스 란소스 오브 인데브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들어온, 정확히는 펠릭스의 정체성을 잡아먹은 다른 인격 탓에 일시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펠릭스의 기억을 압도하며 정체성의 혼란은 없었지만, 반대로 기억과 충돌하는 몸의 상태 때문에 통제가 어려웠다. 전신마비나 식물인간 상태와 다를 바 없었다.

펠릭스의 누나, 베로니크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덟 살 아래의 동생, 가문에서 큰 기대 없이 지내는 아이라 이해관계를 넘어 걱정되는 면이 많았다. 어딘가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있을 때가 잦았고, 걸음마도 말도 늦었다. 가문에서는 둔재라고 여겼고, 란소스 가문에 유별난 둔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근처에 파다했다.


"건강해야 해."


열세 살이 할 말은 아니지만,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받는 압박감을 책임감으로 해소하는 베로니크에게 동생의 안위는 중요한 문제였다.

펠릭스는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누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베로니크는 빙긋 웃어주었고, 펠릭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베로니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쓰다듬을 받으며 마지막 수면에 끌려내려간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작별이 다섯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버둥이었기에.


"잘 자. 내일 보자."


베로니크는 펠릭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그게 마지막 인사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 * * *


사제단이 방문하고 이틀째 되는 날. 펠릭스는 늙은 사제를 찾아갔다.

성경을 읽으며 주신 샤메드의 가르침을 공부하던 사제는 공부 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나빠졌으나 신탁의 당사자가 찾아오니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찾아왔는지 듣기를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다. 독실이라 의자는 하나뿐이라 소년은 서서 말할 수밖에 없다. 5살이라 앉아서 대화해도 내려다보는 상태일 것이고, 긴 대화가 성립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소년은 당돌하게도 당당히 서서 사제를 올려다보았다. 어제 겁에 질려 쓰러진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절하여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샤메드님께서 가엾게 여기시매 보호해주셨나 봅니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어···. 어린 형제께서 사려가 깊으시군요. 덕분에 힘이 납니다, 허허허."


사제는 내심 건방지다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잘 포장했다. 주교들이 사양한 탓에 주교 후보인 본인이 이런 시골까지 왔으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조용히 일이 끝나도 화가 나는 판에 이렇게 속을 긁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소년은 아는지 모르는지 히히 웃으며 두 팔을 살짝 들며 상인이 할 법한 동작을 보였다.


"계약은 완수됐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뭐···."


거기까지 말하고서 펠릭스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또 다른 삶을 받았고, 기억도 온전했다. 계약은 완수됐다. 그럼 남은 건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뿐.


'그건 그렇고, 정말로 살 수 있게 될 줄이야···.'


주문한 것처럼 적당한 양판소 세계관일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만족스러웠다. 시골귀족이긴 하지만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적어도 어린 나이는 건너뛰고 5살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기왕이면 7살 정도로, 더 큰 뒤가 좋았지만 확실하게 다시 살아난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더 불평하지는 않기로 마음먹는다.

기억과 함께 받은 중요한 것도 있었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힘.


'이렇, 게 하면 되는 건가?'


우물에서 두레박을 던져 물을 끌어올리듯 심장에서 바깥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으로 더 많은 무언가를 가져왔다.


'이게 마나겠지? 이런 식으로 쉽게 경지를 올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펠릭스는 자연에서 끌어온 마나를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빠진다. 지금까지 펠릭스는 백치에서 조금 더 나은 정도의 둔재로 취급받는 중이고, 사제를 만난 다음 수재가 되는 건 가십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감사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종교와 엮이는 건 꺼려졌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신이 실존하는 세계다. 사소한 부주의로 신벌을 맞는 건 피하고 싶었다.

부드럽게 기를 갈무리한 펠릭스는 본인의 앞날을 생각해본다.


'문자도, 글자도 익숙해. 하지만 공부는 당장 할 필요는 없고. 그냥 건강해졌다는 듯이 뛰노는 게 고작인가? 어차피 난 물려받을 것도 없는 둘째니까 바깥을 돌아다녀도 이상할 건 없겠지?'


양판소의 꽃, 소드마스터를 떠올린 펠릭스가 마법사보다는 기사처럼 보이도록 방향을 잡았다. 나중에 계승 문제로 숙청당하지 않으려면 적당한 때에 출가해야 할 것이고, 그럴 땐 그저 건강이 최고였다.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얻은 교훈 중 하나였다.

마나는 꾸준히 끌어모으면서 마나를 쌓고, 바깥을 돌아다니며 상속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난 아직 5살이야. 시간은 많아. 전생에 못 했던 것들, 여기에선 해낼 수 있겠지. 급할 거 없어.'


펠릭스는 굳게 다짐했다. 예전 가족은 그 나름의 행운으로 행복을 받을 것이고, 지금의 자신은 지금의 가족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편하게 마음먹었다.

힘을 가진다고 해도 능력과 실력을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10년 동안은 마나를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하고, 더 나아가 숨기는 데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5살에 기억을 되찾은 건 긍정적이다.


'들짐승만 없으면 괜찮겠지.'


한국은 들짐승이라고 해봐야 개나 고양이고, 심해도 멧돼지다. 하지만 이곳은 판타지고,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아무리 마나를 다루는 게 익숙해진다고 한들 몬스터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펠릭스는 잠시 기억을 뒤적거리며 이 세계에 대해 떠올려보려고 했으나, 5살이 기억하는 내용이라고는 누가 자신을 예뻐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구분 정도였다. 일상의 예절도 있긴 하지만, 도덕적 상식에 불과해 큰 도움은 안 된다.


'밖으로 나간 기억도 없고. 육아라는 개념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고, 내버려둔 자식이라도 이건 좀 너무한데.'


가족 중에서 호의적인 사람은 오직 누나뿐이다. 상속을 두고 다퉈야 할 친남매가 가장 친하다는 점에서 얼마나 외로이 자랐는지 알 수 있었다.

펠릭스는 가족에 관한 판단을 내린다. 부모는 귀족과 영지민을 이끌 대상으로 부적격이라 여겨 둘째를 방임했다. 그들은 타당하고 마땅한 선택과 집중을 한 쪽이었지만, 당사자인 펠릭스에겐 좋게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살 수 있겠지?"


일말의 불안감을 품고 새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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