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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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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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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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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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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4쪽

서임식 (1)

DUMMY

펠릭스의 설명은 셀튼을 거쳐 트렐라드 변경백의 귀에 들어갔다.


"···?"


뇌가 정지된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 셀튼의 보고를 받은 집사장은 굳은 표정으로 변경백에게 차근차근 다시 설명했다.


"펠릭스 란소스 오브 인데브, 그 아이가 소드마스터가 되었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분명 마나 블레이드였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말문이 막혔다. 기사의 자식인 네리카가 오러를 깨우쳐 익스퍼트가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뻐했다. 활용할 전력이 늘어난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고, 서임식을 내리면 바로 손이 급한 지금 훌륭한 소방수로 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드마스터라고?


"내가 안고 가기엔 좀 크지?"

"예. 마스터는 왕의 서임이 필수입니다."

"하···. 아깝다, 아까워."


수도로 올라가면 트렐라드가 아니라 남방으로 향할 가능성이 컸다. 왕국의 관심사는 북방보다는 남쪽 무주지 개척이다. 카팔라 제국이 계승 문제로 발이 묶인 틈을 노리는 곳이 바다.

북방 소국들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였고 거시적 시야라는 건 트렐라드 변경백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서부 방위가 뚫릴 지경이라는 게 문제.


'적어도, 내게 악감정 품을 일은 없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아무튼 지낼 수 있게 해줬잖아?'


트렐라드 변경백은 빠르게 셈을 내렸다. 펠릭스가 자신에게 나쁜 감정이 없을 거라고 단정 지은 것이다. 이건 사실이기도 했다.

매일 굶지 않게 밥을 줬고, 성장에 맞춰 옷도 지급했다. 방은 손님이 머무르는 별채였으나, 헛간이나 창고 따위가 아니라 매일 하인이 방 정리를 해주는 서비스도 있었다. 인데브 남작령에서 갇혀 지낼 때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지냈는데, 펠릭스가 트렐라드 변경백에게 통수를 때릴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가정교사와 은퇴기사도 붙여주지 않았던가!


"텔레포트 게이트, 열 수 있나?"

"충분합니다."

"그럼 그걸로 보내지. 텔로드에서 수도까지 가려면 말을 타더라도 반년은 걸릴 테니."


집사장은 곧바로 순서에 맞춰 조치를 시작했다. 변경백의 후원을 받는 마탑에 연락해 수도로 향할 텔레포트를 준비해두라고 전하고, 마나석을 전달했다.

그 사이 변경백은 수도에 통신구를 연결해 용무를 밝혔다. 늘 그랬듯 지원요청으로 여기고 미적거리며 나타난 궁중관료. 지겹다는 분위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소드마스터가 출현했소."

"뭣! 어디에!"

"영지지. 본작이 후원하던 아이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소이다."

"아이? 많이 젊은가 보군."

"12살이오."

"···?"

"열둘! 마나 블레이드를 이룬 나이오."


궁중관료는 욱 올라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헛소리일 가능성은 작았다. 무엇보다 관료가 변경백에게 비꼬는 건 할 수 있어도 무례한 짓은 할 수 없다.

말없이 잠깐 수정구 넘어 트렐라드 변경백을 바라보던 관료는 곧 묵례하며 말했다.


"상부에 소식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마탑의 게이트를 열어둘 테니 연결을 준비해주시오. 사전에 연락도 주고."


평소에 중앙귀족의 뒷배를 업고 지방귀족인 변경백을 업신거리던 관료였지만, 사안이 중대하여 이번에는 곱게 고개를 숙였다.

트렐라드 변경백은 관료가 오래간만에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 속이 후련했다. 무능을 암시하는 망언을 거침없이 던지며 속을 긁던 담당자였다. 그런 놈이 고개를 푹 숙이니 어찌 유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비는 넉넉히 줘야겠군.'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가는 희극이었다. 건방지게 굴던 녀석의 입을 닥치게 해준 펠릭스에게 넉넉한 돈을 지급해주기로 하며 통신실을 나섰다.

그 시각 펠릭스는 마력을 해체하는 걸 연구하고 있었다. 네리카의 마력을 관찰하면서 구성원리를 파악했고, 지금은 자신의 마나를 마력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해체하며 유연성을 실험했다.


'마나는 회전하려는 성질이 강해.'


마법사의 경지를 구분하는 단어로 서클이 있다. 함셰르가 스스로 5서클 마법사라고 소개했듯이, 심장을 두르는 마나는 원을 그린다. 어째서 서클인가, 라고 물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 말인즉 원칙과 순리라는 뜻이다. 중력이 그렇듯이, 빛이 그렇듯이. 세상을 떠받치는 기본원리가 그렇다.

회전하는 마나를 얼마나 끌어안을 수 있느냐가 마력의 관건이고, 마력의 근원은 의지력과 정신력이었다. 셀튼이 말했다.


< 스스로의 강함을 믿기 위해선 진실로 몸이 튼튼해야 하는 법. 아직 단련이 덜 된 아이의 기준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


자신이 강하다고 믿는 힘. 자신감과 자존감 등의 정신적 수양이 있어야 마나를 고정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건 마법사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펠릭스는 정작 심장에 서클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계기가 없어서. 심장에 서클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흩어졌다.


'이번에도 뭔가 만져보긴 해야겠네.'


네리카의 경우처럼 운이 좋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서클을 이루지 못해도 마법 흉내는 낼 수 있으니까 크게 상관없기도 하여 일단은 접는다.

마력을 분해하는 일에 집중해 보았는데, 한 번 결합한 마나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형성된 마력 덩어리는 마나가 닿으면 그대로 먹어치웠다. 흩어내려면 원심력을 억눌러야 했다. 마력끼리 부딪쳐서 약하게 만드는 게 가장 편했다. 그런데 그러면 결국 마력 덩어리 두 개를 만들어야 해서 쓸모는 없었다.


'이래서 마력의 잔재가 남는 건가.'


마력에서 떨어진 잔여 마력은 허공에서 맴돌다가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져 흩어졌다. 그 시간 동안 남아있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는데, 함셰르가 말한 잔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웅덩이에서 떨어져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이 증발하는 것처럼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완전히 지우는 건 나도 힘들겠는걸.'


마력이 마나를 잡아먹으며 커지는 이상 마나를 이용해 잔재를 지우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마력으로 마력을 지우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펠릭스가 만든 마력이 남아 잔재가 되었다. 시간 자체를 가속해버리는 게 아닌 이상 흔적은 남기 마련이니.

펠릭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력을 흉내 내서 음흉한 계략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란소스 경, 계십니까?"

"네, 있습니다."


손바닥 위에 마나와 마력을 이리저리 만지던 펠릭스의 귓가에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저는 트렐라드 변경백님의 집사장입니다. 소드마스터에 이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일찍 찾아뵙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는 건 잘 압니다."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주인님께서 란소스 경을 초대하셨습니다. 안채로 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말씀이십니까? 저야 좋습니다만 이런 옷차림으로 뵙기에는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펠릭스의 옷차림은 평민에서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다. 모직원단 상의와 돼지가죽으로 만든 바지. 평소처럼 숙소와 연병장을 반복할 때라면 모를까 변경백을 만나러 가는데 무례한 복장이다.

집사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래 대화할 상황이었다면 응당 옷을 마련해드려야 마땅하나, 조만간 란소스 경께선 영자를 떠나 왕도로 향하실 겁니다."

"왕도? 어째서입니까?"

"소드마스터는 수도에서 왕의 서임을 받는 것이 관례입니다. 중앙귀족으로서의 격을 위해서고, 어느 한 귀족이 강하게 성장하여 역모를 꾸미는 걸 방지하는 정치적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아아."


양판소에서 흔하게 언급되는 소드마스터지만, 군 지휘체계에서 상당히 높다. 친정이나 아예 기사단을 결성하는 등, 귀족 아래에 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며 있다 하더라도 공작 정도가 일반적이다.

그 이유를 '역모를 막기 위해서'로 무마한 모양이다.


'소드마스터 정도 되면 아예 왕의 친위세력으로 두는 건가? 하긴, 그러면 국가를 좀 부드럽게 운영할 수 있겠지.'


다른 효과로는 주인공이 세운 치적에 격을 높일 수 있다. 같은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누구의 명령을 받는지에 따라 보여는 높이가 다르다. 남작가의 소드마스터를 쓰러트리면 '남작에게 피해를 줬다!'로 끝나지만, 소드마스터인 백작을 쓰러트려서 '상대국가에 피해를 줬다!'로 부풀릴 수 있다.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 튀어나오자 펠릭스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신호를 긍정으로 받아들인 집사장은 묵례하며 안내를 시작한다.


영주성을 방문한 첫날 이후로 들어가 본 적 없는 본채에 들어서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무려 7살이었고, 지금은 5년이 지난 12살이다. 시선도, 능력도 달라졌으니 보이는 시야도 달라졌다.


'아니, 앞에 내세운 사람이 달라져서 그런가?'


굽신거리는 하인을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5년 전에는 하인이 안내했지만, 지금은 집사장이 안내한다.

괜히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생각해보니 머리도 좀 잘라야 하는데.'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다. 원래는 어깨에 닿을 즈음, 한 손으로 꽁지머리를 잡을 수 있게 된 때에 단검으로 잘라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가위가 흔하지 않아 이보다 짧게 자를 수 없으니 하는 고육지책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 한가롭게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게 되었다.

뒤통수를 긁다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펠릭스.


'이번 기회에 머리카락 한 번 길러볼까.'


마침 좋은 기회였다. 네리카를 데리고 다닐 수 있다면 머리 손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데다가 아버지가 트렐라드 변경백의 기사였으므로 여기에 남을 가능성이 지대했다. 그러므로 기대를 빠르게 접고 다른 하인을 구하는 게 속 편하다. 그동안 머리를 기르는 것이고.

머리카락 관련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집사장이 뒤로 돌았다. 멈춰선 지점은 이중문(二重門) 앞.


"주인님, 란소스 경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게."


고풍스러운 문이 양쪽 모두 열렸다. 아무도 손을 안 댔는데 열려서 마법인가 싶었는데, 집사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기사가 연 것이었다.

집사장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옆으로 비켰다. 펠릭스는 정면에서 변경백을 보았는데, 굉장히 피로한 것처럼 보였다. 다크서클이 짙고, 피부도 거칠다. 한가롭게 미용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는 듯한 외견이었다. 그나마 옷과 머릿결은 단정했지만.


"잘 지냈나?"

"각하 덕분에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 감사드립니다."

"뭘, 당연한 일이었지. 잘 지냈다니 다행이군. 여기 앉게."


변경백 맞은편의 긴 의자. 탁자 위에는 과자가 가득 쌓인 접시와 와인병이 놓여있었다.


'보통 여기에선 차 아닌가?'


판타지에서 나오는 귀족의 음료는 홍차로 나온다. 술은 저질이고, 맹물은 저급하니 생기는 서술이다. 깨끗한 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한국에서 쓰인 양판소니까 나올 수 있는 묘사였다.

트렐라드 변경백 건너편에 앉아 말을 기다린다.


"마음껏 들게. 시장했을 텐데."

"감사합니다."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과일이나 꿀을 올린 정도의 간단한 과자였다. 현대의 제과에 비하면 퍽퍽하고 딱딱해서 과자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그나마 평소에 먹던 게 빵 하나라서 이런 것도 별미지만, 많이 먹기는 어려운 음식이었다. 설탕 묻힌 건빵이 차라리 이것보단 나을 것이다.


"이번에 왕도로 올라가면 국왕 폐하께 직접 서임을 받게 될 걸세. 기대되지 않나?"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무슨 걱정 말인가?"

"왕도에 착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흐하하하."


트렐라드 변경백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12살이라 하더라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인데브와 텔로드에서 지내던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다. 힘이 없으면 초라해지고, 힘을 가지면 강해진다. 잘 먹고 지낼 수 있는 건 강자의 아량과 자비 하나에 기대야 한다는 뼈저린 경험이 있으니 저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지내는 귀족들은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른 귀족을 잘라낼 귀신으로 가득했다. 당장 북부 국경선에서 몬스터와 도적으로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국력을 남부 해상개척으로 돌려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 맞다. 착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변경백 각하의 아량으로 살아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절 다른 곳으로 보내셨다면 지금 같은 일은 없었겠지요."

"하하하, 이거 쑥스럽구먼."

'쉬운 남자 같으니라고.'


트렐라드 변경백은 매우 솔직했다. 칭찬을 들으면 기뻐하고, 욕을 먹으면 화낸다. 정치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처음 슬쩍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웃는 걸 보면 정치할 성격은 아니었다.

듣기 좋은 말 좀 적당히 해줬다고 호감도 오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펠릭스는 말을 아끼지 않고 해줬다. 몇 마디 빈말로 호감을 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일반인도 아니고 변경백 아닌가.


"왕도에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넉넉하게 챙겨주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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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임식 (4) 20.04.21 227 5 11쪽
14 서임식 (3) +1 20.04.19 239 6 12쪽
13 서임식 (2) 20.04.18 240 5 12쪽
» 서임식 (1) 20.04.18 245 6 14쪽
11 마나 블레이드 20.04.16 252 5 12쪽
10 신체 단련 (2) 20.04.15 248 5 12쪽
9 신체 단련 (1) 20.04.14 246 4 12쪽
8 트렐라드 변경백령 (4) 20.04.13 250 3 13쪽
7 트렐라드 변경백령 (3) +1 20.04.12 254 8 12쪽
6 트렐라드 변경백령 (2) 20.04.11 274 7 13쪽
5 트렐라드 변경백령 (1) 20.04.10 286 4 11쪽
4 각자의 고민거리와 해결방법 +1 20.04.09 316 4 12쪽
3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2 20.04.08 345 6 12쪽
2 각성 20.04.08 432 7 11쪽
1 프롤로그 +2 20.04.07 592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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