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위산
새벽이 가까운 그 시간, 장평과 마찬가지의 삶의 무게로 인해
아직 자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나무 탁자에 턱을 괴고 유등불 아래 깊은 생각에 빠진 이는
바로 개방의 장로인 만리신개였다.
탁자 위에는 수많은 지도와 갓 만든듯한 두루마리들이 놓여
있었다.
중원 전역을 표시한 지도를 자세히 보면 붉은 점들이 표시되
어 있었고붉은 점들의 옆에는 검은 먹으로 멸망한 군소방파의
이름과 날자가 적혀 있었다.
붉은 점들은 다시 작은 동그라미로 연결되며 작은 동그라미들은
공통적인 한 곳을 의미심장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만리신개가 평소 분주한 그 답지 않게 개방의 와룡장 비밀
분타에 머문지가 벌써 사일째였다.
개방에서 핵심인사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장소인 와룡장은
항주 남쪽에 유하강 지류이며 잡히는 물고기의 싱시함에 낚시터로 유명한 세암강 곁 바위능선에 위치했다.
. 일반 사람들이 부티가 나는 와룡장에서 궁핍한 개방을
연상할 수 없었으며 평범한 퇴직한 관리나 낙향한 부호의
은거장원으로 생각했다.
만리신개가 며칠 전 정의회의 곽홍, 장평 그리고 임숙영 세사
람에게 천하제일가와 맹주인 인의대협에 대한 의혹을 말하며
그 배후에 대해 비밀리에 알아보라 부탁했다.
그러나 개방내에 맹주인 인의대협의 추종자가 너무 많았기에
그가 섣불리 수하들에는 자료를 받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지금 그 수집된 자료들을 근거로 마침내 두루마리를 만든 것
이다.
그가 처음에는 정의회주 곽홍의 부탁을 받고 만강의 총단을
찾기 위해 단지 막간산 인근에 일어난 사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 그가 막간산 주위를 벗어나 강성, 절강,
강소 일대의5개 문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멸문문파의
멸문 사인까지 조사한 것은 단순히 그의 호기심의 발로였다.
그러던중 공교롭게도 그들 멸문 문파가 모두 사업 관할문제
등으로 천하제일가에 적대적이었으며 모두 이번 맹주선거에서
인의대협에게 적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연하게도 지도상에는 그들 5개 멸문된 문파의 중심 위치에
천하제일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료들만으로 판단하기에 맹주가 멸문 가문들
의 배후로 볼 정확한 정황은 없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맹주나 천하제일가를 수호하며 이일을
획책한 집단이 따로 있는 것은 그의 오랜 경험으로 확신했다.
“철위산(鐵圍山)...”
갑자기 그가 정의회의 군사로 있는 임숙영이 말한 수미산을
호위하는 불경속의 철위산이 떠올랐다.
그녀가 설명하길 고고한 수미산을 호위하는 철위산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수미산의 그늘의 역할을 한다 했다.
세상의 한 가운데에는 수미산이 있고, 9개의 산과 8개의 바다
가 이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를 구산팔해(九山八海)라
한다.
이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산을 철위산이라 하며 산 바깥쪽은
우주의 끝으로 어둡고 캄캄하며 무서운 암흑이 펼쳐진다.
철위산에는 극무간지옥, 대아비지옥 등의 지옥들이 있고, 옥마
다 백천가지 형틀이 있으며, 옥마다 백천 가지 고통들이 있는
깊고 어두운 햇빛도 달빛도 들지 않는 무서운 곳이다.
실제 철위산은 곧 수미산이 거울에 비친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인들은 수미산은 알고 숭상하고 있으나 그 바다끝
암흑속에 위치한 철위산은 모른다 했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자료는 이곳 항주에서 가장 가까
운 백화장원의 멸망을 조사했던 과거 기록이었다.
작년 중추절이 며칠 지난 새벽에 일어났다는 참변은 불행하게
도 아무도 목격한 자는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목격자조차도 남겨두지 않은 겁화였다.
이 사안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개방 총단의 감찰부 소속 육결
제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나마 백화장원에서 멀지 않은
한 촌락의 나이든 촌노의 말을 인용하여 기록으로 남겨두었으나
촌노의 말에 무게는 두지 않고 있었다.
촌노의 말에 따르면 그 날은 가을 날씨치고도 청명한 날이었
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들일에 분주해
있었고 마을에 남은 노인들에게 특별히 다른 일이 일어날 하등의
이유도 없다 했다.
그래도 개방 제자가 미련이 남아 묻자 촌노는 시큰둥 하게 대답
했다.
“글세, 특별한 일을 꼽으라면 장원이 멸망하기 그 전날은 다른
날과 달리 아침부터 말 탄 사람들을 많이 보았네. 그들은 남자
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노인들도 있었고 젊은이도 있었네.
못 보던 낯선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에게 별다른 특징은 없었
네”
“무인들이었습니까?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습니까?”
“칼과 같은 무기는 보지 못했네. 아마 놀이를 가는지 비단옷을
입은 노인도 있었고 본가를 찾아가는 어여쁜 처자도 있었네.
그들은 한 결같이 말을 타고 지나갔네”
물론 그들이 범인이라면 무기는 감추어 휴대할 수 있었다.
만리신개가 읽은 유일한 단서였으나 너무나 막연했다.
그가 수집한 자료가 많았으나 이 자료만으로 2년여 동안 만강이
저질렀다고 속단한 미궁의 사안들이 실제 천하제일가와 연관
된 것이라고 명확히 입증할 수 없었다.
천하제일가는 현 맹주를 배출하기 이전부터 무림성역이었다.
그가 잘못 일을 건드렸다가는 개방이 공적이 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존폐의 위기까지 몰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칠십평생 도산검림의 험난한 무림을 헤쳐오며
살아온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이 사안은 노부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 될 것이다. 맹주인
인의대협은 정녕 이 사건을 모르고 있는가? 그러나 맹주가
적어도 이 사실에 대해 들은 바는 있을 것이다. 단지 그가
관여하지 않고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맹주가 아니라면
천하제일가에서 이러한 천인공노할 혈겁을 획책하며 맹주
까지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 불세출의
마두인가? 아니면 여지껏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런 집단인가?“
'정녕 불교설화의 철위산이 호위하는 수미산은 현실에 존재하는가? 있다면 천하제일가와는 어떤관계인가"
그가 마침내 현 상황에서 풀리지 않는 복잡한 의문에 어지러
운 머리를 식히려 잠을 청하려고
서재와 바로 붙은 나무 침상에 몸을 누일 때였다.
갑자기 처절한 비명소리가 장원내에서 들렸다.
“으악!”
“크악“
폐부를 찢는 끔직한 비명소리는 악몽같이 연이어 이어졌고
만리신개가 놀라 벌떡 일어섰다.
“히이이힝!”
난데없이 새벽을 깨우는 여러 필의 말울음 소리들이 비명소리
에 섞여 와룡장의 평화를 동시에 깨우고 있었다.
만리신개가 침상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는 사이, 문밖에서
상의조차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오결제자 하나가 문을 “쾅!”
박차고 황급히 들어섰다.
“장로님 ! 큰일 났습니다. 침입자들입니다! 침입자들이 장내의 제자
들을 불문곡직하고 살해하고 있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