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누가 나를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날 밤 달이 중천에 뜨고 강물이 가장 불어나는 시간,
월락성의 빈성터에는 한 인영이 서성거렸다.
장평이었다.
그가 월락성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대웅전 앞에 섰다.
대웅전은 항상 사찰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큰 힘이 있어서
도력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었고, 불교
에서는 그중 부처를 모신 것이다
눈앞의 2층 대웅전은 그래도 마치 영웅의 장렬한 죽음같이 세
월이 풍화되어도 사면 벽과 서까레를 인 지붕이 남아 있어 밤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서성이던 그의 귓전에 갑자기 은은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고성(故城)에 부는 바람
돌아오지 않는 강
읽지 않은 서신
녹슨칼
세월이 흘러 누가 나를 기억할 것인가"
여인의 청아한 노래소리였고 장평이 놀라 귀를 기울이니 어느
새 노래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대웅전 문가에 서 있었다.
여인은 품이 큰 남빛 장옷을 상의에 걸치고 흰 치마를 입었으며
긴머릿결을 바람에 날리며 서 있었다.
은빛 달빛이 그녀 위에 부서지고 있었고 놀랍게도 그녀는 임
숙영이었다.
그녀의 선한 인상이 조금은 수상한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
고 서 있었다.
"아니 임소저가 이곳에 왠 일이오?"
장평이 크게 놀라며 그녀를 맞았다.
그녀가 태연히 대답했다.
"약속이 있어서요"
장평이 곤혹스러워 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자신과 같은 시간 폐허가 된 이 장소에서
약속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혹시 만강의 수호신녀와 아는 사이인가?'
짐작대로 그녀가 수호신녀를 아는지 그를 안내했다.
"당신은 수호신녀를 기다리고 있죠? 저를 따라오세요"
장평이 그녀를 뒤따르며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임숙영의 집 거실에서 본 바람개비를 든 노란황의를 입은 어
린 여자아이의 그림이 떠올랐고, 그녀가 안내해준 천궁과 신지
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집 정원에서 느꼈던 수상하고 기이했던 살기가
함께 연상되었다.
분명 천외인 먼 신강에서 태어났다는 그녀는 발원지가 마찬가
지로 신강인 만강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장평이 수호신녀를 만나면 모든 것을 알 것으로 생각하고 성
급히 묻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달빛을 타고 걸어가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장평 역시 고성의 정취에 취해 말없이 그녀 뒤를 따랐다.
그녀가 걸어가면서 수호신녀에 대한 화제가 아닌 월락성
의 비사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월락성은 오래된 과거에 성무왕조가 세운 성이죠. 대부분의 작은
왕조처럼 성무왕조 또한 적군에게 멸망되었죠. 성무왕조는 절
벽위에서 버텼으나, 적군은 오직 절벽과 평원 사이인 협곡에서
만 농사를 지을 수 있던 성의 주민들이 내려와 농사를 짓는
것을 방해하여 결국 6년 만에 왕조는 점령되고 말지요"
장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적의 칼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오. 천
길 절벽위에 있는 월락성도 무너져 폐허가 된 것이오. 오직 있
다면 죽어야만 갈수 있다는 저 세상일 것이오”
“오직 죽음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요?”
장평이 대답이 없자 그녀가 말했다.
“불경의 법구경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보호자이니, 무슨
다른 보호자가 있을 수 있는가? 자신을 완벽히 제어한 사람은
도달하기 어려운 보호자를 얻으리라’고 적혀 있죠. 아마 우리
자신의 마음이 진정한 피난처일 수 있겠죠”
장평이 다시 임숙영에게 충격을 받았다.
항상 느끼지만 그녀의 지식은 망망대해와 같이 끝이 없었다.
아니 지식 이전에 어떤 영력이 그녀의 지혜를 인도하는 듯 했
다.
방금 말한 귀절이 법구경에서 나왔지만 그 글을 읽고 암송하
고 바르게 생각하게 하는 힘은 평범한 인간의 능력이 미칠 부
분이 아니었다.
“영력(靈力)!”
그녀는 어떤 특이한 신령한 힘을 지닌듯 했다.
장평의 그런 충격을 모르는 임숙영이 머리를 꺄우뚱하더니 이
어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죠. 신은 연약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중에 그들의 도움이 되죠. 그래서 사람들이 마련한 헛된
세상의 피난처를 믿지말고 그분에게 의지하라 말하지요. 월락
성은 천혜의 절벽만을 믿고 진정으로 그들이 믿는 신을 믿고
의지 하지 않았는가 봐요”
장평이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마치 무학의 중요한 오의 같았다.
‘내가 무림십대고수인 검제나 현명진인과 같은 절대고수들 보
다 오히려 그녀와 하루를 보내면, 무공면에서조차도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가 황유정에게 느끼는 이성으로서의 감정 이상으로 임숙영
에게는 영혼의 일치함과 이끌림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인적없는 중앙대로를 따라 걸으니 넓기가
대웅전 못지 않은 5층 불교대탑이 나타났다.
네모난 돌들로 쌓아진 대탑의 출입문이 불어오는 바람에
덜컹이고 있었다.
“이곳이에요. 이 탑 안에 만강의 수호신녀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장평이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비록 임숙영이 신녀와 아는 사이라 하나, 임숙영을 포
악한 수호신녀 앞에 함께가기가 마음에 걸렸다.
“임소저, 만강의 수호신녀는 성정이 사납소. 임소저는 여기 남
아있고 소생 혼자 갔다 오겠오”
그 말에 임숙영이 놀라 눈이 둥그레 지더니 잠시 풀죽은 표정
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 사나움이 그녀의 본성이 아닐 것이에요. 부디 당신만
은 그녀를 바로 이해할 수 있길 바래요”
장평이 그녀의 알 수 없는 말에 의아심이 들었으나 결국 두
사람이 함께 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탑안에 네모진 창이 뚫려 있어 달빛이 흘러 들어와 어
둡지 않았다.
임숙영은 이층으로 오르지 않고 회랑을 따라 돌아 들어
가더니 컴컴한 벽면의 한 곳을 만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지 ‘그르렁’ 소리와 함
께 벽체가 뒤로 물러서더니 회전하며 열렸다.
벽체가 물러난 바닥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석실이 나타나고 석실은 몇 개가 연이
어 있는 듯 했다.
“제가 최근에 만든 곳이에요. 본래 집안의 천노가발견한
곳을 제가 사람을 시켜 내부를 넓히고 기관을 보완 한 것이에요.
기관은 평범한 사람은 벽뒤에 설혹 석실이 있음을 알더
라도 열 수 없어요”
석실 내부에는 장방형의 탁자와 간소한 집기가 있었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으나 내부는 정갈했고 석실 벽면에는 오래된
족자가 한폭 걸려 있었다.
족자에는 한 성장을 한 여인이 양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흑백의 묵화로 그려져 있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복장은 고대의 복장이고 단정한 용모에 30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장평의 시선이 그림속의 여인에게 머물자 그녀가 자랑스레
설명했다.
“제가 구한 그림이에요. 그녀는 성무 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강비(姜妃)에요. 평생 한 남자만을 좋아했으나 불행하게도
적장에게 살해된 여인이죠. 저도 평생 한 남자만을 좋아했으면
싶어요”
순수한 그녀가 마지막까지 적장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 죽음을
택한 그 전설에 감동하여 그림을 구해 걸어둔 것이다.
임숙영이 석실에 연이은 반대편 석실로 향하며 장평에게 부탁했다.
"제가 잠시 다녀올테니 이곳 석실에서 기다리세요.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해도 놀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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