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의 꽃은 아무데나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에 다시 뵐께요”
짧은 인사말과 함께 그녀가 빈 찻주전자와 집기들을
챙기고는 소축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떠나자 갑자기 장평의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감정의 공백이 생겨났다.
방금전 찻주전자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그의 흔들리는
마음인양 나무 탁자위에 상흔처럼 번져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저녁으로 가까와질 무렵에는 장평이 마음과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외원인 표국의 업무장으로 향했다.
표국외원은 내원과 또 다른 생동감이 감돌고 있었다.
영화표국을 상징하는 태양을 두른 청룡의 표식이 새겨진
깃발이 전각 기둥위에서 창공으로 비산하듯 표표히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태웅전이라는 전각앞 빈터에는 표사와 보표와 쟁자수들이
열심히 짐을 수레에 실으며 움직이고 있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표사의 우두머리인 표두들과 부국주의 분주한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장평이 방해할까봐 멀찌감치 서서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다가 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표국이 설립된지 십년이 넘었고 항주에서도 세손가락에
드는 큰 표국인지라 이끼낀 기왓장과 돌장식 하나하나가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찾아오는 의뢰자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듯 했다.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표국내의 깊은 우물곁에 와 있었고,
우물 바로 옆에는 커다란 물푸레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물푸레나무 아래 응지에 쌓였던 눈은 이제 모두 녹아 질펀한
푸른 잔디와 흙만이 저녁 햇살에 빛나고 있었으며, 물푸레나무
에는 능소화 덩굴이 높이 하늘을 향하고 자라나 있었다.
능소화 노란꽃 피면 가을장마가 시작된다 했다.
그때쯤이면 이곳 항주와 영화표국에서의 그의 낯선 생활도
적응되었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키큰 능소화 넝쿨 같이 그의
마음의 키도 훌쩍 자라나 있을 것이다.
장평이 첫날 하루를 그렇게 표국내부를 살펴보며 소일을 했다.
그리고 저녁무렵에는 국주인 황대녕이 돌아왔으며 기분이
몹시 좋아보였다.
마침 같이 국주를 동행한 표두의 말을 빌면 큰 표물을
수뢰했다고 했다.
어쩜 국주인 황대녕이 직접 표행을 맡아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
국주 황대녕이 생각하기에 칠일이 걸리는 표행의 최종 목적지인
읍속으로 가는 표행의 길은 큰 위험이 없었다.
표행을 무사히 수행하기 위해 안면 칠푼에 실력 삼푼이 필요한
이 바닥에서 그는 이제껏 잘 해온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축하는 의미에서 표두 이상의 간부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고 물론 장평에 대한 환영식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표국의 바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모두
내원의 넓은 별실에서 술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먹었으며,
밝은 유등이 장내를 밝히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처럼 맡은 큰
표물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서 장평이 부인했으나 내심 마음속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황유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친과 두 남동생 역시 참석한 편한 자리였으나
그녀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니는 화산파의 무관인 유천무관에는 오늘 아침부터
한 중요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 행사는 화산파 본산의 장로가 마침 이곳에 발걸음을
했기에 겸사하여 무술대련과 신입관원들의 승급시험이 있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뒤 모든 제자들과 관원들이 참석하는
연회가 있는 것이다.
화산파와 같은 대문파의 장로는 평소 하늘과 같이 보기
힘들었고 그들은 작은 문파 한두 개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언젠가 화산파 본산에서 수학하기를 희망하는 황유정 역시
그러한 모처럼의 본산의 높은 위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일찍 귀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녁식사가 끝났는데도 사람들은 남아서 술자리를 계속했다.
표국의 식솔들 대부분이 국주가 젊은 시절에 호남성 벽지의 한
이름없는 공산이라는 사문에서 무공보다도 오히려 그 다급한
성격에 맞지도 않게 도경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림문파라기보다도 실제적으로 도문에 가까운 작은
사문으로 간주한 공산 출신인 장평이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태양혈도 튀어나오지
않고 비록 눈빛은 맑으나 정광이 형형하지 않고 골격도 굵지 않은
외모때문에도 그의 무공실력을 그저 그런 정도로 생각했다.
세상에는 무당파와 공동파 같은 정통 도문의 이름을 도용하여
사람을 속이는 혹세무인의 인간들은 밤하늘 별같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그자들이 사용하는 무공초식 또한 겉으로는 요란했으나
사실 싸움에 임하여는 보잘 것 없었고 잘못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장평은 젊은 나이었으나 자신의 실력을 알고서
겉모습과 명칭만 거창한 삼류무공을 강호의 노련한 그들 앞에서
어리석게 내세우지 않는 것에 그들은 흡족했다.
‘겸허한 젊은이군, 세상이 넓은 것을 알고 스스로의 분수와 지닌
능력을 바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 청년이다. 앞으로 노력하고 선배
표사들이 잘 가르치면 향후 이 방면에서 쓸만한 표사가
될 것이다’
얼굴에 구렛나룻이 무성하고 사십대 초반의 방탁효 표두가
장평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의 낯선 자리에서 사람을 어려워
하고 행동을 조심하는 태도를 지켜보다가 마음에 들었던지
호감어린 목소리로 장평에게 제안했다.
“소형제, 자네도 국주님을 본받아 한번 이름난 표사가 되어
보게.”
“강호경험도 없는 제가 어떻게...”
표행을 책임지는 표사란 장평이 그제껏 되고자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그때 국주인 황대녕이 그 소리를 곁에서 듣고 말했다.
“그래, 장평사제도 이제 호호탕탕 사나이의 길을 가게나. 표사란
그렇게 세인들이 생각하듯이 위험한 직업이 아니다. 표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각지역의 녹림의 호걸들과 안면을 터두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스럽지 않다. 녹림의 영웅들도 계란을
한번에 많이 얻기 위해 암탉을 잡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결코
벌이지 않지. 그러다가는 그들 역시 무림공적으로 몰려 제명에
죽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사제도 돈을 모으고 마음에 드는 여인과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장평의 낯이 붉어졌고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 했다.
그때 그러한 즐겁고 소란스런 장내에 갑자기 황유정이 나타났다.
술자리를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자못 차가웠다.
남정네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흥청대는 것이 여인들의
눈에 별로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편한 심사에 관계없이 그날따라 기분이 좋은
국주 황대녕이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보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불렀다.
"하하!자랑스런 내딸 유정이 이제 왔구나, 유정아, 장평 사제도 있고
하니 이리와 잠시 앉았다 가거라"
그러나 그녀가 자기 부친과 술에 취한 사내들을 보더니 쌀쌀
맞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장평소협은 낮에 이미 뵙고 인사를 드렸어요. 오
늘은 무관에서 대련이 있어서 피곤합니다. 아버지, 소녀는
죄송하지만 일찍 자겠어요”
그녀가 부친과 한구석에 앉아 있는 장평에게 고개
를 잠시
숙여보이고는 이층 자신의 방으로 곧바로 걸어 올라갔다.
국주가 그녀의 매몰찬 뒷모습을 보며 섭섭한 듯 말했다.
“저년이 이제 다컸다고 아비 말도 듣지 않으니...쌀쌀맞기가
꼭 왕년의 제 어미를 그대로 빼다 박았군. 허허...사제 미안하게
됐네“
그가 황유정이 좌석에 앉지도 않고 방안으로 곧장 들어가자
오히려 말을 꺼내지 못함만 못했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죄없이
소박을 맞은 장평에게 미안함을 느껴 말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비록 사의를 표했지만서도 장평의 마음속에도 아쉬움이 남았
다.
그녀가 낮에 그에게 표시한 친밀한 감정이 괜히 그 혼자만의
착각인 듯 했다.
천연(天淵),
'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운영(雲影),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옛말과 같이 내원의 연못이 있는 정경은 달밖은 밤에 더욱
아름다웠다.
정원을 가꾼 이집의 안주인인 여백령은 밤에 뜨는 만월의
위치에 맞추어 피어나는 매화의 가지모양까지 정성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밤이 깊어 갈수록 좌중의
모두가 모처럼의 술과 강호기담과 피어나는 정원의 꽃봉오리의
정취에 깊이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파하지 않는 연회가 없듯이 시간이 늦어 자리가
끝나 모두가 귀가했고 장평 역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장평이 소축안으로 들어서니 거실 위 탁자에는 못보던
다과가 나무접시에 놓여 있었고 다과는 구하기 힘든 탕월이었다.
탕월은 '샨자'라는 열매로 만들었고 그위에 엿물을 입힌 것이고
한겨울에서 초봄까지 먹는 비싼 다과였다.
그가 생각하니 값이 비싸고 구하기 힘든 탕월은 오늘 저녁
회식에는 없던 것이었고 누군가가 그가 없는 사이에 놓고 간 듯
했다.
어쩐지 국주부인이 하녀를 시켜서 가져다 둔듯 했고
집안사람들의 위해줌에 감격하며 장평이 탕월 조각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뒤에는 그가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로 인해
한달전의 사부의 쓸쓸한 죽음을 잠시 잊은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이층 불꺼진 황유정의 방 창문이 조금 열렸고 그녀가
방안 어둠속에 서서 장평이 있는 소축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빛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침대 머리맡 탁자위에는 그녀가 이웃
유천무관에서의 연회후에 가져온 탕월이 대나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그녀의 은옥같은 손에도 역시 같은 탕월이 들려 있었고 그녀가
그것을 한 입 베어물며 혼잣말로 말했다.
"장평 소협, 그대는 좋은 분 같군요. 당신에게는 이곳 번화한
항주의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때와 오만이 없네요. 그 이유가
그대가 자랐고 제 부친이 꿈에서도 그리던 공산이라는 이름
때문인가요?
다른 사람을 위한 만큼이나 비어 있는 마음...공산이라는 이름은
참 훌륭하군요,마찬가지로 우리집 화분의 꽃도 비록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크게
자라지는 못해도 아무데나 함부로 뿌리를 내리지 않지요.
아무쪼록 항주에서의 그대의 내일이 희망차기를 바랍니다“
“잘 주무세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밤인사를 하고는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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