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서신
그날 밤이 늦은 시간, 영화표국의 내원에 위치한 정심소축앞에
얼마전까지 화산의 청진자와 대결을 벌였던 장평의 모습이
나타났다.
창문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그의 외딴 소축은 불이 꺼져 있는
채 어두웠다.
장평이 소축에 들어가기 앞서 국주 가족이 살고 있는 별채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2층에 있는 황유정의 방을 향했다.
미리 그가 저녁식사 약속이 있다고 말했기에 집안사람들이 그
리고 그녀도 그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녀의 방은 꿈결 같은 아늑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아
직 그녀가 자지 않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감히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며 그녀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하하하!-”
갑자기 그녀의 방에 붙어 있는 2층 진용, 진명의 방에서 동생
인 진명의 소리로 보이는 밝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
다.
장평이 순간 자기 자신도 정의할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들킨듯한 느낌이 들어 한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발걸음을 자신의 소축으로 옮기며 고개를 들어 맑게 개
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이 바라보이는 드넓은 창공의 별들은 푸르렀고 매화향기와
별채에서 들려오는 밝은 웃음소리로 이른 계절의 봄밤은 그윽
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봄의 꽃향기는 낮과 밤이 다른 것을 안
다.
봄밤은 한낮의 밝음 때문에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채워주는
것을 안다.
봄밤은 사람들이 멀리 떠나간 연인에게 서신을 적다가 채 끝
내지 못하고 그리움과 함께 다시 서랍속에 두는 시간이었다.
장평이 자신의 소축 나무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방금까지의 온화한 감정이 끝나고 방안에 있을 두 사람의
불청객이 생각난 것이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집 앞에 와서 남의집 같이 여기다니, 이것이 모두 그 경우
도 모르는 두 노인네 때문이다’
그가 그리 탐탁치않은 심정으로 소축 나무문을 열고 들어섰
다.
그리고 대청에서 옷을 갈아입은후 침실 방문을 여니 두 노인
이 아직 자지 않고 유등을 밝혀두고 편히 바둑을 두고 있었
다.
창문은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두터운 천으로 가렸고 하나밖
에 없는 탁자위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한주전자의 술과 오리고
기와 낙화생의 안주가 먹던채로 나무 젓가락과 함께 놓여 있
었다.
방안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는 장평의 마음이 당연히 편하지
않았고 몹시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무전취식하고 있는 두 노인네가 장평이 들어가도 눈여
겨 돌아보지도 않았고 창가에 놓인 말리꽃 작은 화분만이 그
의 귀가를 반기는 듯 했다.
'저 까마귀 같이 시커먼 도복을 걸친 노인도 내방에서 하루를 묵을
모양이구나‘
그러나 생각은 그래도 장평이 일단 공손히 인사를 했다.
“어르신, 잘지내셨습니까”
“응, 잘 다녀왔냐”
그제야 땅딸한 무영노괴 노인이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다시
바둑판에 시선을 향했다.
그나마 새로온 현의노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반상에 몰두
해 있었다.
장평 또한 바둑판 곁에 앉았고 금방 그도 바둑에 심취했다.
두 노인중 현의노인 실력이 월등히 나아보였으나 흑을 잡은 무영
노괴가 여러 점을 반상에 깔고 두는지라 대국은 팽팽했고, 관전자
역시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아는 실력이라 주먹을 불끈쥐며 반상
의 긴장감을 돋구었다.
그때 갑자기 현의노인이 무영노괴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이보게! 빨리 두지 못할텐가!”
비록 큰 소리였지만 현의노인이 무형간에 음파를 차단할 수
있는 고수라 음성은 방안에서만 듣는 사람들의 귓전을 왕왕거
렸고 소축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아 담장위의 쥐를 쫓는 어린
고양이의 발걸음소리조차 감싸지 않았다.
무영노괴가 두개의 대마가 사경에 처한 상태인 양곤마로 몰려
장고를 하고 있는 참이었고 장평 또한 그만그만한 실력이라
무영노괴의 입장에서 같이 심각히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
다.
“무슨 소린가,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체신머리
없게 재촉하지 말게”
생각을 방해당한 무영노괴가 오히려 역정을 내었다.
“벌써 반다경은 지났네. 계속 그렇게 장고를 하면 언제 한판
을 다둘 것인가?”
“어떻게 반다경이나 지났는가? 자네가 둔지가 불과 얼마 되었
다고 명색이 무림십기라 불리는 유명한 고수가 시간도 하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가!”
무엇보다 두 사람은 내기를 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성질 급한
무영노괴마저 자주 장고를 하곤했다.
증거를 입증할 방법이 없으면 입담이 센쪽이 이기는 법이다.
현의노인이 무영노괴의 우격다짐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장평을 향해 말했다.
“네가 앞으로 한쪽이 두고난 후에 바로 시간을 계산해라”
장평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현의노인을 쳐다보니
노인이 기발한 생각인듯 자랑스레 설명했다.
“상대방이 한수를 둔 다음 스물번 헤아리는 동안에 두지 않으
면 무조건 지니 마음속으로 정확히 헤아리고 그전에 열다섯번
째가 되면 알아듣도록 소리내서 헤아려라”
그리고 본인의 발상에 극히 만족한 듯이 무영노괴를 어떻냐는
듯이 돌아보며 다짐조로 말했다.
“자네도 물론 이의가 없겠지?”
무영노괴 역시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것 괜찮은 생각이네”
장평이 눈치를 보아하니 이번 한판으로 끝날 것 같지 않고 그렇다
면 매판 매수마다 수를 세어야한다는 것은 분명 귀찮은 일이
었다.
장평이 반대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싫습니다. 저는 이제 잠을 자러 가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대청에서 자려고 침실을 나서
려 하자 현의노인이 바둑판 앞에 앉은 채로 두눈을 부라리며
역정을 내었다.
“이놈! 네녀석이 감히 노부의 말을 거역하다니! 네녀석이 더
이상 살생각이 없단 말이지“
장평도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어떻게 저녁에 만난 화산파의 노도장부터 지금의 낯선 노인까
지 하나같이 괴팍했고 모두가 사람 알기를 바둑판의 죽은 바둑 돌
같이 마음대로 취급했다.
장평이 이제는 인정사정없이 필히 두 노인을 자기 방에서
몰아내겠다고결심을 단단히 했다.
특히 나중에 나타난 현의노인은 비싼 옷차림으로 보나 깔끔한
매무시를 보더라도 어디 가더라도 장평 자신의 방보다는 호화
로운 곳에서 기거할 것이다.
그렇게 이번에는 인정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장평의
굳은 각오가 그대로 눈빛에 드러났고 마찬가지로 화가난
현의노인이 갈쿠리 같은 손을 들어 장평의 완맥을 제압하려는
급박한 순간이었다.
“잠깐 멈추게!”
갑자기 참견하는 무영노괴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무영
노괴를 쳐다보았다.
무영노괴의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장평이 죽고 사는 것은
그가 상관할 바 아니나 바둑 두는 도중에 시체를 보는 것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제 자신의 지난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은연중에 정
이들었는지 자신의 눈앞에서 죽게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영노괴가 일단 장평을 타일렀다.
“이보게, 젊은이란 물론 불굴의 기상과 오기가 있어야 하지. 그
러나 항상 누울자리와 설 자리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렇지 않으면 그 혈기에 모두 애꿎은 목숨만 잃고 북망산에 무
덤은 이미 넘쳐나 지금쯤은 사람이 묻힐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젊은 혈기에 자기 죽을줄 모르고 오기를 부리는
장평의 기분을 맞추는든 하더니 이번에는 은근한 말투로 말했
다.
“만일 네가 정 내키지 않으면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떻느냐? 네
가 숫자를 세어주면 노부가 대신에 세상에 구하기 힘든 정말
좋은 것을 구경시켜주마”
그리고 품속에서 한 손때가 묻은 책자를 꺼내었고 그 책자가
무엇인지 아는지 현의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무영노괴가 책자를 장평에게 건네며 말했다.
“첫장을 펼쳐 보아라”
장평이 손에 쥐어진 얇은 책자를 무심결에 펼쳐보니 한 여인
의 그림이 있었다.
그림속의 여인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끌 정도로
아름답고 요염했다.
장평이 몇 년 전인가 공산에 있던 그날도 새해 원단이 갓지난
추운 한겨울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쌓인 눈을 헤치고 산아래 마을로 물건을 사러
갔다가 마침 우연하게도 한권의 손때 묻은 책자를 구했다.
당(唐)대에 지어진‘앵앵전’이라고 제목이 적힌 그글을 밤새
사부님 몰래 이불속에서 읽으며 그는 여인의 매력과 성애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읽던 글속의 여인이 지금 그림속에
다시 살아 환생한 듯 했다.
그림속 백의차림의 여인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내리고 물에 젖은 듯 윤기가 났고, 두 눈썹은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같이 아름답고 초승달 같이 예뻤으며 살구씨같이 동그
랗고 아름다운 두 눈은 크고 검은 빛이 나며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앵두같은 빨간 입술에 치아는 하얗고 코는 오똑 치솟고 조각
한 듯 했고 뺨은 부드러운 분홍빛을 머금었고 얼굴은 애교가
철철넘쳤으며, 몸매는 나긋나긋한 꽃잎같고 섬섬옥수는 파같이 가늘고 길며
부드러웠고, 허리는 버들가지 같이 날씬했고 피부는 백설같
이 희고 부드러웠다.
여인의 염기에 장평의 혼이 달아난 듯 했고 그가 당황하여 엉
겁결에 급히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그 다음 장은 앞장과 동일한 여인이 반나의 차림으로
창밖의 매화나무를 배경으로 창틀에 기대 앉아 있었고 , 한겹
겉옷을 벗어 허벅지를 드러낸 자태가 장평의 눈앞에 드러났
다.
그리고 옆에 그려진 그림에는 나긋나긋한 하얀 복부와 그가
태어나 처음보는 여인의 풍만한 가슴부위가 마치 실제와 같
이 버찌와 같은 유두가 드러난채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장평이 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며 책자를 그만 덮고 말았다.
그의 그러한 반응을 이미 예견했다는 듯이 무영노괴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책자는 지금은 죽고 없는 이름난 화공인 유철공이
그린 것으로 노부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다. 내일 저녁 이 시
간 까지 빌려줄 것이니 가져가서 보아라. 대신 필히 반납해야
한다“
장평이 그만 무영노괴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래서 밤이 늦을 동안 세 사람은 바둑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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