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터밭
그들이 들어간 정의전 전각의 내부는 밖에서 보기보다
더욱 크고 넓고 화려했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집무를
보고 있었다.
황유정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고 장평 또한 넓은 집무실에 놀랐으나 한눈을 팔지
못하고 그뒤를 따랐다.
이층 역시 몹시 넓었고 그중 중앙의 가장 크고 웅장해
보이는 집무실 앞에는 커다란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고,
어린 도동이 탁자위에 연적과 종이를 두고 열심히 먹을 갈고
있다가 황유정이 관주를 뵈러 왔다는 말에 박꽃같이 맑은
얼굴과 손에 잔뜩 먹이 묻은 채로 기별을 알렸다.
그리고 잠시후 두 사람을 방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두 사람이 햇살이 밝게 비쳐들어오는 실내로 들어서니
한곁에 놓인 업무용 자단목 탁자앞 의자에 한 노도인이
편히 담요를 무릎위에 두고 앉아있었다.
노도인이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담요를 걷고 천천히 일어서며 시선을 두 사람에게 향했다.
노도인은 육십 정도로 보였고 키가 작고 여위어 보였으며
늦은 이월의 날씨가 쌀쌀한지 목면수건을 목부분과
하얀 도복 상의 위에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겼고
장평이 생각하기에 분명 유천무관의 관주가 분명했다.
"제자 황유정이 관주님을 뵙습니다"
황유정이 먼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고 장평 역시 그녀를 따라 인사를 했다.
노도인이 두 젊은이의 인사를 받고는 흐뭇한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백매검 황유정이 모처럼 할일 없는 빈도를 찾아 왔구나.
어젯밤 꿈에 정의전 창밖의 매화나무가 흰 몽우리를 한꺼번에
피우고 평소 보이지 않던 휘파람새가 바람결에 가지에 앉아
울기에 화산의 본산에서 누가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더니 한겨울 눈보다 흰 매화를 닮은 유정이가 시간만많은 노도를 찾아
주었구나”
“죄송합니다. 제자가 그동안 많이 격조했습니다”
노도인이 두 사람을 실내의 단목나무로 된 탁자앞 의자에
앉게 하고는 자신도 맞은 편 자리에 먼저 앉았다.
장평이 곁에서 지켜보니 노도인과 황유정 사이에 오고가는
짧은 대화지만 말속에 조손의 정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실내의 단목 정향과 함께 창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매화의 향기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고 쾌청하게
해주고 있었다.
노도인이 이번에는 장평을 향해 말을 건넸다.
“노도가 부족하나마 이곳 유천무관의 관주
직함을 맡고
있는 보현이라 하네. 자네가 호남성 공산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장평인가?”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와 했다.
장평이 공산에서 내려온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황유정과
묵시했고 더구나 아직 무관에 입관할 의사조차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보현진인이라고 도호를 밝힌 나이든 관주가 미리 알 까닭이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의 의구심을 풀어주듯 관주가 황유정을 향해
말했다.
“네 부친이 아침나절에 먼저 다녀갔다”
그제야 두 사람이 이해가 되었다.
장평을 위해 미리 황대녕이 두 사람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녀간 것이었다.
더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사람을 시켜 가입비와
월회비까지 한꺼번에 완납한 것이다.
장평과 황유정이 내심 황대녕에게 고마워했다.
다시 관주가 장평에게 물었다.
“자네 사부님은 어떤 뛰어난 분이신가? 황대녕 국주의
이야기로는 그곳에서 마음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다. 한 사람이
개인의 신분이 아닌 명망있는 표국 국주의 신분으로 , 그리고
무림에서 구대문파라는 명문정파중 하나인 본파의 제자로서
잘못 오해를 살 여지를 알면서도 오랬동안 과거의 사문을
추억하며 다시 그곳과 사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황대녕이 공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고
역시 관주에게도 부지불식간에 공산에 대한 자랑을 섞어
들려준 것이다.
장평이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돌아가신 사부님의 함자는 천허 풍현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평생을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산속에서만 사시다가 한달 전에
타계 하셨습니다”
장평이 기억하기로는 사부는 평생 산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황유정은 장평에게 산의 기운이 물들어 있다 했다.
그러나 사부는 산 그 자체였다.
산은 평소 결코 지루하지 않고 어느 한 곳이라도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산은 또한 한결 같았다.
관주인 보현진인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범인들이보기에는 애초에 두드러지지 않아 보이는
나무가 산을 지키는 법이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요란해
보이는 나무는 일찍 옮겨져 부호의 정원을 치장하는 관상수가
되나 결국 일장이 넘게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나무때 특출하게 드러나 보이지
산에
남은 나무는 나중 그 숨겨진 진면목을 드러내어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거목이 되는 법이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인지라 큰
인물은 본래 산에 남는 법이다. 빈도와 같이 풍진속세에 발을
담그고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지”
그때 황유정이 말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간세상 자체가 곧 도인들이 진정으로
갈고 닦아야 될 마음의 터밭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도인인 관주가 산에서 내려와 풍진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점을 오히려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관주가 그녀의 하는 말뜻을 알기에 흐뭇해했다.
“유정이는 참으로 총명하구나. 네 부친과 사부에게 있어서 큰
홍복이로다”
평소 황대녕이 그의 장녀를 자랑하던 모습이 노진인의 눈앞에
훤했다.
그가 이제 온화한 눈빛으로 장평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의 입관은 이미 노도가 아침에 황대녕 국주
ㅣ
에게 허락했네.
영화표국의 사람은 항상 자격이 되지. 그런데 무관에서의
배속과 위치를 지금 결정해야 되니 현재 자네의 무공수준은
스스로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질문은 장평을 소개한 황유정에게도 마찬가지로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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