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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8086 님의 서재입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K8086
작품등록일 :
2014.08.06 07:20
최근연재일 :
2014.08.21 00:03
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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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2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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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쪽

15화

DUMMY

나는 전장의 한가운데를 걸어나갔다. 나를 수행하려 양 옆에서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참모들은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전쟁은 끝났다. 전쟁터에 남겨진 수천구의 시신과 병장기들... 나는 그 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서 전장의 한가운데서 동쪽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 필립 재상에게 다가갔다.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나요? 당신의 옛 주인..."


잠시 후 그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며 말했다.


"알고 계셨나요?"


"들었습니다. 루이 첩보관을 통해서요...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여왕폐하의 이야기를요..."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추억을 음미하듯이 감상에 빠져든 그가 입을 열었다.


"성군이 되실 분이었습니다. 종교의 관용과 빈자의 사랑과 기득권자의 자제를 갖춘, 십자군의 시대를 종결하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중간에서 평화의 땅으로 남고자 했던 예루살렘의 희망이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분의 재상이며, 보호자며, 섭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분을 모셨고 그분을 통해 이 땅에 영원한 평화가 올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분도 저를 신뢰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당신이 제게 재상직을 맡기며 했던 말... 재상은 나라를 치유하는 의사라는 말... 그분이 제게 하셨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사적인 아이유브는 우리의 입장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냈고, 그래서 평화는 이뤄지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하 중

과격파인 맘룩의 수장 바이바로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교도의 피와 절규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지하는

그들의 주인마저도 속이는 계략을 짰습니다. 저는 아이유브의 공격 소식에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였고,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인

클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그들과 조우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 아이유브의 부대 또한 속아서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저에게 여왕폐하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맘룩에게 기습당하고 내부의 배신자에게 성문이 열려 시가전이 벌어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죄가 없는 아이유브의 군대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유럽 최강의 기병대를 이끌고, 그곳에서 주저앉아

왕국와 주군이 불타없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넓은 등에 몸을 기대고 말해주었다.


"아름답고 현명했던 멜리장드 여왕님... 저같은 건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가 당신의 주인이니

그분을 대신해서, 그분이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편지에 쓰지 못했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폐하..."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슴속의 회한을 버리고 미래를 위해 살아주세요."


그가 눈물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네에... 그렇죠. 그분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을겁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그리고 복직을 명령합니다. 나의 재상이시여... 그리고 돌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이번에는 늦지 않게 돌아와서 제 마음속에 한이 풀어졌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주님과 나의 왕에게 감사드립니다."




내가 다음으로 발걸음을 향한 곳은 베니스인들의 흥겨운 파티장소였다. 그들은 처치한 제노바인들의 전리품을 끌어모아 놓고

신나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내가 걸어가자, 그들은 이탈리아 남자들 다운 반응으로 나를 보며 페르몬이

넘치는 발언과 응대를 했다. 나는 그들의 나의 미모에 대한 칭찬에 조금 우쭐한 기분을 느끼며 그들 가운데에서 제일 신나게

웃통을 까고 놀고 있는 안젤모 재무관에게 다가갔다.


"흥겨워 보이시네요... 총독님."


"허허허... 도제라니깐요. 뭐, 이젠 이짓도 끝이군요. 폐하의 앞에서 이제 함부로 왕급의 작위를 논하는건 역적이나 할법한

일일테니 말입니다."


"괜찮아요. 정말 도제셨잖아요."


그는 어께를 으쓱하며 말했다.


"철없던 시절에... 교편잡는게 지겨워서 좀 외도한 경력입니다. 덕분에 추방까지 먹을줄은 몰랐죠. 아무렴 어떻습니까?

전 여기가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에 깃든 우울한 얼굴을 분칠로 가리고 일하는 거리의 소녀들을 돕는 건 나름 가슴이

저미면서도 그 아이들의 안심하는 표정을 보는게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당신을 만났죠. 슬픔을 가슴에 묻고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당신을 보고, 늘 비난만 늘어놓으며 세상을 살아온 제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었고, 제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당신을 보며... 당신같은 주인을 만나 보좌를 한다면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는 좀더 나은 결과를

내놓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게 해임당하셨을때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군요. 왜 돌아오셨죠?"


"아! 그거 말입니다. 퇴직금 정산이 안끝났습니다. 상법에 의하면 퇴직금 정산 지급이 끝나기 전까지는 전 조직에 소속입니다.

저 퇴임시키시려면 퇴직금 지급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늘 유쾌한 나의 재무관... 그는 항상 나의 편이었다. 지위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에 대한

친절과, 인생에 대한 즐거움, 그리고 부와 모험을 찾아 넘치는 그는 백발을 흩날려도 변함없이 젊은 시절의 정열을 간직한

이탈리아의 청년이었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죠? 전 땡전한푼 없는 거지인데요. 팔아서 드릴 왕관도 없는 가난한 왕이랍니다. 드릴 퇴직금이 없는데요. 어쩌죠?"


"유감이군요. 그럼 전 돈받을때까지 안나갈겁니다. 천년만년 버틸테니 어디 내보내 보시려면 내보내보시죠."


그때였다. 그의 곁에 있는 한 남자가 일어서며 말했다.


"저런 거짓 공갈에 속지 마십시오. 폐하... 상법에 의하며 직원의 경우 기업과 행정 조직은 퇴직금을 정산해주기 전까진

조직에 속하지만 임원의 경우는 해당 해임 분기중에 본인이 직접 해당 퇴직금을 청구해서 찾아가도록 절차가 명시되어

있고 분기가 끝날때까지 받아가지 않으면 지급 무효로 처리하고 다음 회계분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교수님의 그런 공갈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아름다운 국왕폐하..."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는 이탈리아인 답게 멋지게 내 손등에 키스하며 대답했다.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로시니 학파 1기 연구생, 로베르 그라치아니 입니다. 베니스의 전임 치안 감사관이자, 크레타 주둔

함대의 사령관으로도 복무하였습니다. 보아하니, 노망난 소리만 하는 우리 교수님 면직시키신 모양인데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빈 자리에 후임을 아직 안채우셨다면 저는 어떠십니까? 교수님이 하셨던 정책들은 저도 일관성을 가지고 진행할수 있고,

거기에 더해서 제 이력을 살려서 앙주의 해군 양성에도 복안을 제시할수 있습니다. 멋진 대양 해군과 전세계를 관리하는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당신에게 세상의 모든 재화를 받치겠나이다. 한번 써보시지요?"


그의 말에 안젤모 재무관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로베르 이 녀석...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직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허억... 이 망할 녀석... 그동안 키워줬더니 스승의 뒷통수를 치려하다니..."


"아, 말은 제대로 하시죠. 없으신 사이에 로시니 학파 결집시키고 생계 챙기며 숨죽이고 조직 유지시킨게 누군데요? 이제 스승님은

슬슬 여유롭게 원예나 하시면서 은퇴하시고 저한테 일 넘기시죠?"


"누구 마음대로! 네가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좋다! 승부를 내자. 앙주의 국민총생산 실적으로 한판 붙자!"


"콜! 베니스의 두배 먼저 달성하는게 기여도 평가로 하시죠."


"이 고얀놈... 네가 감히 스승을 노려? 제대로 탈탈 털어서 울며 빌게 해주마. 안토니오, 기욤, 서류 챙겨라..."


그러나 그가 말한 두 젊은이중에 한명은 조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수님, 안토니오는 교수님을 따르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로베르 선배가 승산이 더 높아보여서... 저기로 붙겠습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내가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구나... 그래 좋다! 나를 꺽어봐라. 젊은 것들아... 본때를 보여주지."


"나이 생각도 좀 하시죠. 이제 저희들의 시대입니다. 한방 제대로 먹여드리죠."


나는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결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결국 더 많은 앙주의 시민들의 부와 행복이

가득하게 될것이다. 나는 재무부의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면 저 고집스럽고 낭만적인 이탈리아 재주꾼들이 서로 안부딪치고

효율을 낼수 있을지 즐거운 고민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언덕받이에 홀로 서서 전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오늘의 체스시합은 어떠셨나요? 예상하신 기보대로 움직였나요? 체스마스터 루이 느베리님."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게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같은 아이의 밑에서 일하실 분이 아니란건 알게 되었어요. 전 유럽에 깔린 복잡한 첩보 네트워크를 자기 손바닥

보듯이 다루며 수많은 황제와 왕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선사하셨던 인물... 유럽의 지도를 체스판으로 두고 권력자들을 장깃말로

삼아 체스를 두시는 어둠의 지배자... 아니신가요? 맞다면 저같은건 감히 만나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무서운 분이시잖아요.

왜 제 밑에 계셨죠? 저도 하나의 체스말이었나요?"


"오해하고 계시는 거 맞군요. 그 오해를 풀어드리죠."


그는 나지막히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첫째, 저는 체스를 두지 않습니다. 둘째, 저는 엄청난 비밀 조직을 거느리지 않습니다. 셋째, 당신은 체스말이 아닙니다.

하나씩 설명드리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틀림없이 체스마스터입니다. 하지만 유럽을 배경으로 한 왕좌의 체스를 두지는 않습니다. 마스터라는 말은... 스승이자

조언자를 뜻하는 말이지 실제 체스를 두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체스를 두는 사람의 곁에서 기보와 훈수를 두고

실력을 높이기 위해 교육을 할수는 있어도 직접 체스를 두지는 않습니다. 가끔... 제가 두는 훈수를 잘 받아들이지 않고 짦은

안목으로 악수를 두거나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서두르는 자들은 자신의 의지로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은

그들의 기보일뿐 저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살인애호가는 결단코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대단한 첩보 네트워크를 가지지 않습니다. 정보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자신의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는 왕이나 방백들이 저희들에게 정보를 팔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럼 저희들은 뭔가 오래된 양피지 같은 서류에

가능성을 대단히 고어체로 적어서 복잡한 전달과정을 거쳐 전달해주면 그들은 뛸듯이 기뻐하며 정보를 맹신하죠.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더군요. 그냥 반란이 일어날지 알고 싶으면 시장에 나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장사꾼 아주머니들에게

물어보라구요. 그 사람들의 생각이 곧 현실로 일어나니깐요.


정보는 세상에 널려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소리에 귀기울이며 들을수 있습니다. 그것이 들리지 않는 다면 못듣는 것이 아니라

안듣는 것입니다. 저와 저의 동료들은 오랫동안 그런 자들을 상대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의 구미에 맞게 가끔은

그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절망을, 가끔은 존재할리 없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희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선물했을 따름입니다.

그들이 뭔가 대단한 첩보 요원들일것 같습니까? 저의 동료들은 다들 그냥 평범한 시장 상인, 농부의 아낙, 행상의 자식 같은

민중들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텐데요. 민중의 소리를 들으라고요.


마지막으로 당신은 우리 체스가 오랫동안 만나기를 고대하던 귀 기울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장기말로 체스를 두지 않습니다.

아니, 둘수조차 없습니다. 이미 언급했었죠? 우리는 체스를 두는 자가 아닌 조언하는자라고요. 그리고 우리의 조언에 귀기울이는

당신, 당신이 바로 체스 플레이어, 백성들의 부름을 듣고 체스판에 임한 자, 적진에 도달하여 퀸(Queen)으로 승격한 폰(Pon),

이 땅위에 왕좌의 게임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얼굴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나의 첩보관... 그리고 세상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진정한 왕을 찾는 어두운 세계의 방랑자... 나는 그의 방랑을 마치고 마침내 정착한 안식처인것일까?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귀환과 그가 나를 위해 행한 행동에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고 조용히 감사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파면도 취소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멋진 캐슬링이었습니다. 나무의 성벽에 병사들을

데려와 앙주를 보호하고 반격에 성공하셨군요. 당신에게 묻습니다. 제 다음 기보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것은 체스 플레이어의 뜻에 따라... 저희는 다만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말들을 움직여도 상관없을 듯

합니다만... 일단은 적의 킹에 체크메이트를 날린 나이트에게 가서 위로를 하심이 어떨지요?"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죠. 동행하세요. 직무의 복귀를 명합니다. 처음에 말했듯이 제 곁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처벌입니다.

그리고 오늘 한가지를 더합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제게 백성들의 소리를 더 많이 들려주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에 왕을 세우는 자가 누구인지를...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이

누군지를...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자가 이땅에서 벌어지는 체스에서 체크메이트를 외치는 자임을요."


"훌룡하십니다.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역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병력차이를 돌파하여 승리를 가져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방법론에 있어선 명장들의 수만큼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운 승리를 마치고 여운이 가시지

않은 주둔지에서... 헛구역질을 쉴새없이 하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에라드의 모습도 또한 명장들이 모여주는 그들만의 개성...

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에라드의 부하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였다. 여기저기서 토악질을 하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 보이며

옷차림이며 무장상태며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버린 잉글랜드 경기병대...

이제는 퀸스가드의 현황이었다. 차라리 저너머에 멍하니 영혼이 빠져나간 모양으로 포박된 프랑스 중장기병대의 포로들이 훨씬

멀쩡해보였다. 패잔병과 승리한 병사가 서로 뒤바뀐 모양새였다.


이미 그곳에는 에드워드 왕자와 마틸다가 와서 제일 열심히 구토에 매진하고 있는 에라드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너무 과소평가 했군... 정말로 해내다니... 위에서 보고 있는데 기가 막히더군. 이제는 어디가서 기병대 지휘하겠다고

명함도 못내밀겠구만. 이런 전설을 눈앞에 두고선 알아보지도 못했다니... 미안하네."


"우에엑... 그만 하십시오. 정말로... 정말로... 한번, 이번 한번만 운좋게 된겁니다. 두번은 죽어다 깨도 못해요. 아마도 상상도

못하실겁니다. 사람이랑 말이랑 철갑옷이 랜스가 닿는 순간 치즈처럼 뭉게지는 느낌을..."


나는 멀리서 관전했던 얼마전의 모습을 잠시 회상했다. 그것은 정말로 무자비한 압살이었다. 퀸스가드의 창이 닿는 순간 전면에

도열한 프랑스 중장기병들은 순식간에 피떡이 되서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인마를 에라드의 묘사처럼 치즈 뭉게듯이 뭉게버린

창은 폭발하듯 박살나서 흩어져버렸고, 그 파편에 2열과 3열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조준이 잘맞은 병사는 무려 3열뒤까지 적을

관통해버렸고 1열에서 4열에 도열한 2군은 그대로 전투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리고 1군이라고 해서 무사할수는 없었다. 그 충격에서 퍼져나오는 충격과 전열에서 붕괴하는 아군의 혼란은 삽시간에 1군에도

전염되어버렸고, 부러진 창을 버리고 세이버를 뽑아들고 닥치는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베며 전진하는 퀸스가드의 공격에 그들은

허수아비처럼 무력했다. 상당히 많은 병사들이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어졌고 지금 잡힌 포로들이 바로 그자들이었다. 그렇게 단

한번의 공격으로 유럽 최강의 기병대를 박살낸 퀸스가드는 그대로 적진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빠져나왔고, 그것을 신호로 모든

프랑스군은 일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비규환의 추격전이 이어졌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같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제가 떠나라고 명령했을텐데요... 떠나서 마틸다와 아이랑 같이 행복해지라고 명령했는데... 돌아와버리셨군요."


그는 구역질을 하면서도 힘겹게 대답했다.


"우리의 행복은 다 이곳에 있습니다. 명령 불복한거 아닙니다. 명하신대로 행복찾아 돌아온겁니다. 우에에엑..."


나는 다시 토악질을 하는 그의 등을 두들기며 미소지으며 물었다.


"기분이 어때요?"


"죽을 만큼 술퍼먹은 기분입니다."


"아뇨 그거 말구요. 유럽 최강이 되신 기분이 어떠시냐고요?"


"우에... 엑? 꿀꺽! 켁... 켁켁켁...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럽 최강이라뇨. 누가요? 저요?"


"아닌가요? 유럽 최강의 군대를 최악의 군대로 박살내 버리셨잖아요. 이제 많이 바빠지시겠어요. 수많은 국가와 제후들이

당신을 주목할테니깐요. 마틸다, 너는 기분이 어때? 사랑하는 남자가 최고의 자리에 올랐잖아."


에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마틸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마틸다는 에라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저렇게 구토나 하고 있는 최강은 어디다 쓰라구? 한심한건 변한거 하나도 없어. 그래도..."


그녀는 에라드는 살작 치켜보며 말했다.


"앞으로 잉글랜드 개자식에서 개는 빼고 잉글랜드 자식으로 승격시켜서 불러줄께."


"야! 그게 뭐야!"


"어라? 지금 임산부앞에서 폭력 쓰려는거야? 그런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 좀 심하잖아. 그래도 엄청 고생했는데..."


"됐고, 다 토했으면 먹을꺼나 좀 챙겨와. 아기가 딸기가 먹고 싶데."


"아니, 그걸 내가 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퀸스가드의 병사들과 에드워드 왕자가 웃으며 그의 순박한 행동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기적이라 묘사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당연한 결과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신에게 소중한것을 위해 노력해오다 마친내 영광의 순간을 손에 쥔 승리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와 축복을 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스위스 용병대와 사제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엄숙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세속군주들에 의해 임명된 주교들이 보여주는 경박한

약식 미사가 아닌 오랜 전통과 성스러움을 간직한 전쟁터의 생자와 사자를 위해 드리는 미사에 나는 절로 성호가 그어지고 그런

미사를 주도하는 앙리 주교... 아니 추기경에게 지고의 위엄을 느꼈다. 한참후 미사를 마치고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추기경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해해라."


"네?"


"고해할것이 있을텐데? 죄가 없다 주장할 셈인가?"


나는 그의 사나운 모습에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대답했다.


"혹시 저한테 면직당하신 것 때문에 삐지셔서..."


"그 입 다물라! 네가 감히 저지른 죄를 심히 가볍게 보는구나. 너는 교회의 사제를 다른 타락한 세속군주들 처럼 네 마음대로

서임하고 파면하였다. 네가 감히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내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간 주님이 용서치 않을것이다."


나는 그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잠시 기가 죽었다. 그리고 잠시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회개합니다. 상황이 다급하여 교회에 주어진 사제의 서임을 임의로 하였나이다. 반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빕니다."


"주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앞으로 다시는 내 주교령에 손대지 마라. 지금까지 저당잡혀서 돈을 빌리거나, 도때기 시장을

만드는 건 용서했지만 이런 짓을 다시 한번 더 저지른다면 주님의 군대가 철퇴를 내리치는 건 네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네에..."


그는 여전히 기세 등등하게 나를 쳐다보며 화를 내고 있었다. 덕분에 그와 동행해온 각지의 성자의 반열에 드는 주교와 사제들은

그에게서 나를 두둔해주느라 연신 우리 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했다. 돌아와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죽기보다

듣기 싫은 마음과 더불어 자신이 더 강경하게 나와야 내 신분에 대해 이견이 있을 사제들이 되려 나를 두둔하게 하기 위해 그는

더 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병사들을 위로하러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


"그래도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추기경이 되신것도 축하드립니다. 인펙토레 추기경이라면 교황성하가 가장 신뢰하는

가슴속에 비밀로 그 정체를 담아두는 추기경이라 들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교황이 되실수도 있겠군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카톨릭의 지고의 자리가 그리 쉽게 보이더냐. 그 자리에는 지상에서 주어진 주님의 막대한 과제를 감당할 종에게만 허락된 책임이

따르는 자리다. 내가 감히 논할 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설사 내게 그런 입장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거절할것이다."


"왜요? 주교님이라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교황의 자리는 명예와 위엄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그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너와 네 놈들이 저지르는 각종 사건사고들에

대해서 죽빵을 날려줄수 없고, 그럼 아무도 네 녀석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으니... 그건 마치 맹수를 목줄도 없이 풀어주는 것과

같다. 나는 앙주에 머물며 네놈들이 저지르는 일들을 평생 감시할것이다. 너도 그래달라고 했으니 발뺌하진 않겠지?"


나는 미소지었다. 진정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늘 무뚝뚝하고 원리 원칙만을 주장하는 앙주의 보수주의자... 나는

그로 인해 자만하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진다. 나는 어린 시절 부터 지금까지 평생동안 내

걱정을 하며 떠나지 않는 우직한 사제의 팔에 팔짱을 끼고 걸었고, 그는 몇번 뿌리치다가 마지 못한듯 그대로 걸음을 걸어갔다.




잠시후... 모든 나의 각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서로 웃으며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제 기운을 차린듯

스스로 걸어다니는 에드워드 왕자도 그곳에 모여 우리가 이뤄낸 성과에 대해 감탄했다. 그러던 와중에 저너머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필립 재상이 말했다.


"프랑스에서 사절을 보내오는 군요. 역시, 예상대로군요. 저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물자도 거의 다 떨어졌으니 그들에게도

이제 한계겠지요. 제가 가서 얘기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제지했다.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그들은 나의 말에 한걸음 물러났다. 사절이 우리에게 다가오자, 루이 첩보관이 귀띰해 주었다.


"샴페인 공작, 위그 카페입니다. 왕을 제외한 최고위 사령관이 직접 오다니 어지간히 사정이 다급한 모양이군."


나는 한걸음 나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샴페인 공작은 내 앞에서 속도를 줄이고 멈춰섰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앙주의 마녀에게 지엄하신 프랑스 국왕폐하께서 고하신다. 지금 발생한 이 전쟁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주시기로 하셨다.

전쟁에 대한 사과와 우리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제시한다면 특별히 자비를 베푸시어 이 전쟁을 여기서 종결하고..."


"꺼져라."


나의 말에 위그 카페는 물론 내 측근들까지도 당황해했다. 위그 카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나는 프랑스 왕의 정식 외교 사절로서..."


"너랑 할 얘기 없다. 대화? 대화를 하고 싶다면 격에 맞게 너희 왕에게 직접 나오라도 전해라."


그가 분노해서 소리쳤다.


"지금 지엄하신 우리 폐하보고 나오라고 말하는 거냐? 그분께서 천한 너희들과 같은 자들과 대등하게 협상할꺼라고

생각하나? 이 요망한 계집이..."


"나 또한 왕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나오기 싫다면 나오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역겨운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건 우리보다는 너희쪽일꺼라고 생각하는데?"


"......"


"가서 전해라. 대화를 원한다면 직접 나오라구. 그것도 오늘까지만 유효할것이다. 내일부터는 더이상의 대화따위는 없다."


그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말을 몰아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후... 몇몇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기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에라드에게 명했다.


"가서, 동행을 치우라고 전하세요. 나 또한 혼자 갈것입니다. 왕과 왕으로 대화 할것이며 원치 않으면 돌아가라고 전하세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몰아갔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프랑스 기사들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실랑이하고 격하게 항의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고, 창이 내밀어지자... 그들은 마지못한 듯 불안해 하며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말에 올라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 주변에 신료들이 물러났다. 서로 얼굴을 마주볼만큼

가까워지자 그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다. 짐과 독대를 감히 청하다니... 그리고 왕을 사칭하는 계집이여. 네가 감히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도

무사할거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수 있었다. 그는 자격이 없는 자다. 죽음의 순간에 왕으로 선택받은 내 눈에 그는 그저

장난감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떼쓰는 어린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싸우자. 부대를 동원하여 한쪽이 전멸하는 순간까지 싸우자. 나는 이런 말장난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대가

남자라면 여자를 지루하게 하지 말고 피와 절규와 검으로 대화하기를 선택해라."


그가 움찔했다. 한방에 무너질 허세다. 그는 한참동안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 그대들의 두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다. 한번의 승리로 그 얄팍한 승리가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하느냐?"


"그럴거라 생각한다. 병력차이가 두배든 열배든... 더이상 그대들의 진영에 나의 기사들, 퀸스가드에 정면으로 맞붙을 상대가

남아 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모든 힘이 이곳에 모여있다. 이곳이 우리의 나라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모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어떤가? 그대의 모든 봉신들이 이곳에 와서 나의 봉신들처럼 그대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게

할수 있는가? 그대의 나라 모든 곳에 지킬 병력이 존재하는가? 자신있다면 말은 그만두고 제대로 붙어보자."


그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정말 모든 앙주가 불타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분명, 우리가 조금 열세에 처한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의 전력은 아직 굳건하고

굳이 이런 모욕적인 협상없이 그대로 퇴각하였다가 나중에 군비를 정비하여 다시 돌아올수도 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이런 제의를

하고 있는 것은 남은 앙주의 영내에 우리가 분탕질을 치니 않는 조건으로 사과받는 선에서 마무리 하는게 그대들에게도 유리하리라

판단하여 제의하는 것이다."


"곱게 돌아갈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착각을 부셔주겠다. 우리는 추격할것이다. 병력차이 따위는 관심없다. 끝까지 너희들을

추격하고 또 추격해서 너희들의 발목을 잡을것이다. 내가 한번 맞춰볼까? 지금 너희들에게 처한 위기는 보급의 한계뿐만이 아니라

너희들을 노리는 또다른 적에게서 기인했음 이겠지... 뭐, 딱히 이런 건 첩보관의 조언이 없어도 신성로마제국인걸 알수 있겠군."


그가 눈에 띄게 흠칫해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너희들을 전멸시킬순 없겠지. 하지만 너희들의 발목을 계속 잡을수는 있다. 신성로마의 병사들이 너희들의 수도에 진입하여

너희들의 아내와 딸들을 범하고 도시를 불태우는 것을 막을수 없을만큼 붙들고 늘어질것이다. 타국의 왕위 계승을 틈타 사욕을

채우려 전쟁을 결정하는 너희같은 자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겠다."


그리고 그 순간... 저너머 까마득한 곳에서 어둑어둑해지는 저녁하늘을 가르는 불화살이 있었다. 그 불길한 기운에 프랑스왕과

그들의 사절들, 그리고 저너머에 진을 친 프랑스군의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그와 반대로 온몸에 타고 흐르는 희열을 느끼며

그에게 최대한 거만하게 말했다.


"군사기밀을 하나 누설해주지. 지금 그대들의 퇴로는 끊겼다. 강을 따라 상류로 진입한 우리 병사들이 너희들의 퇴각로를 확보하고

너희들을 엿먹일 준비를 완료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 프랑스의 왕이여 이제 시작해라."


그는 나의 말에 넋을 잃은 듯 황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럴수가... 믿을수 없어... 대... 대체 뭘 시작하라는 거냐?"


나는 오만하게 소리쳤다.


"뭐긴 뭐야. 목숨구걸이지. 내게 살려달라고 빌어라.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내 발등에 입맞추고 빌어라. 나와 나를 왕으로 섬긴

모든 앙주의 시민들에게 사과해라. 그 태도가 절박하다면 혹시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 용서해줄지도 모르니깐."


전쟁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프랑스왕은 어리석은 자였지만 목숨이 아까운줄은 아는자였다.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말에서 내려

나에게 사과하고 이 전쟁을 그만 종결하자고 사정하였다. 나는 그에게 프랑스군이 보유한 얼마 안남은 물자들과 공성병기, 그리고

이번 중장기병대의 전멸로 인해 공작이 사망하여 주인없는 땅이 된 베리의 영지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번 전쟁의

원흉인 두사람... 샴페인 공작과 베드포드 공작의 신변을 인도받을수 있었다.


혈연따위는 참 값싼것 같았다. 언제는 죽고 못사는 피로 이어진 사이라며 전쟁을 선언한 자들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가차없이 친동생과 사촌형제를 버리는 선택을 내렸다. 나는 우선 샴페인 공작을 그토록 바라던 공병대에게 인도하였다. 그들은

절규하는 샴페인 공작을 끌고 어디론가 떠났다. 나중에 세월이 한침 지난 다음에 문득 생각이 나서 그의 상태를 공병대장에게

물어보았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살아 있을겁니다. 아마도요..."


베리에 이번 전쟁에 죽은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한 성당이 지어졌을때 그 성당에서 비오는 날이면 어디선가, 제발 날 꺼내줘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말없이 그 보고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기억속에서 그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베드포드 공작이 끌려왔을때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았다. 오만한 귀족의 얼굴... 이 상황을 납득할수 없다는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가 소리쳤다.


"이 천한 창부년... 이걸 풀어라. 나는 대귀족이다. 설사 내가 반란에 실패했을지라도 나는 신변을 구속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런 권리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설령 왕이라고 해도 죄를 지은자는 포박됨이 원칙입니다."


"왕? 그래 말잘했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7명의 왕을 배출한 왕가의 후예... 너같은 길거리에 굴러먹다 우연히 왕을 꼬득여 직위를

손에 넣고 이제는 왕을 사칭하는 천한 계집이 모욕할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에드워드 왕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카분들의 원수... 갚고 싶으시겠지만 이 자는 제게 맡겨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며 베드포드 공작이 나에게 말했다.


"흥, 그래... 나를 죽여 입을 막고 싶겠지. 너는 고귀한 혈통을 끊어 권위를 증명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너를 왕으로 섬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죽어도 고귀한 왕가의 후예고 너는 살아도 영원히 천한 창부일 뿐이다."


"네에네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서 한번... 맞나 시험해볼까 합니다. 베드포드 공작과 같이 인계된 베드포드의

지휘관들의 포박을 풀어주고 무기를 들려줘라."


곧 나의 부하들은 십여명의 베드포드의 장교들을 풀어주고 그들에게 무기를 주었다.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내 부하들은 전원, 50보 뒤로 물러나라."


순간 그들과 내 부하들 모두에게 소요가 일었다. 그러나 내 부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잠시후 50보 뒤로 물러났다. 나는

묶인 베드포드 공작과 그의 무장한 10명의 부하들과 같이 서있는 모습이 되었다. 베드포드의 부하들은 당황한듯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베드포드의 부하들아. 나는 너희 주인의 적이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의 주인을 죽일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베드포드의

충신들이라면... 들고 있는 무기를 뽑아 나를 죽여라."


그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도 무기를 뽑는 사람은 없었다. 50보나 멀리 내 부하들이 물러났음에도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쩔줄 몰라했다. 베드포드 공작이 소리쳤다.


"죽여라! 어서 저 년을 찔러. 저년만 죽으면 역전이다. 이 전쟁 베드포드의 승리로 끝난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이건

주님이 주신 둘도 없는 기회다. 죽여라! 죽여!"


그러나... 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베드포드의 부하들은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되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외면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아무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구나. 동기가 부족한가? 그럼 명령을 바꾸겠다. 나는 너희들도 모두 죽이겠다. 죽고 싶지 않다면

나를 죽여라."


그들은... 완전히 창백해져버렸다. 그리고 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결국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물었다.


"네가 나를 죽일것이냐?"


그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아닙니다..."


"왜 나를 죽이지 못하느냐? 너와 내 사이에는 아무런 제지도 없다. 너의 살의면 충분히 나를 죽이고 영웅이 될수 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그쳐 물었다.


"왜 그렇느냐? 대답해라. 왜 너희들이 나를 죽일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는 결국 울듯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에 든 칼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당...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쇄반응처럼 베드포드의 부하들은 무기를 떨구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조용히 베드포드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부하들은... 당신 생각과는 좀 다른듯 하군요. 유감스럽겠군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


"이건... 이건 아니야. 말도 안돼... 그럴수는 없어... 저런 갈보년이... 갈보년이... 왕이라고? 이건 미친거야.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는 베드포드를 외면하고 그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저자의 부하였다면... 그대들이 판단하는 가장 정중한 방법으로 그를 모셔라."


그말을 남기고 나는 그들을 남겨두고 내 부하들에게 걸어갔다. 그들은 한참동안 고민하듯 망설이다... 한명씩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베드포드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험프리, 조단,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죽일 놈들... 배신하는것이냐? 3대에 걸쳐 우리 집안을 섬기던 네 놈들이 감히..."


"공작님... 다 끝났습니다. 부디 치욕만은 면하게 해드리는게 저희들이 할수 있는 마지막 충성인듯 합니다. 부디...품위있게

마무리하도록 협조해주십시오."


"안돼!!! 이건 안돼!!! 다들 무슨짓이야! 그만둬!!! 으아아악!!!"


그렇게 오랜 시간 잉글랜드의 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거물은 부하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베드포드 공작이 앙주의 마녀에게 죽었다는 소문은 곧 잉글랜드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의 4만 대군이 앙주에서

참패하고 그들이 자랑하던 프랑스 중장기병대가 박살났다는 소문은 내란으로 힘겨워 하던 잉글랜드의 모든 백성들에게 희망과

전쟁의 끝을 예고해 주었다. 하지만 추악한 다툼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베드포드의 몰락은 그 충격파를 런던에 남아 있던 둘째

왕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력부대가 앙주에서 소멸되고 일부 흡수되어 버린 것에 그는 길길히 날뛰며 왕명을 내려 나를 죽이라는

선포를 남발했다.


그러나 베드포드의 지원이 없는 그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소문이 퍼진지 얼마되지도 않아 섬머셋의 세력들은 병사들을

몰아 런던에 공격을 가했고, 시가전이 벌어진 다음 패배한 둘째 왕자를 처형하고 새로운 왕을 세웠다. 그는 바로 얼마전 다섯째

왕자에게 유폐되었던 일곱째 왕자였다. 넷째왕자와 다섯째왕자가 죽은 이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회복한 선왕대비는 섬머셋 공작과

그 아들에게 일곱째 왕자의 즉위를 강요했고, 곱추에 조금 모자라다는 평을 듣던 여섯째 왕자를 제외하곤 달리 섬머셋의 후계자가

없는 덕분에 그가 왕으로 즉위했다.


왕이 된 그는 곧바로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고 나에게 사절을 보내어 잉글랜드로 와서 사죄하면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우리는 그의 사절의 목을 잘라 돌려보내 우리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그일이 있고 몇일후... 앙주 공방전으로 부터는 두달 후

앙주에서 출발한 병사들이 배에 올랐다. 전 잉글랜드는 긴장에 휩쌓였다. 내전이 다시 심해질것이란 예상에 런던의 시민들은

피난을 떠나고 공포에 휩쌓였다. 모든 섬머셋은 런던으로 오는 해안가를 봉쇄하고 상륙전의 저지와 결전의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병사들이 도착한 곳은 런던이 아닌 잉글랜드의 중부 요크였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륙지점에 놀랐고

동시에 왕자의 행보에 더 놀랬다. 왕자는 런던이 있는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스코틀랜드의 수도가 있는

가우리로 가는 길이었다. 곧 잉글랜드 각지에 흩어져 약탈을 일쌈고 있던 하이랜더들이 황급하게 고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왕자는 느긋하게 스코틀랜드 영내를 소각하다시피 부숴버리며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고, 착실하게 축차투입되는 부대들을

박살내며 전장의 광대의 악명을 쌓아갔다.


결국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스코틀랜드 병력도 집결해서 제대로 대응을 준비했고, 두차례의 회전이 벌어졌다. 두번다 전력차이는

컸다. 겨우 1만의 병력밖에 없는 왕자의 군대와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섬머셋의 원군을 합쳐 3만 대군이상을 전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둘다 스코틀랜드의 무참한 대패였다. 그 계기는 바로 앙주에서 파견 종군한 퀸스가드의 활약 덕분이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퀸스가드를 적진에 우회시켜 후방으로 보냈고, 병력이 일체형으로 밀집되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쉴트론 장창병대는 그런 배후에 난입한

기병대에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곧 경악하고 만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전설이 된 퀸스가드가 눈앞에 있다는 함성소리 덕분이었다. 에라드는 딱히 이렇다할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그냥

적진을 배회하였으나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사냥감의 부위를 확인하는 사냥꾼의 태도로 그들의 눈에 비춰졌다. 결국... 그 잔인한

후방의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코틀랜드 군은 배후로 공격을 감행했고, 퀸스가드가 미끼가 되서 그들을 유인하는 동안 여기저기

배치된 장궁병대가 흩어진 스코틀랜드의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하던 실트론을 붕괴시켰다.


결국 수많은 패잔병과 덜어진 사기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섬머셋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휴전을 구걸했고, 상당한 금전전 보상을

지불하고 나서야 고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왕위를 두고 외세를 끌어들여 조국을 짖밟는 왕족들의

행패속에 유일하게 남쪽과 북쪽에서 외세와 싸우는데 집중하고 왕위에 대해 함구하고 있던 앙주와 에드워드 왕자에게 민심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에드워드 왕자는 모든 잉글랜드에 자신의 제안을 발의하였다.


"남쪽으로 가서, 다같이 선왕폐하들에게 합동 성묘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복잡한 왕위의 주인을 논하도록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견에 동참하여 성묘를 하는 길에 동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성묘행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섬머셋에서는 그의 행동이 명백한 반역행위며 지금의 왕은 일곱번째 왕자임을 선언하고

그에게 모여드는 것은 역적의 도당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였지만... 그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섬머셋에서 그들을

진압하라고 보낸 병사들이 두번다 그에게 합류하자 섬머셋도 모든 사태가 끝났음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가

런던 인근에 도착했을때,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의 5만에 달했고, 이미 섬머셋 공작과 그의 장자는 아일랜드로 망명한지 오래였다.


오로지 일곱번째 왕자만이 정신을 못차리고 근위대들을 모아놓고, 앙주에서 있었던 퀸스가드의 기적을 언급하며 자신을 위해 그런

결과를 내라고 종용했고, 일곱번째 왕자보다 훨씬 정세 판단이 빨랐던 그들은 왕궁 집무실을 닫고 조용히 그를 둘러쌓다. 그리고 왕좌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팔을 붙들고 목을 졸라 그를 처리했고, 서명을 발표했다. 왕좌가 비어있으니 서둘러 돌아와서 이곳의 주인으로

임해달라고... 에드워드 왕자는 군대를 외곽에 주둔시키고 성묘 인원과 시민들만을 대동하고 런던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고 내전은 종식되었다.


왕위에 대한 논쟁은 없었다. 여섯째 왕자가 아직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는 스스로의 분수를 알고 있었고, 더구나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훌룡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다른 섬머셋 일족의 목숨을 보전해달라며 편지를 써서 에드워드 왕자에게 유언을 전했고

특히 많이 증오스럽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인 선왕대비를 용서해줄것을 간곡히 빌며 생을 마쳤다. 모든 이들에게 곱추고 모자라다는 평을

들은 여섯째 왕자였지만 섬머셋의 네명의 왕자중 왕의 자격을 가장 갖추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였다. 에드워드 왕자는 그의 뜻을

받아들여 섬머셋의 잔당들을 용서했고, 선왕대비를 유폐하는 것으로 더는 죄를 묻지 않았다.


목숨을 구제받은 선왕대비는 유감스럽게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총애하던 일곱번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나는 그가 안나 왕비와 왕자님들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사랑해준 아들과

자신이 사랑한 아들을 통해 큰 비극을 겪은 그를 조금이나마 동정했다. 그리고 런던에 도착한 에드워드 왕자는 당장 왕좌를 접수하는 대신

그동안 내전으로 희생된 윌리엄 왕과 안나 왕비 두분 조카 왕자님들과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했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렇게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내전은 겨울이 끝나가는 것과 비슷하게 종결되었다.




봄이 시작되어 여기저기 봄꽃이 피어날 무렵... 나는 새벽에 살며시 내 방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섰다. 간단한 여행준비를 마치고 책상에는

사직서 한장을 남기고 앙주를 빠져나왔다. 이제 나에게 더이상 이곳에서 해야 할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을

참사회에 위임한다는 서신만을 남기고 무책임하게 앙주를 떠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한참동안 배를 타고 올라가며 손을

뻗어 강물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느낌... 옛 추억이 떠올랐다. 처음 앙주를 벗어나 런던으로 처형당하러 가던 길... 그때도 이렇게 배에서

손을 뻗어 물을 만져봤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는 조금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두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며 생각했다. 이대로 배를 타고 항구에서 바닷배로 갈아타면 런던까지는 이틀이면 도착이다. 그러면 런던에

가서 제일먼저 안나 왕비님의 묘소부터 참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분 왕자님의 묘에도 좋아하시던 과자를 놓고 지켜드리지 못한 사죄와

편한 곳에 가시라는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저 발이 닿는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새 나를 둘러싸듯 다가온 사람들을 보며 나는 조금 흥이 깨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저희들은..."


"다 알고 있어요. 얼굴같은거 안가리셔도 되는데... 어차피 복수하거나 추궁할 사람도 없어요."


"폐하..."


"얼른 일을 처리하죠. 안내하세요. 포박은 하지 마세요.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 필요없을꺼예요. 안대는 받아들이죠. 굳이 눈으로 보고선

찾아갈 필요는 없겠죠. 어서 씌우세요. 그리고 제 손을 잡고 안내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용서를..."


그들은 안대를 나에게 단단히 묶고 덜덜 떠는 배의 선장을 협박해 배를 강가에 정박시켰다. 그리고 나의 손을 이끌어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말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서, 어느 낡은 수도원 같은게 아닌가 싶은 건물에 들어왔을때 그들은 나를 내버려 두고 주변으로

흩어졌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익숙한 향기가 느껴진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제가 있는걸 어떻게 아셨죠?"


당신은 어디에 있더라도 알수 있답니다. 나의 광대님... 기억을 잃은 소녀는 사실 광대를 살리기 위해 기억을 잃은 척 했을 뿐이고 항상

광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오실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좀 편하게 일하시라고 일부러 혼자 몰래 여행을 나섰어요. 각료들에게 한마디 언질도 주지 않고요.

조금더 여행을 즐기고 이 시간이 왔으면 했지만, 역시 제 욕심이겠죠?"


"조안... 당신은 정말..."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알고 있었는걸요. 한 나라에 두명의 왕은 존재할 수 없어요. 제가 왕의 길을 선택한 시점에서 이미 저의

운명은 결정되었던 거예요. 왕이 오직 한명 밖에 없다면, 두 왕 중에 한명은 사라져야 겠죠. 저는 당신이 사라지는 걸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

이 경우에는 제가 죽는게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해요. 정통성으로 보나, 재능으로 보나 왕위에 어울리는 사람은 역시 에드워드 왕자님...

아니 실례했습니다. 에드워드 폐하 밖에 없으시니깐요."


"당신이 홀로 프랑스의 대군을 막고 있는 동안 잠이나 퍼질러 잤던 자에게 정통성을 논하다니요... 수치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의

일이란 호락호락 한게 아니더군요. 예전에 섬머셋과 베드포드가 만들었던 파벌이 이제는 당신과 나를 두고 만들어질줄은 상상도 할수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다들 어께를 맞대고 싸운 전우들이 이제는 서로 칼을 겨눌 기세더군요. 이럴줄 알았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을 조롱하던

광대의 시절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를 달래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힘을 내셔야죠. 모든 잉글랜드의 봉신과 백성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당신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부당한 처사도

아니예요. 아직 저에게 내려진 처형 명령은 집행 유예일뿐... 그 통지서에 날짜를 오늘로 쓰는 건 왕의 결정,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수 없어요.

저는 당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안... 하지만... 나는..."


"이제 그만... 너무 시간을 끌지 마세요.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 하고 싶어요. 그리고, 너무 시간을 끌면 제 각료들이 저를 찾아 이곳으로 오게 될지도

몰라요... 이제 그만 끝낼 시간이예요. 자아... 나의 사랑하는 폐하... 집행하세요. 기쁜 마음을 가득 안고 당신의 손에 죽겠습니다. 안대는 벗기지

마세요. 제 눈을 보면 약해질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이대로... 그냥 이대로 순식간에 끝내주세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다가온다. 슬프고도 사랑스러운 살의를 가지고 나를 죽이러 온다. 그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들리는 금속성... 그가

뭔가를 꺼내 내 목에 둘렀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 사슬인가? 교수형인가요? 그러나 그의 사슬은 내 목을 조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린 안대를 풀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잠시 놀라고, 그리고 풀린 안대 덕분에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가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목에 걸린 사슬을 보았다. 그것은...


"이게 무슨 짓이시요?"


"알고 계시잖습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왕비의 목걸이... 잉글랜드의 적법한 왕비들에게 허락된 왕실의 목걸이잖아요. 왜 이걸 제게..."


"저와 결혼해주세요."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항상 그렇듯 다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고민해봤습니다. 하지만, 역시 전 그런 선택을 할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이요.

당신은 한 나라에 두명의 왕은 존재할수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존재할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당신과 나는 남자와 여자, 우리 둘의 결합을 통해

이 나라에 두명의 왕을 가져갈수 있습니다."


"폐하... 저는 거리의 여자입니다."


"몇번을 말해야 납득할껀가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옛 과거보다는 당신이 죽음과 싸우며 걸어와 세운 지금의 찬란한 모습에 감탄합니다.

당신은 왕입니다. 이젠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혈통외에는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그저 왕의 곁에서 왕인척 재롱을 떠는 광대에

불과합니다. 저는 당신이 있어야 왕이 될수 있습니다. 당신도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셨죠. 한쪽이 죽는 그런 결말은 더이상 논하지 말기로 합시다.

저는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집행유예 서류에 그 날짜를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로 적겠습니다. 그날까지 제 곁에서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사랑합니다, 나의 조안... 저의 아내가 되어 주세요."


그는 진심으로 나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그의 솔직한 고백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이 세상에 모든 행복을 다 가진듯한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와 시험을 통과했다. 그것이 오늘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나는 주님에게 감사하리라... 내게 그와 함께 이런 시련을 주신 것에 감사하리라. 나는 목걸이를 만져보았다. 묵직한 보석들의 느낀...

그 무게에 왕비로서의 책임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하였다. 감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떼며

그를 보았다. 홍조가 오른 거의 발개진 얼굴이 더욱더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래서 내 가슴속에 온 마음을 담아 그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 제안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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