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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8086 님의 서재입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K8086
작품등록일 :
2014.08.06 07:20
최근연재일 :
2014.08.21 00:03
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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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5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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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01,785

작성
14.08.1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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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13화

DUMMY

광장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사이로 갑옷을 입은 기사들에게 끌려 광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선량한 앙주의 시민들... 그속에 낯익은 얼굴들도 많이 보인다. 농부, 빵집주인,

마부, 행상인, 푸줏간주인... 다들 착실하게 이곳을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들은 지금 겁먹은 얼굴로 우왕좌왕하며 그저

나를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연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광장에 중심에 모여있는 사람들과 나를 연행하는 사람들을 합쳐서

대략 백여명... 다들 좋은 중갑을 갖춘 프랑스가 자랑하는 중장기병대의 선봉부대인듯 했다. 문득 기억이 났다. 에라드의

푸념... 잉글랜드 왕립 경기병대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명가의 자제들을 엄격하게 훈련시켜서 최고의 장비로

무장시켜서 구성한 유럽 최강의 부대... 그런 그들이기에 이곳 앙주를 접수하러 오는 인원은 백여명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듯

보였다.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엉망진창으로 얻어 터져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에 머리는 산발이고 옷차림도 누더기꼴이었다.

정말로... 예전에 길거리 생활로 돌아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더 나빠졌나? 그때는 지금처럼 아프게 팔목을 조이는

수갑을 차고 있지는 않았으니깐. 팔목을 옥죄는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기분나쁘다. 여기서 정말... 내가 뭔가를 할수 있는게

있을까? 나는 에드워드 왕자의 말에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비웃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데려왔습니다."


나를 연행한 기사가 발걸음을 멈춘곳은 광장의 중심에 있는... 화형대였다. 나를 묶을 기둥과 그 밑에 기름이 잔뜩먹여진

건초가 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반송장이 되어 있더군요. 어디 도망치지도 못할것 같아서 그냥 두고 왔습니다. 데려올까요?"


"됐다. 그 광대놈은 베드포드에서 인수해갈꺼다."


그렇게 말한 사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더러운 앙주의 마녀... 나를 잊지는 않았겠지?"


사정없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남자... 내가 계략을 써서 추방한 보에몽 주교였다. 그는 입술이 터져 흘린 피가 주먹에

묻자 더럽다는 듯이 털어내며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여기서 세상을 기만하고 음행으로 이 타락한 도시를 세운 마녀를 징벌한다. 나는 이단심문관이자 재판관으로서 이

마녀의 죄상을 세상에 낱낱이 고하고 주님의 손길로 정화하여 이 땅에 더러움을 일소할것이다."


언젠가는 개방적인 플레이보이처럼 굴던 자가 지금은 신의 이름을 파는 광신도처럼 굴고 있다. 그의 신앙은 아마도 자신의

이기심 외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나보다. 앙리 주교님이 얼마나 중심잡힌 분이었는지 새삼 인식하게 되어버렸다. 그는 열을

올리며 나의 죄를 모인 군중들에게 고했다. 그중에는 나도 몰랐던, 내가 사탄의 일곱번째 아내라느니, 무저갱의 입구를 여는

마술을 안다느니, 솔로몬의 황금을 계략으로 훔쳤다느니 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거 할줄알면 사는거 참 편할것 같긴 하네...

한참동안 나의 죄를 군중들에게 고하던 그는 이제야 좀 분이 풀리는지 숨을 고르며 나를 보며 지시했다.


"마녀를 화형대의 단상에 올려라."


기사들은 명령받은대로 나를 끌고 화형대에 올렸다. 그곳에는 겁먹은 늙은 농부가 조금전까지 건초를 쌓는 작업에 동원되었는지

쇠스랑을 들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단상에

올라 광장을 바라보았다. 광장을 꽉꽉 채운 수천명의 군중들... 나의 시민들... 그때 보에몽 주교가 소리쳤다.


"마녀에게 최후의 자비를 구하고 회개할 시간을 주겠다. 마지막으로 할말을 해보아라."


자비를 구한다고 해서 살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그냥 자신들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보이라는 강압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망설이며 앞으로 나갔다. 의미없는 말이 될지라도...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도박을 해보기로 하였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앙주의 시민분들... 조안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저는 앙주에서 여러분과 오래도록 함께 하였습니다. 저에게 이곳 앙주는

고향이었고 집이었으며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저의 가족이고 이웃이며 소중한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을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들이 간간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여러분들에게 저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숙인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만약 평범한 거리의 여자였고 흔한 이웃이었다면 여러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런 아이가

하나 있었지라고 추억해주시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만약 쓸만한 시장이었다면 역시 여러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 시장이 되었던 날 걸었던

첫걸음처럼 저는 마지막도 모든 책임을 지고 여러분을 구할것입니다."


몇몇 사람이 머리를 쥐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만약 잉글랜드의 봉신인 귀족이었다면 역시 여러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모두 귀족들의 더러운

권력 다툼일뿐 여러분들에게 피해가 가거나 개입되실 필요는 없을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힘겹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위해... 각오가 필요했다.

나는 난간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만약... 그럴리는 없겠지만 제가 만약... 왕이었다면... 당신들의 왕이었다면... 그렇다면..."


광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나는 오열하는 기분으로 힘겹게 마지막 말을 이어나갔다.


"짐이 명하노라. 지금 짐을 겁박하는 적들을 죽여라."


그리고... 더 긴 침묵이 광장에 감돌았다. 나는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민들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헛소리... 정말 그들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고 싶을 많큼 창피하고

고개를 들수 없는 망발이었다. 그리고 그 긴 침묵을 깬것은 거친 주먹질이었다.


'퍼어어어억!!!'


나를 끌고 온 기사의 주먹이 내 면상에 꽂혔다. 나는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가 내 머리채를

잡고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그는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 잉글랜드 갈보년이 정말 미친게 틀림없구나. 뭐? 왕? 너같이 천한 년이 감히 왕을 논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더는

이 한심한 헛소리를 들어줄수 없구나. 지금 당장 화형대에 이 년을 묶... 어? 이... 이거 뭐지?"


그의 말이 멈추고 그가 더듬거리며 물은 것은 나조차도 쉽게 답해줄수 없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갑자기 그의 가슴에서 튀어

나오듯 솟아난 날카로운 세개의 쇠붙이... 마치 쇠스랑 같은? 그 기사는 피거품을 흘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고 그때 그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조금전 처형대의 구석에 웅크리고 두려워 하고 있던 늙은 농부였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왕의 몸에서 떨어져라... 이 더러운 놈..."


정적이 감돌았다. 광장에 모든 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멈춰진듯... 조용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것은 누군가의

비명이었다.


"크아아아악!!!"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곳은 잘려진 팔을 들고 바닥에 나뒹구는 군중들을 통제하던 기사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의 팔을

베어버린것으로 짐작되는 푸줏간 주인이 고기자르는 칼을 들고 서서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어 단상을 바라보며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소리쳤다.


"왕이 명하셨다. 우리 왕이 명하셨다. 죽여라... 왕의 적을 죽여라. 모든 앙주의 시민들이여 저기 있는 우리 왕을 겁박하는

적들을 죽여버리자."


순간 광장이 폭팔하듯... 함성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 왕이 명하셨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거대한 합창에 서두를 알리듯 눈앞에 농부는 쇠스랑을 기사 대장의 몸에서 뽑아내었고... 세줄기의

거대한 피가 단상위에서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것이 신호였다. 수천명의 군중들은 저마다 들고 있던 작업도구와 작은 무기들을

들고 기사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듯 기사들이 황급히 무기를 빼어들고 그들과 대적하려 하였고

보에몽 주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죽일 놈들... 지금 너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주님을 섬기는 사제를 겁박하고 왕을 칭하는 창녀를 섬기는 것이다."


"우리 왕이 명하셨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내 말을 들어라. 지금이라도 멈추면 주동자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용서하겠다."


"우리 왕이 명하셨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다들 그만 둬... 빌어먹을 이건 말도 안돼... 저딴 갈보년을 위해 너희들 모두 즉을 셈이냐?"


"우리 왕이 명하셨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군중들은 다들 소리높여 무슨 주문처럼 죽이라는 소리만 외치고 있었다. 곧 광장 여기저기서 기사들의 사지가 절단되고

피보라가 불기 시작했다. 단련된 정예병사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광신도처럼 몰려오는 수천의 군중들을 겨우 백여명으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도망치려고 해도 무조건 항복이라는 전갈에 너무 방심한 탓인지 병사들 모두가 광장의 중심에

군중들 속에 포위되어 있었다. 각자 무기를 빼들고 저항하려 했지만... 그것은 헛된 저항이었다.


아침에 제일 일찍 일어나서 갓구운 빵을 출근길에 선물로 주던 제빵사 아줌마의 억센 팔에 기사의 목이 졸려나갔다.

무료병원 덕분에 손녀의 병을 치료했다면 거절하는대도 시청에 거름수거를 하러오던 노인의 배변삽이 기사의 면상에 박혔다.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졌지만 앙리 주교를 통해 고아들을 몰래 후원하던 전당포 노인의 쇠저울이 철퇴처럼 기사들에게 날아갔다.

수의사가 되겠다고 시에서 학비 지원을 받아 공부하지만 아무래도 군사 부문에 더 재능이 있어 보이던 청년의 단검이 휘둘려졌다.

샴페인 공작에게 가족을 잃고 여기서 만나 가정을 이룬 홀아비와 기사를 뒤에서 붙잡고 그 아내인 과부가 쇠꼬챙이를 찔렀다.


잠시후 모든 기사들이 처리되고 오로지 보에몽 주교만이 남았다. 그리고 단상위에 올라온 시민들은 나에게 옷가지를 가져다

주고 팔목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피로 물든 기사들의 망토를 가져와 단상의 계단에 깔았다. 내가 말없이

내려가자 그들은 다들 무릎을 꿇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것 처럼 익숙하게 왕에게 표하는 예를 올렸다. 나는 시민들의 손에

잡혀서 겁에 질린 보에몽 주교에게 다가갔다. 그는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그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살... 살려주시오. 국왕폐하에게 가서 말씀드리겠소. 이곳을 공격하지 말라고... 교황께도 청해서 모든 죄를 사면해달라고

하겠소. 모욕한거 사과드립니다. 제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저 시킨대로 이곳에 와서 명령을 수행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앙주 총독님..."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대답했다.


"앙주의 총독은 당신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서 내 다음말에 그는 더 절망했을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앙주의 총독은 이제 없으니깐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위해를 가할수도 없겠죠.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 건 이 땅의 왕입니다.

왕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왕의 부도덕한 행동을 바로잡을 생각을 안했고 자신이 가진

힘으로 약한 자들을 겁박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당신의 주인에게 돌려보내 경고로 삼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붙잡고 있는 시민들에게 말했다.


"그를 프랑스왕에게 돌려보내세요."


그들은 머뭇거리며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사지를 각각 따로 보내세요. 저기 널부러진 선발대와 같이요."


그제서야 시민들의 얼굴에 만족스럽고 잔인한 미소가 돌아왔고 보에몽 주교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이 저주받을 갈보년... 너는 결단코 지옥의 무저갱에서 감당할수 없는 고통에 절규하게 될것이다."


"거기 내 남편 사업장이라면서요? 사모님 의전이 형편없는 곳인가 보군요."


"크아아아아악!!!"


시민들은 많이 참았다는 듯이 저마다 달려들어 보에몽 주교의 사지를 해체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그렇게 피의 소요가 끝나자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떠올랐다. 언젠가 루이 첩보관이 했던 조언... 민중들에게

내가 시험을 받을 날이 올거라는 그의 의미심장한 조언... 그리고 그것을 통해 탄생할 것이 그 누구도 감당할수 없는 이런

괴물같은 것이라는 걸...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새삼 내 손으로 추방한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 지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필립 재상, 안젤모 영감님, 앙리 주교, 에라드경, 마틸다... 내가 쫓아보낸 모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지금 멸망의 낭떠러지에 서있는 왕국의 끝을 장식해야 할 왕이다. 나는 나를 왕으로

인정하였지만 아직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는 시민들을 보았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 프랑스의 군대가

지금 여기서 벌어진 일을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일것이다. 나는 설사 그게 무의미한 짓이라고 해도 지금 해야 할일을 해야 했다.

후회없는 삶을 위해... 왕으로서 나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일어서야 했다. 항상 그랬듯이...


자신의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며... 사람들 앞에 한걸음 나서길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왕이니깐... 그래서 나는 소리쳤다.


"뭔가 얼떨떨하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제가 여러분의 왕인건 맞나 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백성 여러분... 제가

당신들이 인정한 왕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군중들 속에서 웃음소리가 퍼져나왔다.


"원래대로라면 신나는 즉위 축하 파티를 기획해야 하지만 공교롭게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지금 프랑스왕은 대군을

이끌고 하루거리에 주둔하고 있고 지금 벌어진 소동을 알게 되면 당장 이곳에 물밀듯이 쳐들어 올것 같군요. 그러니... 아쉽지만

즉위 축하 파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일단 싸울 준비를 합시다."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왕을 위해 싸우자!"


시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는 그에 응답하듯 가볍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싸우는 것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집과 땅을 지키지 위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할것입니다.

왕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우리의 소중한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웁시다. 어렵고 힘든일이 될것이고 죽거나 다치는 사람도 많이

나올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찾아올 오늘을 회상하며 서로 웃을수 있는 그날을... 다같이 함께 맞이 할수 있도록 싸웁시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할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신이여 우리 여왕을 보호하소서! 각자 전투위치로!"


그리고 군중들은 우르르 흩어지며 서로 맡은 전투의 준비를 하러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나는 그들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참사회를 다시 소집합니다. 예전 각료분들의 밑에서 일했던 선임 부서 직원분들은 지금 즉시 시장관사로 모여주세요."


사고는 이미 쳐버렸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어쩌면 몇일안가서 이곳 앙주는 불길에 휩쌓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면... 오직 전진할 따름이다. 그 누구보다도 빨리... 나는 발걸음을 시장관사로

향했다. 새로운 각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현재 적의 공세는 정치적 무리수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앙주 공방전때 너무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왕권이 실추되었고

이어진 탄핵 여론에 왕은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잉글랜드의 계승 내전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계승 내전에 개입해서 앙주를 탈환하고, 잉글랜드에 친 프랑스파인 베드포드 출신의

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지나치게 서둘러 병력을 동원한 상황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기회인 동시에 위기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쟁의 향방에 따라 그들의 정치적 입지는 큰 위기를 맞을수도

있고, 전쟁이 길어지는 재미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무리해서 병력을 동원하느라 비워둔 신성로마제국과 반항적인 봉신들의 돌발

행동을 저지할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기전을 절실히 원할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렵겠지만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간다면... 그들의 총공세를 농성전으로 막아내고 물자가 고갈될때까지 버틸수만 있다면

이 전쟁을 우리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끌고갈 여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재상 대리가 정치적 분석을 마치자 재무관 대리가 입을 열었다.


"앙주는 여러차례의 공성전을 통해 방어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예전보다 더 두터워졌고, 식수와 물자도 충분히

여유분량을 비축했습니다. 장담하건데 돌발생황이 없는 한 20년은 버틸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무기와 방어구도 여분을 비축해서

민병대를 신속하게 무장하도록 하고 전시 생산체계를 갖출 모의 훈련도 이미 여러차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전쟁때 큰 공을 세운 공병대도 저번처럼 트랩을 깔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공성전에서 충분한 역활을 해줄것으로 기대됩니다.

방어에 있어서는 자신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교구의 앙리 주교의 제자였던 젊은 신부가 말했다.


"교회도 전력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병동을 부상병을 수용할수 있도록 개방하고 미사를 통해 우리의 정당함과 적들의 무도함을

논하며 정신적으로 시민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일부 주교령의 사제들도 무기를 들고 직접 참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들은 교황 성하를 농락하는 세속의 타락한 자들... 이것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징벌하는 것에 심적인 부담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첩보관 대리는 조금 걱정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단기전으로 결착을 내려 하고 우리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이미 프랑스군도

충분히 분석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셔야 할것 같습니다. 대외적으로 잉글랜드의 봉신에서 독립된 상태로 아무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우리 앙주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입지를 확보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이 전투... 설사 공성전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낸다고 해도 그 뒤의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긍정적인 기분만 가지고 임할 상황은 아닙니다."


사령관 대리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장기적인 우리 앙주의 생존은 둘째치고... 이번 공성전의 전망도 우리에게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관련

첩보에 따르면 프랑스군에 공병부대와 관련 대규모의 자재 이동이 지속적으로 감지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군이 해당 전투를

단기전으로 끝내기 위해 대량의 공성장비를 투입하려는 의지로 보입니다. 만약... 성벽이 대규모로 투입된 공성장비에 무너지고

그 틈으로 적군이 성에 진입하는 순간 우리는 최후의 각오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들의 논의와 보고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일고 재상 대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폐하... 뭔가 저희가 잘못하고 있는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임 재상님이나 재무관님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어 저희도 보고드리며 많이 불안한 심정입니다."


"아뇨... 잘하고 계세요. 물론... 전임자분들에 비하면 조금 미숙해보이시는건 사실이지만, 기준을 그분들로 잡는건 여러분에게

너무 잔인한 평가라고 생각해요. 재상 대리께서는 원래 이쪽 업무를 담당하셨나요?"


"아닙니다. 원래 저는 측량사였습니다. 참사회에는 단기 아르바이트로 왔다가 측량 관련으로 어영부영 복직하질 못해서 그냥

재상님 밑에서 서무로 일했습니다."


"그런것치고는... 너무 우수하신데요? 그 정도면 당장 잉글랜드 행정부에 고위직에 올라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인데요?"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뭐... 다행이군요. 근데 생각해보면... 이곳 앙주에서 그 어르신들 밑에서 월급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겨우 초보자는 면했다는 수준으로 급여 타갈수 있었습니다. 워낙에 대단하신 분들이신지라..."


그의 말에 다른 각료들도 다들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지금 이곳에 없는 그분들을 위해

감사의 임사를 드렸다. 그분들은 없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이 남겨준 유산으로 생을 연명하고 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회의를 마무리 했다.


"좋아요. 늘 그랬듯이 각 업무의 진행은 각료들에게 위임하겠습니다. 스스로 판단한 최선의 방법을 통해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응할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저는 성벽으로 가서 적과 싸울 병사들과 시민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올리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첩보관님, 첩보국에서 예상하는 프랑스군의 식량이 바닥나는 시점이 언제죠?"


"불특정요소들이 다수 있기는 합니다만... 대략 두주입니다. 그때가 되면 프랑스군은 풀을 뜯어먹을 식습관을 익혀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공성장비의 준비는 그보다 빠를듯 합니다. 대략 한주후면 준비가 완료될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전쟁의 향방은 앞으로 7일에서 14일 사이... 그때까지 우리가 버티면 이기고, 그때까지 그들이 성벽을 뚫으면

우리가 지는거군요. 심플하네요. 기왕에 싸우기로 결심한거라면...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게 훨씬 낫겠죠. 이곳 앙주에서 다시한번

모두의 힘을 합쳐서 난공불락의 신화에 한줄을 보탤수 있도록 다같이 힘을 냅시다."


"네! 모두 폐하를 위해 혼신을 다하여 보필하겠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올리고 각자 현장으로 흩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우는 소리는 하지 않을것이다. 겁대가리 없이

왕을 칭했다면 최소한... 왕으로 살수는 없어도 왕으로 죽을순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부재에 아쉬운을 느끼면서도 내 스스로

그들없이 이 곳을 지켜나갈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프랑스군의 대응은 신속했다. 사건을 저지르고 그들이 타고온 말 한마리에 실어보낸 시신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그들은 부대를 이동하여

앙주를 겹겹이 포위하는 진을 쳤다. 곧 강을 통해서 내륙으로 들어온 배들을 통해 용병대와 보조병들의 합류도 시작되었다. 우리도

성벽에서 전투태세를 준비하고 적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적의 첫 반응은 궁수대로 부터 시작되었다. 전면에 도열한 방패를 갖춘 정예병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석궁을 들고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나는 이미 만들어둔 성벽의 천장이 달린 망루에 몸을 숙였다.

참모들이 말했다.


"제노바 용병대가 합류했나 보군요. 비싼 녀석들인데... 빚만 잔뜩진 프랑스왕이 그들을 고용했다면 두가지 분석이 나옵니다. 첫째는

정말로 엄청나게 짧은 단기계약을 맺어서 일주일안에 전쟁을 마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것입니다."


"다른 하나는요?"


"아마 대금지불을 우리 앙주에서 약탈을 통해 알아서 상황해갈 권리를 합의한것입니다. 어느쪽이든간에...절대로 버텨야 할 이유는 명백하게

수립되는 것 같습니다. 반격을 지시하겠습니다. 궁수대! 망루의 구멍을 통해 조준사격 개시! 일제 사격을 필요없다. 개별적으로 사정거리안에

적들을 조준사격하라!"


곧 우리측의 궁수대도 반격을 시작했다. 첫날은 그렇게 궁수대간의 사격으로 지나갔다.


이틀째, 그들의 조급함을 드러내듯이 사다리차가 보병대를 통해 성벽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후방에서 투석기가

대거 자리를 잡고 조립되는 것이 목격되었다. 사다리차는 궁수대의 일제 사격으로 보병대의 속도를 늦춰서 접근을 지연시켰고 그틈에

공병대가 개발한 인화물질을 투척하여 적의 공세를 둔화시켰다.


사흘째, 투석기의 조립이 눈에 띄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공병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물건 우리들이 추방당하기 전에 노역할 당시에 만든 물건입니다. 샴페인 공작이 죄다 끌고 온것 같군요.

유감스럽지만... 성벽만 믿기는 조금 불안한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흘째, 투석기는 거의 완성이 되어가는 모양새였다. 거의 50여개가 넘는 투석기가 거대한 기둥처럼 전장의 한가운데 서기 시작하자

우리쪽의 사기도 조금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연이은 보병대의 파상공격에 대응하느라 우리는 저너머에서 우리 성벽을 부실

투석기에 대해 이렇다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닷새째, 투석기의 완성이 눈앞에 다가왔다. 곧 가죽끈을 연결하고 시범 발사를 준비할 모양새였다. 그리고 사다리차를 동원한 보병대의

파상접근은 계속 이어졌다. 공병대를 주축으로 투석과 궁사로 대응하고는 있었지만 앙주의 민병대가 전력을 집중해도 성의 여기저기서

불규칙하게 치고들어왔다 물러나는 부대를 상대하느라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었고 방어의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엿새째... 드디어 투석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처음 발사된 거석이 성벽을 강타하는 순간... 그 거대한 울림과 굉음에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하루 빠르게 완성된 투석기의 진형... 그리고 그 압도적인 위력에 그걸 직접

만들었던 공병대의 대장장이들도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빠르게 시민들에게 전염되어 갔다.


이레째, 그들은 본격적인 투석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상적인 공세를 취하던 보병대는 이제 한발 물러나고 어느새 거의 완공된 투석기

50여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쉴새없이 거석을 날려 앙주의 성벽에 쏟아부었다.


"쾅! 쾅! 쾅! 쾅! 쾅!"


소름끼치는 굉음이 성안에 하루종일 울려퍼졌고 그 진동이 온몸을 타고 느껴졌다. 성벽은 마치 상처입은 거대한 동물처럼 미세하게

흔들리며 수십년간 상처입지 않았던 그 육신에 상채기를 내고 있었다. 피로가 느껴졌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거대한 돌들이

날아오는 와중에 숙면할수 있는 강심장은 별로 없을듯 싶었다. 나는 각료들과 지휘관들을 소집해서 중간 회의를 열었다.


"변수는 두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도저히 육로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어려운 투석기들을 배로 수송했다는 점입니다. 노르망디를

거쳐오는 강을 타고 오는 길이 원래대로라면 적의 통과를 허용하면 안되었지만 베드포드를 지지하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장비 운송을

허용해버렸습니다. 덕분에... 도착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대량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적의 숙련도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제작을 한 공병들이 투입되야 제대로 써먹을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지난번 앙주공방전때

트랩에 당한 이후 오늘을 위해 관련 정비부대를 만들고 신속한 전개가 가능하도록 훈련시킨듯 합니다."


"지금 변수를 감안하면... 예상되는 성벽이 무너지는 시기는 언제쯤이죠?"


나의 질문에... 참모들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입을 연것은 공병대장이었다.


"사흘...이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을 포함해서요."


다시 회의장은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일모레가 앙주의 마지막 날이군요. 그렇죠?"


젊은 각료들이 일어서며 말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힘으로는 폐하를 지킬수 없었습니다. 크흑...."


그들은 진심으로 분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말하려 애썼다.


"여러분들은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는 다만 저의 불찰로 인해 발생한 것... 전임자들을 죄다 추방하고 방어 태세도

제대로 세울 시간도 주지 않고 그대들에게 대업을 맡긴 나의 과실입니다. 너무 스스로를 책망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폐하는... 폐하는 사셔야 합니다. 결사대를 조직하겠습니다. 투석기가 성의 정면에 집중된 틈을 타서 느슨해진 배후에 돌격하여

뚫고 나갈 길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민병대 전원이 다 결사대로 자원하고 폐하를 도주시키기 위해 뜻을 모았습니다. 내일 최후의 돌격을

감행해서 폐하를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다들 저를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것처럼 왕으로 모시더군요. 뭐 그건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앙주의

시민의 목숨하나와 내 목숨을 바꾸려고 하는군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제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요? 저는 그냥 무능한 대리

시장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번영은 제가 추방한 각료들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여기저기 사고만 치고 다니고, 회의에서는 그냥

거수기 역활만 했고 이제는 모든 앙주의 시민들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저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살리려고 하시죠?"


나는 그 질문에 답을 듣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참모들은 즉답했다.


"폐하께서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보며 참모들은 말을 이어나갔다.


"폐하가 이곳의 시장이 되시고 나서... 각종 부역과 군역이 사라졌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특별세도 사라졌고, 되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리의 대출과 생활 보조가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교도에도 친절함을 가지고 대했고, 이방인들도

이곳에서 살 기회와 공간이 주어졌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모든 것이 각료분들의 공으로 돌리지만... 그것을 실행하고 유지하는데

힘을 실어주신건 폐하십니다."


다른 참모들도 입을 열었다.


"이곳은... 폐하의 나라입니다. 폐하께서 세우시고, 폐하께서 번영시키시고, 폐하께서 지켜내신 우리들의 나라입니다. 이 앙주 안에

우리의 모든 꿈과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곳을 포기하는 것은... 꿈을 포기하는 것이고... 폐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희망을

지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디... 살아주십시오. 모든 앙주의 백성들의 희망을 짊어지고 살아서 우리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당신이 있으면 나라는 다시 세워질수 있지만 당신이 없으면 희망을 되찾을 길이 없습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그리고 공병대장도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차피... 여기 사는 모든 녀석들은 폐하께서 시장이 되던 날 죽은 놈들입니다. 그날 이후의 삶은 당신의 희생으로 담보된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당신에게 빌린거 이제는 돌려드릴 시간이 된것 뿐입니다."


나는 웃었다. 내 어처구니 없는 행보를 이렇게 평가할수도 있는건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최대한 환하게 그들에게 미소지으며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기각하였다.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폐하!!!"


"이곳이 저의 나라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왕은 자신의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도리겠지요? 그리고 자랑은 아닙니다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건 여러분보다는 제가 훨씬 고수랍니다. 여러분들의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제안은 기각하겠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할것입니다."


"크흑... 폐하..."


참모들이 오열했다. 나는 그들에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어차피... 내일모레면 함락될 것...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은 각 부대에 최소인원만 남기고 휴가를 드리겠습니다. 내일 하루

가족들과 함께 그동안 하지 못했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하세요. 그리고 모레... 성벽이 무너지는 날... 저 역시 여러분들과

같이 무너지는 성벽틈으로 들어오는 적군들과 무기를 들고 싸우겠습니다. 앙주의 마지막 소중한 하루를 모두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내일 성벽에서 뵙겠습니다. 이만 회의를 마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오열하는 참모들을 격려하며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성문쪽에서는 거석이 앙주의 성벽을 채찍질하는

잔인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소리마저도 태연히 받아들이며 관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할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엄마와 같이 놀던 봄날의 추억과도 이어지는...

행복이 가득한 꿈이었다. 나는 그래서 아침 늦게 기상을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펼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광장 여기저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 시민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고 나는 그들에게 다정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운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떠나 보낸 사람들을 하나둘 기억하며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의 병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가끔 희미하게 경련처럼 움직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깨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수건으로 그의 몸을 딱아주고 시트를 갈아준 다음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날... 내가 본건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소망을 본것일까요? 어쩌면 당신은 그날 깨어나지 않았고 절망에 빠진 내가 그냥

환상을 본걸까요? 아니라면 대답해주세요. 게으름뱅이 광대님... 여기 왕이 있어요. 당신의 재롱을 보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고

싶은 지루한 왕이 있어요. 당신이 광대라면 이렇게 누워있는건 직무 태만이라고요?


아! 사실은 광대가 아니라 왕자님이라고 주장하고 싶은가요? 그렇다고 하면 언어도단이예요. 세상에 어떤 왕자님이 마녀의 숲에

잠든 아가씨를 키스로 깨우러 가지, 자기가 잠에 빠져서 아가씨가 악천고투하며 와서 키스해주길 바라나요? 왕자님으로서도

직무태만이에요. 안그런가요?


설마 제가 마법에 빠진 아가씨가 아니라 마법을 건 마녀라서 안깨어난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그건 절대 아니예요. 증거도 있어요.

제가 마녀라면 저는 빗자루를 타고날아가지 나귀를 타고 알몸으로 벌벌 떨지 않았을꺼예요. 사람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놀려댔지만... 저는 틀림없이 마녀가 아니라 그냥 천방지축에 사고뭉치 아가씨랍니다. 그러니깐..."


나는 잠시 복받치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러니깐... 이제 깨어나세요. 깨어나서 저에게 돌아와주세요. 제 곁에서 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어께를 붙잡아주고 손을 붙들어

주세요. 처형대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저를 위해 돌아와주세요. 나의 사랑하는 왕자님..."




눈을 떴을때는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고 새벽녘의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나는 푸석푸석한 얼굴로 어둠속에서 서서히 빛나는 일출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바로 오늘이... 이 전쟁의 마지막 날이다. 그렇게 멍하니 감상에 빠져 있느라 나는 내게 인사하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잘잤어요?"


"네... 이틀연속 개운하게 잠들었던것 같아요. 응? 으아아악!!! 왕자님!!!"


"좋은 아침! 이번에는 아침 맞죠?"


"어...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어요?"


"한... 두시간 전 정도쯤?"


나는 속에서 울분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대체 왜... 왜 항상 그렇게 한 타이밍 늦게 깨어나는 건가요? 만약 하루만 일찍 깨어났다면 날 탈출시키려던 계획에 당신을 대신

내보낼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모든게 다 끝난 오늘 일어나는 건가요?"


"와... 자기가 돌아와 달라고 사정사정 해놓구선... 돌아오니깐 안면몰수라... 프랑스 여자들 너무해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제가

당신을 만난 날 중에 모든게 다 끝나지 않았던 날이 드물었던것 같아서 그날 피하긴 어려울것 같은데요?"


"지금 농담할 시간없어요. 오늘이면 성벽이 무너진다고요.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 근데 잠깐만요. 돌아와달라고 사정사정했다고요?

서... 설마 다 듣고 있었어요?"


그는 어께를 으쓱하며 말했다.


"꾀병부린건 아니예요. 몸은 정말 못움직일 상황이었어요. 통증속에서 감각은 청각만 겨우 희미하게 남았어요. 그래서... 들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좀 낯뜨겁네요. 저 이래뵈도 연애는 해본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배게로 파묻어서 편하게 해드릴까요?"


"죄송합니다. 장난 그만 치겠습니다. 뭐 일단...상황이 안좋은건 알겠군요. 성벽이 이제 한계인가 보죠?"


"네... 이미 어제부터 금이 가는 게 눈으로 보일만큼 균열이 일어나고 있어요. 투석기의 각도를 조정해서 취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때리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고요. 이제 조금있으면... 적들이 이곳으로 몰려올꺼예요."


"그렇군요. 저도 이제 좀 진지하게 각오를 해야 할것 같군요. 저를 부축해주세요."


"어쩌실 생각이시죠? 지금 거동조차도 불편하신데..."


"전장에서 당신의 옆에 있겠습니다."


"무리예요. 전 병사들과 같이 가장 전방에서 싸우겠다고 선언했어요. 당신을 데려갈순 없어요."


"어차피...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게 매한가지라면... 가능하다면 당신의 곁에서 적에게 이빨이라도 한번 박아보고

죽는게 덜 수치스러울것 같군요. 부탁해요. 같이 있게 해줘요."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리는 식은땀... 여전히 통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처음 만났을때 내 마음을 설래게 했고 몇번이나 곤란한 상황을 만들었던 그 장난스러운 개구장이 같은 눈빛은 여전히 멋지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어께를 부축했다.


"그래요... 같이 가시죠. 혼자서 죽도록 서로 내버려 두지 말아요."


"네에... 같이 가는 겁니다. 모두다 함께 말이죠..."


그는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들어오는 참모들의 도와주겠다는 말도 거절하고

내 혼자 힘으로 그를 부축하며 성벽을 향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성벽을 두들기는 거석의 굉음은 더 요란해졌다. 이제 성벽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균열된채로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의 거인처럼

보였다. 이미 성벽위에서 병사들은 다들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흔들림도 흔들림이었지만 당장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기세에

더이상 버틸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참모들에게 말했다.


"상황은 어떤가요?"


"공병대장은 이제 30분을 넘기지 못할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지금 성안에 싸울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가장 먼저 균열될 성벽의

정면에 바리케이트와 중장비를 갖추고 백병전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죠. 각 참모들은 각자 부대에 위치로 이동하세요. 그리고 저에게도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주세요. 가장 정면에서 난입하는 적들을 맞이하겠습니다."


그때 나의 명령에 제지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요. 그만두세요. 갑옷과 무기는 필요치 않습니다. 당신은 어차피 그걸 사용할수 없습니다. 맨몸보다 나을게 없어요. 되려

주변의 병사들만 피해를 주게 될겁니다."


"하지만 왕자님... 저는 이곳에서 죽기로 맹세했습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빈손으로 죽을수는 없어요."


"아뇨... 그건 당신의 역활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왕으로서의 역활을 수행하시라고... 지금 당신이 있어야 할곳은 무너질

성벽의 균열이 아니라... 바로 저곳입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성문의 위에 위치한 망루였다. 이미 투석으로 인해 지붕이 날아가서 전망대처럼 노출된 공간... 하지만

덕분에 그곳에서는 모든 전장을 내다볼수 있을 만한 조망이 펼쳐져 있을것 같았다. 나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그의 말을 이해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참모들이 제지하고 나섰다.


"저곳은 위험합니다. 언제 조준이 어긋난 거석이 날아들지 모르고 균열로 인해 연쇄 붕괴할지 모르는 곳입니다.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저곳에 폐하를 모실수는 없습니다."


"아뇨, 가겠어요. 왕자님의 말씀을 이해할수 있을것 같아요. 저곳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볼수 있을거예요. 아군도

적군도 모두... 저기가 저의 왕좌예요. 제가 처음 발걸음을 내딛었던 곳... 제가 시작된 곳... 저는 저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최후의 전투를 지키겠습니다."


"하오나... 알겠습니다. 몇명 폐하에게 따라붙어."


"아뇨, 그만두세요. 올라가는 건 저와 왕자님 뿐입니다."


"폐하... 그건..."


"왕좌는 오직 왕에게만 허락된 자리입니다. 가끔, 광대가 왕을 희롱하기 위해 걸터 앉을수는 있죠. 저곳에서 여러분의 마지막

분투를 제 눈으로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저곳에서 최후를 맞겠습니다. 모든 앙주의 각료와 참모와 시민 여러분...

지금까지 모두들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최후까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 싸워주세요."


병사들은 말없이 군례로 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열하는 사람... 고개를 돌리는 사람... 간절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미소를 보내며 왕자를 부축하고 성문위로 올라갔다. 지붕이 날아갔어도 워낙에 높은 위치인지라 나는 한참을 무너져가는 계단을

통해 나는 한참동안을 진땀빼며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한참후에야 도착했을때... 나는 그곳의 전망에 감탄했다. 발밑에 수많은

앙주의 시민들과 저 너머에 수많은 적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 풍경을 평했다.


"장관이네요..."


"그렇죠? 어떠신가요? 왕좌에 오른 기분이? 저는 그 정도로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곳에 대한 멋진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왕자님... 이곳으로 저를 데려와줘서요. 솔직히 두려웠어요. 당장 중장갑을 하고 거대한 병기를 휘두르는 병사들에게

무기를 들고 대항하는 것 저에겐 무리예요. 이곳에서라면... 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죠. 그냥 난간의

끝에서 한걸음만 내딛으면 되니깐요. 저를 위해 준비된것 같은 임종의 장소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거석은 쉴새 없이 성벽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리고 곧...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벽이

무너져내렸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오랜 시간 앙주를 지켜온 성벽이 드디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진동을 견디기

위해 무너지기 직전의 난간을 붙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왕자를 끌어당겨 밀착하며 부축했다. 왕자가 신음하며 말했다.


"드디어 성벽이 무너졌군요. 이제 시작되겠군요."


"네... 드디어 정말로 정말로 끝이로군요. 이겨내겠어요. 이제 앞으로 제 눈앞에 벌어질 아비규환을 고개돌리지 않고 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버텨내겠어요. 그리고 저 스스로 이곳에서 몸을 던져서 끝을 내겠어요. 그때... 제 손을 잡아주시겠어요? 왕자님..."


그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나는 그의 말에 조금 실망하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곧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잘 지적해주셨어요. 역시 같이 뛰어내리자고 큰소리는 쳤지만 실제로 그 순간이 되면 뛰어내리는 건 당신뿐일지도

몰라요. 저는 망설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저를 밀어주세요. 그리고 잠시라도 좋으니 저의 최후를 확인하시고 왕자님도 마무리하세요.

어려운 역활 맡아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처절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피어오르는 먼지속에서 그의 얼굴이 잘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여쭤보는건 누가 먼저냐 하는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왜 죽어야 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소리치듯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저보다 더 잘아시잖아요. 이젠 농담할 시간도 없어요. 곧 먼지가 걷히는 대로 무너진 성벽틈으로 적군이 밀려들어

올꺼라구요. 다 끝났다구요. 네?"


나의 역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달래듯이 차분하게 말했다.


"네, 인정합니다. 확실히... 전쟁의 전문가로서 말하건데 지금의 상황이 기록된 전쟁사 책을 읽는다면 저는 이쯤에서 결말을 대충 짐작하고

페이지를 넘겨 다음 챕터로 넘어갔을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 상황이 전쟁으로 보이지 않아요. 상황이 전쟁이 아니라면... 모든

요소가 전장에 투입되어 더이상 전장외의 변수가 없는 전쟁이라면... 확실히 지금 상황은 끝입니다. 서둘러 손잡고 뛰어내려서 굴욕을 덜

당하는게 좋아요. 하지만 전쟁이 아니라면... 아직 이 상황 알수없습니다."


"그럼... 왕자님의 눈에는 이 상황이 전쟁이 아니라면 뭘로 보이시나요?"


"제 눈에는 이 상황이 사냥으로 보입니다."


"사냥... 네, 그렇기도 하군요. 어설픈 초보 사냥꾼이 경험도 없이 사냥에 나섰다가 일방적으로 맹수와 만나서 활과 창과 방어구를 모두

잃어버리고 쓰러진 상태로 맹수가 올라타서 사냥꾼을 잡아먹으려는 상황과 비슷하기는 하군요."


"정확한 상황 묘사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모든 장비를 잃고 가진건 오로지 맨주먹 뿐인 상태로 맹수는 올라타서 움직임을

봉쇄당한 상태고 곧 미숙한 사냥꾼을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벌리고 물어뜯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사냥에도 두가지 방식이 있는

건 알고 계시죠? 몰이 사냥과 덫 사냥이 있습니다. 확실히 사냥감을 추격하는 몰이 사냥이라면 이 상황은 역시 전쟁의 상황과

같이 끝입니다. 하지만 이게 덫 사냥이라면? 사실 이 모든게 맹수를 잡기 위한 미끼와 덫이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아들을수가 없어요."


나는 그가 다시 정신에 큰 충격을 받고 횡설수설하는게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맑았고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가득차 있었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숙련된 덫사냥꾼들은 맹수를 유인하는 미끼 역활을 맡은 사냥꾼이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빠져도 가볍게 구하러 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맹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단 한번... 맹수가 가장 방심하고 있는 시간... 아가리를 벌리고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고

포식할 생각에 주변의 경계를 게을리 하는 순간... 그 순간 그들은 매복을 풀고 맹수의 배후에서 일어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깐... 아마도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라니요?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순간... 저 너머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먼지때문에 잘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군대의 출정을 명하는 나팔소리인듯

들렸다. 드디어 조금씩 가시는 먼지 사이로 돌입이 시작되는 건가? 나는 손으로 먼지를 걷으려 애쓰며 적들이 배치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전쟁에 문외한이기는 했지만 시야가 조금씩 확보되고 내 눈앞에

드러난 프랑스군의 움직임은 마치...


"당황한것 처럼 보이는데요?"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할수 밖에 없었다. 까마득하게 먼 지평선 인근의 언덕받이에 낯익은 부대가 나타났다. 예전에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소중한 앙주의 수호자들... 잉글랜드 왕립 경기병대 8중대의 깃발이었다. 에라드가 돌아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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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46 loveis
    작성일
    14.08.18 08:45
    No. 1

    오 드디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네요. 즐겁게 읽고 갑니다.
    여름철 더위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14.08.18 21:01
    No. 2

    칭왕이라.. 정통성을 얻으려면 에드워드 왕자와의 결혼이 필수적이겠네요.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베드포드와 섬머셋 일파에게 명분이 밀리지도 않겠죠.
    누가봐도 반역행위에 타국과 내통한 혐의가 확실하니까요.

    찬성: 1 | 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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