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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8086 님의 서재입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K8086
작품등록일 :
2014.08.06 07:20
최근연재일 :
2014.08.21 00:03
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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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4
추천수 :
289
글자수 :
301,785

작성
14.08.15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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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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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3쪽

10화

DUMMY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을 받은 프랑스는 한동안 패전의 책임을 두고 내분에 휩쌓여 잉글랜드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플랑드르는 내부의 배신자들을 척결해서 잉글랜드에 넘겼고, 브루타뉴도 푸아투 공작에

적대하는 세력들이 기존의 공작을 몰아내고 다시 친 잉글랜드 성향의 공작을 세웠다. 프랑스의 혼란 덕분에 그쪽에

관련 연줄을 가지고 있던 베드포드파도 당분간 제멋대로 설치지 못하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은밀히 런던으로 와서 왕을 알현하라는 명을 받았을때만 해도 나는 각료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에드워드 왕자의

왕자비로 간택될꺼라는 말에 밀린 사형집행 당하러 가겠다고 응수하며 가벼운 기분으로 출발할수 있었고, 도착해서

내가 불려온 이유를 알았을때 받은 충격은 클수 밖에 없었다.


"짐에게 가까이 오라."


나는 말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비통함을 느꼈다. 사자왕의 칭호를 받으며 불패의 명성을 날린

정복 군주가 폐결핵에 걸려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은 그를 적대하는 이의 가슴에도 통렬함보다는 회한을 남길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왕은 손을 저어 주변의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 왕의 침소에 우리 둘만 남자 왕이 말했다.


"짐의 모습이 꼴사납지 않느냐?"


"잠시 웅크린 사자처럼 보입니다. 곧 일어나 사냥을 시작하려고 잠시 웅크린 것 같습니다."


"하하하... 하긴, 웅크린 맹수는 원래 사냥하는 법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맹수가 아니다. 여자인

그대가 행여나 단도라도 하나 숨겨 왔다면 지금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 나는 그대가 흉한 마음을 품으면 그저

자비를 빌수 밖에 없는 노인일 뿐이다. 쿨럭쿨럭..."


"폐하, 괜찮으십니까?"


"다가오지 마라. 그대가 할수 있는 것은 없으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안정된다. 하아... 이제 숨쉬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지는군. 일생동안 전장을 누비며 쉬는 것은 오로지 관에 들어간 다음일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살아

있는 것조차도 고행이구나. 나쁘지 않은 인생이였으나 끝은 항상 모든 인간이 그렇듯 늙고 비참해지는 건 매한가지로다.

내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일을 논하기 위해서다."


"불길한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그건 마치..."


"그래 내가 죽은 이후의 일에 대해서 말이다. 나도 왕국에서는 최고로 존엄한 자라도 주님앞에서는 그저 주어진

생을 받은 사람일 따름이다. 죽음을 피할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내 생은 그리 나쁘지 않아 죽는 것에

후회나 두려움은 없으나 죽음 이후 남겨진 자들에 대해서는 암울한 기분이 들어 쉽게 이승을 하직하기 어렵구나.


나는 많은 아들들을 두었다. 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재능이 부족하고 불충한 마음만 가지고 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 없도다. 내가 죽은 이후 그 녀석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왕국을 혼란과 비탄으로 몰고 갈것이란 생각이 들어

걱정스럽도다."


"그런 말씀마십시오. 폐하에게는 훌룡한 후계자가 있으시지 않습니까? 윌리엄 왕세자는 인품과 재능이 출중하시어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재목이시옵니다. 저는 폐하가 없는 시간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윌리엄 왕세자를

믿기에 이 땅의 안정과 번영이 멈추리라 생각치는 않습니다."


"윌리엄... 불쌍한 나의 장자... 내가 그 아이를 거두지 않았다면 일생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남자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엄격한 병영생활에서 그 아이는 나에게 너무나 큰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그 아이에게 주고 싶었고, 그럴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지.


왕은 인격과 재능만으로 유지될수 없다. 상대를 압도하는 힘과 단호함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너무

유약하다. 그 아이가 왕이 된다면 모든 왕좌를 탐내는 기회의 냄새를 잘맞는 늑대들이 그 아이의 빈틈을 항상

노릴 것이다. 동생들은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잘난 외척들의 힘을 빌어 왕이 되기 위해 이전투구 할것이고 그런

흉측한 무리들을 그 유악한 아이가 감당할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조차 견디기 힘든 그 중압감을 그 아이에게 줄

생각을 하니 나는 몹시 가슴이 아프도다."


그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려 노력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왕세자께서는 다정하실뿐이지 유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섬머셋가의 공녀와의 결혼을

거절하고 버틀러가의 소꿉친구를 왕세자빈으로 선택하신 것은 낭만적인 남자의 감성이 아니라 강한 남자의 의지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모든 왕자님들이 불충하신 건 아닙니다. 에드워드 왕자님은 윌리엄 왕세자님의 영원한 아군이

되어 왕세자의 버팀목이 되실겁니다. 비난맏는 그분의 명성과는 달리 그분의 능력은 인정해야 하는 법, 함부로

불충한 이들이 왕세자를 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저 또한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저는 그분이 폐하처럼 훌룡한 왕이 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앙주와 그 지지세력들이 왕세자님을

보필할 것이오니 너무 심려치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 에드워드... 나를 웃게 해주는 유일한 광대 녀석... 그 녀석이 있었지. 그리고 그대도... 그래서 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대들이 조금만 더 좋은 상황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에드워드가 막내가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셋째나 넷째만 되었더라도... 재능있는 자가 왕이 된다고

선언하고 반심을 품은 도당들을 사정없이 제압할수 있는 그 아이에게도 길을 열어줄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만약에 그대를 1년만 먼저 만났더라면... 그대의 신분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그러면 그 녀석은 왕좌를

노리는 자들을 상대로 등을 맞대고 의지할수 있는 반려를 만날수도 있었을 것을..."


왕의 마지막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펄쩍뛰며 소리쳤다.


"폐하, 그 말씀음 못들은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지엄하신 현재의 왕세자빈을 제치고 그런 언급에

오르내릴수 있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말이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왕자님도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윌리엄 왕세자를 돕는 일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부디 듣는 저희가 수치스러워 스스로 죄를 물어야 할 발언은

거두어 주시길 바랍니다."


왕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안다. 그대들이 그런 이들이 아님을... 그래서 아쉽고 또 아쉽도다. 그래...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내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거늘... 더 말하지 않으마. 그저 부탁만 하겠다. 부디 앞으로도 그대는

에드워드와 같이 왕세자를 도와 힘이 되어 주길 바라네. 그 아이가 더이상 불행해지지 않도록 그 아이와 그 아이의

가족들의 편이 되어 주게나. 약속해줄수 있겠나?"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맹세합니다. 신은 잉글랜드의 봉신으로서 신명을 다받쳐 왕세자를 보필할것을 맹세합니다."


"고맙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궁을 빠져나왔다. 큰 기대에 대한 중압감과는 별도로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준 왕의 심정에 조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려... 살짝 쓴웃음이 나왔다. 내게 그런

행복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리고 그 상대로 윌리엄 왕세자... 창녀에게 왕자님이 과연 어울리기는 한걸까?

동화속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지... 차라리 광대라면 또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는

윌리엄 왕세자를 보았다.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표정이 조금 밝으시군요. 폐하도 조금 안정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폐하에게 가장 안심되는 분은 앙주 충독님

뿐이시군요. 이렇게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곧 폐하께서도 건강을 되찾으실겁니다."


나는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네... 미래의 잘생긴 임금님의 모습이 보이네요."


"다른 사람이라면 불충이라고 노했겠지만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이시라면 그런 의미는 아니시겠죠.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따로 고하셨나요?"


"네에... 왕자님의, 아니 다음 국왕폐하의 힘이 되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폐하께서는 항상 감당키 힘든 말씀으로 부담을 주시는 군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잠시만..."


"네?"


"잠시만 고개를 숙여 주시겠어요?"


"무슨 긴밀히 하실 말씀이시라도..."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맞대었다. 나는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며 살며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뭔가 넋이 빠진듯 한걸음 물러섰다.


"저... 저기 이건..."


"왕이 되시면 이제 손등과 발등에 밖에 못하겠죠. 그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키스입니다, 너무 마음쓰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그냥 짖굳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봉신의 장난으로 여겨지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왕세자를 남겨두고 고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렸다. 왕의 말은 사실인듯 했다. 아마도...

그가 조금만 더 나쁜 사람이거나 욕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그는 지금의 아내 대신 나에게 그런 제안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전 그의 반응을 보니 그 마음은 사실인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만 받고 물러섰다.

저에 대한 그 마음... 평생 간직하고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위한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왕세자에게만 하게 된것이 아니었다. 앙주로 귀국하고 일주일 후 나는 다시 런던으로 향해야 했다.

국왕이 서거하셨다. 그리고 평온하던 우리의 일사으이 톱니바퀴가 조금씩 엇갈려 돌아겨 격동의 시간으로 가는

엇박자를 내기 시작했다.




윌리엄 3세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모두의 환영속에서 즉위할수는 없었다. 모두가 긴장한 대관식이 끝나고 새로운

왕이 처음으로 처리해야 할일은 바로 반란 진압이었다. 그리 큰 규모의 반란은 아니었기에 처음 소식을 들었을때는

나을 비롯하여 많은 근왕파와 관련 세력들이 그 반란을 주시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 반란의 주동 세력

때문이었다.


"헤리포드에서 반란이라니... 그곳은 선왕 폐하의 연고지이자 가장 든든한 왕실의 지지기반이라고 생각했는데..."


루이 첩보관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되기도 했습니다. 헤리포드에 반란 세력들은 현지 영주가 아니라 선왕을 오랫동안 모셨던 상비군

일부 부대들입니다. 생소한 일도 아닙니다. 시저도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10군단의 보너스 파업과 반란에 준하는

행동에 일생동안 속을 썩어야 했으니깐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속내를 드려다보면 그런 부대의 처우 불만에

대한 반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근왕 세력의 취약점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현재 오랫동안 왕좌를 차지했고 혈족으로 구성된 영지를 기반으로 한 베드포드나 섬머셋의 세력과는 달리, 최근

급격하게 세력 강화를 성공하기는 했지만 앙주를 중심으로 하는 근왕 세력은 내부적으로 복잡한 군소세력들의

연합체에 가깝습니다.


왕권의 다툼에는 관심이 없고 자유 무역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앙주의 정치적 방향에 대해 우호적으로 동참하는

자유 도시의 시장들, 베드포드와 섬머셋 양쪽에 속하지 못하고 시장님에게 모여든 군소 영주들, 선왕 폐하의

지지기반이던 상비군 장교들, 새로운 왕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지식인 계급들, 그리고 에드워드 왕자를 지지하는

난봉꾼들까지... 솔직히 쉽게 집결하기도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반목할수 있는 입장을

가진 세력들이 총합이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흠... 저도 어느 정도는 우려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윌리엄 폐하라면 모두가 상생할수 있는 정치를 펴실것이고

그것으로 소요세력들의 불만이 조금 줄어들거라고 믿었는데, 뭔가를 해보기도 전부터 저렇게 난리를 치다니...

마음이 답답하네요. 모두가 힘을 모아도 아직 베드포드와 섬머셋의 세력의 위협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인데..."


"지금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을듯합니다. 국왕폐하께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이번 반란을 강경하게 진압하시고

한편으로는 각 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치는, 채찍과 당근의 전략을 잘 추진하시길 바랄수 밖에요."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스럽군요."


나는 많이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반란은 단시간내에 진압되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근위대는 헤리포드에 집결한

상비군들의 보급로를 끊고 항복을 종용했고, 상비군 부대들의 지휘관들이 나서서 주동자의 가벼운 처벌외에는 병사들은

용서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조금씩 마음을 돌린 그들은 반란을 멈추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반란으로 왕의 권위에 대해

논하려던 베드포드와 섬머셋은 의회가 열리기 전 진압된 반란에 내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는 않았고, 국왕의 첫

의회 연설에서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말에도 뚱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다행히도 그 이후 별다른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윌리엄 국왕은 스스로를 낮추고 각 세력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우호적인 행보를 보이려고 노력했고, 그런 왕의 모습에 훼방을 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악수라는 평가가 있었기에

각 세력들은 못마땅함을 감추고 일단은 얌전히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선왕의 서거 이후 잠시 소요가 있었던 근왕파

세력들도 안정을 되찾고 다시 결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정국의 안정이 시작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왕에 대한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왔을때 우리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파문이라뇨? 폐하께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셨다고 교황성하께서 파문을 통지하신단 말입니까?"


역시나 루이 첩보관은 이마의 땀을 딲으며 본인도 짜증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표면적으로는 왕좌에 어울리는 신분이 아닌 오르지 말아야 할 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명분입니다. 파문장에 구약에

나오는 사울왕의 사례를 들며 윌리엄 폐하의 왕위 계승을 인정할수 없다고 고하더군요. 전부터 돌던 소문인...

국왕폐하가 선왕의 자식이 아닌 천한 생모가 손님들 사이에서 정을 통하고 낳은 사생아라는 내용을 근기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어처구니 없는 파문의 배경을 조사해보았는데... 역시 그 배후에는 아비뇽에 교황성하를

구금한 프랑스왕이, 그리고 그 프랑스왕을 뒤에서 사주한 사람, 프랑스 국왕의 누이를 아내로 들인 베드포드 공작이

이일을 조도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듯 합니다. 상당히 교묘한 방식으로 야비하게 들어오는 군요."


"맙소사... 앙리 주교님, 이런 경우 파문을 철회할 방법은 없나요?"


나는 참사회에 교황 성화와 관련된 일이기에 회의 참석을 요청한 앙리 주교에게 물었다.


"파문은 교황 성하가 신의 대리인으로 내리시는 것, 정치적 입장으로 간단히 철회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경우는

간단히 내려졌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방식이라 판단할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교황 성하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주변의 압력에 의해 발효된것이라면 외부에서 그것을 철회할 방법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든 봉신들이 파문된 국왕을 섬길수 없다고 난리를 치겠군요... 런던의 상황은 어떻죠?"


"예상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의회에서는 탄핵을 요구하는 발언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근왕파에서도 이 일에 대해서는

탄핵은 언급할수 없지만 어떻게든 파문을 철회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국왕 폐하에게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근왕파까지 그런 반응이라니... 할수없군요. 제가 가겠어요. 일단 저와 친한 영주님들을 설득하고 관련 소요에 대해

방법을 찾을때까지 시간을 벌어봐야 할것 같습니다."


런던에 도착했을때 나는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왕을 알현하러 찾아간 왕궁에는서 나는

국왕폐하를 뵐수 없었다. 의회와 교회의 요구 때문에 잠시 왕궁을 비우고 근신같은 느낌으로 옥스포드의 별궁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은 현재 왕비의 가문의 영지와도 가까운 곳이었다.

벌집을 쑤신듯한 런던의 소요와는 달리 조용한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의 별궁에서 나는 왕과 왕비를 만날수 있었다.


"자, 이제 짐만 남았구나. 뚫고선 골을 넣을수 있겠느냐?"


"아바마마라고 봐주지 않을꺼예요. 슛! 하는 척 하면서 패스! 리처드 받아!"


"응! 형!!! 내가 슛! 골인!!!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어요."


"오오... 이런, 우리 왕자들이 왕을 멋지게 물리쳤구나. 아, 이런... 왕자들아. 인사드려라. 앙주 총독님이 오셨구나."


"공작님을 뵙습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편하게 조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리처드 왕자님, 윌리엄 왕자님..."


왕은 웃으며 흙먼지를 털며 일어나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시합은 여기서 마쳐야 할것 같구나. 자, 이제 궁으로 들어가 목욕하렴. 자기전에 짐이 방에 가서 동화책을

읽어주마."


"네에!!!"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서로 순서를 다투며 별궁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왕이 말했다.


"귀여운 아이들이죠. 지금 별궁으로 와있는 것이 무슨 가족 여행쯤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이렇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아이들과 축구해도 왕궁이 아니니 뭐라 말할 사람도 없구요."


"폐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셔야 할것 같습니다. 폐하가 계셔야 할곳은

이곳이 아니라 왕좌가 있는 궁전입니다. 어서 돌아가셔서 대책을 세우시고, 폐하의 권위를 넘보는 적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으셔야 합니다."


왕이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의무를 잊지는 않았습니다.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고요. 오시는 길에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의회의

탄핵상정은 극적으로 합의안이 도출되었습니다. 에드워드가 고생해주었더군요. 교황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인정받고 와야 왕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하더군요. 1년안에 말이죠..."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프랑스의 심장부에 있는 교황 성하를 뵈러 간다고요? 맹수의 입에 고개를 내미는 격입니다."


"물론 아비뇽은 아닙니다. 의회는 어떤 교황이라고 지정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계속 복잡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아비뇽의 정통 교황성하가 아닌 로마의 대립교황을 통해 인정을 받으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단지 비열할뿐이죠.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의 정통성을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제국과

스코틀랜드의 입김이 닿아 있는 쪽으로 따르라니... 세상의 정의는 이미 땅에 떨어진것 같더군요."


"폐하..."


"뭐 하라면 해야죠. 왕은 절대자가 아닌 신의 지상 통치의 대리인... 파문당하고 나서는 신의 축복을 받은 왕궁에도

출입하지 말라고 해석하는 주교들의 성화에 못이겨서라도 가서 굴욕을 감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든걸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왕이 아닌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같이 신나게 뛰노는

이 소중한 시간... 이제 더 이상은 없겠죠. 그게 참 서글픕니다."


다행히도... 나의 왕은 현실에서 눈돌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찌보면

굴욕이라고도 할수 밖에 없는 그 길을 그는 묵묵히 걷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조급했던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무책임한 왕이 아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모두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노을을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네 있습니다. 모레 출발하기 전에 내일 마지막으로 왕비와 두 왕자들을 데리고 피크닉을 나갈까 합니다. 우리의

손님으로 참석해주세요. 즐거운 추억속에 늘 저와 선왕의 우군이었던 당신이 함께 있어준다면 더 좋을것 같군요.

에드워드도 부르겠습니다. 와주실수 있겠죠? 왕명이 아닌 친구로서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의 소박한 부탁에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대답했다.


"네에...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즐거운 피크닉이었다. 아이들은 개울가에서 송사리를 잡았고, 안나 왕비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머핀과 쿠키는 맛있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최근 의회의 치열한 교섭으로 다소 피로한 모습으로 참석했지만 조카들의 재롱을 잘받아주었다.


"에디 삼촌! 삼촌은 장가 안가요?"


"오오... 왕세자께서 이 몸 광대의 혼사를 걱정하시는군요. 하지만 광대는 관객과 못된 무대감독만 있을뿐 아내는

없습니다. 아내를 둔 남자는 남을 웃기는 광대를 못하거든요. 그리고 어떤 정신 제대로 박힌 아가씨가 맨날

방귀로 피리부는걸 재주로 삼는 광대를 좋아할까요? 흑흑흑... 광대는 그래서 항상 혼자랍니다."


"응?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있잖아요. 앙주 공작님이 삼촌 좋아하는거 아니예요?"


어린 아이의 생각치도 못했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하여 황급히 말했다.


"에... 아니 저기 윌리엄 왕자님... 제가 에드워드 왕자님을 좋아하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여전히 싱긍벙글하며 대답했다.


"오오... 잘말씀해 주었습니다. 광대는 거리의 꽃을 든 아가씨를 사모하지만 아가씨는 항상 슬픔에 잠겨 광대의

재롱을 보지 못하죠. 제가 들려드린 이 이야기 기억나시죠?"


"네! 기억나요. 광대는 그래서 아가씨를 웃게 해주기 위해 노래하지만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광대는 겨울날씨에

얼어죽어가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아요."


"정답입니다. 저도 그 광대처럼 계속 노래부르고 있습니다. 동화속에는 광대는 죽고 눈이 내릴때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광대의 노래에 아가씨는 살며시 미소짓지만 저는 죽지않고 살아서 그 미소를 볼때까지 계속 노래를

부를거랍니다."


"흐응? 어른들 얘기는 너무 어려워요."


그때 저너머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윌리엄! 리처드! 아침에 걸어둔 그물에 고기들이 잔뜩 걸려있다. 어서 건질테니깐 이리오렴. 먼저 오는 사람이

제일 큰 고기 가져간다."


아이들은 왕의 말에 방금전 얘기는 신경쓰지 않고 개울가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에드워드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저멀리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걸까? 내 일생에

가장 극적인 순간마다 항상 내곁에 있던 사람... 스스로를 광대로 낮춰부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희대의

방탕아.., 나는 조금 벅찬 마음을 가지며 그의 미소짓는 수려한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국왕의 로마 방문은 그렇게 외교적으로 보면 굴욕적인 상황인것만은 아니었다. 정통 교황을 버리고 좀 소문이 안좋은

대립교황에게 인정을 받으러 가는 길이나 구설수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 국왕이 성지 로마를 방문한다는

건 외교적으로 주목할만한 상황인건 사실이었다. 대립교황측도 방문해 국왕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의사에 환영의

입장을 표명했고, 직접 방문해서 대립교황을 만나준다면 얼마든지 아비뇽에서 통고한 파문따위 무효로 선언하겠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리고 국왕의 방문으로 인해 해상 방문 여정에 경호체계를 엄격히 하기 위해 각 잉글랜드의 해군 주력부대가 런던에

집결하고 관함식을 거행하자 그 장관인 모습에 백성들은 환성을 질렀고 귀족들은 불편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나

역시 관함식에 참여하여 줄지어 해상에서 진을 구성하고 있는 성채같은 배들을 보며 곁에 있던 에드워드 왕자에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여론도 폐하에게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네요. 이럴줄 알았으면 파문 이전에 이런 종류의 무력

시위에 준하는 행사를 하는것도 나쁘진 않았을것 같네요."


"그랬다가는 철권통치라고 귀족들이 들고 일어났을지도 모르죠. 폐하의 정치는 그런 방식이 아니신걸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공작님의 의견에는 공감합니다. 이렇게 힘을 보여줘야만 사악한 흉계를 꾸미는 자들도 조금은 신중해질

마음을 품겠죠."


"네 맞습니다.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 풀리는 것 같네요. 런던 날씨답지 않게 화창하기도 하구요. 노파심인듯 하지만

혹시 해군에서 배신자가 생길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럴리는 없을겁니다. 지난번 헤리포드의 반란 때문에 걱정하시는건 압니다만 해군은 태생 자체가 왕실에서 많은

비용과 교육을 통해 양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단 징집하고 무기만 들려주면 오합지졸이라도 당장 전투가

가능한 육군과는 달리 오랜 시간 왕실에서 통합으로 양성하여 Royal Navy의 칭호를 받은 자들입니다. 왕을 수행하는

함대가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정말 세상 그 누구도 믿을수 없게 되겠죠."


"다행이군요... 무사히 잘 다녀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만 앙주로 돌아가겠습니다. 루이 첩보관이 계속 폐하의

동태는 주시하며 위협을 경계하는 것은 늦추지 않도록 명해두었습니다. 왕자님은 이곳에서 왕비마마와 두분 왕자님을

잘부탁드립니다."


"네, 폐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이번 로마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시면 공작께서는 런던에 다시 와주시길 바랍니다. 폐하의 앞에서 당신에게 할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것 같았다. 나는 아무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그렇듯 장난을 막칠려는 악동처럼 미소지으며 내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하며 인사를 건내었다.


"가시는 길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앙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오래전에 눈치채고

있었다. 저주스럽게도 거리의 시절에 익힌 것은 그런 남자들의 마음을 원치않아도 너무 쉽게 간파해버린다. 나는

조금 힘없이 웃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나는 그가 들려준 광대의 이야기를 안다. 동화책속에 나온 아가씨가

광대의 재롱에도 웃지 않았던건 그 아가씨가 영주의 정부였고, 광대는 영주에게 작위를 빼앗긴 전임 영주의 아들이었고

기억을 잃어 자신의 소꿉친구인 아가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광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아가씨는

그를 보며 웃을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와도 다르지 않다.


기적같은 일들이 거듭되어 나는 사람들이 부러워 마지 않는 현재의 직위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억을 잃은 연인에게도 눈물흘리며 다가가지 못했던 아가씨의 이야기처럼... 내 모든

과거를 짐작하는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너무 과한 욕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그냥 친구처럼...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여겨지는 그런 존재만이라도 될수있다면 그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

경계를 넘으려하고 있다. 내가 그은 그와 나와의 경계를 넘겠다고 선언한것이다. 그래도 좋은 것일까? 나는 그의

바람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느라 한동안 앙주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야 했다. 늘 그렇듯이 다 알아서 처리해주는 나의 각료들은

나를 보며 딱히 고민하는데 방해하지 않고 이제는 공국으로 확대된 우리 영지의 업무를 원만히 처리하며 시간이 흘렀다.

한동안 별일없는 시간이 흘러가서 고민의 결론을 정리하려고 하던 날의 오후였다.


"총독님!!! 긴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루이 첩보관이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왔다. 한동안 잉글랜드 국왕 함대의 이동 경로를 주시하느라 외부에 나가있던

그가 갑자기 나타나 다급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필립 재상과 안젤모 재무관도 뛰어들어왔다. 나는 다급해

하는 그를 진정시키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일단 진정하시고 설명해주세요. 무슨 문제가 발생했나요?"


"아직 아닙니다. 하지만 곧 발생할것 같습니다. 이번 로마 방문을 검토하던 도중에 예상치도 못했던 위험한 변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그게 뭐지요?"


"함대의 구성입니다. 이미 설명들으셨다시피 해군은 왕실과 잉글랜드 해군성에서 주관하는 군대여서 전통적으로

현임 국왕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해상을 통한 로마 방문에 대해 국왕 폐하는 큰 걱정을 하지

않고 길을 떠나신거죠. 하지만... 한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예외? 그런게 있나요? 어떻게 그런게 가능하죠? 모든 잉글랜드 해군은 전부 왕립 해군일텐데..."


"채널 제도... 채널 제도 주군 함대만은 유일하게 잉글랜드 왕립 해군이 아니라 노르망디 공작 직할 해군입니다.

이는 채널 제도가 옛 노르망디의 영지였었고,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 후 윌리엄 1세가 된

일에서 기인합니다. 윌리엄의 후예들인 노르망디 가문은 기존 잉글랜드 왕가인 웨섹스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죠.

그때 채널제도 해군도 같이 왕실 해군에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인해 노르망디 가문은 왕위를

빼앗기고 왕위는 몽포르가에서 가져가게 되었죠.


그때, 편제와 구성은 기존 왕립 해군과 동일한 체계에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잉글랜드 국왕 직속 해군이 아닌

노르망디 공작 소속 해군인 채널 제도 함대는 한가지 예외로서 노르망디의 입김이 닿는 유일한 해군 함대로 남게

되었던 겁니다."


"맙소사... 노르망디 공작이라면 베드포드파의 본가와 같은 곳이잖아요. 설마 그 함대가 방문 함대에서 수행을..."


"기함입니다. 빅토리호, 현재 국왕 폐하와 함대 총사령관이 타고 있습니다."


"당장 중간 기항지에 연락해서 배를 멈추게 하고 기함을 변경하도록 하세요. 에드워드 왕자님과 본국 해군성에도

알려서 내용을 공유하시고요. 그리고 베드포드 공작의 동향도 예의 주시해주세요. 지금 당장..."


"이미 다 조치해두었습니다. 다만..."


"다만?"


"마지막 기항지였던 마르세이유에서 3일전 출발한 다음... 도착해야 할 제노바에 입항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관련 제노바 인근에서 해적들이 코르시카 방면으로 한군데 집결해서 어디론가

출발했다는 조금 수상한 정보도 같이 입수되었습니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희망합니다만...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길한 예상은 항상 현실이 된다. 다음날 잉글랜드 해군은 제노바에 무사히 입항하였다. 하지만 그곳에 빅토리호는

없었다. 도착한 해군 함대들은 이틀전 함대를 기습한 해적들을 상대로 용감히 싸워 물리쳤고 싸움에 휘말리게

하지 않기 위해 빅토리호를 먼저 우회하는 항로로 도주시켰다고 증언했다. 그 말대로라면 이미 제노바에 먼저

도착했어야 할 빅토리호였건만 도착소식은 없었다. 당황한 해군함대들은 백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개시했고

사르디니아 인근 해상에서 빅토리호를 발견했다. 폐하의 시신과 함께...


동승한 해군 사령관과 호위 무관들은 용감히 싸웠던 것 같았다. 귀빈실의 문앞에 쌓여있는 시신들은 결단코 배신한

빅토리호의 해병들과 몰래 다가와 합류한 해적들이 국왕을 해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잠겨진 귀빈실에서 폐하는 심각하게 당한 부상으로 인한 출혈을 어찌하지 못하고 도와주는 사람없이 죽어

간듯 하였다. 해군이 빅토리호를 발견하였을때 이미 모든 배신자들은 작은 배로 도주한 다음이었고 해군은 현장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폐하의 시신을 수습하여 비통하게 돌아와야 했다.


안나 왕비는 실신했다. 아직 철없는 왕자님들은 관에 누워있는 국왕에게 어서 잠자는 척 놀이는 그만하고 나가서

축구를 하자고 졸라서 주변 사람들을 더 가슴아프게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제 선왕이 된

윌리엄 국왕의 장례식을 주관해야 했다. 나는... 울수없었다. 깨어난 후 너무나도 서럽게 통곡하는 안나 왕비의

곁에서 그녀를 위로하며 같이 눈물 흘릴수 없었다. 그녀의 서러운 울부짖음은 마치 돌아가신 리처드 국왕의 왕세자를

부탁한다는 탁고를 어기지 못한 질책처럼 들려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겨울이 접어드는 계절에 잉글랜드는 위대한 현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왕을 떠나보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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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50 stoneax
    작성일
    14.08.15 02:12
    No. 1

    점점 흥미로워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범체비
    작성일
    14.08.15 02:14
    No. 2

    이렇게 퀄리티가 높은 글이 추천 수가 높지 않다는게 충격이네요 작가님 생각하시는 데로 완결 하시길 빔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6 loveis
    작성일
    14.08.15 05:06
    No. 3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글이에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14.08.17 10:09
    No. 4

    정말.. 나라꼴이 말이 아니네요;
    한쪽은 교황을 인질로 잡고 한쪽은 사실상 주적이 내부에서 미소짓고있고..
    즉위 다음날 국왕 암살이라니;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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