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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8086 님의 서재입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K8086
작품등록일 :
2014.08.06 07:20
최근연재일 :
2014.08.21 00:03
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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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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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1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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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쪽

9화

DUMMY

나는 우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앙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일전에 있었던 런던에서 열렸던 군사회의의 일을

회상하였다. 전면전이 시작되기전 관련 군비를 정비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주요한 영주들에게 소집령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군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내가 무슨 의견을 논할수 있을까? 나는 내 대신 답변을 하게 하기 위해

동행한 에라드에게 대변을 당부하였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군사회의에서... 다행히 내가 걱정했던 것 처럼 의견을 개진하거나 조정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군사적인 재능에 있어서는 적대적인 봉신들 조차도 인정하는 왕은 이미 대략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그대로 통지만

하고 있었고 별다른 이견을 접수하지는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그가 우리 앙주에 내릴 명령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정예병력 6,000명을 데리고 참전하라."


"네? 600명이 아니라, 6,000명이요?"


왕은 어처구니 없는 숫자를 말해버렸다. 지금 앙주의 군사력은 오로지 에라드가 데리고 온 왕실 경기병 중대 100여명이

전부다. 어차피 그 병력은 왕실 소속이니 전쟁이 개시되면 국왕의 지휘하에 들어갈 것이고... 그동안 반란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피하고 동시에 방위비를 시의 복리 증진에 사용하기 위해 조금 보류한 시의 군비 상황을 감안해서... 적정 징집

병력을 600명으로 산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10배라니... 왕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의견은 나만의 의견은 아니다. 왕국의 유력한 세력들인 베드포드와 섬머셋에서도 각각 6,000여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합의된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정계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그대에게도 동일하게

6,000의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오나..."


"그만! 더 이상의 변명은 듣지 않겠다. 이미 나는 그대에게 충분한 지위와 권력을 부여하였다. 그 권리를 행사하기

전에 충분히 의무를 져야 함을 잊지 마라. 짐을 실망시켜서 지난번 의회에서 벌인 일을 광대노름으로 만드는 우를

범한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더는 할말이 없었다. 멀리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는 베드포드와 섬머셋의 일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오는

길에 따로 면담을 요청해서 만난 윌리엄 왕자도 딱히 쓸만한 조언을 주지는 못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번에는 폐하의 의견을 따르심이 좋을 듯합니다. 어려우신 상황은 이해하지만 지난번 의회의 권리

청원 사건 이후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왕의 권한을 축소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군사적 의무를 게을리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베드포드와 섬머셋에서 관련 태만을 문제삼아 탄핵을 들어올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아... 큰일이네요. 물론 폐하의 봉신으로 의무를 게을리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단순한 사람 6천명이 아니라 요구되는 조건을 보면 잘 숙련된 정예 6천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왕자님께서

더 잘아시겠지만 갑자기 그런 숙련병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요? 앙주의 미숙한 민병대를 도시 치안 병력까지

다 동원해도 겨우 2천명이고, 숙련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뭐... 그간의 사정은 저도 보고서와 현지 감사 결과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앙주에서 올라오는 납세가

워낙에 만족스러워 방위에 대해서까지 신경쓰지 못한 왕국 행정부의 잘못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군요. 좀 어렵겠지만 구색만이라도 맞추어주시면 안될까요? 어차피 이번 전쟁의 주력은 항상 그렇듯이 영주들의

소집병이 아니라 국왕 폐하의 상비군이 될 예정이고, 어떤 의미로 영주들의 병력 소집은 주력부대가 부재중인

틈에 내란을 방지하기 위한 보험차원이기도 합니다.


요는 요구한 조건인 숙련된 정예 병력에 인원만 어떤 형태로든 맞출수 있다면... 실제로 실전에서 소모되거나

무리한 작전에 투입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그냥 예비대라고

생각하고 준비해주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 보시면 어떤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어렵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왕가는 항상 당신이 만드는 기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아... 다시 한번 한숨이 나왔다. 나는 동행한 에라드와 경기병대를 런던에 두고 일부 수행원들과 같이 앙주로

돌아오는 길에 연신 한숨을 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참사회를 소집했다. 대충 미리 소식을

전해 들은 각료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영 신통치 않은 모습이었다. 필립 재상이 말했다.


"결국... 용병을 고용하는 밖에 없겠군요. 재무관, 예산은 충분하지 않은가?"


안젤모 재무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예산? 돈이야 넘쳐나지. 하지만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다. 이미 앙주 근방의 용병대는 죄다 프랑스 왕과 계약을

완료해서 한가한 부대가 없다. 그렇다고 이베리아나 이탈리아의 용병대를 고용하기엔 도저히 이동 시간과 조건이

안맞어... 무리야."


"돈은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프랑스 왕에게 고용된 자들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계약 파기를 요구하는

건 어떤가?"


필립 재상의 말은 내가 받았다.


"그건 제가 반대입니다. 돈 몇푼에 계약을 깨는 불한당을 신뢰하고 전쟁에 나설수는 없어요. 거리에서의 경험을

봐도 대개 그런 조건에 동의하는 놈들을 쓰면 돈만 낭비하고 정작 중요한 순간엔 줄행랑치기 일수죠.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루이 첩보관이 나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아시다시피 방법이 없습니다. 무리해서 앙주의 민병대를 증강한다고 해도 숙련도로 따지면 형편없는

친구들이 될게 뻔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데려가서 왕앞에 내밀면 불길에 기름을 부은 모양새가 될겁니다. 참전에

요구되는 우선 조건이 병사의 숙련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불한당들을 고용하심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의 말에 반론한건 의외로 마틸다였다.


"난 군사는 잘 모르지만 그건 좀 아니라고 봐요. 아까 조안도 거리의 예를 들었지만... 주먹 좀 쓴다고 이리저리

돈받고 팔려다니는 양아치가 도움이 된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래서 거리의 우두머리들은 그런 양아치보다는 차라리

지조있는 매춘부가 더 쓸만하다고 말할 정도라니깐요."


"네, 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마틸다양... 다른 대안을 찾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거리의 양아치 대신 거리의 여인을 쓸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나는 불연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래 그거 괜찮을지도."


하지만 나의 발언에 각료들은 다들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필립 재상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어... 시장님, 설마 말씀하신 것 처럼 무슨 용병대에 따라다니는 그 여자들 부대 같은 걸 만드실 생각은...

설마 아니시겠죠? 뭐 해야 할 일에 대해 숙련된 정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고, 사람이 그만큼 모일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시면 시장님의 평판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나요? 하지만 발상의 전환의 여지는 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반드시 병사들이 전투에 숙련된 정예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전투가 아닌 전쟁에 다른 관련된 방면에 숙련된

정예라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공병은 어때요?"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그리고 시선이 안젤모 재무관에게 모아졌다. 안젤모 재무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분명...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마침 앙주에는 저번에 만든 자유 상업지구에 대거 이주한 대장장이들과 건축업자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그쪽 분야에는 충분한 숙련병들로 생각할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숙련된 공병 6천명이라면 폐하께서도 딱히 문제 삼지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좀 빈정 거리실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시장님 그게 좀 문제가..."


"뭐죠? 말씀해 보세요."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대장장이들과 건축업자들은 원래 구속받는 걸 싫어합니다. 영주에 토지로 매여있는 농민들과는

달리 기술을 가진 그들은 그런 징집에 대한 요구에 대해 반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뭐죠?"


"대장장이들과 건축업자들이 엄청나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는데 쓰는 시간을 인생의

낭비로 여기지 않는 자들이죠. 그 거친 친구들이 한 부대에서 같이 일한다는 장면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군요."


"흐음... 한쪽만으로 부대를 구성하긴 무리겠죠?"


"네에... 6천명을 무리죠. 아니면 좀 부족한대로 한쪽만 설득하고 모자란 부분은 운송업자들을 포함시켜 보는걸

검토해볼까요?"


"아니예요. 그분들은 숙련된 공병으로 인정받기 어려울거라고 생각해요. 자리를 마련해주세요. 제가 양쪽을 한번

설득해보겠어요."


나의 유능한 각료들은 몇시간이 지나기 전에 상업지구의 한 카페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불러내었다. 내가

갔을때의 분위기는... 참 살벌했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두 노인들은 테이블의 앞에 서로 나란히 앉아서 끊임없이

서로를 질시하며 당장이라고 주먹이 나갈 기세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나름 리더급으로 보이는 대장아이들과

건축가들이 손님인양 카페의 여기저기에 죽치고 앉아 살벌한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나의 조건을 설명했다. 한참동안 설명을 마친 이후...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무기를 만들지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시에서 우리 대장장이들을 위한 지구를 마련해주시고 시민권을

부여해주신 점은 감사하지만 그런 일은 수용하기 어렵군요. 거기다 저 땅거지들과 같이 복무하라구요? 생각만

해도 당장 주먹이 나갈것 같군요."


"우리 역시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손이지 누군가를 죽이는 손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영주들처럼 부당한 부역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주해 왔습니다. 말을 바꾸시면 곤란합니다. 거기다 저 깡통들과 같이 뭘 해보라구요? 욕이 안나오는 건 시장님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말 당장이라도 서로 주먹을 휘두를 것 처럼 노려보았고 더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나는 한숨을 다시 한번 쉬었다. 너무 쉽게 생각한것이었나?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고 일단

일어서기로 했다. 그때... 내 뒤에서 면담을 지켜보던 루이 첩보관이 나에게 말했다.


"뭐... 할수 없죠. 일단 양측의 의견도 그릇되지는 않습니다. 분명 이주 조건에 저희가 부당한 부역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공시했으니 자발적인 참여의 의사가 없다면 무리하게 요구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에... 뭐 할수없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 밖에... 역시 계약파기를 할 용병대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가야

하려나요..."


"뭐, 일단 검토해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관련 사안으로 적당한 용병대도 물망에 오른 곳들이 좀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는 샴페인 공작과 계약한 용병대부터 의사를 타진해보죠."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다 자리를 뜨려는 두 사람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샴페인 공작?"


루이 첩보관이 뭔가 알듯말듯한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아, 네... 그렇습니다만..."


나는 순간 사람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대장장이의 우두머리는 이글이글 타는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루이 첩보관에게 다시 물었다.


"샴페인 공작이라고 하면... 위그 카페 그 개자식을 말하는 거요?"


"뭐... 개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국왕의 동생인 프랑스군 총사령관 위그 카페가 이번 전쟁을 주도한 샴페인 공작임은

틀림없습니다."


"하겠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네?"


"하겠소. 공병으로 참전하겠소. 이봐, 땅개들... 너희들은 어쩔꺼냐?"


대장장이 우두머리의 말에 건축가들의 우두머리를 말없이 소매를 걷어올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흉하게 짓물러져

마치 불에 지져진듯한 상처자국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우린 전투병이라도 상관없다. 그 자식을 엿먹일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




돌아오는 길에 루이 첩보관은 지나가듯 샴페인 영지에 있었던 대성당 건축의 일을 들려주었다.


"화려하고 장엄한 성당이죠... 수많은 고통받은 장인들의 단발마와 분노가 생생히 새겨진 곳이죠. 위그 카페는

프랑스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강경한 인물입니다. 그는 왕실의 권위와 영광을 드높이고 자신의 업적을

이 땅에 새기기 위해 거대한 성당을 건축했죠. 그리고 그것을 독려하기 위해 수많은 프랑스의 내노라 하는

장인들을 물색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물론 목적은 협박이었죠.


수많은 장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샴페인 영지로 몰려와 도저히 말도 안되는 공사기간 내에

거대한 성당을 건설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장인들이 과로사하거나 실족사하는 참사가 있었지요. 하지만...

잔혹한 독려 덕분에 성당은 완공되었고, 그 성당은 샴페인 공작의 명성을 높이는 귀감이 되었죠."


"기가 막히는 군요... 그래도 완공되서 다행이네요. 행여나 무너지기라도 했으면 난리가 났겠네요."


"무너졌습니다."


"네? 아니 왜요? 부실공사였나요?"


"모든건 오랜시간을 공들여 만든 음모였습니다. 성당의 설계 당시 공작은 특이한 주문을 했는데 성당의 모든 무게

중신을 한곳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곳에 와인잔 하나로 균형을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지만 건축에 참여한 대장장이들과 건축업자들은 그것을 성공했지요. 그리고 경고했습니다. 절대 무게 중심에

놓인 와인잔을 건드리지 말라고요. 성당이 무너질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샴페인 공작은 자신의 정적들을 성당 완공 기념 미사에 초청하고 거기서 성찬을 나누는 예식을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당연히... 자신은 참석하지 않았죠.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주교는 성찬을 나누어주기 위해 와인잔을

들었고, 성당은 와르르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리고 공작은 그 죄를 부실공사를 행한 대장장이들과 건축가들에게

물었죠."


"맙소사... 끔찍한 얘기로군요... 그럼 그들이..."


"대부분의 수석 대장장이들과 건축가들은 모진 고문과 처형에 사라지고 가족과 친구를 버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망명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앙주에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이 권위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지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네에... 이젠 알겠네요. 참 무섭네요."


"샴페인 공작이요? 네에... 괜찮은 음모였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였고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은..."


"아뇨, 첩보관님이요. 알고 계시면서도 그들의 앞에서 지나가듯 일을 늘어놓으시는 첩보관님은 못당하겠네요.

저는 그런 처절한 기분으로 그분들을 전장에 내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유감스럽군요. 하지만 시장님께 사과하지는 않겠습니다. 시장님은 그들의 아픔을 보시지만

저는 그들의 비명을 듣습니다. 저에게는 그들이 복수를 원한다고 외치는 것 처럼 들렸습니다."


"제가 잘못된건가요?"


"아뇨,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백성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세요. 그들의 들리지 않는 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질때 외면하는 자와 돌아보는 자의 운명이 갈립니다.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손을 더럽히는 것은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나는 왠지 필립 재상이 할법한 말을 하는 루이 첩보관의 뒷모습을 보며 저 사람에게 저런 생각이 있었나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건 해결되었다는 기분에 홀가분한 마음이 마음속에 든 잠시간의 의문을

수면아래로 가라 앉혔다.




"하! 공병으로 6천명이라... 발칙하면서도 기발하구나."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는 주변에서 보내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애써 해명했다.


"능력들은 다들 출중합니다. 행군과 공성, 주둔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말을 윌리엄 왕자도 거들어주었다.


"전투병 6천명이 와도 큰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이미 보급의 한계도 있으니 이 점을 감안하여 관대하게 보아

주심이 어떠실지요?"


"어차피, 앙주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종군하면서 병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하라.

행군중에 발을 적시고 갈일은 줄었군."


왕의 퉁명스럽지만 봐주는 말에 나는 겨우 한숨을 내려놓을수 있었다. 앙주의 북쪽 메인 영지에 각 영주들과

국왕의 병력이 집결하자 곧 작전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전쟁의 목표은 간단하다. 북쪽 플랑드르에 대한 교역권과 북해로 나가는 항구를 확보하려는 프랑스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노르망디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적의 중심부인 파리로 진격한다. 파리로의 진격은 플랑드르에

배치된 적의 부대를 회군시키기 위함이니 무리한 강행군이 될 필요는 없다. 적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는 우리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회군한 부대와 중간 지점에서 조우하여 회전으로 물리쳐서 플랑드르로의 압박을 완화하고

프랑스 영내의 잉글랜드의 영지를 넓히는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한다. 이것이 우리의 방향이다."


왕의 설명이 끝나자 장내에 작전지도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부대의 공격로와 예상 조우 지점 및 적의 배치에 대한

가장 최근 동향이 나와있었다. 왕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의 병력은 4만, 프랑스의 예상 동원 가능 병력은 7만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도 지난번 앙주 공성전과

마찬가지로 남부 가스코뉴와 아키텐과 툴루즈의 영주들은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되었다. 실제로... 첩보국은

관련 약속에 대한 증거도 받아둔 상태다. 고로, 우리가 대응해야 할 병력은 대략 5만 남짓... 저쪽은 신성로마제국과

플랑드르의 국경에 뺄수 없는 병력의 차질이 예상되고 우리는 일부 싸우기보다는 취직이나 하러 온 몰지각한

병력의 전투력을 기대할수 없다는 점을 보면 병력차는 동등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왕의 내가 동원한 공병에 대한 험담이 끝나자 잠시 낄낄저리는 소리가 나를 야유하듯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전쟁의 주력은 짐의 정예 부대들이 맡을 것이다. 각 제후들은 양쪽 날개와 배후에 배치된다.

그외에 마지막으로 질문이나 제안을 할 시간을 주겠다."


다들 눈치만 보는 분위기였다.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에드워드 왕자가 일어서서 말했다.


"폐하 다시 한번 진언드립니다만... 행군의 계획을 조금 늦춰주시면 안되시겠습니까? 아직 첩보국은 위그 카페의

행방을 못찾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을 주장한 프랑스 매파의 수장이자 현재 프랑스 최고의 명장인 그가 전장에

그물망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스럽습니다. 그의 위치가 파악될때 까지만이라도 행군을 늦추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짐의 광대여... 같은 소리를 또 다시 하는구나. 위그 카페의 모략이 두렵다는 소리는 많지만 그래봤자 그 자는

전장의 용사가 아니라 배후에서 모략을 일삼는 모략꾼에 지나지 않거늘... 그 재능 마저도 과거 조슬랭에 비하면

한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는 자가 아니더냐? 그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고 파리에 남을 것이 틀림없다. 설령 그가

어떤 모략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짐의 용맹한 병사들이 사자와 같은 기세로 물리칠것인즉 두려워 할것 없다."


"네에... 정 그러시다면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전장의 오만을 경계하라는 폐하의 평소 입버릇 같은

말씀처럼 경계하고 또 경계해서 대사가 그르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늘 짐을 웃기는 광대가 오늘은 마치 신경질적인 평론가 같구나. 걱정하지 마라. 행군의 속도는 무리하지 않을

것이며 지속적으로 첩자들과 정찰병들을 통해 적의 동태를 보며 움직일 것이다. 이것으로 회의를 마친다.

모두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마라. 진격이다."


그 말을 남기고 각 지휘관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배치도니 부대로 발걸음을 옮겼고, 부대는 거대한 행군을 시작했다.

나는 데려온 공병대에 돌아와 부대의 배치와 행군 경로를 설명하고 지시받은 도로의 보수와 공성병기의 현지 조립에

대한 임무를 부대장들에게 설명하였다.


"쳇... 결국 뒤에서 치닥거리만 하게 생겼군. 전장의 정면에 내보내주실수 없으시오? 이번 기회에 그 녀석의 이마에

끓인 은을 붓고 정교하게 세공된 장식을 해주려고 했건만..."


"어이어이... 우리가 먼저야. 성베드로 성당에 버금가는 건물의 무게 중심을 그 녀석 척추로 받치도록 해놓은 뒤에

마빡에 은을 새기든 동을 새기던 하라고. 새치기 하려고 하면 안되지."


대장장이들과 건축가들의 살벌한 농담에 나는 진땀을 빼며 달래서 각자의 임무 위치로 보낼수 있었다.




부대의 이동은 순조로웠다. 노르망디를 거쳐 메인에 집결하고 진격을 시작한 부대는 곧 우리 앙주를 지나쳐서

적의 영지인 투르를 향해 접어들었다. 앙주에서 차출된 공병대는 의외로 성실히 일을 해주었고 부대가 이동한

동선은 정말로 발을 적시지 않을만큼 잘 정비되어 진격과 보급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아울러 투르의 지역 영주

들은 몰려든 잉글랜드 군대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주요 부대들만 이끌고 파리로 줄핼랑을 쳐버려서 별다른 저항없이

파리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길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잉글랜드의 대군이 이동하기 시작하자 플랑드르에 집결된 프랑스의 주요 부대들은 파리로 철수하여

재편한 뒤에 우리를 향해 천천히 진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남부 아키텐과 툴루즈의 영주들은

오랫동안 반목해온 북부의 영주들과 왕을 지원하는데 소극적이었고 우리는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뭔가 이상해."


안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에 야영지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공병들을 치하하는 중에 방문한 에드워드

왕자의 첫마디에 조금 불안한 마음을 느끼며 물었다.


"왕자님... 행군은 예상대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만..."


"시장님... 저도 이런 사기가 충천한 상황에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어떤 점이 말씀이신지요..."


"모든게 너무 순조롭습니다. 이럴수는 없어요. 정석대로 움직이는 부대에 대해 아무런 돌발상황도 발생하지 않고

전쟁이 진행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체스를 둬도 말도 안되는 수가 넘쳐나는 데 실제 전쟁에서 이렇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간다고요?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평소의 그라면 보여주지 않을 초조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달래며 막사에 있는 차를 내며 말했다.


"자... 일단 진정하시고 앉아서 이걸 한잔 드세요.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는 왕자님처럼 전쟁에 대한

동향을 감지하는 육감은 없습니다만... 저 역시 조금은 이상하다는 점에 대해서 동감하고 있습니다."


"아, 역시... 시장님이라면 말이 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 기대가 맞아떨어지니 다행이군요. 의심을 하시게

된것은 역시 유능한 첩보관의 조언때문이신가요?"


"아뇨, 루이 첩보관님에게 관련 조사를 명하기는 했지만 제 개인적인 이유로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건 마치...

아, 아닙니다. 좀 말씀드리기 창피한 터무니 없는 이유라서요."


왕자는 좀 민망해하는 나를 보며 간곡히 말했다.


"말씀해주시죠. 지금은 대단히 심각할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의심의 근거가 있으셨다면 제게도 그 단서를 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별다른 특이한 사유는 아닙니다. 그저... 이번 전쟁의 정세가 옛날에 제가 목격했던 어떤 치정 살인이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요."


"네? 치정 살인이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빈민가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죠. 개요는 이렇습니다. 어떤 돈많은 양모상이 후처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후처는 빈민가의 저같은 신분의 여자였지요. 하지만 성실한 태도와 양모상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 통해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처의 옛 애인... 본인 주장이었기는 했죠.

사실상 포주가 나타나서 후처에게 협박과 금품갈취를 시도했습니다.


후처는 그 사실을 처음에는 남편에게 숨겼지만 결국 없어지는 금품 덕분에 들통이 나게 되고 아내를 사랑했던

양모상은 분노해서 칼을 들고 그 포주에게 찾아갔죠. 포주도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어서 두 사람은 서로 심하게

다투게 되었고... 결국 양모상은 포주의 칼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포주는 체포되어 사형되었죠."


"네에... 귀족가에서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끝인가요?"


"아뇨, 그리고 반전이 있습니다. 양모상의 유해를 수습하던 일족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것은...

바로 양모상이 들고간 칼이었습니다. 칼집안에 아교가 들어가서 칼이 쉽게 뽑히지 않게 되어 있었던걸 발견하게

된겁니다. 그래서 양모상은 포주와의 싸움에서 제대로 칼을 뽑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한 범인은 바로 후처였습니다."


"역시... 후처가 배신한거로군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후처 역시 남편을 사랑한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옛 포주가 죽지는 않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일부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고 그 일로 인해 후처 역시

공범으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왠지 이번 전쟁을 둘러싼 외교적인 문제가 보였습니다."


"외교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설마 그 후처가..."


"네, 플랑드르라고 생각해보면 재밌는 가설이 나와요. 영토적으로는 프랑스에 인접하여 있는 플랑드르가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인해 잉글랜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죠. 프랑스가 옛 포주고 잉글랜드가 양모상이라

가정해본다면... 잉글랜드와 긴밀한 동맹으로 묶여 있는 플랑드르의 입장이지만 옛 주인에 대한 마음의 한조각이

남아 있을수 있겠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범위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겠다고 생각해본다면..."


에드워드 왕자의 얼굴이 심하게 어두워졌다.


"플랑드르의 배신... 아니, 모든 플랑드르가 배신하진 않겠죠. 그 안에 일부 친 프랑스 파들이 살짝 편의를 봐주는

식으로 전쟁을 지원할수 있겠죠. 그리고 그걸 샴페인 공작이 조종하고 활용할 생각을 한다면... 정말 큰 사고로

이어질수 있겠군요. 맙소사...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확실히 위협당한 당사자가 우리를 배신할꺼란 생각을

미처 못하고 첩보망을 다소 느슨하게 운영했지요... 지금 루이 첩보관은 어디있습니까?"


"말슴드린 대로 플랑드르의 내부 정세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지금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때였다.


"시장님, 큰일났습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루이 첩보관이 막사로 뛰어들어왔다.


"마침 에드워드 왕자님도 계시는군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보고 시간을 절약할수 있겠군요. 플랑드르에서 시장님이

예상한 우려가 현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지난달 플랑드르의 북쪽에 자주 사용되지 않는 항구에서 제법 많은

수송선이 조용히 집결했다가 어디론가 출발한 동향이 포착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군의 일부 부대가 기존

첩보에 알려진 장소에서 사라졌습니다.


현재 플랑드르의 국경에 남아 시위하고 있는 부대는 막사만 거창하지 극소수만 남아서 부대가 많은 것 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안 감시망을 총동원해서 수송선과 사라진 부대의 행방을 추격했는데... 한동안

감시망에 걸려들지 않다가 겨우 찾아낸 곳이 바로... 브루타뉴 반도였습니다."


에드워드 왕자가 놀라 일어서며 말했다.


"브... 브루타뉴라고요? 거긴 중립국인데... 아니, 오히려 현재 브루타뉴 공작은 친 잉글랜드 파벌의 인물인데..."


"그리고 동시에 푸아투 공작의 사위이기도 하지요. 푸아투 공작은 남부 프랑스의 반 북부 성향에도 불구하고

몇안되는 국왕 지지를 보내는 인사이기도 하고요. 모종의 설득이 사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그들의 병력은?"


"수송된 프랑스 상비군 1만에 현지에서 채용한 용병대와 푸아투 공작이 보낸 일부 지원군을 합쳐서.., 총 2만 정도의

병력입니다. 지휘관은 예상하신 대로... 샴페인 공작입니다. 현재 파리에 있는 건 가짜인듯 하더군요."


"맙소사... 덫이로군. 우리 잉글랜드가 덫에 걸렸어. 정면에서는 프랑스왕의 정예 3만이 대치하고 그 배후를 별동대

2만으로 들이쳐서 포위 섬멸하겠다는 작전이로군. 완전히 당했어! 어째 예감이 그렇게 좋지 않더라니... 수고했소.

루이 첩보관. 시장님, 저와 같이 가시죠. 지금 당장 긴급 회의를 열어야 합니다."




회의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예상치 못한 적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모두들 당황함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동안 말이 없었고 논의가 시작된 이후에도 이렇다할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있게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는 흉휸한 분위기였다. 보다 못한 윌리엄 왕자가 일어서서 말했다.


"역시...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노르망디로 서둘러 퇴각하심이 어떨지요..."


왕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포위가 되기 전에 줄행랑 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적들이 바라는 바다. 그들은 느긋하게 도망치는

우리의 뒤를 밟으며 낙오병과 전리품을 챙기고 충분히 사기가 떨어진 시점에 들이쳐 몰살시킬것이다."


"하오나 방법이 없습니다. 양면에서 적을 맞이해 싸운다는 것은 도저히 무리입니다. 적들은 우리의 주력인 장궁병의

사거리 안으로 순식간에 기병을 투입시켜 전열을 흐트러트리고 양면에서 포위해 몰살시켜 버릴겁니다."


"차라리 기동전으로 승부한다면... 정면의 적을 최대한 빨리 물리치고 부대를 돌려 배후의 적을 영격한다면..."


"적의 주력은 승부를 서두르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를 두고 포위가 성립될때까지 우리의 도발에 응할리가 없습니다.

결국 시간을 끌다가 포위망이 완성되어 우리는 독안에 든 쥐가 될것입니다."


회의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모두들 침체되어 있었고 공포에 휩쌓여 있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심정...

지금은 살아있지만 예정된 죽음이 곧 다가오리라는 기분... 이미 느껴본바 있어서 내게는 친숙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나의 각료들은 이

문제에 한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대가가 따르는 것이었다. 나는

과연 그것을 감당할수 있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체 귀를 닫아버리면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각료들도 아마 대책을 제시하면서도 내심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니, 내 일생의 분기점마다 내 행동을 결정하게 했던 삶의 지표, 어머니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아아... 이제 이

정도면 원망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렇듯이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행동할수 밖에 없었다.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행할것.'


'나보다 다른사람들을 위해 살것.'


'사람들 앞에 한걸음 나서길 두려워 하지 말것.'


나는 손을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이고 왕이 묵언의 발언 허가가 떨어졌다.


"외람되지만 제가 한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떤 사람은 기대를, 어떤 사람은 냉소를, 어떤 사람은 노여움을 가지고...


"농성전은 어떨까요?"


왕이 말했다.


"지금... 모든 군대가 성벽에 틀어박혀 구원군을 기다리며 장기전에 돌입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거냐?"


"아닙니다. 그래서야 지금의 포위상황과도 다를바가 없겠죠. 제가 제시하는 농성전은 양쪽에서 밀려오는 적중에

한쪽에 대한 농성전을 통한 방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앙주는 공성으로 쉽게 무너뜨리기 힘든

난공불락 성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 저와 소수의 지원병을 남겨주십시오. 브루타뉴에서 오고 있는 별동대를

어렵겠지만 주력부대가 정면에서 오고 있는 적의 본진을 물리치고 돌아올때까지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좌중에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왕이 정숙을 명한 후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가능하겠는가? 앙주의 방어력은 짐도 이미 알고 있지만... 남겨줄수 있는 병력은 극소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버려지는 말과 같은 임무가 될수도 있다. 감당할수 있겠는가?"


"장담드릴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달... 두달안에 적의 본진을 물리치고 돌아와 주신다면 어떻게든 앙주를

지키며 페하의 귀환을 기다리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왕은 나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그대야 말로 진정한 나의 충신이로다. 약속하마. 반드시 돌아오겠다. 조금만 인내하며 기다려 다오.

짐이 별동대가 합류되기 전에 적을 궤멸하고 돌아와 앙주를 구원할때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이는 명령이다."


그리고 주변에 웅성거리는 영주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든 봉신들은 들어라. 앙주 시장 조안을 잉글랜드 2군단장으로 임명한다. 그녀의 말은 해당 전선에서 1군단장인

짐의 명령과 동일한 수준의 효력을 가지며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군령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모든 2군단에 귀속되는

영주와 방백들과 병사들은 그녀의 명을 따라 프랑스군을 방어하는데 총력을 기울여라."



그러자 많은 나에게 호의적인 영주들이 고개를 숙여 무거운 짐을 진 나에게 예를 표했다. 나는 맞잡은 왕의 손과

영주들의 기대에 그제서야 느껴지는 어께의 중압감에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전쟁은 이제 시간과의 싸움이 되었다. 먼저 행동해서 목표를 달성하는 자가 이긴다. 나는 긴급히 앙주로 왕이 내린

지원군과 앙주에서 차출된 공병대와 같이 돌아와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지원군의 수는 3천 남짓으로 2만 대군을

막아내기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앙주에 익숙한 에드워드 왕자와 에라드 경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주었고, 내게

호의적이던 영주들도 일부 합류하여 사기는 나쁘지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지연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성벽의 강화를 준비하고 시민들에게도 방어전에

동참해줄것을 호소해주세요."


"경기병대를 외부에 내보내서 성과 안팍에서 연계작전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점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적들은 앙주가 목표가 아닌 잉글랜드 본진으로 이동하려 할것이고 되려 분산되서

격파될 가능성만 높아질것 같군요."


"식량과 물자는 충분합니다. 지난번 전쟁때 워낙에 고생들을 해서 집집마다 식량을 쌓아두는 것이 유행처럼 불었고

시에서도 공매한 곡물이 충분하고 경제 호황으로 물자도 충분히 쌓아두었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관련 주변

상인들에게 추가 매수도 포위가 이뤄지기 전에 완료해두겠습니다."


"성 외부의 시민들의 대피가 시급합니다. 느긋하게 약탈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용병대가 급여외 보너스를 목적으로

무슨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서둘러 대피시켜야 합니다. 성안에 그들이 머무를 대피소를 수배해두겠습니다."


나의 각료들과 지원군의 지휘관들은 서둘러 대책을 논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며 착착 농성전을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그런 회의에서 말없이 참석하고 있던 공병대의 우두머리들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흠... 우리는 전쟁은 문외한이지만... 들어보니 적들이 이곳 앙주를 지나치려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

목적인듯 한데... 그렇다면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소이다. 트랩을 설치하는 건 어떨까요?"


그의 말을 에드워드 왕자가 받았다.


"트랩이라면... 그 지나가다 보면 땅속에 숨겨져 있다 빠지거나 발목을 옥죄는 등의 덫을 말하는 겁니까?"


"뭐... 그런 것도 트랩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아직 적의 별동대가 이곳으로 오려면 몇주간의 시간이 남은것

같은데... 그 사이 우리 공병대가 오는 길목에 그런것들을 설치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수 있지 않을까 싶소이다만."


각료들은 서로 말없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무언의 동의... 명령은 내가 내려야 했다.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적의 행군을 지체시킬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죠. 허락합니다. 하지만 절대 작전

지역에서 시간을 소요해서 포로가 되거나 공격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나는 그때 대장장이들의 우두머리와 건축가들의 우두머리의 눈빛이 유난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의아해

하면서도 모처럼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작전을 허락했다. 그렇게 서둘러 방어 대책을

세우고 적을 기다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이런 방어작전이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리란

사실을 전혀 생각할수조차 없었다.




한 병사가 수풀을 뒤지고 들어갔다. 그리고 두리번 거리다 뭔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찾았다! 여기 샘이 있어. 수통을 들고 이리로 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저마다 수통을 들고 샘의 물을 떴다. 그때였다.


"응? 저기 연못 가운데에 뭔가 빛나는게 있는데?"


한 병사가 다른 병사들의 양해를 구하고 연못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가 물속에서 건져낸건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나름 좋아보이는 반지였다.


"호오... 이게 왠 횡재야. 응? 근데 반지에 실이 걸려있네... 이게 뭐지... 으아아아악!!!"


잠시후 부대의 중대장이 급보를 듣고 달려왔을때는 샘물속에서 튀어나온 못에 다리와 손에 상처를 입고 나뒹구는

병사들만이 가득했다. 곧 망연자실한 반지를 찾은 병사를 밀치고 반지에 연결된 트랩을 발견한 중대장은 증거를

들고 사령관이 샴페인 공작에게 보고하러 갔다.


"흐음... 확실히 노루를 잡으려고 만든 덫은 아니군. 대인 살상용이야... 적들의 짓이다."


"역시... 사령관님, 경계를 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적들이 이미 대비를 한듯 합니다."


"아니,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이런 트랩으로 다치는 사람이 몇명정도 되겠나? 몇몇 멍청한

병사 서너명이다. 이런 덫이 노리는 건 실질적인 피해보다는 우리를 겁먹게 하려는 의도다. 사실, 아주 하수거나

약자가 쓸법한 방법이지. 잉글랜드 본진에서 떨어져 나온 앙주의 마녀가 우리의 길목을 막고 있다고 했지? 과연

여자들이나 쓸법한 작전이로군.


행군은 예정대로 한다. 몇몇 부주의한 놈들의 부상때문에 행군을 지체시키지 마라. 우리는 순식간에 앙주를 포위하고

그곳에 일부 병력만 남겨 포위망을 유지한채로 주력은 그대로 잉글랜드의 본진을 친다. 리처드의 목은 나 위그 카페의 손에 떨어질것이다. 두려워 하지 말고 진격하라. 이미 우리는 플랑드르와 브루타뉴를 넘어 적의 배후에 돌입한

용맹한 프랑스의 용사들이다. 가자 병사들이여!"


"와아아아아아"


샴페인 공작은 힘차게 외쳤고 그의 자신감은 병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각 부대는 신속하게 행군을 더 서두르며

앙주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안오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죠?"


"이미 두주가 지났습니다."


"다들 긴장이 풀려가는 분위기가 되가고 있어요."


"그러게요... 처음에는 목숨걸고 싸울것 같은 분위기던 시민들이... 요즘은 그냥 일상생활 하면서 별로 긴장도

없이 돌아다니더군요. 가끔 언제 시작되냐는 불평도 늘어놓으면서요."


"역시 샴페인 공작이로군요. 신중한 모략가라고 하더니 차분하게 우리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나 보네요.

동시에 우리의 방심을 유도하는 건가요? 무서운 상대로군요. 역시 정찰병을 보내서 동향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그게 말입니다... 저도 보내보려고 했는데, 공병대에서 말리더군요."


필립 재상의 말에 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왜요?"


"글쎄요... 자세한 설명은 기밀이라 시장님한테만 설명할수 있다고 하니..."


"흠... 그럼 들어오라고 하세요."




"조심해..."


"걱정마... 여기 이 선만 제거하면... 으으으... 됐다!"


긴장한듯 땀으로 범벅이 된 병사는 땅밑에 깔린 못을 쏘아내는 트랩에 연결 부속을 해체하고 그제서야 한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다른 병사들이 환호했다.


"이제 된건가?"


"그래 됐어. 이제 여긴 안전하게 지날수 있어. 이미 트랩을 제거했으니 이렇게 밟아... 크아아아악!!!"


"응? 무슨... 으아아악!!!"


트랩 밑에 하나 더 깔린 트랩은 위의 트랩이 제거되자 작동을 개시했고 길가에 모여있던 병사들에게 사정없이

못과 칼날을 날렸다. 그리고 그 칼날의 빗줄기를 피하다 허둥대던 한 병사의 발목에 밧줄이 감겼고 그 밧즐이

병사를 들어 나무가지에 끌어올리자 곧이어 나무가지에서 더 많은 칼날의 빗줄기가 쏟아졌다.


잠시 후... 현장에 온 샴페인 공작 위그 카페는 이를 갈며 말했다.


"몇번째냐..."


곁에 있던 참모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27번째입니다..."


"지금까지의 사상자는?"


"이번에 백명을 넘어섰습니다."


"돌아버리겠군. 대체 이게 무슨 참상이냐. 처음에는 간단한 트랩이려니 하고 지나갔는데 어떻게 이토록 사전에

발견하기가 힘들고 발견되도 작동이 예상치 못한곳에서 해서 병사들의 손해가 막심해지고... 거기다 사상자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냐. 거의 트랩 하나당 4명은 당하고 있구나. 그 부상자들을 돌보는 의무병과 보급은

또 그대로 발목을 잡고... 대체 이게 무슨 악몽인거야!!!"


"고정하십시오. 사령관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되었나? 지금 이런 트랩이 만약에 앞으로 5천개가 더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 별동대를 완전히

몰살시키고도 남을 상황이지 않은가?"


"그럴리가 없잖습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상황이 심각해지면 앙주를 우회하는 행군을 하지 그대로 바보같이 피해를

감수하고 진격할리가 없습니다. 부디 진정하시옵소서. 사령관의 불안은 곧바로 병사들에게도 전염됩니다."


참모의 말에 샴페인 공작은 그제서야 조금 숨을 골랐다.


"그래... 내가 너무 흥분했던 듯 하군. 아무리 그래도 5천개나 더 트랩이 나오지는 않겠지."




"5천개를 깔았다고요?"


경악해서 소리치는 나에게 공병대의 대장들은 좀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어... 시장님, 저희가 말씀드린 숫자를 조금 잘못 들으신것 같습니다만."


"네, 그렇죠? 그럴꺼예요. 그럴리가 없죠. 5천개라니... 하하하... 그건 말도 안되는 숫자..."


하지만 나의 기대를 잔인하게 배신하고 공병대의 대장들은 정확하게 정정해 주었다.


"네 정확히 5만 5천개를 깔았습니다. 그러니 정찰병을 보내는건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정 보내고 싶으시면 사형수로

선발해서 보내세요."


오, 주여... 나는 기가 막힌 상황에 너무도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지금 설명을 들어보니 그냥 토끼나 노루 잡는 수준의 물건이 아니라 정말 사람잡는

수준의 물건인것 같은데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지금쯤 거기는 지옥이 펼쳐져 있을꺼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놈이 원하는대로 되서. 그 녀석이 우리 가족들과 동료들을 고문하고 죽일때 우리는 놈에게

말했죠. '지옥에 떨어질 놈!' 이라고요. 그때 녀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몰랐어? 지금 여기가 지옥이야.'

그 말이 가슴속에 가족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뼈저리게 새겨지더군요. 그래서 만들어 줬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지옥에 근접한 땅을... 그렇게 좋아하는 지옥에서 한번 신나게 살아보라고 하죠."


"하지만 병사들은 무슨 죄가..."


"참전한 병사들이 샴페인 공작의 직속이라면 분명 성당이 무너질때 우리를 체포하고 채찍질을 하고, 아내와 딸들을

끌고가 강제로 재미를 보고, 우리 재산을 약탈해 한몫챙긴 놈들일겁니다. 동정의 여지가 있을까요?"


"맙소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죠. 증오와 복수를 그런식으로 표현하시다니... 하지만 그 심정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군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이제 적의 별동대는 앙주를 통과하는 트랩으로 가득찬 지역을 우회해서 이동하려

하겠군요.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할것 같습니다."


"저어... 시장님,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신것 같은데... 적들은 당분간 이동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요?"


"그야... 트랩 지역의 한복판에 있으니깐요."


그 얘기에 의외로 적의 행군이 꼬인것에 내심 기뻐하는 눈치의 각료들과 에드워드 왕자도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서... 설명해보세요."


"저희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진입로에 몇개의 트랩을 깔아둬서 적들의 방향을 돌릴

겨우 그런 목적으로 트랩을 설치하지는 않았습니다. 트랩은 시간장치가 다 달려있습니다. 물시계 방식이던, 태엽이던

아니면 저 건축가 놈들이 놓아하는 하중차이를 이용하든... 아무튼 모든 트랩은 설치후 1주일간은 아무리 강한

충격을 줘도 전혀 작동하지 않고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작동하게 설치되었습니다.


적들이 하나둘 트랩에 걸리기 시작했다면 이미 그건 적들이 트랩지역 한복판에 있다는 말과 같을겁니다. 시간은

충분히 지났으니 비활성화된 트랩들은 일제히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제 놈들은 심각하게 결정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전... 진할지, 퇴각할지를요?"


"아뇨, 편하게 자결할지, 고통스럽게 트랩에 걸린 짐승처럼 죽어갈지를요."


그리고 그는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향이 참 좋군요... 아내도 라벤더를 좋아했었죠. 이제 더이상 매일밤 꿈에서 복수해달라고 울부짓지 않겠죠?".




그들의 복수는 멋지게 귀결되었다. 적군을 구출하러 보낸 부대는 트랩 지대에서 마찬가지로 공병대가 하나둘

기존 트랩들을 해제하는 것을 기다려서야 돌입할수 있었고... 그곳에서 발견된것은 사지가 날아간채로 아사 직전까지

버려진 반병신들과 죽어넘어가는 병사들의 시체 만여구였다. 간혹 드물게 발견되는 사지가 멀쩡한 생존자들도

지난 두주간 겪은 언제 자기를 덮칠지 모르는 트랩의 공포에 반쯤 실성해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게도 프랑스군이 작정하고 이번 전쟁의 준비한 회심의 승리의 방안은 앙주의 복수심에 불타는

공병대의 손에 산산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또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사람들은 2만 대군이

궤멸당한 이 전쟁에 대해 이렇게 애기했다.


"갑자기 마녀가 주문을 외우니깐, 전쟁터의 한복판에 거대한 무저갱이 열렸데. 그리고 나서 수많은 악마들이

쏟아져 나와 병사들을 덥쳤다고 하더라구."


"그럴리가... 내가 듣기로는 공병대가 설치한 덫에 걸려서 행군이 저지된거라고 하던데."


"아니, 이 사람아... 겨우 공병대가 설치한 덫때문에 한두명도 아니고 2만 대군이 몰살당했다는 게 말이 되나?"


"하긴... 그건 좀 이상하긴 하지."


"분명히 마녀가 자신의 일을 숨기려고 퍼트린 소문일꺼야. 틀림없어. 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물리친건 마녀가

소환한 지옥의 악마들이라고..."


"과연... 마녀... 아니, 이젠 마왕이라고 불러야겠구먼."


내 의사와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그런 소문의 출처는 잉글랜드 내에서도 내 정적에 해당하는

베드포드와 섬머셋의 일파들이거나 프랑스쪽의 농민들이기는 했지만... 왠일인지 그런 소문에 대해서 논하는 건

나름 재미를 주는 호사거리가 되버린듯 했다. 나는 앙리 주교의 눈치를 보며 애써 소문에 신경을 끄려하였고 얼마후

앙주로 프랑스군의 본진을 물리치고 강화 조약을 맺은 왕이 돌아왔다.


앙주의 성문앞에서 우리는 왕을 기다렸고 보폭도 경쾌하게 왕은 홀로 대열을 이탈하여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근위병

들을 내버려 둔채 내게 다가와 말에서 내리며 돌직구를 날렸다.


"우리 불패의 마왕군 2군단장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다니 영광이로군."


그만 좀 하시라구요... 안그래도 기분 별로구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성 죠지의 축복이 폐하와 함께 하셨기를... 그리고 황송하오나 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그리고 자랑스럽게 얘기할만한 일도 아닌 전황에 그런 말씀은 거두어주심이..."


"핫! 앙주의 시장이 겸손이 지나치군. 그렇게 말하면 적의 계략에 넘어가 전 부대를 함정에 빠뜨리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봉신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짐이 뭐가 되는가? 당당히 가슴을 펴고 승리를 자신하라. 전장을

보아라.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이런 통렬한 대승을 거둔 여성이 부디카 이후 있었던가? 그대는 충분히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여도 좋다. 그래야 그대엑 주어질 공로에 대한 포상이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말한 왕은 우리를 둘러싼 봉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전쟁의 승리로 우리는 프랑스로부터 방돔과 투르의 영유권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번에 메인의 백작 죠셉

노르망디는 좌익에서 적의 돌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적전 이탈을 감행했다. 그리고 비겁하게 자기

목숨만 구하려도 도주하다 등에 활을 맞고 죽어 메인의 영지는 임자를 잃었다."


그 말에 베드포드 공작이 나서며 말했다.


"폐하, 부당한 말씀이십니다. 구호기사단이 레반트에서 철수한 이래 유럽 최강이라 불리는 프랑스 중장기병대를

상대로 장궁병만 주시고 돌격을 저지하라 하심은 명령 자체가 불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지의 임자가 없어지다니요.

죠셉은 자식이 없지만 메인은 오랫동안 노르망디 가문의 영지였던바, 6촌 동생인 로버트가 물려받을 것입니다."


"그 입 다물라! 그대는 중과부적의 상대를 명하였기에 부당하다 논하지만 그 명령은 동일하게 우익에도 내려졌고

그곳에서 왕세자는 훌룡히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분명 전날밤 목책을 여러겹으로 쌓으라고 명했거늘 그 명을

게을리하고 적의 돌격을 방치하게 한것은 지휘관의 잘못이다.


그리고 메인의 영지는 노르망디가 프랑스의 봉신이던 시절 영유권을 얻은것... 몇십년간 프랑스에 영유권을 잃고

있다가 십여년전 짐이 찾아준 땅을 감히 그대가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도다. 거기다 전쟁터에서 줄행랑을 친

겁쟁이에게 그런 상속의 대가를 줄 이유는 더욱이 없을 것이다. 앙주 시장은 짐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


나는 죽일듯이 노려보는 베드포드 공작의 시선을 받으며 얼떨결에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칼을 들어 내 양어께에 한번식 대고선 하늘 높이 치켜들며 선언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앙주의 시장에게 기존 앙주 영지에 더하여 메인과 방돔, 투르를 봉지로

하사하노라. 그리고 그 영지를 주관하는 격에 걸맞도록 앙주 공작에 봉한다. 그대를 시장이니 공작이 아니라

총독으로 불려야겠군. 모든 봉신들은 보아라. 짐의 영광을 빛내고 짐을 기쁘게 하기를 즐거워 하는 자는 이와

같은 영광을 누리리니 이는 다만 모데카이의 일만은 아닐것이니라."


구약성경 에스더서에서 나오는 얘기의 인용이였던가... 기억하기로는 뭔가 화려한 제국의 황후와 그의 숙부가

현명하게 간신을 몰아내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얘기였었지. 나는 그런 일생동안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분한 영광에

비유되어도, 내게 주어지리라 상상할수 조차 없었던 작위를 받은 기쁨에도,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함성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한채로 서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 위를 돌아보았다.


내가 서 있는 앙주의 성문...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가르침을 따라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기를 결정했고

살아남았다. 그리 얼마되지도 않은 일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엄마의 가르침은 나에게 동화속에나 나올법한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엄마에게 고마워하며 승전 축하 파티로 나를 이끄는

각료들과 나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함께 표정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가 나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나를 젇개하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다 행복해 하였고, 나를 칭송하며

영광을 찬양하였다. 축하 파티의 음식은 맛있었고, 와인은 시원했으며, 악사들의 흥겨운 노래와... 나에게 손을

내밀어 댄스를 청한 에드워드 왕자와 시골 장터의 무도회에 처음 가본 말괄량이 처녀처럼 깔깔거리며 춤췄던 시간도

너무나 행복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닥쳐올 불행과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을 잃을거라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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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46 loveis
    작성일
    14.08.14 01:06
    No. 1

    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나 보네요.. 부디 슬기롭게 헤쳐나갔으면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곰탱이곰곰
    작성일
    14.08.14 12:09
    No. 2

    오타 발견 젇개 -> 적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14.08.17 09:54
    No. 3

    공병들의 원한이 엄청났나보군요.
    2만 군을 전멸시킬 함정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간제 트랩이라니..대단합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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