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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8086 님의 서재입니다.

창녀와 광대의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K8086
작품등록일 :
2014.08.06 07:20
최근연재일 :
2014.08.21 00:03
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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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1
추천수 :
289
글자수 :
30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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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16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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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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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7쪽

11화

DUMMY

정국은 혼돈에 휩쌓였다. 이미 성인이었던 윌리엄 국왕마저도 권위와 출생신분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윌리엄 4세 국왕에 대해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곱게 놔둘리 만무했다. 각 귀족


세력들은 어린 소년왕의 즉위와 그 섭정에 대한 자리 싸움으로 진흙탕 싸움을 시작하였다. 나는 잠시 별궁으로 몸을


피한 안나 왕비를 만나러 갔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야위어 있었다. 조금 통통하게 보였던 그녀는 수척한 모습으로 상복을 벗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듯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그녀를 애써 위로하려 하였다.




"죄송합니다. 다 저의 불찰입니다. 방심하지 말고 조금만 더 호위함대의 구성에 신경을 썼더라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호위 함대의 구성을 결정한건 돌아가신 선왕 폐하... 당신께서 의지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채널 제도의 함대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배신을 하리라고 짐작할순 없었어요."




"그분은... 그렇게 가셔선 안되었어요. 현명하고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이 나라의 훌룡한 왕으로 남으실 분이셨어요.


그분이 없는 이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저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왕비마마의 절망에 비할바는 아니지만요."




우리는 한동안 그에 대한 추억과 서로를 위로하는 말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저는 아이들에게 감당할수 없는 자리를 주고 싶지 않아요. 그냥 평범한 여느 아이처럼 자라줬으면 했어요. 그래서


왕세자의 신분으로 제게 청혼한 그분의 프로포즈에 한동안 망설일수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분을 믿고 험한 길을


헤쳐나가기로 했지요. 이제 그가 없는 세상에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힘을 내셔야 합니다. 왕비마마께서 무너지시면 안됩니다. 왕위에 오르신 윌리엄 폐하와 왕제 리처드 왕자님을 생각하셔


서라도 기운을 내세요."




"지금 두 왕자는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벌써 두번의 암살시도가 무산되었어요. 수많은 야심가들이 왕좌를 노리고 우리


철모르는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어요. 앙주 공작님... 부탁드립니다. 부디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들만은... 우리 아이들만은 무사히 살아주는 것이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저는 힘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기적을 만들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적들에게 마녀의 칭호를 들으며 두려움을 준 당신이 우리


아이들을 지켜준다면 전 안심할수 있을것 같아요. 부탁드려요. 이렇게 간청합니다."




"무릎꿇지 마세요 왕비마마... 저는 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왕족은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지만 부탁하신 것은 제


목숨을 걸고 들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미 리처드 선왕 폐하의 유지마저도 지키지 못한 과오가 있습니다. 제 모든것을


걸고 폐하와 왕자님을 지키겠습니다. 이제 더이상 몸사리는 일은 없을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왕비마마..."




"고마워요... 역시, 당신은 내 남편이 반할만한 분이군요."




"에... 저, 저기 왕비마마 그런 말씀은..."




"이미 알고 계시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조금만 더 나쁜 남자였다면 당신을 통해 안정된 자리와 왕의


의사를 충족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셨겠죠. 하지만 폐하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저를 선택해주셨죠. 오해하지


마세요. 전 질투하거나 원망할만큼 속좁은 여자는 아니예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받을 만큼


매력적이고 당당한 여성이니깐요... 그러니깐, 부탁드려요... 저는 할수없지만... 당신이 할수 있는 일을 해주세요.


그 은혜는 죽을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앙주의 공작님..."




그녀의 말은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암살 시도는 지속적으로 발각되었고, 각 귀족 세력들은 노골적으로 반란을 도모하려는


듯 군비를 정비하고 사병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상황은 점점 더 위태하게 흘러갔다. 이 상황이 내전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드포드와 섬머셋의 세력비가 비슷해서 서로 경계를 하고 있어서였지 세력의 불균형이


이뤄지는 즉시 피를 보는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건 명확해져만 갔다. 나는 각료회의를 소집하였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사태는 시급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전 당장 내일 윌리엄 국왕폐하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의견을 내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만


이 상황을 타개하고 두분 선왕의 후예들의 안전을 보장할수 있을까요?"




회의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지간하다는 필립 재상이나 안젤모 첩보관도 말없이 눈치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치의


행방은... 당연하다는 듯이 루이 첩보관이었다. 그리고 정작 루이 첩보관은 그 시선들과 기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루이 첩보관..."




"안됩니다."




"아직 말도 안꺼냈어요."




"타개할 방법 내놓으라는 거 아닙니까. 한가지 있습니다. 하지만... 심하게 무리수가 따르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걸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대답하세요. 명령입니다."




"거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군요. 안녕히 계세요."




"어디 가십니까?"




"윌리엄 폐하가 계시는 왕궁으로요. 제가 가서 폐하에게 밀착해서 암살범들의 공격을 막겠습니다. 저는 그런 방법밖엔


달리 다른 방법을 생각할수 없군요."




"그만두십시오. 제기랄...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죠. 하지만... 시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려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마 여기 계신 재상님과 재무관께서도 제 생각에 동의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일단 들어나 보죠. 말씀해보세요."




그는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왕좌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세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선왕과 윌리엄 선왕의


서거 이후 두분의 폐하를 지지하던 근왕파의 세력들이 갈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거기다 지금 왕은 아직 섭정조차


확정되지 않은 어린 소년... 그런 왕으로는 세력의 집결을 기대하기는 무리입니다. 그렇기에 베드포드와 섬머셋의


환심을 사려는 기회주의자들이 암살이니, 탄핵이니, 내란이니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거죠. 결국, 현재의 왕을 지지하는


세력을 강화시키면 이런 혼란은 진정될것입니다."




"어떻게요? 그 강력한 리처드 선왕에게도 결집하지 못했던 근왕파예요. 어떻게 근왕파의 세력을 강화시킨다는 거죠?"




"한가지 무리수가 따르기는 하지만 현재의 정치적 구도를 분석해본 결과 뚫을수 있는 방향이 있었습니다. 이미


잘아시고 계시겠지만 귀족세력은 베드포드 공작과 섬머셋 공작의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왕위에 대한 다툼을 지겹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세력은 서로 리처드 국왕의 자식들중에 자기 가문을 외가로 둔 왕자들을 지원하며 그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베드포드는 선대 왕비가 낳은 둘째 왕자를 왕으로 밀고 있고, 섬머셋은 후처로 들어온 왕비가 낳은 넷째 왕자를


왕으로 밀고 있습니다. 근데 베드포드와 섬머셋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포드가 지지할 왕자는 저번


반란 후 셋째 왕자가 죽은 이후 남아있는 둘째 왕자 하나 뿐이지만... 섬머셋은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의


4명의 왕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섬머셋은 리처드 선왕의 아들 중에 섬머셋의 핏줄을 이은 가장 맏장자인 넷째 왕자를 왕으로 밀고는 있지만


그안을 들여다 보면 조금 상황이 복잡합니다. 섬머셋의 공식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다름아닌 섬머셋의 맹주인


공작 본인입니다. 하지만... 공작의 아들인 서리 백작은 의견이 좀 다릅니다. 그는 태만한 넷째 왕자보다는 잔인하고


교활하며 자신과 친한 다섯째 왕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위세에 억눌려 강하게 의견을 표출하지는


못하지만 섬머셋의 젊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그런 여론을 주도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둘을 이간시켜서 어느 한쪽을 우리쪽으로 끌어들이자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건 무립니다. 양쪽의 세력은 그럴이유가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릴 입장이 안되고 그래서


이간질로 싸우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기 죽은 이후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입장으로 나올겁니다. 우리가 노려야


할 상대는 그보다는 좀 약하지만 명분을 가질수 있고 더 터무니없는 야망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위협이 크게 되지


않는 상대여야 합니다. 마침 거기에 딱맞는 사람이 한명있습니다. 바로 선왕대비입니다."




"선왕대비요? 그러면 리처드 선왕 폐하의 미망인인... 그 뚱뚱한 왕비님 말하시는 거죠?"




"네에...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전부 낳기는 했지만 태만한 넷째도, 잔인한 다섯째도, 좀 모자란 여섯째도 별로


이뻐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서 총애하는 일곱째 왕자를 총애하여 그를 왕으로 세우길 원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랫도리가 머리보다 더 총명하다는 평을 받는 일곱째 왕자가 왕이 될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섬머셋 내부에서도 일곱번째는 그냥 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방탕아 취급이죠. 그래서... 선왕대비는 이 점에 대해 늘


불만스러운 상황이죠.




여기서 우리의 승부수를 던질 틈새가 있습니다. 좀 무시당하는 상황이기는 해도 선왕대비는 엄연한 왕실의 가장 큰


웃어른으로 왕실의 일에 큰 입김을 낼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섬머셋의 유력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제안을 한번


해볼수 있을 겁니다. 일곱째 왕자에게 왕좌를 제외한 최고의 권력을 주겠다. 섭정의 자리를 선왕대비가 맏도록


제안하겠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에 불과한 현재의 왕을 살려두고 그대로 권력을 장악해보는게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입니다..."




"그럴듯 하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예요."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선왕대비는 총독님을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네? 하긴... 그분도 섬머셋의 일파이니..."




"그뿐만이 아닙니다. 잊으셨습니까? 처음 사면받으셨던 해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 당신께서는 당시 왕비였던


그녀를 제치고 그해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나서서 남편을 골탕먹이려고


장난을 치다 봉변당했으면서, 그 일에 대해 두고두고 앙금을 남기고 분노하며 당신을 증오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만약 총독님께서 그런 제안을 하신다면... 분명 그 멍청한 여자는 그것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말도 안되는 황당한


요구를 해댈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린겁니다."




나는 필립 재상을 보고 말했다.




"지금 즉시 선왕대비 쪽 사람과 접촉해서 의사를 타진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의 말에 루이 첩보관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만 두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요구가 따를것입니다."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국왕 폐하와 왕자님을 지켜야 합니다."




"왜 당신만 그래야 합니까? 당신은 왕족도 아니고, 왕에게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은 귀족도 아니고, 그저 어쩔수


없이 책임을 떠안은 어찌보면 그들의 포로와도 같은 신분입니다. 눈꼽만치의 실리도 없는 마음 씀씀이로 자신을


해치는 일을 받아들이실 이유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이유라면... 있습니다. 사람이 삽니다."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로 당신도 살았습니다. 저에게 소중한 여기 계신 모든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잊으셨나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목숨은 제가 선택한 희생에 담보되어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지만 힘든 날도 있지요. 하지만 지나고 나면 좋은 날도 힘든 날도 웃으며 얘기할수 있어요.


설마 죽으라고 하지는 않겠죠. 그 어떤 무리한 요구가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고생하도록 하죠. 언젠가


찾아올 다같이 살아서 웃으며 농담삼아 얘기할 그날을 위해서..."




나는 진심으로 그러한 날이 오기를 소망하였다. 그래서 나의 간절한 소망이 전해져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오지


않기도 희망하였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원하는게 크면 지불해야 할 대가 또한 컸다. 나는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필립 재상이 대단히 불쾌한 표정으로 보고하는 것 조차 거부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달래서 얘기를 들었고,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요구에 내 귀를 의심하여야 했다.




"정말... 그것을 요구했나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입니다. 루이 첩보관의 말이 맞더군요. 만나볼 가치도 없는 불쾌하고 모욕적인 자리였습니다.


이건 더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겠습니다."




"총독님! 뭔가 제가 드린 보고를 잘못 이해하신것 같은데..."




"정확하게 이해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말로 하지 말고 그에 걸맞는 성의를 보여주는 행동을 보여서


사죄의 뜻을 모두가 알게 하라. 예를 들면 레이디 고디바의 사례처럼... 그러니깐, 알몸으로 사람들이 보는 길을


지나서 선왕대비에게 가서 사죄하라는 그 뜻이잖아요. 어차피 저는..."




"젠장! 얘기하지 마십시오."




"...길거리에 굴러먹던 창녀니깐, 그리 어려울것도 없는 제안이라는거죠. 네... 정확하게 이해했어요. 뼈저리도록


저의 현재 처한 입장을 상기시켜주는 제안이로군요. 그러니깐... 하겠습니다."




"더는 저도 못참겠습니다. 힘으로라도 가시는 걸 막겠습니다. 이건 개념도 없고, 예의도 없는 인간으로서 할수없는


개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런 막되먹은 소리에 굴복하시겠다고요? 거기다, 그냥 단순히 알몸으로 와서 사과하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템즈강변에서 선왕대비, 아니 그 돼지년의 별궁까지 가는 런던 시내를 가로지르는 길을 그 망할


고디바의 이야기처럼 알몸으로 나귀를 타고 가로 질러 와서 사죄 하라는 겁니다. 그걸 하시겠다고요?"




"어차피 할거라면 그냥 별궁에 와서 조용히 알몸으로 무릎꿇으라는 것보다는 나을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적어도 사람들의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사과만 받고 날름 약속을 깨는 행동은 함부로


하지 못할테니깐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당신은요? 당신의 자존심과 수치는요? 당신은 우리의 주군이기 이전에 젊고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그 행동은 당신의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완전히 밟아버리겠다는 개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이디 고디바의 이야기처럼 모든 런던 주민들이 창문을 닫는 훈훈한 미담을 기대하십니까? 다들 보러 나와서


ㅡ히희낙낙하며 당신을 조롱할것입니다. 그 수치를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 후의 정치적 여파는 또한 어쩔 생각이십니까? 말씀하신 대로 세상의 여론에 이 일이 알려지게 되면...


폐하와 왕자님의 목숨은 보전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행동은 사람들에게 앙주파가 섬머셋에게 굴복한걸로 밖에


여기지 않을겁니다. 이것은 곧 우리와 우호적인 영주들의 이따른 이탈을 발생시킬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의


희생보다는 자존심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이 빌어먹을 세상의 인심입니다."




"희생이라 생각한적 없습니다. 자존심은 어차피 없었습니다. 날때부터 천한 창녀였던 제게 무슨 그런게 있나요?


수치심은... 감수하겠습니다.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일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실망하여 사람들이


떠나신다면... 그것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겠죠. 어차피 모여있어도 왕의 목숨조차 구할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제게 실망하셔서 떠나는 분들을 잡을 방법은 없겠죠. 보내드리세요."




그는 나의 말에 무겁게 울리듯, 그리고 마지막 카드인듯 말을 던졌다.




"에드워드 왕자님은요?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분이 감수해야 할 대가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나는 그의 무거운 말에... 잠시 그를 외면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무겁게 대답했다.




"저의 그 행동이... 그분에게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오랫동안 손님에게 기대를 품게


만들었죠. 닳아빠진 창녀들처럼... 이제 그만, 성실한 젊은이들을 꼬여 한몫챙기는 건 그만둬야 할 시간이겠죠.


그게 이 바닥에서도 적당한 상도덕이니깐요."




필립 재상은 더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몇일후 나는 탬즈강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미 소문이 널리 퍼진듯 강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나의 수치를


목격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필립 재상의 말처럼... 현재 국왕폐하에게 동정적인 것이 런던 시민들의 입장임에도


그것과 무관하게 호사거리에는 모여드는 것이 어쩔수 없는 군중들의 심리인듯 했다. 레이디 고디바의 이야기처럼


고디바 부인을 위해 창문을 닫고 시선을 피하는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나귀에 올라 걸친 가운을 벗었다. 손으로 가슴과 하단을 가리기는 했지만 런던의 쌀쌀한 날씨는 그것으로


온기를 느끼기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의 조소와 희롱 담기 야유속에 나귀는 마부의 손에 이끌려 런던 시내로 들어갔고


나는 매섭고 쌀쌀한 바람과 뼛속까지 사무치는 수치를 참으며 별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들리는 사람들의 성적인


희롱과 성직자인듯 보이는 사람의 음행을 관두고 회개하라는 비난을 받으며 나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이 느겨졌다.




거의 두시간을 알몸으로 런던을 통과하여 겨우 선왕대비의 처소에 도착했을때 나는 이미 손발이 꽁꽁 얼어붙고


시야마저 희미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마부가 나귀를 멈추었을때, 나는 거의 쓰러지듯 나귀에서 내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두손으로 땅을 짚고 버틸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저너머를 보자, 뚱뚱한 몸에 보기에도


두터워보이는 외투를 걸쳐 거대한 눈사람처럼 보이는 선왕대비가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별궁의 앞에 수많은 시녀들과


섬머셋의 귀부인들을 데리고 나와 조소하듯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죽을 힘을 내어 일어서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거의 기다시피 해서 선왕대비에게 다가갔다.


정상적으로 걸었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가 오한과 몸속에서 올라오는 열기운에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에서는


끝없는 길처럼 느껴졌다. 한참동안 기어갔을때... 눈앞에 두툼한 발이 보이고 나는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닭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 앞에 내민 발등에 키스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말했다.




"천한 것이 선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굴어 대비마마의 성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대죄를 머리숙여 사죄하오니


부디 자비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대비는 말이 없었다. 희미해져가는 의식속에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새 몸위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섬머셋의 귀부인들의 조롱하는 소리뿐이었다.




"정말로 알몸으로 이곳까지 사죄하러 왔네요. 어머나, 천박하기도 해라..."




"돈몇푼에 몸파는 천한 출신이잖아요. 저런건 예사로 하고 다닌것 아닐까요?"




"망측하기도 해라... 역시 천한 것들이란..."




그 말들을 들으며 느낀 것은 굴욕감이나 수치보다는 뭐라고 말해도 좋으니 이 얼어죽을것 같은 시간이 얼른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후 느껴진것은 내 머리를 짖밟는 무겁고 아픈 구두의 무게였다.




"다들 보아라. 누가 앙주의 마녀를 굴복시켰는지를... 세상에 제 잘난 것만 믿고 설치는 것들이 많다고 하나 결국


자신의 운명을 피할수는 없는 법! 모든 잉글랜드인들은 누가 이 땅에서 왕의 자리를 결정하는 지 주목하여야 할것이다."




겨우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것이 심연속으로 가라앉았다. 더이상 머리를 짖밟은 발의


무게도, 몸을 사정없이 때리던 차가운 런던의 빗줄기도, 그리고 가린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머리를 박고


사죄하는 수치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달려와 나에게 뭔가를 덮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불러줘요. 몸이 불덩이 같아요. 어머님, 어떻게 같은 여자로서 이런 잔인한 짓을..."




"흥, 어머님이라고?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좀 나은 신분일지 몰라도 몰락한 기사 집안 출신이 감히..."




아마도... 안나 왕세자비인것 같다. 나는 흐려져가는 의식속에서 그녀의 절규어리고 비통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분이 풀리시겠습니까? 그녀에게 폐하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은 저이지만 이런 수모를 감수해


달라고 청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작님, 정신차리세요. 의식을 잃으시면 안되요.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천한것들끼리 잘도 노는군. 그리고 왕좌는 감히 너따위가 이래라저래라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약속은 약속이고, 선왕의 피를 이은 적자이니 섭정으로서 지금의 왕을 보호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섬머셋의


이름으로 행해질것이며, 더이상 왕궁에 천한것이 발들이는 일은 없을것이다. 너나 왕가의 그 막되먹은 광대놈은


더이상 왕궁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다."




"어머님!!! 그런 말도 안되는...!!!"




그녀의 절규를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심연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렸을때 주위는 온통 어두웠다. 그리고 열기... 방안에 가득 찬 온기와 어둠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 죽은건가?"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살아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곳을 보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앙리 주교... 난 헉1 하는 소리와 함께 엉겁결에 이불속으로 숨어버렸다. 한참동안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계속 이럴수도 없다는 생각에 슬며시 이불을 걷었다.




"이곳 런던까진 어떻게 오셨나요..."




"네가 부리려는 난행을 네 부하들이 긴급으로 전해서 당장 달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도착해보니 이미 늦었더군. 정말


저지른 기행에 대해 일일히 열거하는 것 조차도 지치는구나."




나는 술먹고 사고친 다음 사감에게 붙들려온 신학교 기숙사 여학생 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음행을 벌인 것에 대해...




"그게 아니잖느냐."




"지위에 걸맞지 않게 불명예스러운 일로 세상의 민심을 어지럽힌...




"그것도 아닐텐데?"




나는 더 말을 못했다. 지겨운 잔소리... 어차피 그의 입장에서 내 행동이 곱게 보일리는 만무하다. 난 그가 쏟아낼


나에 대한 성직자 입장의 잔혹한 비난을 감수하리라 마음먹었다.




"너의 죄는 헌신을 이유로 네 자신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다뤘다는 것이다. 세상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린 모든 피조물


중에 그 어떤 것도 자신을 함부로 다룰 권리는 없다. 그런데 왜 너는 주님이 내린 값진 생명을 그렇게 하찮게 다루고


험하게 굴리는 것이냐? 예전에 신분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위치에서도 그것은 용서받을수 없는 행동이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뭔가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질꺼라고 생각한것에 비하면 의외로 가벼운 질타... 아니, 되려


나를 걱정하는 사람만이 할법한 발언이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회개합니다. 주님에게 제 자신을 함부로 다룬 것에 대해 회개하고 속죄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을 대신하여 너의 죄를 사하노라."




즉석에서 이뤄진 고해성사를 마치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것 뿐이신가요? 좀더 저를 비난하시리라 생각했는데요... 예를 들면 길거리에서 예전 갈보짓 하고 다녔느니 하며..."




"네가 바래서 한것도 아니고, 재물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타의에 의해 어쩔수 없이 한것이


어째서 네 죄란 말이냐? 그건 그런 짓거리를 강요한 이 세상에 물어야 할 죄다."




나는 그에게서 지금까지의 고장꼬장한 성직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나는 조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는 걷혀진 커튼을 열고 투덜거리며 방한켠에 놓인 죽그릇을 가지고 왔다.




"먹어라. 정신차리면 주라고 하더구나. 이틀간 의식이 없었던건 알고 있느냐?"




"이틀간이요? 맙소사... 제가 어떻게 된거죠?"




"나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듣자하니 안나 왕비가 달려와서 기절한 너를 끌어내서 우리쪽에 황급히 보냈다. 섬머셋의


왕비는 이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면서 섬머셋에 자신의 위엄을 자랑했고, 이 일로 인해 넷째 왕자의 왕위 계승을 노리던


섬머셋은 현재의 왕을 인정하고 그 후견인으로 선왕의 왕비와 여덞째 왕자를 지목하여 권력을 쥐는 걸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모양이더라. 뭐, 전해들은 표현에 의하면 쓸모없던 돼지년이 한건 했다는 분위기였다더군..."




"다행이네요... 그래도 약속은 지킬 생각인가 보네요."




"다행이라... 그렇게 만만한 상황이 아닌듯 하다. 네가 섬머셋의 왕비에게 조리돌림 당하고 사죄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일이 정국에 일파만파인가 보더구나. 상당히 많은 너의 추종자들이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하거나 너의 지지를 철회하는


분위기로 모여지고 있다는 분위기다. 심지어는... 너의 각료들도 이번 일로 인해 너에 대한 실망이 큰것 같더구나.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너 얼른 부하들 관리 좀 해야 할것 같다."




"다들 어쩌고 계시는데요?"




"필립 재상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네 응급처치가 끝나는 대로 곁에 붙어있지도 않고 자기 업무만 하고 있다. 뭐, 듣자하니


달리암에 보낼 서신 작성을 해야 한다나? 그리고 안젤모 재무관은 히죽거리며 이번일을 가지고 레이디 고디바의 이야기랑 같이


묶어서초콜릿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 하고 희희낙낙하고 있더구나. 이탈리아인들이란... 근데 초콜릿이란게 뭐냐?


뭐, 뭐든 상관없겠지. 그보다 더 심각한건 루이 첩보관이다. 공공연하게 자격없는 여자가 높은 지위에 있으니 이런 일이


생겼다고 처단해야 한다고 발언하고 다니더구나. 얼른 뭔가 수습하지 않으면 좀 위험할것 같다."




"네에... 그렇군요. 얼른 가서 막아야 겠네요. 늦어지면 선왕대비가 위험해져서 제가 한 일이 헛수고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친구들은 분명 너에 대해서..."




"달리암은 어새신 교단의 본거지가 있는 지방이예요. 필립 재상이 적고 있는 편지는 암살 의뢰서일꺼예요. 초콜릿은 서방 저너머에


있는 땅에서 전해진 달콤한 음료와 과자예요. 선왕대비가 좋아하는 물건이죠. 이탈리아인들은 죽일 상대에게 선물을 보내는 나쁜


버릇이 있죠. 독이든 초콜릿이 배달되는 거 그만두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루이 첩보관이 말하는 자격이 없는 여자란 제가 아니라


선왕대비를 말하는 걸꺼예요. 뭔가 손을 쓰기 전에 그만두라고 전해주세요."




어이없다는 듯이 처다보는 앙리 주교에게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자 밖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는 에라드와 마틸다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놔! 그냥 말로 하겠다고! 그러니깐 다녀오게 놔줘!"




"말로 하겠다면서 내 단검들은 왜 품에 숨겨가는데? 그리고 선왕대비가 그렇게 아무나 만나줄것 같아. 그 심정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면 안돼. 그만둬..."




"엉엉엉... 이건 말도 안돼. 이래서는 안되는 거야. 우리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조리돌임이야! 그것도 알몸으로...


내가 여기 있었으면 이걸로 그 돼지년 죽여버리고 나도 죽고 그딴일 조안한테 없게 했을꺼야! 엉엉엉..."




창밖에서 난동을 부리는 마틸다를 에라드는 애써 말리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나는 깊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앙리 주교가 일어서서 문을 살짝 열고 잠시 얘기를 나눈 뒤 다시 닫고 나에게 다가왔다.




"에드워드 왕자가 찾아왔다. 어떻게... 만날수 없다고 전할까?"




나는 의외로 빠른 그의 귀환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망설임을 가졌다. 예정되었던 시간이 이제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아뇨, 들여보내 주세요. 그에게 할말이 있어요."




"그래... 알았다."




잠시후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에드워드 왕자는... 울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의 모습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처럼 보였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항상 미소지었던 왕의 광대... 그가 처음으로 힘든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그를 대신하여 웃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왕자님."




나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슬프고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일을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하셨습니까?"




"만약에 미리 말씀드렸다면... 말리셨을 꺼잖아요."




"그랬겠죠. 당신이 그런 수모를 겪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헤리포드에서 그 소식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곧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미친듯이 달려왔는데,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다음이더군요.


형수님이 억지로 당신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던 상황이었더군요."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았다.




"당신에게 이런 희생을 강요할수 있는건 그 무엇도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고개 숙인채 울먹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결심을 마쳤지만... 말로 꺼내는


것은 어쩌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의 결의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고생하기는 했지만 다 잘된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폐하와 왕자님의 안전은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섬머셋의 보호아래 지켜질것입니다. 베드포드의 반발이 우려되지만 앙주를 굴복시킨 섬머셋을 압도하긴 당분간 무리가 있겠죠.


앞으로 긴 굴욕의 시간이 되겠지만 어떻게든 폐하와 왕자님이 어른이 되실때까지만 기다린다면 모든 일이 다 잘될것입니다.




선왕께서 제게 부탁하신 일들을 피흘리지 않고 이뤄냈습니다. 제 작은 수치로 그것을 이뤄냈다는 것에 저는 만족합니다.


이제 지금 당장 죽어서 선왕 폐하를 뵈어도 부끄럽지 않게 드릴 말씀이 있겠네요.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제가 이루지


못한 것이 있기는 하네요. 왕자님,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실수 있으실까요?"




"무슨 부탁이신지요? 말씀하십시오. 그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결혼해주시겠어요?"




"네? 지금... 뭐라고..."




나는 그가 왜 당황해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표정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 표정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아프다.




"왕자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 좋은 아가씨랑 결혼하셔야죠. 가능하다면... 왕자님에게 힘을 실어줄수 있는 좋은 배경을


가진 가문의 참한 규수면 좋겠네요."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속에 그의 마음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물어볼 필요도 없군요.


이미 저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저에게


그런 잔인한 얘기를 하려는 이유가 뭐죠?"




"지금까지 저에게 보내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창때의 젊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감정적인 유희를


즐기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유년기는 끝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해드릴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럴수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위치가 있고, 저에게는 저의 위치가 있습니다. 한동안... 즐거운 꿈을


꾸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기대하지도 못한 행운의 도움을 받아 제가 정말 저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해서


동화속에 나오는 멋진 삶을 살수 있으리라 헛된 망상을 한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알았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보셨지 않나요? 저는 아무리 제 지위가


변했을지라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조리 돌림이나 당하는 천한 창녀고, 당신은 잉글랜드에 남은 마지막 희망입니다. 저는


당신을 지지할수 있을순 있어도 당신의 곁에 설 자격은 없습니다. 알몸으로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며 느낀 것은 몸의 냉기가


아닌 차가운 현실에서 오는 마음의 냉기였습니다. 그래서... 선왕대비에게 어떤 의미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헛된 꿈을


서둘러 깨어나게 해주어서... 현실에 돌아와 제 위치로 찾아갈 기회를 주어서요..."




그가 일어서며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희망? 희망이라고요? 천한 어머니의 피를 이어 평생 권력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광대질로 세상을 조롱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나같은 한량이 잉글랜드의 희망이라고요? 살다살다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군요. 그리고 당신은...


제가 아는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나요? 사형대에서 중지를 치켜세우고 모든 잉글랜드의 사내들을 고자취급하던 여장부가


이런일로 무너진겁니까?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심으로... 저에 대해 당신이 가진


마음이 없었다고 주장하실겁니까? 대답해 보세요!"




나는 이불을 격하게 걷어재꼈다. 그러자 거의 반라에 가운만 걸친 몸이 들어났고, 왕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은화 한닢..."




"네? 뭐라고요?"




"은화 한닢... 하룻밤 저를 사는데 필요한 가격입니다. 제가 마음에 드시나요? 그럼 은화 한닢을 주시면 저를 마음대로


하실수 있습니다. 은화가 많으시면 더 오랫동안 저를 가지실수도 있겠죠. 하시겠어요?"




"조안...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전 이런 여자입니다. 감당하실수 있으시겠어요? 제게서 무엇을 보고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신다면 어렵게


마음을 전하기 보다는 그냥 은화 한닢으로 해결보시는게 빠를겁니다. 대부분의 창녀들에게 홀린 철모르는 청년들이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일겁니다. 벗을까요?"




한참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깊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떠나겠습니다."




"......"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당신이 바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요. 어렵겠지만


혼처도 구해보도록 하죠. 제가 꿈꾼 행복한 시간 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이제 당신마저 떠난 남은


시간을 어떻게 감당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것이라 믿고서요."




"......"




"마지막 인사를 드리죠. 안녕히 계세요. 이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리고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곧이어 앙리 주교가 들어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가운을 덮어주며 말했다.




"혼자 있게 해줄까? 그렇다면 방문앞에서 지키고 서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주겠다."




"...여기 있어주세요."




"그러려면 옷이라도 좀 제대로 챙겨 입어라. 민망하게시리... 어?"




그가 시선을 돌리려고 몸을 움직일때 나는 그의 허리를 붙잡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당황한 그에게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있어주세요... 부탁드려요..."




그리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저히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만큼... 오열했다. 나 자신을 증오했다. 나는


내 생에 엄마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줘버렸다. 그리고 영원한 이별을 통고받았다. 내가


바란 일이었고 감당할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것은 정말로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열했고, 또 오열했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나는 첫사랑을 잔인하게 떠나 보낸것에 대해 눈물을 흘렸고, 앙리 주교는 고맙게도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그의 등을 빌려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46 loveis
    작성일
    14.08.16 10:42
    No. 1

    즐겁게 읽고 갑니다. 모쪼록 조안이 잘풀렸으면 좋겠네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14.08.17 10:21
    No. 2

    너무 현실적인 사람..동시에 비현실적인사람.. 어떻게 저렇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4 해현
    작성일
    20.04.05 06:49
    No. 3

    꼭 그랬어야 했나? 왕세자비가 증오스러울 정도네. 왜 지켜달란 부탁은 해가지고... 애초에 왕위 에드워드한테 양위했으면 됐잖아. 그럼 둘이 결혼해서 잘 통치했을 텐데... 윌리암도 혈통 문제 있었는데 안 될 건 뭐야? 왕위 양도하면 목숨도 살았을텐데 끝까지 지 자식 왕 시킬라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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